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떨기 꽃 아래 모루 (3)
승강기에 발을 들이자 안내하던 남자는 이에 관한 설명을 덧붙였다.
“맞잡은 손 조합의 도르래와 끈으로 만들어진 승강기입니다, 바위를 실어도 꿈쩍하지 않을 만큼 견고하지요.”
그렇게 그의 말이 끝나자 승강기가 위로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승강기의 동력은 무엇입니까?”
“첨탑 지하에 만든 관리실 내 인원들이 무게추를 얹고 덜어 조작합니다.”
고전적인 방식이로군.
내 생각을 꿰뚫었는지, 이번에도 남자는 친절히 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벼락 파편을 이용해도 되긴 하겠지만, 이 부분은 우리 조합의 고집적인 부분이기도 합니다.”
“노동력의 가치를 가장 높게 보는 겁니까?”
남자는 내 말에 활짝 웃으며 답했다.
“본질을 꿰뚫으셨군요, 맞습니다. 비록 경제적이지 못한 고집이지만, 그 고집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렇게 자리 잡으면 그들은 조합의 가족이 되지요.”
“이상적인 구조군요.”
“내부적으론 그렇게 보이겠지만, 그 이상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은 만만치 않답니다. 그렇기에 저희가 이런 고가 정책을 펼치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이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분명 그에 수반된 대가가 치러지고 있어야 한다는 거겠지.
말 그대로 이상이 전부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과연 남자의 안내대로 승강기는 순전한 노동력을 동력 삼아 흔들림 없이, 아주 느긋한 속도를 유지하며 올라갔다.
이내 덜컥거리며 첨탑 천장과 맞닿은 승강기 문이 열리고,
남자는 먼저 나가 내 앞길을 안내했다.
일반적인 첨탑의 모습과는 가장 동떨어진, 이곳에서 가장 많이 개조된 꼭대기 층의 화려한 복도.
그 끝에 있는 방문 앞에서 남자는 예를 갖추며 말했다.
“이곳이 귀하께서 하룻밤을 묵으실 방입니다.”
이윽고 내 걸음걸이에 맞춰 방문이 열리고, 그 내부가 두 눈에 가득 차올랐다.
어두운 계열로 일치되었으면서도, 곳곳에서 영롱한 빛을 내뿜는 방의 모습은.
사치와 품격이 서로 아슬아슬하게 줄다리기를 하는 모습과 같았다.
아마도 그 줄다리기의 승자를 결정하는 건,
이 방에 묵는 이겠지.
“그럼, 주류 봉사가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참.”
설명을 이어가던 남자가 다시 아차 하며 말을 버무리고 설명을 잇는다.
“저희의 도움이 필요하실 땐, 이곳에 손을 얹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남자는 선반 한쪽에 작게 쌓인 흙더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흙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다만 이 흙의 이름은 ‘작은 산’이지요. 멀리서도 서로의 속삭임을 주고받을 수 있답니다.”
“그렇군요.”
“그럼, 편한 하룻밤이 되시기를.”
* * *
어스름을 벗고,
차고 있던 장비를 침대 옆에 기울여 놓은 뒤,
차분히 뚫려 있는 창에 기대어 바깥 풍경을 눈으로 훑어본다.
과연 눈에 들어오는 풍경 하나만큼은 일품이로구나.
무너진 성채 전반이 모두 보이고, 그 사이를 꿰찬 인파의 생기 가득한 모습이 하나하나 실감 나네.
그러면서도 문득,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토르킨 선생께 가르침을 받으면서 읽었던 책 가운데 이런 내용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본디 첨탑 꼭대기에 있는 방은 유폐를 위한 공간으로써 쓰였다.
패배한 깃발의 주인이 갇히거나, 승리를 쟁취한 깃발이 그 전리품을 가둬놓는 곳.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좀 묘해지네.
하필이면 뚫린 창 너머로 보이는 것도 무너진 성채에다가, 그 사이엔 수많은 인파라니.
적들의 승전을 지켜봐야만 하는 패배자가 된 기분이 들어 얼른 풍경에서 눈을 떼면.
고급스러운 방의 풍경이 나를 반겼다.
극과 극에 양발을 걸친 기분이 이럴까.
뭔지 모를 간극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만큼 아이베리아도 많은 것이 변했겠구나 하고도 생각해본다.
알려주는 책들은 상대적으로 과거를 이야기하잖아?
만약 내가 글을 쓰는 작가였다면, 첨탑을 여관으로 개조한 조합이 있었다…,
라고 운을 뗐을 거야.
그럼 후에 내 책을 읽는 사람들 가운데 깃발 달린 자가 있다면, 지금 내가 느끼는 이질감과는 좀 더 동떨어진 감정을 느끼겠지.
이런 생각에 하염없이 빠져들고 나면,
뭔가 남모르게 속으로 재미난 일을 저지른 것 같아 기분이 하늘하늘해진다.
자,
그럼 안 파헤쳐볼 수가 없겠지.
이 무너진 성채와 관련한 이야기 말이야.
그것과 더불어 이런 곳이라면 정보의 질 역시 매우 높을 것이다.
그 론다이트와 비교하면 틀림없이.
걸터앉은 침대에서 벗어나, 아까 안내받은 흙더미 근처로 다가갔다.
마치 어린아이가 흙장난을 치며 쌓아 놓은 것처럼 보이는,
그저 평범한 흙더미가 남을 부르는 신호가 된다니.
궁금증이 일어 흙더미 주위를 살펴보면, 그에 대한 안내서가 서랍에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페로론 절벽의 작은 산]
페로론의 절벽 가운데서도 메아리가 가장 진하게 배어있는 곳을 특정, 채취 후 빻아 만든 작은 산입니다.
사용법 – 위 작은 산에 신체 일부를 등정한 뒤 직원들에게 전달 사항을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예시 – 작은 산에 손을 얹어 전달 사항을 말하기.
주의 – 상기한 작은 산은 크기가 큰 만큼 출력도 높아 고성을 내지 않도록 주의 부탁드립니다.
위 작은 산을 통해 내신 메아리는 지하 관리실과 지상 직원실 전체에 전달됩니다.
주의 (특) - 신체 가운데 비교적 수고를 들여야 닿을 수 있는 부위를 고집하셔도 출력엔 차이가 없습니다…,
흥미롭네.
메아리도 날씨 파편과 같이 따로 물질적으로 채집할 수 있는 것인가?
그나저나, 주의에 적힌 말들을 보니 여관업을 하는 이들의 고충 일부를 엿본 기분이야.
괜히 목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작은 산 위에 손을 얹은 뒤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어본다.
“주류 봉사를 요청합니다.”
그러자 순간 내 귓불 아래에서 이질적인 메아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즉시 출발하겠습니다.’
* * *
똑똑.
하고 방문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 문을 열어주면, 날 안내해주었던 남자가 우아한 걸음걸이로 들어와 예를 갖춰 인사했다.
“방은 편하신지요?”
“이견이 없을 만큼 편합니다.”
“그거 다행입니다, 그럼 먼저 주류 봉사에 대한 안내를 시작하겠습니다.”
남자가 손뼉을 치자 곧 방 안으로 두 사람이 더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손수레를 끌고 왔는데, 그 안엔 어떤 조각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기하학적인 모양의 술병이 가득했다.
“수고했습니다, 퐁소. 디즌.”
그들이 방 안으로 수레 운반을 끝마치자, 남자는 그들에게 격식을 다해 인사를 건네었다.
이제 두 남자가 방 밖을 나서고, 남자는 본격적으로 안내를 시작했다.
“각 술의 종류에 따른 특징은 제가 직접 고객님께 설명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특징이란 고객님의 호기심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지요, 가령.”
남자는 곧 초승달 모양의 술병을 집어 들고 말을 이었다.
“북부 올레지아의 특산품인 초승달 주를 선택하신다면 말 그대로 북부에 관련한 정보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설명하는 것만 들어보면 론다이트와 비교했을 때 정보의 범위가 굉장히 광활하군.
“또 정보의 범위가 너무 넓다고 하신다면, 작은 잔을 선택해 제게 제시해 주십시오. 그럼 작은 잔에 어울리는 술을 제가 다시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그 말은…?”
내 궁금증에 남자는 작고 둥근 공 모양의 유리병을 집어 들며 말했다.
“이 술은 북부 올레지아의 남쪽 지방인 테리안의 특산품입니다. 제시한 술을 받아들이신다면 테리안과 관련한 고객님의 호기심을 어느 정도 푸시게 될 겁니다.”
광범위한 범위를 축소하여 원하는 것만 골라 들을 수 있다는 거네.
말 그대로 검색 기능을 이용할 수 있다는 소리겠지.
다음으로 남자는 제법 단호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단 아이베리아를 벗어난 정보에 관한 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또 아이베리아의 특정 깃발을 비롯해 내정이나 군사적으로 민감한 주제는 내규상 취급하지 못하니 이 점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겠지, 긴 손가락 조합은 중립을 도모한다고 그랬으니까.
“이해했습니다.”
내 말에 남자는 다시 싱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자, 고객님 어느 것부터 시작하시겠습니까?”
가장 큰 술병들이 담긴 수레를 내민 남자의 말에,
일단은 제일 처음 보이는 얼굴 형상의 술병을 가리켰다.
“아이베리아의 북서쪽, 롱케르의 특산품인 인과주입니다.”
“인과주… 말입니까?”
“많은 분이 이름만 듣고 덜컥 오해하시는데, 그 지역 특산품인 과일의 이름이랍니다. 그런데 그 지역은 무슨 장난기가 발휘된 건지, 근래 술병이 모두 이런 모양으로 교체되었더군요.”
“상당히 짓궂군요.”
“그럼에도 특유의 거부할 수 없는 맛 때문에 애주가들이 찾는 술이기도 합니다.”
“다른 것으로 선택하겠습니다.”
아이베리아의 북서쪽엔 아직 관심이 없다.
적어도 지금 빌비온은 베나즈 깃발의 공표에 집중해야 할 때고, 애초에 북서쪽 깃발에 관한 정보를 들을 수도 없으니까.
이 자리는 깃발을 벗어난,
순전히 궁금증의 갈증을 해소하는 자리지 않는가.
그렇기에 나는 수레에 실린 술병들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살짝 뒤로 물려 있는 둥근 탑 모양의 술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 든든해 보이는 병으로 하겠습니다.”
내가 그것을 고른 이유는,
겉에 붙어 있는 상표에 긴 손가락 조합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내 선택에 남자는 활짝 웃으며 탑 모양의 술병을 들어 내밀었다.
“긴 손가락 조합에서 생산한 첨병주입니다. 취할 때 높은 곳에 선 기분이 들어 이런 이름이 붙었지요.”
“그게 좋겠군요.”
남자는 곧바로 마개를 연 뒤 유려한 손동작으로 술병을 기울였다, 그런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나는 내 앞에 놓인 크기가 각기 다른 술잔들 가운데 두 번째로 작은 것을 골라 제시했다.
이제 남자는 내 잔에 첨병주를 따르며,
“긴 손가락 조합에 대해 궁금하신 것이 있으신지요.”
나긋나긋하고 듣기 좋은 말투로 질문했다.
“정확히 말하면 조합에 관련한 내용은 아닙니다.”
“그럼 어떤 부분에 호기심이 이셨는지요?”
“이 성채와 련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 기원을 듣는 게 불가능하다면 첨탑을 여관으로 인수했을 당시의 배경만이라도 알려주셨으면 좋겠군요.”
술병을 거둔 남자는 다시 칼같이 공손한 자세를 유지한 채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무너진 성채는 본디 테슬라이 가문의 주성이었습니다. 깃발은 푸른색 바탕에 하얀 말 머리가 새겨져 있었지요.”
그의 말을 경청하며,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살며시 내려놓은 나는 순식간에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가문의 위세는 아이베리아의 중립 변경 가운데서도 대단했습니다. 선조 때부터 금광업으로 쌓아 놓은 막대한 재산 덕분에 제정에 어려움이 없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어째서 이런 꼴이 된 겁니까.”
“테슬라이 가문은 야망이 컸습니다, 무리하게 가문에 기업과 조합을 유치시키며 세를 불렸죠. 그럼에도 처음은 가문의 위세에 변화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축적한 재산이 많았다는 소리겠죠.”
“해서요?”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는 법, 결국 수많은 기업과 조합 사이로 야기된 정치적 문제가 테슬라이를 옥죄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엔 내부에서 기업과 조합 전쟁이 일어나 걷잡을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렀지요.”
“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군요…,”
“그렇지요, 이제 테슬라이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답니다. 그 후손이 바다 건너 대륙에 망명을 요청했다곤 하지만 그 행방마저 묘연하지요. 이렇게 테슬라이 가문의 흔적만이 남은 상황에서도 그곳에 투자한 기업과 조합은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그 흔적마저 거래하였습니다.”
“그럼 이 무너진 성채도?”
“그렇지요, 가문의 주성은 이제 기업과 조합의 협의로 맺어진 자유지가 되어 하나의 상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나 참담한 이야기일 줄이야.
“우리 긴 손가락 조합은 이러한 상권에서 사업을 하기 위해 투자를 하였고, 보다시피 이렇게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깃발의 세를 불린다는 건,
절대 섣불리 해서는 안 되는 일이며.
지름길이 보인다 한들,
정해진 길을 묵묵히 따르는 인내심이 필요한 일인 것 같다.
리케니엔의 베나즈라는 이름을 듣고,
어떤 기업과 조합이 우리를 찾아올까.
잠깐이지만 여러 상념에 젖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