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떨기 꽃 아래 모루 (5)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양손을 펼쳐 보이며 그들에게 적대적 의사가 없음을 호소하는 것뿐.
“진정하십시오, 별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욱 경계를 굳힌 눈빛으로 나를 압박했다.
그렇게 쫓기듯 여관 밖을 나서자, 안에 있던 자들은 문을 걸어 잠근 채 긴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저 날붙이 달린 농기구에 시선을 둔 것만으로도 저런 반응을 보이다니.
대체 왜?
오히려 의심이 부풀어 오른다.
그들이 이렇게까지 극렬한 모습을 보이는 건, 그만큼 본인들 역시 그 칼날이 보통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아주 잠깐이었음에도 눈에 담았던 그 갈고리 칼은 분명 범상치 않은 것이었다.
노동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그들에 비해,
도구로 쓰였을 갈고리 칼엔 그러한 흔적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마치 일부 하늘을 얼려 도려낸 것들로 만든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래.
간단히 말하자면 셀레어와 흡사한 느낌이 들었어.
한낱 농기구가 명품인 셀레어와 견줄 만큼 대단한 날을 가지고 있다?
늪 때문에 외부와는 거의 단절된 마을에서, 저런 완성도를 지닌 농기구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닌다는 건 확실히 비정상적인 일이야.
그렇다고 해서 이 마을에 그만한 대장간이 있냐면,
그것도 아니다.
한창 장미꽃을 거둬 증류를 시작한 듯 보이는 이 마을에서, 대장간에서나 나올법한 연기 기둥을 본 적이 없을뿐더러.
애초에 대장간이 있다면 바로 눈에 띄어야 할 만큼 마을의 규모부터가 작다.
그렇다면 이들의 농기구는 필시 마을 외부에서 반입된 거겠지.
여기서 ‘만약’이라는 아주 매력적인 단어를 붙여볼까.
만약, 이곳이 과거엔 늪지대와 수풀밖에 없었다면.
그래서 만약, 벤투스가 근처에서 길 찾기를 멈춘 이유가 지리적 변화 때문임이 확실하다면.
이 근방에 기울어진 바위 아래 난쟁이가 있을 확률이 높다.
기울어진 바위 아래 난쟁이는 맥레인이 해준 과거의 이야기 속 0과 가장 직접적인 관련이 있고.
그 관련의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낡은 아밍 소드에 이식된 0이었으니까.
정황상 기울어진 바위 아래 난쟁이는 곧 그만한 공정을 해낼 수 있는 대장간이나 특정한 작업실을 지칭하고 있다는 소리 아니겠어?
이런 전제라면,
저들의 농기구가 명품과 같이 성능이 전륜한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간다.
0을 이식해낼 정도의 기술자라면, 저런 농기구도 능히 만들어낼 수 있을 테니.
해서 이러한 의문을 지금이라도 당장 풀어야 하겠지만,
진짜 문제는 아마도 지금부터일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농기구와 관련해 대놓고 적개심을 드러냈고, 나는 그 적개심을 유발한 사람이다.
아마도 여관 안에서 저들이 나누고 있을 대화의 주제는,
나에 대한 처분이겠지.
내쫓거나, 위협을 가해 함구를 대가로 받아내거나.
나로서는 차라리 후자가 아닌 전자가 좋은 상황이다.
저들이 날 위협하기로 작정했다면, 나는 방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저들에게 위해를 가하게 될 것이고.
그럼 나와 이 마을 사이엔 돌이킬 수 없는 감정의 골이 생기고 말아.
그러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우선 발을 빼야만 하는 것인가.
“스튜를 먹은 게 맞소? 얼굴은 무슨 거미를 씹은 표정이구먼?”
들려온 목소리에 퍼뜩,
어깨를 움찔거렸다.
내게 안내를 자처했던 남자가 불쑥 다가온 것이다.
비록 돈으로 맺어진 관계라지만, 이 마을에서 그만큼 신뢰를 쌓은 자가 없기에.
나는 진실을 말하기를 결심했다.
“아마도 내가 큰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매니의 엉덩이라도 만졌나?”
“…,보다 근원적인 실수요.”
남자는 잠시 아리송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알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름은 갤리걸이오.”
“갑자기 이름은 왜…?”
남자는 태연한 얼굴로 돌아와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제 서로 동업자가 될 텐데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어?”
까슬한 수염, 툭 튀어나온 매부리코.
튀어나온 코만큼이나 깊게 들어간 축 처진 눈두덩이.
그 속에서 녹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하는 그에게, 나는 마치 홀린 듯 내민 손을 맞잡았다.
그보다 말투가 갑자기 변한 것 같은데.
“딱 보아도 나리 같아 보이지만, 우린 동등한 동업자. 맞지?”
“맞습니다.”
“그래서 이름은?”
“디안 베나즈.”
“그럼 디안, 지금부터 동업자인 갤리걸이 조언하나 하겠어.”
갤리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연초 냄새 가득한 입을 내 귓가에 가져다 댄 채 속삭였다.
“지금 당면한 이 상황을 모면하려면 금화 두 개가 필요해.”
그리곤 고개를 거둬 히죽 웃는 그에게,
나는 묵묵히 돈주머니에서 금화 두 개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이러면 거래 성립입니까, 갤리걸?”
“물론이지, 디안!”
호쾌한 얼굴로 건넨 금화 두 개를 낚아챈 그는 곧바로 내 뒷덜미를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
이런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벤투스는 길 바깥으로 빠져 유유히 뒤를 밟기 시작한다.
* * *
작은 마을 내에서도 외진 곳에 속하는 지역.
그곳에 홀로 세워진 집에 도착하기 무섭게 갤리걸은 잡고 있던 목덜미를 놓아주었다.
“무례를 용서해줬으면 해, 동업자.”
천연덕스러운 그의 말에 나는 옷매무새를 매만지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거, 성격 한 번 시원한 나리고만.”
“그래서, 이곳이 당신의 거처입니까?”
주위를 둘러보자 폐가에 가까운 외형과는 달리 내부는 정리정돈이 잘 되어있어 제법 깔끔했다.
“맞아, 내 집이지!”
“취미는…, 낚시?”
그런 거실 한쪽 벽에는 여러 나뭇가지로 만든 낚싯대가 종류별로 진열되어 있었다.
“취미라니, 내 밥줄!”
“밥줄?”
“그래!”
슬쩍, 그의 허리에 무게감이 느껴지는 주머니로 시선을 옮기자.
그는 되려 자랑스러운 듯 허리를 곧추세우며 돈주머니를 자랑했다.
“방금 내가 동업자 나리를 낚아챘잖아.”
아하.
그런 종류의 낚시라 이 말이지.
“나는 다른 마을 사람들이랑은 달라, 그놈의 장미 냄새만 맡아도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 같거든.”
갤리걸은 가슴을 활짝 펴며 가지고 있던 낭만을 내비쳤다.
“난 돈을 모아서 배를 살 거야, 그리고 새로운 곳에 터전을 잡고 그 지역 여잘 꼬셔서 알콩달콩 사는 게 목표지.”
“이 마을을 빠져나갈 생각입니까?”
“당연하지!”
“이렇게 평화로운 곳이 또 어디 있을 줄 알고?”
내 말에 갤리걸은 코웃음을 치며 반박했다.
“방금 나리가 처했던 상황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나와 달리 당신은 이 마을의 일원이잖아.”
“난 그들과 달라!”
갤리걸은 질린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이 시점에서,
“갤리걸, 아직 내 주머니에 금화가 남아있어.”
새로운 거래를 제시하자 갤리걸의 두 눈이 번뜩였다.
그러면서,
“나리도 이제 말 편히 하는 거야?”
내심 팔자 주름을 내세우며 이죽거린다.
그 모습이 중년 남성치곤 유쾌하고 얄궂게 보인다.
다만 불쾌한 심기를 드러낼 줄 알았던 내 예상과는 달리 그는 그제야 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잘 선택했어, 우린 동업자니까! 밖에 나가면 당연히 나리 대접을 해야 하겠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엄연히 동업자로서 소통해야 한다고!”
“그래서 갤리걸, 다음 거래는 뭐지?”
갤리걸은 연초를 입에 문 채 태연히 말을 이었다.
“그 전에 나 혼자 다시 마을에 들러야 해.”
“왜?”
“나는 나리가 도망친 것을 본 유일한 증인이니까. 그리고 나리가 산 향수, 그 소개비도 거둘 겸 말이야.”
정말 갖은 방법으로 돈을 긁어모으는구나.
곧 갤리걸은 금방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 * *
“다녀왔어.”
몇 분이 지났을까.
갤리걸은 특유의 태연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굉장히 빠르네.”
“그저 외지인이 꽁지 빠지게 도망쳤어! 하고 호들갑 한 번 떨어주면 되는 일이거든.”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라고?”
“응, 되려 그들은 나리 도망친 것에 안심하고 있을걸.”
당장 떠오르는 의문에 질문을 이었다간 종일 그와 의미 없는 대화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어.
바로 핵심을 찌르자.
“갤리걸, 당신은 내가 한 실수가 뭔지 알고 거래를 제안했어. 맞지?”
“맞아.”
“그럼 묻지, 내가 범한 실수가 정확히 뭐지?”
“수호신이 하사한 물건을 외지인이 불경한 눈으로 쳐다보았기 때문이지.”
“…,수호신?”
뜻밖의 말에 절로 고개가 기울어졌다.
“로사플로엔 수호신이 있어, 아니 정확히는 수호신이 있는 곳에 로사플로가 생긴 거지.”
“좀 더 쉽게 설명해 봐.”
“세 개.”
갤리걸은 손가락 세 개를 펼치며 말했다.
“이 작은 마을, 로사플로의 옛날이야기를 해주는 대가로 금화 세 개를 받아야겠어.”
“좋아, 거래하지.”
주머니에서 금화 세 개를 꺼내 그에게 건네자,
그는 정말 천진한 미소를 짓다가도 진지한 표정으로 돌변하고는 턱짓으로 내게 자리를 권했다.
그렇게 낡은 의자에 앉으면,
그는 목을 가다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로사플로는 무너진 깃발들로 인해 생긴 유랑민들이 모여 만든 마을이야. 아이베리아에선 흔한 종류의 마을이지.”
그렇겠지.
지금 순간에도 어디선가 깃발이 무너져내리고 있을 테니까.
“각 유랑민 무리 대표들은 결정해야만 했어, 그래서 더는 상실 없는 긴 평화를 누리기 위해 오지에 마을을 건설하기로 했지. 그게 바로 지금의 로사플로야.”
하여 마을 인근에 그런 울창한 늪지대가 있었구나.
애초에 벤투스가 아니었다면 나도 그 늪을 건널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문제가 생겼어, 오지에 마을을 건설한 덕에 누구의 간섭도 없이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됐지만 자급자족할 수단이 없어도 너무 없었던 거야.”
갤리걸은 안면 근육을 능수능란하게 움직이며 이야기에 연기를 덧대기 시작했다.
“진흙 먹은 갈대는 도통 베어지질 않고, 삐쩍 마른 검은 나무는 얼마 없는 도끼를 잡아먹는 흉물이었지. 그나마 남은 땅은 얼마나 척박한지 씨를 심으면 그 씨의 영혼이 되려 땅에 빼앗길 정도였어!”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군.”
“그래, 그렇게 마을 남자들이 제법 험한 길까지 나서가며 인근을 도는데.”
순간 몰입하기 시작하는 갤리걸의 얼굴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내밀어 빨려든다.
“글쎄 그 남자들에게 어떤 계시가 들려왔다는 거야.”
“계시…?”
“그래, 마치 동굴을 집어삼킨 듯 걸걸하고 울림 가득한 목소리였데!”
“그 목소리가 뭐라고 말했는데?”
“공물을 바쳐라!”
갤리걸은 이내 요란스럽게 양팔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남자들이 헐레벌떡 마을로 돌아와 겪었던 일을 설명하니까 유랑민 중 제사장이었던 여인이 발작하듯 반응하며 외치기 시작한 거야. 우리로 인해 이 땅에 잠들어 있던 신이 깨어났다고.”
“그래서? 공물을 바쳤어?”
내 물음에 갤리걸은 곱슬곱슬한 머리가 휘날리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없는 형편에도 아득바득 모은 그럴싸한 공물을 목소리가 들려온 곳에 갖다 놓고 하루를 기다렸댔어.”
이윽고,
갤리걸의 녹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공물을 바쳤던 곳으로 갔더니, 글쎄.”
“글쎄?”
“공물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쟁기, 낫, 곡괭이와 삽들이 쌓여 있었다는 거야.”
찾았다.
복잡하게 뒤엉킨 실타래의 시작 부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