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떨기 꽃 아래 모루 (10)
“조심해, 도미느투는 네 걸음걸이를 모르니까.”
테리아의 말처럼, 그녀 뒤를 바짝 쫓고 있던 나는 발을 내디디는 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시원시원한 걸음으로 앞장 서 있는 그녀와는 달리,
내민 발에 맞춰 솟아오르는 바닥은 내게 익숙하지 않았고, 동시에 내 주저하는 발걸음에 익숙하지 못한 바닥 역시 솟아오르기가 들쑥날쑥했다.
“도미느투가 뭔데?”
“귀 큰 자들의 대표적인 뿌리형 집.”
테리아는 걸음을 멈추고 뒤따라 오는 나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같이 공생하며 살아가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기도 해. 그런 방식에 쓰이는 대표적인 뿌리 이름이 도미느투지.”
그녀는 나를 내려다보는 그 상태에서,
“도미느투는 주인과 오랜 교감을 통해…,”
뒷걸음질 친 발에 맞춰 솟아오른 바닥을 자연스레 디뎠다.
“뿌리에 엉킨 지반을 움직여주는 아주 똑똑한 집이야.”
그래서 이곳을 처음 접했을 때 땅이 꺼진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구나.
동시에 점점 가파른 오르막으로 변해가는 통로 역시 도미느투가 그녀의 발걸음에 감응한 결과겠지.
“자, 서두르자!”
기합이 잔뜩 들어간 테리아가 다시 뒤돌아 빠른 걸음을 시작한다.
아깐 조심하라며.
그렇게 통로 끝에서 슬슬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하자 그녀는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 끝을 향해 주저 없이 달려나갔다.
이내 빛 너머로 사라진 그녀를 따라 통로 밖으로 나서면,
“하.”
눈부심 사이로 크게 숨을 들이켜며 하늘을 바라보는 그녀의 뒷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하하.”
그녀는 연신 숨을 내쉬다가도, 곧장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테리아?”
옆으로 슬쩍 다가가 드러난 그녀 옆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초승달처럼 유려하기 짝이 없는 둥근 콧날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다만,
그 초승달 끝엔 붉은 석양이 얼룩져 있어.
…,
코끝을 붉히면서도, 그 큰 눈망울로 용케 눈물을 붙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참으로 애처로워 보였다.
“밖에 나오니까 어때.”
그녀는 보석 같은 눈동자를 굴리며 주위를 살피다가, 결국 유리구슬 같은 눈물 한 방울을 흘려보내야만 했다.
“아빠가 들려준 세상과 똑같아.”
기사왕의 검을 위해서라지만…,
세상으로부터 스스롤 격리해야 하는 건 너무 매정한 처사인 것 같다.
그 사실에 나도 모르게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되려 기다려왔던, 고대해왔던 일의 임박을 앞두고 금세 흥미진진한 모습으로 돌아와.
“서두르자! 시간이 없다면서!”
씩씩한 걸음걸이로 나아갔다.
“테리아, 그쪽 방향 아니야.”
“어!”
내 말에 인형처럼 바로 뒤돌아 뚜벅뚜벅 걷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얼른 입가에 묻은 미소를 감춰야만 했다.
* * *
“가기 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어.”
목에 걸고 있던 어스름을 풀어 테리아에게 덮어주자, 그녀는 두 손으로 그것을 붙잡고 얼굴을 감추듯 더욱 동여맸다.
“로사플로에 신세 진 사람이 있거든.”
“응.”
아까의 의연했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그녀는 곧 바깥세상이 낯선 순한 양이 되어있었다.
휘파람을 불어 벤투스를 부르고,
그녀의 허리를 감싸 들어 등자에 발이 걸치도록 유도하면, 그녀는 또 곧잘 안장 위로 미끄러지듯 잘 올라탔다.
“디안, 너는 안타?”
“말 타는 게 익숙하지 않을 테니 틈틈이 익숙해지도록 하는 게 좋을 거야.”
“응.”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는 이윽고 필요 이상의 힘으로 안장 머리를 붙들었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어, 벤투스는 널 떨어트릴 법한 행동은 일절 하지 않을 거니까.”
고삐를 잡고 슬슬 벤투스를 끌고 가자 내 의도에 맞춰 녀석은 아주 부드럽게 움직였다.
테리아가 잘하고 있나 보면,
그녀는 또 곧잘 균형을 잡고 타고 있다.
그렇게 늪과 땅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올라탄 채 로사플로 외곽을 삥 둘러 갤리걸의 집에 도착했다.
혹시 모르니 벤투스에게 일러 테리아와 함께 멀리 떨어져 있기를 주문한 뒤 그의 집으로 들어서면,
벽에 있던 낚싯대도,
여기저기 눈에 띄었던 살림살이도 한바탕 쓸어간 듯, 말끔해진 실내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갤리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싶어 조바심이 일어났지만, 이내 고개를 살짝 내리자 그가 떡하니 남겨놓은 듯한 편지가 눈에 들어왔다.
낡은 종이에 휘갈기듯 써진 글귀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악필이었지만,
갈겨져 엉킨 첫 문장을 알아본 이후로는 술술 읽히기 시작했다.
[동업자에게]
자네 덕분에 시기를 잘 엿보고 나가네.
추신 – 바다 구경하고 싶으면 릴레이커 항구로 오시게.
떠난 건가.
말 그대로 시기적절하게 잘 빠져나갔네.
생각해보면 갤리걸을 핍박했던 자들의 턱주가리를 깐 것은 무모한 행동이었다.
그들이 오해를 품고 갤리걸에게 더한 핍박을 가했을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모든 걱정이 무색하게도.
그는 편지에 쓰인 내용대로 아주 날렵하게 행동했구나.
* * *
“용무는 끝마친 거야?”
“응.”
“잘 끝냈어?”
“잘 끝났어.”
조금 전만 해도 질문은 내 몫이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서로 뒤바뀐 듯하다.
이어 등자에 발을 걸쳐 안장 위에 올라타려는데, 테리아는 그런 내 뒤에 타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몸을 뒤로 내빼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움직임이 무색하게,
그녀를 감싸 안듯 올라타 내 가슴에 등 기댈 수 있게 해주었다.
“우… 악!”
이상한 소리를 내뱉던 테리아는 잠자코 어깨를 쭈그린 채 곧장 숨을 죽였다.
“뒤에 탔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그… 렇지.”
나는 진심으로 걱정이 돼 그녀의 행동에 핀잔을 주어야만 했다.
승마에 익숙하지 못한 자가 기수의 뒤에 앉으려는 건 바람직하지 못한 짓이다.
분명 동승자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기수의 허리를 필요 이상으로 압박할 것이고,
결국엔 이동하는 내내 서로를 지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런 생각을 하니 불현듯,
테리아와 같이 세상이 어색했을 적, 천진했던 안드레 네가 떠올라 그립다.
“두 손으로 안장 머리를 잡되 힘주지 말고, 몸은 슬쩍 기울여 내게 기대면 돼.”
그녀는 또 곧잘 내 지시에 따라 잘 해주었다.
오히려 익히는 속도가 너무 빨라 놀랄 정도야.
이제 두 팔로 고삐를 잡아 그녀를 완벽히 감싸 안은 나는 유감없이 벤투스를 재촉했고,
그 재촉에 녀석은 화답하여 다섯 걸음 만에 주위 풍경을 뭉개버렸다.
맞불어오는 바람에 따가운 두 뺨.
벤투스로부터 느껴지는 안장의 격동.
휘휘 시끄러운 바람을 비집고 들어오는 다각다각 편자 소리.
그 사이로,
새로운 소리가 들려온다.
벅차오름을 내뱉는 그녀의 환호가.
* * *
이름 모를 평원 길에 들어서자 벤투스는 자연스레 속도를 늦추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쓴 어스름 바깥으로 햇살 한 줄기 같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던 테리아는 고개를 바쁘게 저어가며 주위 풍경을 만끽했다.
“저기 봐, 정말 하늘이 퍼즐처럼 생겼네.”
깎아지른 절벽처럼 각진 구름을 가리키며 호기심을 쏟는 그녀에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알려주었다.
“마법사의 탑이 저 퍼즐 조각을 움직여 날씨를 쏟지.”
“말로만 들었는데 그걸 실제로 보니 너무 신기해.”
“다만 아이베리아의 날씨는 대부분 탑이 아닌 기사들에 의해 쏟아져.”
“왜?”
“깃발들의 전투가 끊임이 이어지는 땅이니까.”
그녀는 내 말을 금세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챈트들의 흔적이 쉴 새 없이 나타나기 때문이구나.”
그 고갯짓에 맞추어 어스름 바깥으로 튀어나온 햇살 한 줄기가 팔랑거리며 내 턱을 간질인다.
“바깥세상에 대한 정보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대부분은 아버지께서 해주신 이야기를 통해서. 그 외 대부분은 지금 하는 사업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얻게 됐어.”
그녀는 왼쪽 언덕 위 우뚝 솟은 나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용의 시대 이후 대장장이는 말 그대로 추상을 두들기는 기술자잖아,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야기만으로도 상상이 아주 잘 되더라고.”
그러다가 불쑥,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본 그녀는 감개무량한 듯한 소감을 내비쳤다.
“그런데 역시 실제로 보는 것만 못하네.”
그래, 그 말이 맞네.
세공소에서 자란 나는 모든 곳이 지옥인 줄 알고 살았는데.
실제로 보니 모든 곳이 지옥 같지는 않더라.
“참, 베나즈 가문은 검술로 엄청 유명하다면서? 너도 그래?”
“내가 가진 것 자체는 유명하지 않지만, 적어도 상대가 누구든 업신여기지 못할 거라 생각해.”
“자신감이 대단한데?”
“그럼 테리아 너는 어때? 스케비의 말만 들어보면 굉장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당연히 끝내주지! 난 이미 세상이 인정하는 기술자라고.”
“세상이 인정해?”
“출발하기 전에 내가 했던 얘기 생각나? 이 세상의 방문자들은 기술자에게 난제와 같은 것이라고.”
“기억나.”
“용의 시대 이후 세공사나 대장장이들은 일종의 수학가와 같은 개념으로도 통하거든. 심지어는 방문자들을 풀기 위한 학회도 존재하니까.”
“학회라…,”
“그곳에서 내가 다섯이나 달하는 방문자를 해결했지.”
“다섯씩이나? 아니 그보다 바깥 생활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런 일을 해냈단 말이야?”
“구석에 틀어박혀 정체를 드러내지 않음에도 세상이 용인해주는 수학가처럼, 지금 세상은 은둔 생활을 지향하는 기술자들도 용인해주기 마련이거든.”
“그런데 대체 어떤 방식으로?”
내 물음에 테리아는 목소리를 내리깐 채 스케비의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흠흠, 내 자식아. 내 네게 명하노니 이것을 발롱게르의 부엉이에게 전달하라. 그리하면 뿌리 속에서 검이 솟아오를 테니…,”
“아하.”
사업의 방향이라는 건 무궁무진한 법이니까.
“그리고 말이야, 지금 나는 기사왕의 검을 복원하기 위해 움직이는 중이라고?”
“괜한 질문을 했네.”
내 능청에 테리아는 킥킥거리며 숨죽여 웃었다.
그러다가도 풍경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다시 그 큰 눈망울로 호기심을 쏟는다.
* * *
[벨카의 허리]
동쪽,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그 길이가 광활한 관문을 지나.
[아레라]
붉은 바탕에 사슴 머리가 그려진 깃발의 거대한 영토를 가로질러.
[고풍 지대]
잿빛 갈대가 끝없이 늘어선 완만한 구릉을 거칠 때쯤.
날은 완벽히 저물어 온 세상이 어두워졌다.
리디굴람의 정확한 방향은 벤투스도 알지 못했기에 아레라에서 관련된 지도를 구매해야 했지만,
덕분에 테리아가 말한 동선을 더욱 수월하게 조율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야영을 위해 모닥불을 피우면, 테리아는 내게 건네주었던 질리스를 갖고 정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 정비 방식이 혀를 내두를 만큼 충격적이었다.
대뜸 자신의 오른손을 모닥불에 담그는 것이 아닌가?
“테리아! 뭐 하는 거야?!”
순간 놀라 그녀에게 외치면,
되려 테리아는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모닥불을 어루만지다가 이내 그곳에서 손을 떼었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아는 눈치라고 생각했는데, 내 오른팔이 의수라는 거.”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불을 직접 만질 수 있다는 거, 대장장이에겐 최고의 축복 같은 거야. 물론…,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것이지만.”
그녀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곧 오른손으로 질리스를 쓸어내렸다.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어.
그녀의 몸에 있는 가장 큰 과거의 흔적.
의수에 관해서 말이야.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그녀와 마주 앉은 나는 조용히 마른 가지를 불 먹이로 주었다.
이윽고 조심스레 물었다.
“테리아, 너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게 많아.”
그러자 그녀는 달아오른 오른팔처럼 얼굴을 붉히며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그… 뭐?”
“네가 가지고 있는 과거는 내가 그리워하는 과거와 많이 겹쳐져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그녀는 두 뽀얀 뺨에 얹힌 상기를 쓸어내리곤,
이내 내가 지금 짓고 있을 법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맞네, 나도 디안…, 네게 궁금한 것이 많아. 네가 알고 있는 베나즈의 이야기도.”
그러면서 서둘러 분위기를 환기하고 싶었는지, 그녀는 활짝 웃으며 가벼운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내 머리카락이 왜 군데군데 더 샛노란 빛으로 염색됐는지 아니? 알테르라 불리는 특수한 불로 열처리하는데, 그 과정에서 불 그을림에 염색된 거다?”
천진한 웃음으로 운을 뗀 그녀에게,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내 눈동자에 박힌 별은 실제로 해당하는 별을 바라보면서 각인시킨 거야.”
아마도 오늘 밤은,
살짝 길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