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87화 (187/365)

187화. 떨기 꽃 아래 모루 (7)

자루에 담긴 인챈트를 풀기 무섭게,

낡은 아밍 소드에 폭력적인 기류가 휘감긴다.

비록 여기까지가 내가 다룰 수 있는 인챈트의 정형적 한계였지만, 그럼에도 이 상황에선 만족할만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기류를 두른 검을 살짝 치켜들자,

대뜸 바위에서 경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어? 이게 뭔 바람 소리야?!’

돌 부딪히는 듯한 묵직한 음성 속 드러나기 시작한 경박.

점점 수호신이라는 존재와 동떨어져만 가는 그 목소리에 내 확신은 더욱 뚜렷해졌다.

‘이봐, 진정하고 일단 내 말을 들어봐!’

바위 안 목소리는 끝내 정중한 말투로 내게 부탁했다.

‘모두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잖아, 어?’

“보통은 먹고 살기 위해 신 흉내를 내진 않지.”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도 기업에서 온갖 신을 팔아 재끼는데!’

따지고 드는 바위에 할 말을 잃는 나는 조용히 감겨 있던 기류를 풀어헤쳐야만 했다.

물리적으로 길을 열어볼까 했는데,

다른 방법으로도 열 수 있겠다 싶어서.

바람 소리가 멎은 걸 귀신같이 알아낸 바위 속 목소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계속 항변을 이어나갔다.

‘솔직히 그런 기업보다 우리가 더 나아, 물론 저들의 기도는 정신 나간 것이 맞지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기도에 대한 대가를 지불했다고.’

“순전하게 거래를 했다, 이 말인가?”

‘맞아! 거래야, 우린 거래를 했을 뿐이야.’

“그나저나 우리라니, 혼자가 아닌가 봐?”

바위 속 목소리는 잠시 주춤하다가,

곧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이 공간은 내게 아주 소중하거든, 아울러 우리라고 표현할 정도로.’

“갑작스럽게 지어낸 것 치곤 제법 그럴싸한 변명이었어.”

바위는 또다시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다가 그제야 따지고 들 것이 생겼는지 한층 높아진 목소리로 내게 외친다.

‘너 누구야.’

“그쪽에 대해 궁금한 사람.”

‘외지인이구나, 그렇지?’

이윽고 바위에서 들려오는 낯선 소리.

킁, 킁킁.

‘맞네, 외지인이구나 너.’

냄새로 나를 판별한 건가?

‘어떻게 늪을 지나 이곳까지 찾아온 거야? 그 늪은 우리가 직접 만든 뿌리로 길을 조작하고 있었는데.’

점점 말투가 빨라지는 게, 목소리에서 초조함의 냄새가 느껴질 정도다.

그나저나 뿌리로 직접 늪 길을 조작한다니, 생각 외로 이 바위 속 존재가 일대에 끼치는 영향력이 크구나.

‘바람 기름을 썼구나, 그렇지? 하지만 웬만한 말로는 바람 기름을 바른다고 해도 그 늪을 헤치고 이 마을을 찾을 순 없어. 아! 그렇다는 건 대단한 명마를 타고 오셨다는 건데.’

무르익은 초조함 속에,

바위 속 목소리는 이제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빨라졌다.

‘제기랄, 이래서 늪에 독초를 자생시켜야 했었다니까! 마을이고 뭐고 간에 안전이 최우선인데! 천적인 앉은뱅이 뱀을 놓아 새들을 원천 차단한 게 다 헛수고가 됐어!’

“그렇게까지 해서 숨은 이유가 뭔데?”

‘네가 지금 우릴 찾은 이유 때문이지, 외지인.’

퉁명스럽게 대답한 그는 열 오른 입술을 식히듯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너, 우리의 물건을 봤잖아?’

사실 실제로 확인해 본 적은 없지만, 오지 마을에 경쟁력을 마련해준 도구라고 하니 직접 보지 않아도 그것들이 대단하다는 건 짐작하고 있다.

그래서 부정하지 않고 솔직하게 답했다.

“맞아.”

그리고 이 부분으로 길게 끌고 갈 생각이 없었던 나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이 마을에 있는 물건들은 분명 내가 찾는 것에 있어 결정적 단서에 해당하는 것들이야.”

‘무엇을 찾는데, 그런 물건들을 만들어내는 특별한 대장간을 말하는 건가?’

“따지고 든다면 맞는 말일지도 모르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찾는 게 아직 명확한 것이 아닌가 봐?’

“맞아, 온통 추상적인 것뿐이야. 하여 네가 있는 그곳이 내가 찾는 곳이 아닐 가능성도 있어.”

‘그래서, 만약 아니라면?’

“너의 이 ‘사업’이 원활히 진행될 수 있도록 이곳을 조용히 빠져나가야겠지?”

‘맞다면?’

“그렇다면…, 네 맘이 바뀌지 않는 한 아까 했던 방식 그대로 들어가는 문을 찾아보려고.”

‘이런 씨발…,’

정적.

바위 속 목소리는 한숨을 픽 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일단은 들어나 보자, 정확히 찾는 게 뭔데?’

“기울어진 바위 아래 난쟁이.”

내 대답에,

바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한 침묵에 등줄기 사이로 흐르는 시작하는 소름 한 줄기.

진정 이곳이 내가 찾던 곳이라 이 말인가.

‘너, 지금부터 혓바닥 위에 거짓 한 올이라도 걸칠 생각하지 마라. 나 진지하다.’

낮고 근엄해진 바위 속 목소리.

‘네 이름이 뭐야.’

“디안 베나즈다.”

‘증거는?’

그 물음에 나는 옷 속에 감추고 있던 목걸이를 밖으로 꺼냈다.

‘방금 짤그락거리면서 꺼낸 그거, 눈앞 바위 주변에 묻어봐.’

“좋아.”

순순히 시키는 대로 바위 옆에 인장을 파묻자, 곧 발바닥으로부터 땅속에서 뱀 기는 듯한 기묘한 스멀거림이 느껴졌다.

‘…,말의 이름이 뭐지.’

“벤투스.”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야, 과거를 탈피한 이곳을 어떻게 꾸역꾸역 잘도 찾아왔구나…, 그놈.’

바위 속 목소리는 순간 갈라진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맥레인 베나즈의 후손인가.’

“그렇다.”

‘그는 어디에 있지.’

“땅 위가 아닌 모든 곳에.”

‘용케도…, 이름을 이어 돌아왔군. 영영 돌아오지 못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바위 속 목소리는 먹먹한 감정을 실은 채 내게 말했다.

‘바위를 중심으로 둥글게 돌아 걸어라, 길을 열어주겠다.’

검 자루에 손을 얹고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바위 주위를 둥글게 걷기를 반복하자,

어느새 발 디디고 있는 땅이 서서히 꺼져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바위의 밑부분이 드러나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위태롭게…,

“기울어진 바위…,”

* * *

자연스럽게 꺼진 땅 너머로 연결된 지하 갱도.

아주 말끔하게 닦인 통로를 조금만 거닐면, 그제야 저 끝에서 낮은 철문 하나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강철로 만들어진 문엔 격자무늬가 새겨져 있었는데,

딱 보아도 문의 잠금장치와 연관이 있어 보였다.

요컨대,

요행으로는 절대로 열 수 없는 문이리라.

설령 웬만한 인챈트의 힘으로도 저 문을 뚫을 수나 있을까, 의심이 들 정도로.

이윽고 철문 가까이 다가가자 덜컹거리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격자무늬 틈새로 걸쭉한 액체가 흐르기 시작했다.

끝내 그 액체가 격자무늬 틈새 전체를 채웠을 때, 비로소 문은 육중한 두께를 드러내며 서서히 열렸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서면.

“얼마 만인가? 베나즈가 다시 이곳에 발을 들이는 게.”

돌 부딪히는 소리가 제거된, 한없이 가벼운 목소리가 나를 반긴다.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그러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대체…?”

“놀랐나? 용의 시대 이후 사람이라면 뭘 보아도 놀라지 않아야 정상 아닌가?”

목소리의 주인은,

작은 쥐다.

갈색의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가진 쥐.

그 쥐는 좁쌀 같은 두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며 코와 입을 쉼 없이 움찔거렸다.

그러면서 자신의 유리 집 입구 앞 놓인 내 목걸이에 다가가 작은 두 앞발로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태연히 말을 잇는다.

“하긴, 나도 이 인장을 보고 놀랐어. 설마 이 땅에 베나즈의 인장을 갖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어…,”

“반가워, 난 스케비야. 본명은 아니고 직함이지.”

“반갑습니다, 스케비….”

“씨라고 부르면 돼.”

“스케버씨.”

스케비는 앞발을 세워 유리 벽에 갖다 댄 채 둥근 귀를 움찔거리며 내 인사에 화답했다.

어안이벙벙하다.

무언가에 안면을 크게 부딪힌 기분이야.

멀뚱멀뚱 현관에 서 있는 내게, 쥐 아니 스케비는 조촐한 작업실 전체에 연결되어있는 유리 통로를 통해 내 가까이 다가왔다.

“언제까지 서 있을 건가, 안으로 들어가지.”

“그러죠.”

유리 통로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쥐 아니 스케비를 따라 작업실 깊은 곳으로 들어서자.

순간 펼쳐진 별천지에 나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다.

벽에 거치된 수많은 검,

그 아래 도끼와 망치를 비롯해 질서정연하게 세워져 있는 폴암류 창들.

개별로 놓고 보면 사막 위에 거대한 눈의 결정이 되고도 남았을,

흔히 말하는 명품들이 사방에 점철되어 있다.

“뭘 그렇게 서 있어, 어서 가자고.”

쥐 아니 스케비는 코를 움찔거리며 충격받은 내 모습을 살피곤 다시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유리 통로를 가로질렀다.

겨우 정신을 붙잡고 스케비를 따라 작업실 너머로 드러난 투박한 부엌으로 들어가자.

스케비는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큰 목소리로 연신 누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봐! 베나즈가 돌아왔어! 돌아왔다고! 이런 젠자앙! 나는 믿고 있었다고!”

곧 정신 사나운 스케비의 외침에 화답하듯,

부엌 끝에 딸린 방 안에서 들려오는.

와장창!

시끄러운 소리.

그렇게 발칵 열린 방문 너머로 뿌연 연기와 함께 태연히 모습을 드러낸 이는.

그 윤곽이 눈에 채 들어오기도 전에 벌새처럼 내게 달려들었다.

순간 발휘된 내 본능은 곧 달려든 이의 끝에 맺힌 것이 검인 것을 간파했지만,

동시에 검을 든 자의 실력이 형편없다는 것도 인식하여서,

가볍게 쳐내기로 마음먹고 순식간에 검을 뽑아 쇄도하는 검을 맞받아 쳤다.

그러나,

칵!

하는 철의 단말마와 함께,

내 검은 그대로 두 동강이 나버렸고.

이어 상대는 날카로운 검, 정확히는 스파타를 치켜세워 그 끝을 내 목에 겨누었다.

그렇게 겨눈 검으로부터 시선을 천천히 옮긴 나는 그제야,

상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상대는,

마치 눈에 보석을 품었던 세공소의 아이들처럼.

너울거리는 아름다움을 쏟는 여인이었다.

* * *

“뭐어어 하는 짓이야!!”

스케비의 말에 여인은 눈꼬리에 걸맞은 새침함을 내밀었다.

“스케비, 고작 이름만 듣고서 이렇게 쉽게 문을 열어주면 어떻게 해?”

“증표로 베나즈의 인장까지 제시했다고!”

“그런 인장 따위는 누구나 복제할 수 있어!”

“오랜 기다림 끝에 나타난 증거를 어떻게 불신해?!”

“스케비, 너는 오래 기다려왔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야! 그리고 그 기다림 앞에서 필요한 건 거듭되는 의심 하나뿐이야. 목숨이 걸려 있는 일이니까.”

“나는 싫어! 이런 불신으로 살긴 싫다고!”

“그렇게 불신하지 않으니까 탑에서 호구 짓 하다가 쥐에 빙의 된 거잖아!”

스케비가 곧 찍!

소리와 함께 울분을 토한다.

“야!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할 수가 있써!”

“목숨이 걸려 있는데 그럼, 더 심한 짓도 할 수 있지!”

“그래도 내가 너보다 배는 나이가 많은데!”

티격태격.

용의 시대 비구름과 눈구름이 싸우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언제 어디서부터 끼어들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 그들의 다툼 속에서,

나는 그저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검술로 치환하면 내 비전으로도 꺽지 못 할 만큼 빠르게 주고 받히는 다툼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이러는 와중에도 여인의 손에 들린 스파타는 정확히 내 목을 노리고 있었다.

검술 실력이 그렇게 대단치 않다는 건 알지만,

검을 잡은 채 자세를 유지하는 것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야.

해서 조용히 검을 쥔 손을 보아하니.

그제야 그녀의 미동도 하지 않는 자세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여인,

오른팔이 의수다.

하지만 보통 의수가 아니야.

아니 이 정도면 의수라 부르는 게 맞는가 싶을 정도로…,

색만 창백하다 싶을 뿐이지 말 그대로 신체 일부에 가까워.

관절은 물론이고 꿈틀거리는 근육의 움직임까지 재현되고 있잖아,

심지어는 어디가 결합점인지조차 두 눈으로 찾을 수 없을 정도다.

거기다가,

그녀의 손에 들린 스파타는 내가 걸친 어스름마저 천 조각 마냥 잘라버릴 만큼 날카로웠기에…,

나는 정말 그 자리에서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저 깔끔하게 부러진 내 낡은 아밍 소드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밖엔…,

이내 둘이 서로를 노려보며 씩씩거리고 있을 때.

나는 기회를 노려 천천히 운을 뗐다.

“일단 모두 진정하는 게 좋겠어요.”

그러자 쥐 아니 스케비와 여인은 동시에 나를 올려다보다가,

이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번 서로를 노려보더니 끝내 여인은 내게 겨눈 검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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