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89화 (189/365)

189화. 떨기 꽃 아래 모루 (9)

“지금부터 앞으로의 계획을 간략히 알려줄게.”

뒤로 질끈 묶은 머리가 애석하게 옆으로 비죽 튀어나온 잔머리가 조명 아래 반짝거린다.

금발 특유의 눈부신 윤기에 시선이 가다가도 그런 앳됨이 느껴지는 무성한 잔머리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테리아, 그녀에게선 확실히 뭐라 규정할 수 없는 오묘한 개성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개성은 분명 마주하는 대부분에게 치명적인 매력으로 작용할 거라 생각한다.

솔직히 터놓고 말하면,

매력을 운운하기 이전에 그녀는 매우 신비했다.

같은 두 발 걷는 자임에도 그들과는 동떨어진 존재인 양, 내 시선부터가 그녀를 그렇게 인식해버린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 속에서,

막연한 동질감이 느껴져.

이 감정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디안?”

퍼뜩, 날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정신을 가다듬고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실으며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기사왕의 검은 ‘밤의 제왕’으로 만들어졌어.”

“밤의 제왕?”

“응, 하늘에서 내려온 방문자 말이야.”

“운석을 말하는 건가?”

“맞아, 지금은 운석 대신 ‘방문자’라는 말을 더 많이 쓰지만…,”

테리아의 설명에 스케비가 코를 움찔거리며 덧붙였다.

“밤의 제왕은 세 번째 방문자야. 용의 시대 이후 세 번째로 떨어진 운석이란 말씀!”

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떠 있는 별 외에 다른 모든 것엔 무지했었네.

이어 테리아는 오른쪽 옆머리가 거슬렸는지 그것을 귀 뒤로 넘기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방문자 대부분은 마치 암호처럼 특정한 공정을 거쳐야만 가공할 수 있어. 세공사를 비롯해 망치 좀 두들긴다고 하는 작자들의 영원한 난제 같은 개념이지.”

“그럼 기사왕의 검은…,”

“난제의 해답 그 자체란 소리,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야.”

“어떤 문제?”

“기사왕의 검은 부러졌으니 그것을 다시 녹여 새로운 검으로 벼려야만 해.”

“그 말인즉슨 난제를 다시 풀어야만 한다 이 말인가?”

테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문제의 풀이는 내가 다 기억하고 있어, 다만 그 풀이를 하기 위해선 그에 걸맞은 재료가 필요하다는 거야.”

“해서, 맨 처음 말한 계획이라는 건…,”

“재료를 구하기에 효율적인 동선을 말하는 거지.”

“이해했어.”

* * *

가장 중요한 것은 단연 화약이라고 할 수 있어.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겠지만 우리가 구해야 할 화약은 아주 특별하고 희귀한 거야.

화약의 이름은 ‘살렌의 고성’

이것을 얻으려면 역시 서쪽 바다 건너에 있는 화약의 성지, 피로스로 가야겠지.

다음으로 구해야 할 것은 ‘소로스티’

이것은 북쪽 목걸이 섬이라 불리는 모닐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을 거야.

아, 참고로 소로스티는 흙의 종류 중 하나라고 보면 돼.

마지막으로는 ‘오르미그의 기름’을 구해야 하는데, 살렌의 고성에 필적할 만큼 희귀해서 아마도 적지 않은 고생을 해야 할 거야.

물론 아이베리아 중심 땅 동쪽에 있는 리디굴람이라면 그 기름을 취급하는 곳이 하나쯤은 있을 거라고 봐.

서서히 멸종을 맞이하는 화약과는 달리,

괴물은 지금 시대가 끝나지 않는 한 계속 나타날 테니.

그래서 결론을 말하자면,

먼저 가까운 리디굴람에서 오르미그의 기름을 구해 남쪽으로 이동, 배를 타고 빙 둘러 북서쪽으로 올라가서 모닐 피로스 순으로 방문해 필요한 재료를 구하는 거야.

“어떤 것 같아?”

장황한 내 설명에,

디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살면서 제대로 된 세상 구경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어렴풋이 알 수 있는 것은,

디안 그는 일반적인 두 발 걷는 자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는 뭐랄까,

두 발 걷는 자들의 범주 그 바깥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걸치고 서 있는 것 같아.

한 폭의 밤을 머금은 눈,

그 밤 중에 별빛을 닮은 창백한 피부.

아마도 그를 바깥 경계에 걸치게 만든 것은 상기한 것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아름다움 때문이 아닐까.

그런 그를 보자면,

묘한 동질감이 든다.

이 감정은 대체 뭐일까, 궁금하다.

다만 혹시 모를 북받침에 내 서투름이 들키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테리아?”

그의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바람에 나뭇가지 떨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디안.”

“말로만 들어보면 꽤 긴 여정이 될 것 같은데, 내겐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거든.”

그에게서 느껴지는 초조함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베나즈의 이름으로 기사왕의 검을 되찾으러 온 그의 뒷배경에,

휘날릴 깃발이 없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나로선 긴 시간 동안 세상으로부터 숨어가며 지키기로 맹세했던, 그 약속을 이행할 순간이 찾아온 것이기도 하기에.

신중에 신중을 더할 생각이야.

그래야만,

아르테서스.

당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딸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시기적절하게 모든 바람이 우리의 등을 떠밀어만 준다면 보름 안에는 해결할 수 있을 거야.”

디안은 내 말을 곱씹다 이내 천천히 수긍했다.

“탑의 변덕을 생각하면 그 기간 안에 이뤄질 확률은 희박하단 소리네.”

그러다가도 씁쓸한 표정으로 푸념을 내뱉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덩달아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 * *

직후 스케비는 테리아와 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그녀를 방으로 데려갔다.

둘의 대화를 엿들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스케비의 그 강한 억양은 멀리서도 선명히 들릴 정도여서 나도 모르게 그것을 두 귀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테리아에게 하는 말은 하나같이…,

자식 떠나보내는 부모가 해줄 법한 조언 같은 것들뿐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말에 의외로,

테리아는 흐느낌으로 대답했다.

이 이상,

그들이 나누는 감정적 교류에 괜히 끼어드는 것 같아 좀 더 멀리 떨어져 관심사를 돌리기로 작정한 나는,

자연히 그녀가 내게 건네주었던 검으로 향했다.

확신하는데,

이 검은 내가 지금껏 휘둘렀던 것들 가운데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을 만큼의 명품이야.

속이 빈 나뭇가지만큼 가볍되 휘두르면 손목으로부터 탄력적인 반동이 올라오는 게,

말 그대로 휘두르는 맛이 일품이구나.

테리아,

그녀가 가진 야금술의 단편을 쥔 기분이 들기도 해.

그래서 더더욱 궁금해진다.

테리아, 그녀는 어떤 이야길 갖고 있을지.

이윽고 눈두덩이가 붉게 달아오른 채 방 밖으로 나선 테리아는 조용히 작업실로 들어가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유리 통로를 통해 자각자각 내게 다가온 스케비는,

전보다 더욱 촉촉해진 좁쌀 같은 눈으로 다시금 내게 부탁했다.

“내가 했던 말 절대로 잊지 말아줬으면 해.”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스케비.”

“맥레인의 이름을 걸고?”

“맥레인의 이름을 걸고.”

스케비는 그제야 코를 움찔거리며 그 자리에 엉덩방아를 찧듯 주저앉았다.

“정 걱정되신다면 동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떠십니까?”

벤투스라면 둘은 너끈히 태우고 다닐 수 있다.

물론 셋도 너끈히 태울 수 있지, 셋 중 하나가 쥐에 빙의된 자라면 말이야.

거기다 그가 있는 편이 테리아에게도 훨씬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해.

“내가 동행하면 이곳은 누가 지키라고.”

스케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래 봬도 난 이 대장간의 영업 전반을 맡고 있거든, 누군가는 먹고사는 문제를 전담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

“영업…, 말입니까?”

“거…, 그러니까 이곳에 오기 전에 봤던 그런 거 말이야. 그것 역시 우리가 주관하는 사업의 극히 일부분이라 할 수 있지.”

“그럼 로사플로처럼 다른 곳에서도 그런 ‘특별한’ 사업을 하시는 겁니까?”

“아니…,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로사플로가 독보적으로 특이한 사업장이라는 거야. 나도 근 몇 년 동안 영업을 했지만 저런 건 처음 봐. 세상에 신 대접을 받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생각보다 영업 반경이 넓은가 보다.

“뭐 그래도, 이들이 바치는 공물 덕분에 최근은 재정 상태가 많이 좋아졌어. 그들이 명품에 버금가는 병기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테리아가 뚝딱하면 만드는 조잡한 농기구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으니까.”

여관에서 아주 잠깐 본 게 다였음에도 그 품질이 범상치 않아 보였는데.

그게 뚝딱하면 만들어지는 조잡한 것에 속한겁니까…,

“원래는 말이야 명품에 버금가는 물건을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에 내놓고 누가 발견하길 기다리는 식의 영업을 주로 했었거든.”

“그런 방법으로 사업이 성립된단 말입니까?”

“그래, 그 물건을 받아들고 가문을 일으켜 세운 자들 몇몇이 은혜를 갚는답시고 발견한 장소로 돌아와 성대한 제사를 치르곤 하거든.”

“과연…, 그렇군요.”

드러나선 안 되는 걸 고려했을 때를 생각하면 정말 획기적인 방법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어, 대부분은 마치 자기 운명의 힘으로 얻은 양 떠들어대는 자들뿐이었으니.”

“해서, 보완할 방법을 찾으신 겁니까?”

“그래, 내가 직접 육성으로 그들에게 요구를 덧붙이기 시작했다. 역시 두 발 걷는 자들은 말을 해야 알아듣는다니까!”

스케비, 지금은 네 발 걷고 있잖아요.

“그런데 로사플로는…, 그게 그렇게 됐어, 그냥.”

“긴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들 입장엔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도피처를 찾은 것이나 다름없고,

덩달아 스케비와 테리아에게도 좋은 일이니.

좋은 게 좋은 걸 뭘 더 덧붙일 필요가 있겠어.

“어쨌든 이곳에 자네 인챈트와 기사왕의 검이 보관되어 있으니 명목상으로라도 내가 남아있는 것이 맞아.”

작은 두 앞발로 팔짱을 낀 채 비장한 표정을 짓던 그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둥근 귀를 움찔거리며 바삐 말을 이었다.

“참, 그런데 말이야.”

“왜 그러십니까?”

“그러니까…, 맥레인이 이곳에서 새롭게 이식된 인챈트를 받아가고 난 뒤에 우리는 혹시 모를 발각을 우려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깊은 곳까지 숨어들었거든.”

스케비는 둥근 머리를 긁적이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인챈트를 쫓아야 할 적들의 추격은 거의 없다시피 했단 말이야? 오죽하면 근 몇 년 사이에 우리가 이런 사업을 펼치기로 마음을 먹었겠어?”

마땅히 인챈트를 노리고 추격해야 할 자들이,

애초에 적극적으로 추격하지 않았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내가 가진 공백의 크기가 아주 조금은 더 늘어난 기분이 들었다.

* * *

테리아는 한쪽 팔을 뒤덮는 감색 케이프를 걸친 모습으로 나타났다.

상의는 투박한 우유색 린넨 셔츠.

아래론 신축성이 느껴지는 검은 면바지와 짙은 갈색 부츠를 신어 그 모습이 참으로 시원스럽게 보였다.

대부분이 빳빳한 새 옷인 걸 보면,

거국적인 첫 외출이라는 풋풋한 티가 팍팍 느껴지기도 했다.

“짐의 무게는 최대한으로 줄였으니 말에게 많은 부담이 되진 않을 거야.”

살짝 떨림이 느껴지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출발할까?”

테리아는,

유리 통로에 앞발을 디디고 있는 스케비를 바라보며 꾸벅 인사를 하고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다가 곧 씩씩한 목소리로 답했다.

“출발하자.”

햇살 묻은 듯 반짝이는 금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걸으면, 그 아래 바다 같은 감색 케이프가 찰랑거린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그렇게 앞장선 그녀 뒤를 바짝 쫓아 출구를 향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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