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떨기 꽃 아래 모루 (6)
“제사장의 주장에 반신반의했던 마을 사람들은 결국 믿을 수밖에 없었어.”
갤리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마치 본인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결정적으로 공물을 바쳐 얻은 그 기구들의 성능이 말도 안 되게 좋았거든. 누가 봐도 신묘함을 느낄 정도로 말이야!”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유랑민들이 우연히 발견한 정착지 인근에 그 수호신이란 존재가 살았었고.
그 수호신이 건넨 말을 믿고 공물을 바쳤더니 그에 대한 대가로 개척에 필요한 도구를 얻을 수 있었다.
이 말인가?
그리고 그 기구들의 압도적인 성능이 일련의 모든 일을 이해시킬만한 것이었고?
“그래서, 갤리걸.”
그렇다면 직접 봐야겠어.
“그 수호신이 건넸다던 물건을 내가 직접 볼 수 있을까?”
내 물음에 갤리걸은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친구, 내가 왜 이런 외진 곳에 사는지 생각해 봤나?”
“같은 마을 사람들에게 배척받아서겠지.”
“아주 잘 알고 있군, 그럼 그들 믿음의 증거가 내 손에 있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도 알겠네.”
갤리걸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근래 들어서 내 수완이 도움이 된다는 걸 알았는지, 몇몇이 날 써주긴 하지만 결국 몇몇이 전체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런데, 배척받은 결정적인 이유가 뭔데?”
“이제는 이 마을의 법이나 다름없어진 제사장에게 찍혔으니까.”
“그러니까 뭐 때문에?”
갤리걸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을 공동의 책임에 참여하지 않아서?”
“공동의 책임?”
“수호신이 내세운 법칙이 하나 있거든.”
“그게 뭔데?”
“나는 오롯이 너희들에게 뿌리내렸으니, 너희들은 나를 안으로 믿되 바깥으론 기꺼이 부정하라.”
“와.”
별들을 찬양하는 책에서나 볼 법한 구절이네.
“정확히는 제사장이 수호신의 말을 옮겨 전한 것이지만 말이야. 어쨌든 마을 입장에선 겉도는 내게 수호신의 물건을 건넬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겠지.”
“그럼 이 마을의 향수 사업도 본질적인 목표는 수호신의 존재를 가리기 위함이란 거군.”
갤리걸이 눈썹을 치켜뜬다.
“너 정말 이해가 빠르구나!”
“해서, 내가 그 수호신과 접촉할 방법이 있을까?”
내 물음에 갤리걸은 치켜뜬 눈썹을 다시 내렸다.
“이해가 빠른 만큼 무모함도 크네.”
그는 한숨을 픽 쉬더니 벽에 걸린 낚싯대를 천천히 살펴보곤 힘겹게 입술을 뗐다.
“이 마을에서 수호신의 물건만큼이나 민감한 부분은 없어, 나도 그 부분만큼은 최대한 건드리길 자제해가며 일하는 실정이니까.”
“이해해, 갤리걸.”
“이해만으론 안 돼, 동업자 친구야. 저들에게 향수 사업은 신이 내린 기회고 그 기회로 발판을 마련한 이상 목숨을 걸고 수호신과의 맹약을 지키려 들 거야.”
갤리걸은 잠시 경계하는 표정으로 날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 부분으로 발생한 갈등은 분명 피를 부르겠지. 난 이 마을을 떠나길 결심한 상태지만 적어도 마을 사람들의 피를 보고 싶진 않아.”
나는 그의 경계를 거두기 위해 양손을 펼쳐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나도 마찬가지야, 누굴 살해하기 위해 이 먼 거리를 온 건 아니니까. 그저 깃발의 명예를 되살리기 위한 것일 뿐.”
“아직도 이 땅에 명예가 남았었나.”
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하다가도, 진지한 내 얼굴을 보곤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의 그 말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간다.
그 역시 유랑민 출신이니까.
명예 없이 명분만이 존재하는 깃발들의 싸움에서 삶의 터를 잃고 야생으로 쫓겨난 자들 가운데 하나였으니까.
아직 이 땅에 명예를 위해 휘날리는 깃발이 있다고,
자신 있게 항변하고 싶었지만.
글쎄.
덜컥 목이 잠겨 말할 수 없었다.
나조차도 지금만큼은 명분을 얻기 위해 이 먼 거리를 온 거잖아.
갤리걸은 한참이나 말을 아끼고 있다가, 이내 결심을 굳혔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말했다.
“좋아, 피를 보지 않겠다는 다짐을 보았으니 힘닿는 데까진 도와주겠어.”
“고마워, 갤리걸.”
“자네가 내 동업자인 이상 해당 거래가 끝날 때까진 최선을 다하는 게 사업자로서 도리 아니겠어?”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은 그는 이제 다시 뻔뻔한 모습으로 내게 손을 내민다.
그런 그에게 나는 멋쩍게 웃으며 돈주머니를 꺼냈다.
“금화 네 개, 맞지?”
* * *
“잘 들어, 하루에 한 번 향수 유통을 맡는 마을 남자들이 인근 교역소로 나가.”
“시간은?”
“딱히 정해져 있진 않아, 그런데 웃긴 게 뭔지 알아? 이런 불규칙성이 되려 향수의 값어치를 올렸다는 거야.”
수요가 공급을 압도하면,
공급자의 요행마저도 수완으로 해석되기 마련이지.
그래서 궁금한 게 있어.
“그렇게 되면 개중엔 이 마을에 직접 찾아오는 자들도 있겠네.”
“직접 찾아온 자는 그리 많지 않아, 대부분이 유통 조와 접선해 들어오지.”
“그렇게 접선해 들어온 자들과는 마찰을 빚은 적이 없어?”
“없을 수밖에, 유통 조가 미리 마을에 언질을 넣으니까. 마을은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아주 철저히 준비하거든.”
갤리걸은 결정적인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접선해 들어온 자들의 주목적은 향수야. 목적이 확실한 자들은 그 신경을 오롯이 목표에 집중하기 때문에 의외로 주변 시야가 그리 밝지 않아.”
“그럼 이곳에 찾아온 자들은?”
“대부분은 길을 잃은 자들이야, 알다시피 마을 인근엔 아주 지독한 늪이 있거든. 이런 길 잃은 자들에게 마을 사람들은 아끼지 않고 호의를 베풀어. 그러면 외지인은 그 호의에 감히 의심으로 갚을 생각을 하지 못하니까.”
그는 곧 나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자네 같이 직접 찾아온 듯한 사람이라고 해도 변하는 것은 없어. 철저하게 향수를 생산하는 오지 마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대부분은 조용히 쉬었다 가니까.”
“거기서 이제 그들의 민감한 부분에 관심을 보이면, 바로 극렬히 반응하는 것이로군.”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이거나 하진 않아, 그저 내쫓을 뿐이지. 다만 그렇게 내쫓아진 이들은 대부분은 늪에 소화될 운명일 뿐.”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이 마을에 찾아온 자들 가운데 마을 단위의 배척에도 능히 저항할 힘을 가진 이가 없었다는 건.
바꿔말하면,
베나즈 가문의 주적이라 불릴만한 깃발들이 이곳만큼은 찾지 못했다는 소린데.
물론 이 사실만으로 좋아하긴 이르다.
애초에 이 마을의 수호신이란 존재가 기울어진 바위 아래 난쟁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상황이니까.
이제 그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한 행동만이 필요할 뿐이야.
“디안, 어쨌든 자네는 마을을 활보할 수 없는 상황이니 내가 직접 나가 유통 조를 염탐하고 와야 해.”
“부탁할게, 갤리걸.”
“계획은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난 이후에 생각하자고.”
그렇게 갤리걸이 나서려는 찰나,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갤리걸! 어서 나와!”
그 말에 흠칫 놀란 갤리걸은 대번에 내게 고개를 내밀고는,
“쉿!”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가로막으며 내게 침묵을 강요했다.
“내가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절대 나설 생각하지 마.”
이어지는 그의 속삭임에 끄덕임으로 대답하자,
이내 갤리걸은 특유의 천진한 말투로 소리쳤다.
“무슨 일이야?!”
이윽고 갤리걸이 집을 나서고,
곧 실랑이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기 위해 조심스레 벽 틈새를 통해 바깥을 보자,
네 남자가 갤리걸을 둘러싸고 있었다.
“확실히 말해, 놈이 늪으로 도망친 걸 봤어?”
“그래, 내 눈으로 톡톡히 봤어!”
“개소리, 넌 돈만 주면 개새끼 되길 마다하지 않는 놈이잖아? 놈이 네 소개를 받고 향수를 사주니까 그걸 빌미로 놈을 변호하고 있는 거 아냐?”
“내가 무슨 이득이 있다고?”
“이득이 없긴, 소개비를 받았잖아. 병신아!”
네 남자의 연속된 꾸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갤리걸은 침착을 쏟아냈다.
“그건 단지 소개에 대한 대가잖아, 어쨌든 마을 사람의 일원인 내가 그를 변호할 이유가 없다는 소리야!”
그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네 남자 중 민머리 남자는 가래침을 뱉으며 손가락으로 귀를 쑤시며 다그쳤다.
“네가 마을의 일원이라고? 좆까. 넌 돈만 모으고 이곳을 뜰 생각이잖아.”
“수호신님이 내려주신 기회를 등지고 배신이나 칠 생각이나 하는 주제에!”
“널 믿을 바에 차라리 망아지 똥구멍에서 나오는 걸 믿겠어.”
폭언을 이어가며 갤리걸 주위를 둘러싼 네 남자의 얼굴엔 살기가 등등했다.
“제사장님께 나를 직접 변호할 기회를 줘.”
“네가 감히?”
“우리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마을 일원으로서 행사할 수 있는 마땅한 권리를 막을 순 없어.”
“지랄!”
“우리가 인정 못 해!”
이윽고,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갤리걸의 상체가 푹 꺼졌다.
네 남자 중 하나가 갤리걸의 배에 주먹을 내지른 것이다.
“이 씨발 배반자 새끼, 넌 우리 마을의 수치야!”
“놈이 어디로 도망쳤는지 말해, 이단 새끼야!”
갤리걸의 상체가 쏟아지기 무섭게 사방에서 들어오는 발길질.
“억!”
이따금 그들의 구타 속에서 갤리걸의 신음이 세어 나왔지만,
나는 되려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철을 덧씌운 눈으로 그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무차별적인 폭행이 끝나자,
네 남자는 분이 풀렸는지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그럼에도 나는 밖을 나서지 않았다.
네 남자의 행위 그 자체가 내 존재 확인을 위한 떠봄일 수 있기에.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바닥에 누워있던 갤리걸이 절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몸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힘겹게 집 안으로 들어와서는, 그대로 벽에 기댄 체 스르르 쓰러져 앉았다.
“잘했어, 동업자 양반.”
그러고는 피범벅이 된 얼굴로 씩 웃으며 내게 말한다.
불신은 믿음의 반대말이지만,
믿음‘들’에게 불신은 적이다.
* * *
갤리걸은 금이 간 갈비를 부둥켜안은 채 기어이 집 밖을 나섰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그 행색은 결백의 증표나 다름이 없었는지, 그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 내게 필요한 정보를 주었다.
“오늘 향수 유통은 저녁 늦게 시작될 거야. 동시에 그들이 떠나고 나면 나머지들은 수호신에 대한 예배를 드린다더군.”
참으로 시기적절하게 잘 왔다며 너스레를 떠는 그의 모습을 보니,
강인한 사람이네, 갤리걸은.
그렇게 비교적 빠르게 어두워진 하늘 아래, 어스름을 뒤집어쓰고 몰래 집 밖을 빠져나온 나는 늪 쪽으로 걸어 나가.
“휫.”
푸릉.
혀를 말아 짧게 휘파람을 불자 기다렸다는 듯 늪 저편에서 거친 콧소리가 들려왔다.
진흙에 잔뜩 더러워진 벤투스는 이내 태연한 모습으로 내 옆에 다가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벤투스, 기다리느라 고생 많았어.”
놈의 목을 쓰다듬으며 진흙 묻은 발굽에 바람 기름을 묻히고 안장 위에 올라탄 나는,
“샛바람보다 더 은밀하게 늪을 가로질러야 해, 할 수 있겠어?”
쫑긋 새워진 벤투스의 귀에 속삭이듯 부탁했고.
녀석은 그에 화답하듯 유려한 발길질로 바람을 박차 살랑살랑 뛰기 시작했다.
* * *
유통을 위해 마을에서 사람들이 대거 빠져나가고, 동시에 빠져나간 반대 방향으로 하얀 의복을 걸친 사람 무리가 이동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들고 있는 횃불을 흔적 삼아 추적하기를 한참.
이윽고 그들이 어느 바위 앞에 멈춰 서서 둥글게 앉았다.
이어 노파 하나가 가운데에 나서서 우렁찬 목소리로 외친다.
“수호신이시여, 미물에 불과한 우리가 허락하신 세계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옵니다. 이로써 우리의 귀를 열게 하시고, 눈꺼풀에 주저함이 없도록 해주소서.”
“믿습니다!”
“신이여!”
“저를 가지소서!”
그들의 울부짖음에,
곧 바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오너라, 내가 허락한 유일의 자식들아.’
마치 돌끼리 맞부딪히는 듯한 묵직한 음성에 그들은 곧 발작하다시피 상체를 들썩거리다가,
이내 앞에 놓인 잔을 들어 거침없이 들이켰다.
그러자 이들에게서 기괴한 신음이 연신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강한 환각성 마약이라도 되는 것일까.
제사장의 주도하에 이상한 율동을 반복하던 그들은 하나둘 바닥에 쓰러졌다.
개중엔 흥분을 참지 못하고 이성이건 동성이건 할 것 없이 서로를 미친 듯이 애무하는 자들도 있었고,
먼저 쓰러진 자를 게걸스럽게 탐하는 자들도 있었다.
한 마디로,
완벽한 개판이었다.
비로소 제사장마저 젊은 사내 품에 안겨 안락한 꿈을 꾸고 있을 때.
나는 유유히 그들 사이를 가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얼굴이 눈에 익은 자들이 보여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이들은 분명 갤리걸에게 분을 풀었던 자들이었지.
무표정한 얼굴로 네 남자의 얼굴을 발로 후려 깐 뒤 태연히 바위로 향하자.
곧 바위에서 한숨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드디어 저것들이 다 곯아떨어졌네.’
이에 나는 낡은 아밍소드로 바위를 탁탁 치며 말했다.
“수호신님의 세계가 보이는 것 같아요.”
능청스럽고도 무뚝뚝한 내 말에,
곧 바위 깊숙한 곳에서 당황에 역력한 목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으에?! 어! 그래, 어서 오너라 나의 자식아.’
“바로 눈앞에 있는 것 같아서 한번 들어가 보려고요.”
‘엥?’
수호신님을 뵙습니다.
[0]
[마그나베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