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88화 (188/365)

188화. 떨기 꽃 아래 모루 (8)

어느 정도 일단락이 된 걸까.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뒤로 물리자 여인은 기다렸다는 듯 다시 칼을 내게 겨누었다.

“움직이지 마.”

끝난 거 아니었어?

여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도 그런 그녀의 모습을 그제야 면밀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어두운 금색 머리카락.

그 사이사이로는 햇살 같은 밝은 머리카락이 섞여 있다.

뽀얀 살결은 피가 나타내는 감정 하나 숨기지 못할 정도로 여리게 보였고,

그와 반대로 맺힌 눈동자는 푸른 바탕에 금색 얼룩이 번져 있어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옷은 얇은 가죽으로 만든 버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의수로 추정되는 오른팔 소매는 의도적으로 잘라낸 모습이었다.

오른팔이 뽀얀 피부와는 동떨어진 창백함을 갖고 있을뿐더러,

버프 코트는 엄연히 갑옷에 속하는 옷이다.

그런 옷에서 의도적으로 오른 소매를 제거했으니 나로선 이 부분에 대한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밖에.

어쨌든,

버프 코트라고 해도 거기에 쓰인 얇은 재질 특성상.

그녀가 가진 굴곡을 눈대중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부정은 못 하겠다.

나도 남자니까.

그녀가 가진 굴곡은 마치 이성으로서 꿈꾸던 게 하루아침에 나타난 거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어디였더라.

그래 ‘온폰세의 세 남작’ 중 두 남작이 마치 그녀의 가슴에 얹…,

시선을 더욱 아래로 깔려다가 문득,

턱 바로 밑에 칼끝이 겨눠져 있는 것을 인지한 나는 얼른 시선을 위로 올려야 했다.

정신 차려, 디안.

다시 무거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을 맞추자,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그녀 역시 슬쩍 놀란 눈치로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면서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귀 끝은,

석양 물들인 듯 빨갛게 상기되어 있다.

그보다, 귀 모양이 특이하네.

귀 큰 자의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다른 두 발 걷는 자의 귀라고 하기엔 특이한 모양이야.

살짝 누워있는 모양에 끝이 둥글게 솟아 있구나.

내게서 시선을 거둔 그녀는 자연스럽게 바닥에 떨어져 있는 부러진 검 조각을 바라보더니,

순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얼른 내게서 검을 거두었다.

“이 검…,”

홀린 듯, 작은 소라에서나 나올 법한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그녀의 반응에.

옆에 있던 스케비가 찍!

하며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이제야 알겠어? 베나즈가 확실하다고!”

곧 여인은 나를 흘깃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옆으로 지나쳐 바닥에 떨어진 검 조각을 주워들었다.

“못난이 2호가 확실하네…,”

저 검과 관련하여 깊은 이야기라도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순간 그녀의 눈에 아련한 빛이 흘렀다.

“그러니 의심은 이제 거둬도 돼. 이 땅에 누가 베나즈라는 이름을 걸고 사칭을 하겠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려는 자라면 누구든 하겠지.”

“그래서 그 긴 시간 동안 그런 놈들이 이곳을 찾아왔어?”

“그 긴 시간 끝에 찾아왔을지도 모르지. 기어이 인챈트를 손에 거머쥐고 오느라.”

스케비는 좁쌀만 한 눈으로 처연함을 흘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제 됐어, 테리아. 그 케케묵은 의심을 언제까지 덮고 다니며 숨 참지 않아도 돼.”

“그래도 돼, 스케비?”

“이번만큼은 날 믿으라고.”

“알겠어.”

그녀는 다시금 나를 흘깃거리곤 조용히 들고 있던 스파타를 비어있는 거치대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한참을 뒤돌아 서 있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훔치듯 비비던 그녀는 태연한 모습으로 내게 말했다.

“베나즈에 무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아량을 넓게 베풀어주시기를.”

“이해합니다.”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바깥에 드러난 저 심정들만큼은 이해한다.

“자자, 이렇게 다들 서 있지 말고 둘러앉아 필요한 이야기들부터 나누자고!”

곧이어 스케비가 앞발로 유리 통로를 두들기며 닦달하자 우리는 서로를 멋쩍게 바라보다가 이내 약속이라도 한 듯 자리를 잡고 앉았다.

* * *

“테리아, 테리아 루스에요.”

“앞서 소개했듯, 디안, 디안 베나즈입니다.”

찍!

“나는 스케비다! 그나저나 상호 가문 간에 이런 딱딱함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테리아가 짙은 금색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야 나와 저분은 그 당시 ‘당사자’가 아니니까 그렇지.”

“어허 어허! 그래서 상호 간 유지했던 전통을 이렇게 깨시겠다?”

그 말에 영문을 모르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스케비,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테리아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격식 같은 차려야 할 것들이 필요 없는 사이를 말하는 거예요.”

그래?

“그럼 그게 편하겠네, 어차피 나와 비슷한 또래인 것 같은데. 동의하지, 테리아?”

능청을 떨며 그녀에게 말하자,

순간 놀란 표정을 짓다가도 조금은 분했는지 두 뺨에 노을이 진 그녀가 답했다.

“무… 울론이지, 디안.”

“가문의 전통을 지키는 게 우선이잖아.”

이렇게 해서라도 그녀와 신뢰를 쌓을 수만 있다면 못 할 이유도 없지.

곧이어 나는 그들 앞에 부러진 검을 내놓았다.

구태여 본론을 전하기 위해 길게 말하는 것보다, 이편이 가장 확실하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으니까.

테리아는 말없이 검 자루에 손가락을 대고는 이내 살살 쓸어내리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마그나베노스…,”

식탁과 연결된 유리 통로 앞에 매달려 있던 스케비 역시 코를 격하게 움찔거리며 황홀에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이베리아 중간 땅을 내려다보던 눈!”

잠시 후, 테리아는 자루에 손을 떼곤 담담히 운을 뗐다.

“기사왕의 검을 되찾기 위해 왔겠지요…,아니 왔겠지.”

얼버무리며 어색하게나마 말을 마친 그녀에게, 스케비는 부연 설명하듯 토를 달았다.

“이해하시게, 디안. 테리아는 두 발 걷는 자를 직접 대면해본 적이 없거든.”

“그런 설명을 왜 하는 거야?!”

“테리아, 널 위해 변호하는 거잖아!”

“그게 무슨 변호야! 시인이지!”

티격태격.

그 모습을 잠시 넋 놓고 지켜본 나는 기침 소리를 내며 그들 이목을 빼앗았다.

“그럼에도 잘 해내고 있는 거야, 테리아 너는.”

이런 내 말에 테리아와 스케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 따라와. 기사왕의 검을 보여줄게.”

멋쩍은 표정으로 있던 테리아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 * *

테리아와 어울리지 않는, 투박하기 그지없는 작업실을 지나.

창고로 보이는 곳에 도달하자 그녀는 대뜸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그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생각해보니까, 시간이 굉장히 오래 흘렀잖아…? 그렇지?”

“그렇지.”

“어…, 그 오랜 시간 동안 이곳도 내부적으로 많은 고민과 설계가 반영되어서 말이야.”

“이해해.”

테리아는 고개를 푹 숙이며 고백했다.

“기사왕의 검도 내부적 용도 변경을 피할 수가 없었던 노릇이라, 조금은 조촐히 보관되어 있어도 이해해주길 바라.”

이윽고 두꺼운 문을 열고 들어가 부스럭거리던 그녀가 곱게 접힌 하얀 천으로 포장된 무언가를 들고 나왔다.

“그게…?”

“기사왕의 검이야.”

오뚝하면서도 살짝 둥근 감이 남은 콧잔등 위에 검댕을 묻힌 그녀는 다시 날 따라오라는 듯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작업실 선반에 도착하자,

그녀는 아주 조심스럽게 하얀 천을 거두어 그 안에 든 내용물을 내게 보여주었다.

솔직히,

그 내용물이 처음엔 아주 선명한 날씨 파편인 줄 알았다.

순간 안에서 뿜어져 나온 빛에 눈을 감아야 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금세 빛에 익숙해진 두 눈으로 다시 내용물을 바라보았을 땐,

검을 다루는 자로서 경의를 내비치지 않고는 못 배길.

성스러운 것이 보였다.

티끌 하나 없는 검날.

정제된 겨울을 그대로 벼린 것이 아닐까 싶은,

냉소라는 개념을 물질화시킨 듯 보이는 그것은.

정확히 네 동강으로 부러져 있었다.

부러졌음에도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날붙이 아래엔,

앞서 보았던 것과 비교될 정도로 심히 훼손된 가드가 있었다.

마땅히 그 아래 있어야 할 자루와 폼멜은,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이 안에 담겨있던 인챈트를 빼냈으니까.

반대로 그 흔적으로부터 느껴지는 처절함이 여실히 느껴졌다.

“일체식으로 벼린 탓에 인챈트를 온전히 추출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검을 부러트려야만 했어.”

테리아는 거울 같은 검 파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검날 하나하나가 아직도 숨 쉬듯 살아있지. 금방이라도 달빛을 쏟아내며 휘둘려질 듯이.”

“다시.”

나는 검 조각으로부터 시선을 뗀 뒤 그녀에게 물었다.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응.”

이번엔 그녀가 내 눈빛에서 무언가를 본 걸까.

“해야지, 그것을 위해 내가 있는 거니까.”

테리아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아래 놓인 검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달빛에 얼은 호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은빛에 젖어있다.

* * *

다시 식탁에 둘러앉기 무섭게 테리아와 쥐 아니 스케비는 머리를 맞대며 고심을 쏟아내었는데,

“기사왕의 검을 다시 녹여 복원할 재료가 필요해.”

그녀의 말에 스케비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차갑게 대답했다.

“그런 게 여기에 있겠냐?!”

그러나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테리아가 눈동자에 번진 금빛을 번뜩이며 대꾸했다.

“그래서 직접 나가 찾아야지.”

그러자 스케비의 그 작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너,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하는 거겠지?”

“그렇지 않고서는 저 검을 복원할 방법은 없어. 스케비, 많은 시간이 흘렀잖아? 상황이 달라졌어,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그러다 세상의 어느 무언가라도 너를 발각시켜버린다면 피할 수 없는 위험이 찾아와!”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땅을 덮은 채 숨 참으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스케비는,

테리아에게 할 말을 잃었는지 그저 코를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난, ‘약속’을 지키고 싶어.”

“불과 몇 시간 전엔 찾아온 베나즈를 부정했으면서.”

“넌 불과 몇 시간 전에 그런 베나즈를 내게 이해시켰잖아.”

“누가 ‘아르테서스’의 딸이 아니랄까 봐!”

“누가 ‘아르테서스’의 친구가 아니랄까 봐.”

둘은 마치 친척과 조카를 바라보는 애정 어린 눈빛을 나누다가 서로가 서로에게 져주었다.

그렇게 종래엔,

스케비가 처음으로 내게 이를 드러내며 물었다.

“베나즈라면 분명 싸움을 잘할 거야 그렇지?”

“적어도 질 거라 가정하여 싸우진 않습니다.”

“…, 솔직히 자네 그 말보다 자네에게 붙여진 베나즈라는 이름이 더 설득력이 느껴지긴 하지만…,”

스케비는 작은 앞발로 둥근 귀를 말며 하소연했다.

찍!

“갑자기 상황이 이렇게 급작스럽게 변하다니! 내 이 작은 머리로는 감당할 수가 없숴!”

그렇게 한참 앞발로 머리를 매만지던 그는,

“…, 테리아를 잘 부탁해. 이 말은 곧 네가 이루려 하는 목표를 지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니까 명심하라고.”

마지막까지 내게 당부를 아끼지 않았다.

* * *

스케비의 걱정과는 달리,

테리아는 앞서 말한 약속을 이행한다는 비장한 각오와 밖으로 나선다는 엄청난 설렘이 공존하는 표정으로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면서 한껏 들뜨면서도 어색한 무거움이 깃든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인챈트를 비롯해 기사왕의 검 파편은 모두 여기에 두고 갈 거야, 그것을 지니고 재료를 찾으러 다니는 건 괜한 위험을 부둥켜안고 가는 꼴이니까.”

그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애초에 복원에 필요한 재료를 구하는 길에 그것을 모두 지니고 다닐 이유도, 필요도 없으니까.

다만,

“적어도 갖고 다닐 무기 하나쯤은 있어야겠는데.”

스케비의 충고가 문득 생각나 내민 내 의견에,

그녀는 곧바로 거치대에 있던 수많은 검 가운데 하나를 골라 들어 건넸다.

그것은 롱소드였으며,

검날 자체에 불 규칙적인 특이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이 아이의 이름은 질리스야, 17번 합금에 북풍으로 만든 강을 접쇠하여 만든 검이지. 디안 너의 체격을 봤을 때 이 검만큼 균형이 잘 맞는 검도 없을걸.”

그녀가 건넨 검을 받기 무섭게 느껴지는 극한의 이질감.

그것은 셀레어를 들었을 때, 그 무게감으로부터 느껴졌던 이질감보다 더했다.

“어때, 그 정도라면 충분할까?”

분명 내 얼굴에서 만족을 엿보았을 그녀였지만, 구태여 떠보듯 물어보는 그 모습에.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숨긴 채 급히 답해야만 했다.

“충분하고도 남을 것 같은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