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떨기 꽃 아래 모루 (4)
장비를 체결하고 어스름을 여미면,
이제 떠날 준비가 됐다.
방문을 열고 나가자 날 기다렸다는 듯 승강기는 복도 끝에 맞물려 있었다.
이윽고 그 위에 올라타기 무섭게 승강기는 어제와 같이 느린 속도로 하강을 시작한다.
아마도 몇 분간은 여기서 꼼짝없이 있어야 할 테니 이곳의 감상이라도 남겨볼까.
눈감은 첨탑에서 보낸 하루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고풍에 파묻히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어.
되려 그 고풍에 심취해서,
일어나자마자 해보지도 않은 짓을 어설프게나마 흉내 내기도 했으니까.
그러니까 그 흉내가 뭐냐면,
일어나자마자 흥얼거리며 욕실까지 걸어가기.
욕실 선반에 비치된 유리병을 없던 기호까지 부려가며 몸에 끼얹어 보기…,
같은 거 말이다.
덕분에 재밌었어.
아직 내 목 뒤에는 10월의 높바람이 묻어 있어 으슬으슬 몸이 떨렸지만.
그렇게 하강을 마친 승강기에서 내리자, 어제의 그 남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다가와 내게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편안한 밤 되셨습니까? 밖에 고객님의 말을 대기시켜놓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내 밖을 향해 걸어가는 내게,
안내자를 비롯한 홀을 거닐던 직원 모두가 하던 것을 멈추고 인사했다.
뜨거움에 새벽 하나 남지 않고 증발한 아침.
말끔한 모습으로 등장한 벤투스 위에 올라탄 나는 두 눈을 부릅뜬 채 감긴 성 밖을 나섰다.
* * *
홀가분함도 잠시 질어진 풍경을 가로지르며 감긴 성에 얽힌 이야기를 곱씹기를 한참.
갑자기 벤투스가 멈춰 섰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하마터면 안장에서 튕겨 나갈 뻔했다.
그러나 당황함도 잠시, 갑작스러운 행동에 녀석에 대한 걱정부터 앞서 목을 쓰다듬으며 진정시켜야만 했다.
“벤투스, 무슨 일이야?”
내 물음에 벤투스는 앞발로 땅을 치대며 흥분으로 가득 찬 콧김을 연신 내뱉었다.
기억을 되짚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나아가야 할 길을 잃어버린 걸까.
확실한 건 자석을 만난 나침반처럼 방향을 놓친 건 틀림 없다.
사실 시기적으로 놓고 봐도,
벤투스의 기억 속에 있는 길들이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리가 없다.
당장 테슬라이의 깃발이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생각하면,
아이베리아는 시간의 격류 속에 지금도 그 모습이 깎이고 다듬어지길 반복하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셈이니까.
그마저도 기사왕이 무너져내리면서 그 변화의 시류는 급물살을 타고 더욱 거세게 찾아왔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기울어진 바위 아래 난쟁이라는 추상적인 지명은…,
기사왕의 실각을 주도한 자들 역시 눈에 불을 켜고 찾았을 거야.
그 과정에서 벤투스의 기억이 훼손될 만큼 관련된 길들이 훼손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심지어는 이 순간에도 찾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란 걸 생각하면.
지금은 빌비온 내 입점 된 기업이나 조합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기에 정보의 통제가 가능하지만,
깃발의 공표와 동시에 아이베리아 중앙 지역 전역에 정보가 퍼진다면.
그들도 그제야 깨닫게 되겠지.
그토록 찾던 0이 바로 베나즈의 이름 아래 계속해서 있었다는 것을.
그럼,
물 먹은 염료처럼 모호했던 복수심이 한결 선명해질 거야.
칼끝을 어디로 겨냥해야 할지 깨닫게 되겠지.
다만…,
아직은 다 알지 못해 모르겠어.
이제까지는 그저 맥레인이 남긴 희미한 것들을 쫓아 막 지워지려는 이름을 다시 새기려고 노력해왔거든.
아비베오에서 들었던 맥레인의 간략한 이야기와,
그와 함께했던 옛 기사들조차 모호함을 내뱉는 그 과거엔.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가?
앵거스 가문, 에르앵, 베나즈, 찬탈자.
대명사만이 둥둥 떠다니는 이야기 속에 그 연결 고리가 없다.
그렇다면 깃발이 공표된 이후에 내가 해야 할 것은,
그 잃어버린 연결 고리를 찾는 것.
하여 지금은 앞서 말한 모든 일의 대전제인,
0에 걸맞은 증표를 손에 넣어야 한다.
푸르륵!
곧 벤투스가 귀를 쫑긋거리며 다시 걸음을 재개했다.
다만 바닥에 부딪히는 편자 소리엔 확신이 없어 보였다.
[뱀 허리 늪지]
최근까지도 관리를 받은 듯한 이정표를 건너,
질퍽한 늪에 다다르자마자 벤투스의 발에 바람 기름을 발랐다.
바람 기름으로 인해 생기는 부담보다 늪을 통과하면서 생길 무리가 더 컸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만약 현지인이라도 마주쳤다면 그들이 알고 있는 길을 통해 늪을 빠져나갔을 텐데.
“가자 벤투스.”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벤투스는 두어 걸음 만에 바람을 밟고 늪 위를 질주했다.
* * *
이제는 한계인가.
벤투스는 이상 방향을 잡고 움직이는 것을 포기한 듯 보였다.
하는 수 없이 늪지 너머로 연결된 길 위를 정처 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도달한 곳은 어귀 끝에 딸린 작은 마을이었다.
[로사플로]
늪 바깥에서 보았던 것처럼 관리된 이정표를 보아하니 일대 현지인들이 이 마을에 모여 살고 있겠군.
지금부터는 직접 나아갈 방향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다.
부디 저 마을에서 작은 단서라도 찾길 바랄 수밖에.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농축된 꽃향기가 코를 찔렀다.
거리엔 장미 꽃잎이 늘어져 있었고, 몇몇 부녀자들은 흥겨운 노랫소리를 내며 맨발로 통 안에 장미를 연신 짓이기고 있었다.
이내 거리를 지나는 내 모습을 보곤,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빤히 쳐다보다가 옆 사람과 은근한 미소를 나누며 속삭임을 나누었다.
마을에 경계가 없다.
아마도 늪이 외침을 막는 벽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 같네.
좀 더 깊숙한 곳으로 가면,
파이프를 입에 문 채 붉은 연기를 내뱉는 남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들은 앞서 보았던 부녀자들과는 달리 경계심이 깃든 눈빛으로 내 전신을 훑었다.
그러다가 안장에 걸려 있는 무기를 보곤 대놓고 날 선 눈빛을 보냈다.
곧,
“멈추시오.”
한 중년의 남성이 앞길을 막아섰다.
“외지인이 여기엔 무슨 일로?”
“길을 지나는 것뿐입니다.”
“어느 길이길래 늪을 통과해 구태여 이 마을까지 진입한 거요?”
“단지 가야 할 길에 늪이 있었을 뿐이고, 이 마을이 있었을 뿐입니다.”
남자는 석연찮은 얼굴로 잠시 생각을 하곤, 곧바로 턱을 내세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돌아가시오, 마을을 우회해서 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해줄 테니.”
“길의 종착지가 이 근처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 여독을 풀 말미라도 베풀어주시지요.”
“어허, 이 사람이!”
이윽고 남자는 불쾌함을 드러내며 윽박질렀다.
그런 그에게 나는 안장 가방에 있는 작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적지 않은 소비도 할 겸 말입니다.”
“환영하오.”
어…?
내 예상과는 달리 엄청난 속도로 태세를 전환한 남자의 모습에,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래서, 안내가 필요하지 않겠소? 로사플로는 소개 없이 거닐기엔 섭섭한 곳인데?”
뭐지, 이 사내의 수완에 말려들기라도 한 건가?
홀린 듯 주머니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자, 사내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여부가 있겠소.”
양면성이라기엔,
그 부분마저 유쾌한 사람으로 보이네.
내게서 벤투스의 고삐를 받아든 남자는 곧바로 마을 안내를 시작했다.
“로사플로는 향수로 아주 유명한 곳이오, 바다 건너 다른 땅에서도 수요가 있을 만큼.”
“마을에 만연한 향기만으로도, 그 향수의 질이 뛰어나다는 걸 알겠습니다.”
“식견이 아주 깊은 사람이로구만! 참고로 로사플로가 자랑하는 최고급 향수는 ‘장미의 영혼’이오, 그거라면 분명 그 깊은 식견에 걸맞은 만족을 얻을 수 있을 거요.”
남자는 손가락을 세우며 재차 강조했다.
“명심하시오, 장미의 영혼이오. 장미의 조각이나 장미의 바람이 아닌 영혼! 백 번의 외출용 향수 통이 현지 가로 금화 30개밖에 안 하오!”
그러니까 내가 내뱉은 말을 섭섭지 않게 이행하라는 말로 들리는데.
그래도 단서를 얻으려면 장단을 맞춰야지.
“그거 좋겠군요, 혹 마을에 다른 볼거리도 있습니까.”
“물론이오! 필레아가 운영하는 여관에 방문하면 꼭 스튜를 먹어보시오, 9년 동안이나 불 꺼진 적이 없지!”
여관이라.
외지인의 방문이 적은 마을이라면, 말만 여관이지 실상은 이곳 현지인들의 쉼터로 쓰일 것이다.
그렇담 그곳에서 정보를 캐는 게 가장 좋겠어.
* * *
돈주머니의 무게가 팍 줄었다.
그래도 아깝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장미의 영혼이란 거, 생각 이상으로 대단한 물건이었으니까.
절정을 담은 향기는 물론 붉은 염료를 섞어 구운 유리병은 그 자체로 보석함 한쪽을 장식해도 될 만큼 화려했다.
세라와 아네즈에게 선물하면 되겠다 싶어 두 개나 사버리긴 했지만, 지금껏 그들이 세운 공에 비하면 기꺼이 몇 개를 사도 아깝지 않지.
그렇게 향수를 사고 나서야 겨우 여관으로 들어서자, 그 유명하다는 스튜를 대접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향수를 두 병이나 샀다고 마을 내에서 나를 특별 취급하기 시작해 준 것이다.
뭐랄까,
지형적 특성 덕에 마을 전체가 순수함에 물들을 수 있었다고 해야 하나.
생존에 필요한 물질적 부분을 제외하면 현실을 살면서 묻어야 할 염세의 얼룩이 이곳 마을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는다.
그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지면서도,
막상 마주하면 싫지 않았다.
해서 9년이나 불 꺼질 일 없었다는 스튜가 얼마나 대단할까 싶어 한 숟가락 떠먹으면.
“와.”
육성으로 감탄을 내뱉을 정도였다.
육류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비릿함이 있긴 했지만, 끈적한 국물에서 나오는 깊은 맛은 모든 이견을 날려버릴 만큼 결정적이었다.
그간 숱한 재료들이 덧대어지면서 얼마나 농축되었을까.
이 스튜야말로 야생의 영혼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마을 사람들은 되려 이런 내 모습을 보곤 제 일처럼 좋아했다.
“보아하니 순진한 친구였구먼!”
어느 노인은 내게 다가와 등을 두들기며 두서없이 따듯한 친근함을 쏟는다.
그렇게 한 그릇을 다 비우려는 찰나,
여관에 한 무리 사람들이 들어왔다.
꽃을 베는 작업을 하다 왔는지 온몸에 풀칠이 된 채 들어온 그들이 자연스럽게 비어있는 자리에 둘러앉자,
여관 주인이 그들을 응대한다.
그런 과정에서,
나는 표적을 향하는 화살처럼 본능적으로 어느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할 수밖에 없었다.
시선이 향한 곳은 저들의 허리에 달린 가죽 집,
정확히는 가죽 집 안에 있는 갈고리 칼.
더 정확히는 가죽 집 밖으로 작게 드러난 칼날이었다.
빛을 머금은 유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 만듦새가 두 눈으로 보아도 범상치 않다는 게 느껴져.
마침 이곳의 분위기가 너그럽기도 했겠다.
자연히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물으면,
이에 반응한 한 무리 사람들이 나를 보며 활짝 웃다가도.
이내 내 시선이 가리키는 곳을 알아채곤 일거에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마치 어떤 금기를 저지른 것처럼.
“내 이럴 줄 알았지.”
“외지인 새끼를 들이면 안 된다고 했잖아!”
순식간에 급변하는 여관 분위기.
이에 방금까지 내게 미소 짓던 마을 사람들 역시 표정이 굳는다.
곧 내 등을 두들겼던 노인이 조심스레 다가와 경고하듯 말했다.
“마을을 떠나주시게, 자네의 눈빛에서 탐욕을 보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