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82화 (182/365)

182화. 떨기 꽃 아래 모루 (2)

[가를레지아]

이름 모를 꽃들이 끝없이 늘어선 평야가 나오고,

[온폰세의 세 남작]

구름을 걸친 세 봉우리 산 아래 강줄기를 따라 거스르면.

[에르앵의 관문]

익숙한 이름을 가진, 거대한 동상의 흔적과 그 아래 또 다른 넓은 길이 나타난다.

비록 이정표조차 없어 이름 모르고 땅 밟을 때가 더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눈에 힘을 주어 풍경을 담았다.

다져진 길 위에선 산양을 탄 난쟁이 무리와도 만났고,

길가에서 사냥감을 손질하던 귀 큰 자들의 눈총도 받았다.

난쟁이 무리는 조합에서 나온 단체일까?

저 귀 큰 자들은 이 땅으로 흘러들어온 방랑자겠지.

그렇게 다져진 길 끝에 흐릿하게 연결된 흙길 위로 한참을 더 이동하면,

거대한 밭과 근처 길가에 나와 쉬고 있는 농부가 보였다.

그는 땀으로 범벅이 된 상의를 세차게 흔들다가도, 이내 다가오는 나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한창 해 따가울 때 그늘 만나쇼!”

그 인사가 낯설면서도 정겨워 화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따갑기 전에 비 쏟아질 겁니다.”

그러자 농부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중얼중얼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한참을 길을 따라 더 나가자 이번엔 저 멀리 작은 성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곳곳에 깃발이 휘날리고 있는 걸 보니 이 일대는 이미 주인이 정해진 땅이었구나.

이런 곳에선 좀 더 행동에 주의를 가질 필요가 있다.

방랑자이길 자처했다지만, 저들이 내 목에 걸린 인장을 보기라도 한다면 귀찮은 일이 생길 수도 있어.

“벤투스, 이 땅은 스치듯 건너면 좋겠어.”

손가락 사이로 벤투스의 갈기를 훔치듯 쓰다듬으며 속삭이면, 녀석은 금세 벌컥벌컥 숨을 들이마시며 달음박질쳤다.

귓불을 할퀴는 바람에 두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흥미로운 풍경이 지극히 단순함으로 뭉그러지게.

* * *

벤투스의 달아오른 몸을 식힐 겸, 노상 근처에 간단히 불을 피워 물을 끓였다.

이어서 안장 가방에서 종이로 작게 포장된 주머니를 꺼내면,

[포갠 손안의 커피 가루]

겉에 그려진 포개어진 손과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이런 것까지 만들었구나, 이 조합은.

집에 있었을 땐 조합의 기성품 같은 건 보기 힘들었는데, 막상 밖으로 나오니 리케니엔에서 집어 온 대부분이 같은 조합의 기성품들이네.

끓는 물에 커피 가루를 넣고, 슬슬 흔들어 저은 뒤 한 모금 머금으면.

“우… 악!”

확 올라오는 떫고 쓴 맛에 나도 모르게 욕지기를 뱉었다.

기지어의 말대로,

우리에겐 기업과 조합의 다양성이 절실한 것 같아.

포개어진 손 조합이라고 해서 모든 기성품이 대단한 건 아니구나…,

특히 커피는.

“켁… 켁!”

결국엔 기꺼이 탄 커피를 어쩔 수 없이 쏟아내야만 했다.

푸흥!

이런 내 모습에 벤투스는 콧김을 내뱉으며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휘저었다.

“웃지마, 벤투스.”

푸르릉!

허연 건치를 드러내기까지 하는 놈의 모습을 보니, 이보다 더 얄미울 수가 없다.

하지만 녀석에게 더 따지고 들진 못했다.

방향을 쥐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벤투스니까.

괜히 삐치게 했다가 저 영리한 놈이 다른 엉뚱한 생각이라도 품으면 어떻게 해?

“벤투스, 너도 맛보면 내가 왜 이러는지 이해할 거야.”

내 말에 녀석은 갑자기 호승심이라도 일었는지 쏟은 커피를 향해 고개를 내밀곤 혓바닥으로 짧게 찍어 먹었다.

사람이라면 정색한 표정이 아닐까 싶은,

딱 굳은 모습으로 턱을 움직여 맛을 곱씹던 녀석은…,

이내 발굽으로 커피 쏟은 부분을 짓이기며 신경질을 부렸다.

나는 그저 획 머리를 돌린 채 멍하니 있는 녀석의 목을 토닥토닥 두들겨 줄 수밖에 없었다.

다시 떠날 준비를 마치고 안장 위에 올라서면,

벤투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어느 한 방향을 향해 묵묵히 이동을 시작했다.

과연 중립지역에서 들었던,

희대의 명마라는 말이 다시 한번 실감 되는 순간이다.

상호 간에 원만한 소통이 가능할 만큼의 영민함은 둘째로 쳐도 될 만큼,

거닐었던 모든 길을 기억해내는 능력은 다른 말에 비하면 말 그대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으니까.

맥레인의 유일한 약점이 길치였음을 생각해본다면,

그가 그만큼 벤투스를 의지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렇게 한참 동안 구릉을 넘어 마주한 강줄기를 따라 내려가니 또 다른 평야가 나타났지만,

구릉에 시간을 너무 쏟는 바람에 날이 이미 많이 어두워진 뒤였다.

그런데 이런 어두운 하늘 아래 마주한 평야는,

쓸쓸해 보이기는커녕 저 멀리서 환한 빛을 내뿜었다.

혹시나 머물 곳이 있을까 하여 다가가 보면,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 이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완전히 무너져내린 성채, 환한 빛은 그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무너진 성채의 틈새 사이로,

어렴풋이 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오가는 게 보인다.

“가보자, 벤투스.”

갈기를 쓰다듬으며 재촉하자 벤투스는 성채 쪽으로 말머리를 돌리곤 경쾌한 발걸음을 이어갔다.

이내 무너진 성채 지척에 다다르자, 길 근처에 말끔히 관리된 팻말 하나가 눈에 띄었다.

[감긴 성]

성의 이름이라기엔 거창함이 느껴지지 않네.

그렇다고 ‘감긴’이 누군가의 성씨일 리도 없고 말이야.

유독 크게 무너진 성벽 틈새는 마치 성문처럼 운용되고 있었다.

딱 보아도 거칠어 보이는 유랑단을 비롯해 어깨에 조합의 상징을 매달고 있는 자들까지.

성채를 오가는 자들만으론 당최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종잡을 수가 없다.

하여 틈새 너머를 향해 이동하자,

외지인인 나를 제지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렇게 성벽 너머로 펼쳐진 광경은,

줄지어 차려진 상점과 상회 앞에 수많은 이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성격이 마치 중립지역의 포드와 같은 곳처럼 보여.

넋 놓고 구경하다 자연스레 인파에 한참이나 휩쓸렸다가, 겨우 외진 거리로 빠져나온 나는 그제야 성곽을 둘러볼 수 있었다.

외관에 걸맞게 성곽 대부분도 무너져내린 상태였지만,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성곽은 그 안에도 이미 누군가가 있는지 불이 밝혀져 있네.

눈을 가늘게 떠 새어 나오는 불빛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남녀가 서로 마주한 채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이 보인다.

성곽 하나를 술집으로 개조한 건가?

대체 뭐 하는 곳이지 여긴?

같은 아이베리아 땅이라곤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판이한 곳이다.

다만 그렇기에 흥미로워,

아이베리아의 또 다른 단편인 여기를 지나친다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벤투스, 오늘 하루는 여기서 지내도록 하자.”

어스름을 후드 삼아 뒤집어쓰고, 벤투스의 고삐를 굳게 붙잡은 나는 다시 인파 속을 향해 쏟아졌다.

* * *

지나치며 들은 여러 이야기를 토대로 이곳에서 가장 좋은 여관이 어디인지 알아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기어코 인파를 뚫고 그 여관 앞에 도착했다.

[눈감은 첨탑]

무너져내린 성체 가운데 가장 드높이 솟아있는 첨탑 하나, 이곳이 바로 ‘감긴 성’ 내에서 가장 좋은 여관이란다.

돌벽으로 둥글게 쌓아 올린 첨탑은 딱 보아도 매우 굳건해 보였는데..,

굳건한 게 당연하지, 첨탑은 원래 수성 시설 중 하나니까.

다만 오래된 첨탑과는 달리 이곳의 입구는 어울리지 않게 사치가 흠뻑 묻어 있었다.

맹수의 머리 모양이 조각된 문고리로 문을 두들기면,

곧 안에서 검은 더블릿을 입은 말끔한 사내가 튀어나왔다.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무대 위에 오른 배우처럼 고상한 손짓과 함께 연신 내게 인사를 건네는 그 남자는,

대충 보면 남루해 보일 수 있는 내 행색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였다.

“남은 방이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이곳은 말을 안전히 관리할 수 있는 시설이 있는지 궁금하군요.”

“물론 모두 구비 되어 있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귀하를 안에서 모셔도 될지요?”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문을 활짝 열고 나를 극진히 대접했다.

과연 가장 좋은 여관이라 이거군.

사실 벤투스만 아니었다면 아무 여관이나 골라잡아 쉬었을 것이다.

물론 그 대가로 밤잠은 설쳐야겠지.

하지만 벤투스와 함께인 이상 아무 여관이나 골라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벤투스의 종을 알아본 자가 흑심이라도 품는다면, 마땅히 훔치려 들 테니까.

그런 위험부담을 확실히 줄일 수만 있다면,

약간의 지출은 감내할 수 있다.

“저희 긴 손가락 조합이 운영하는 눈감은 첨탑을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부드럽고 달콤한 향이 내 온몸을 휘감아왔다.

약칠로 마감된 가구는 보석처럼 반짝였고, 탁상 위에 굴러다니는 펜조차 검은 옥으로 만든 것처럼 보여 연신 감탄을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저희 긴 손가락 조합은 아이베리아의 자유지 중 하나인 감긴 성에서 최고 등급의 보안과 편안함을 제공해드리리라 맹세합니다.”

“자유지가 뭡니까?”

“아, 고객님의 호기심에 기꺼이 부응해드리고 싶지만 동시에 소중한 시간을 빼앗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군요.”

“저는 괜찮습니다, 밤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신세라.”

“그렇다면 우선, 묵으실 방과 관련하여 이야기를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합시다.”

내 행동 속에서 뭐라도 본 것일까.

잠깐의 대화가 끝난 뒤에 그들의 행동은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내가 배려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재 남아있는 방은 네 개뿐이지만, 모두 다 감긴 성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전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윽고 금테를 두른 종이 하나를 내게 건네었다.

[뜬 눈]

최고의 전망

최고의 봉사

최고의 경험

[반 눈]

놀라운 전망

최고의 봉사

최고의 경험

[반 눈 2]

놀라운 전망

최고의 봉사

놀라운 경험

[반 눈 3]

놀라운 전망

놀라운 봉사

놀라운 경험

간결하기 짝이 없는 소개로군.

“여기서 말하는 봉사란, 무기 정비 봉사를 포함 말의 관리 및 음주와 식사까지를 포괄해 지칭합니다. 접두에 붙은 단어는 질적인 의미를 말하지요.”

다 같은 형식을 누리되,

약간의 질적인 차이만이 존재한다는 거군.

“가격은 어떻게 됩니까.”

내 말에,

남자는 조이와 같은 화려한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은밀한 표정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가격은 미리 지불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희 긴 손가락 조합은 아이베리아에서 사업을 시작한 지 91년이나 되었답니다, 하여 손님에 대한 눈썰미가 좋다고 자부하죠.”

남자는 다시 공손한 자세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

“만약에, 언젠가라도 우리 조합이 귀하와 좋은 사업적 인연으로 발전할 수도 있으니 그에 대한 우리의 투자라고 생각하시고 부담 없이 머물러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솔직히 잘 모르겠군요, 당신의 의중을 더 깊이 떠봐야 하나 생각이 들 정도로요.”

“저희 조합은 중립을 사랑합니다, 깃발의 고귀한 정치적 갈등이나 명예를 위시한 결투에서 배제되길 원합니다. 그러한 위치를 유지하기 위한 투자라고도 생각해주신다면 좋겠군요.”

깃발 가진 자들에게 호의를 지불함으로써 안전을 도모하겠다는 생각인가.

다만 어떤 깃발에도 그 호의의 무게가 치우치지 않음을 고수함으로 말이야.

철저히 깃발의 영역에 구애받지 않고 사업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겠다는 의도겠지.

그렇다면 편하게 받아들이겠어.

“뜬 눈으로 합시다.”

그에게 당당히 말하자,

그는 기꺼이 고개를 숙이며 끝까지 공손을 내비쳤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참.”

그러다가 남자는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온후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한다.

“호기심은 음주를 빗대어 푸실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 말은,

일전에 이미 내가 경험한 것이기도 하였기에.

“알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점잖음으로 화답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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