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떨기 꽃 아래 모루 (11)
“테리아, 아빠가 하는 말 잘 들어.”
밤에 반쯤 가려진 얼굴로 사색을 그리며,
아빠는 내게 작게 읊조리듯 말했다.
겁에 질린 내 얼굴이 신경 쓰였을까.
한쪽 무릎을 꿇고 나와 눈높이를 맞춘 아빠는 세상 거대한 두 손으로 내 어깨를 감싸주었다.
그런데 투박하고 단단한 그 손이,
왜 그렇게 떨리는지.
나와 키만큼은 비슷한, 그러나 내가 보기에 세상보다 더 장대한 우리 아빠.
“착하지, 테리아?”
그 옆으로 하얗고 가느다란 엄마가 아빠와 나란히 한쪽 무릎을 꿇고 나를 내려다본다.
이러다 닳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날 어루만지는 아빠와 엄마에게,
물었다.
“무슨 말이요?”
그러자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쓴 과실 한쪽을 나눠 먹은 듯 동시에 미간을 찌푸리다가,
애써 표정을 풀고 웃으며 날 바라봐주었다.
이윽고 아빠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늘 밤은 제대로 된 숨바꼭질을 할 거야, 그것도 집이 아닌 숲에서.”
그 말에 내 볼을 어루만지던 엄마가 덧붙인다.
“최대한 멀리 가서 숨어야 할 거야, 이번엔 나도 같이 테리아 널 찾으러 돌아다닐 거니까.”
엄마는 내가 아빠와 숨바꼭질할 때마다 잔소리했으면서.
숲에서 숨바꼭질하겠다고 떼를 쓰면 늑대가 물어간다고 겁을 줬으면서.
갑자기 숨바꼭질하겠다는 엄마의 그 말이 너무 낯설어.
나는 어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었다.
그러면 두 사람은 옥에 묻은 물방울 훔치듯, 애써 나를 쓰다듬으며 최선을 다해 달래준다.
아빠는 소매에 숨겼던 눅눅한 사탕을 꺼내고,
엄마는 절대로 손대지 못하게 했던 진주 팔찌를 내게 걸어주지만,
그 달램조차 낯설고 무서워 더욱 목놓아 울었다.
“제발, 테리아!”
엄마, 왜 나를 다그치는 거예요?
그냥 날 안고 침대에 같이 누워주면 안 되는 거예요?
“테리아, 그럼 집에서 숨바꼭질할까? 대신 이번엔 다락이랑 지하실도 포함 시켜줄게!”
아빠, 싫어요.
지금은 숨바꼭질하고 싶지 않아.
나는 쉬이 달래지지 않는 울음으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보지만,
이윽고 집 문 틈새 너머로 붉은빛이 새 들어 오는 순간.
뚝.
울음을 그칠 수밖에 없었다.
아빠와 엄마는 경직된 표정으로 눈을 쏟듯 날 내려다보며.
“쉿!”
침묵을 강요했으니까.
침묵하지 않으면 정말 큰일 날 것만 같은 느낌에, 나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울컥거리는 흐느낌을 꾸역꾸역 삼켜야만 했다.
“절대.”
아빠는 내 이마에 입을 맞춘 뒤 부탁하듯 말했다.
“절대로 집 밖을 나가지 마, 최대한 숨어.”
이어 엄마는 날 부서트릴 듯이 끌어안고 숨죽여 흐느꼈다.
“미안해, 미안하다 아가. 그러나 사랑한다, 너를 정말 사랑한다.”
두근두근.
이대로 내버려 두다가는 심장이 밖으로 샐까 싶어 입을 막고 있던 손 하나를 덜어 가슴을 틀어잡는다.
아빠는 곧장 문을 열고 나섰고, 그 뒤를 엄마가 조용히 따랐다.
그런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나는 열린 집 문 너머 수많은 이들의 모습을 보았다.
아차.
그보다 얼른 숨어야 해.
최대한 꽁꽁 숨어야 해.
마지막으로 문을 닫기 전, 날 내려다보던 엄마는 입술로 모두 다 괜찮을 거라는 말을 그리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렇게 문이 닫히고,
살금살금 어디에 숨어야 할까 고심하는 와중에…,
밖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쩌자고 그랬는가.”
그 말에 이어 들려오는 아빠의 멋진 목소리.
“이유를 듣고 싶은가.”
아빠의 목소리에 이끌려, 조심스럽게 벽 틈새를 통해 바깥을 내다보면은.
엄마가 막 당당히 나아가 아빠의 손을 맞잡고 있다.
“이유라고 하면 우리에겐 이것밖에 없습니다.”
이어서 들려오는 엄마의 우렁찬 목소리에,
횃불을 들고 온 수십의 시커먼 그들 얼굴이 무서우리만큼 돌변했다.
“기어이 끝까지 가보겠다, 그리 결심한 게야?!”
그 가운데 가장 앞장 서 있던 이의 물음에 아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끝이 아니라 시작일세, 이제 시작이라고.”
그러나 찾아온 이들은 타오르는 횃불보다 더욱 뜨겁게 일그러진 얼굴로 변할 뿐이었다.
“자네들은 세상의 법칙을 어겼어.”
“세상으로부터 마땅히 주어진 것을 누렸을 뿐.”
“잘도 우기는구나, 이제 말장난은 여기까지다. 비켜라.”
“법칙의 위배는 없어져야 해.”
그들이 횃불을 들이밀며 다가온다.
그 모습에,
끅.
나올 뻔한 비명을 겨우 틀어막았다.
“라리만, 정신 차려!”
“정신 차려야 하는 것은 너희 조합이야!”
아빠의 윽박지름에 그들이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의 법칙을 어겼다면 그 심판도 세상으로부터 받으면 되는 일이거늘, 어찌 그대들이 심판자로서 나선단 말이야! 그대들은 그저 도 넘은 믿음에 기인한 광분으로서 움직이고 있을 뿐일세!”
그러나 곧이어 그들은 더욱 단호한 발걸음으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규칙은 우리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니, 마땅히 규칙의 어긋남을 바로잡는 것도 우리의 일.”
“변명은 거기까지 하게. 이제 제발 비켜주시게 라리만. 그대의 손은 우리 조합에 절실해.”
횃불을 든 자들은 이제 아빠와 엄마 근처까지 다가왔다.
“비켜!”
“라리만, 이제 끝났어!”
아빠가 다가오는 자들에게 달려들어 막는다.
몸싸움은 점점 거칠어져,
이내 그들은 아빠를 걷어차고 후려쳐 내팽개쳤다.
그러나 아빠는 더욱 거세게 달려들어 그들을 저지했고.
그런 과정에서,
“안돼!!”
엄마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씨발…!”
“무슨 짓을 한 거야?!”
“라리만!”
“그는 우리 조합 최고의 기술자란 말이야!”
군중 사이에 피어오르기 시작한 당황.
그 사이로,
붉음이 쏟아지는 복부를 부여잡은 채 바닥에 쓰러진 아빠.
엄마는 괴성을 지르며 쓰러진 아빠 위에 엎드려 무서운 눈으로 사방을 째려보았다.
나는,
철렁 내려앉은 가슴이 무거워 두 다리를 달달 떨어야만 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라리만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어.”
“어차피 우리가 아니었어도 조만간 귀쟁이 놈들이 찾아와 똑같은 일을 저질렀겠지.”
그들은,
서로의 눈빛을 주고받았고.
이내 모두의 시선이 아빠 위에서 울부짖는 엄마에게로 날카롭게 꽂혔다.
“어째서! 어째서!”
엄마의 외로운 절규에,
그들은 들고 있던 것을 치켜들어 다가가.
퍽.
퍽.
퍽.
퍽…,
“으… 으…?”
딱딱.
입안에 겨울이 찾아왔어.
주륵.
철렁 내려앉은 가슴이 너무 무거운 나머지 오줌이 나왔어.
욱신욱신.
두 뺨이 따가워.
“어… 으….”
나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걸까.
다만 그러는 와중에도 내 눈동자는 아직 틈새 바깥 상황을 빠짐없이 담아내고 있다.
그렇게 한바탕 난리를 친 그들 뒤로는,
아빠 소리도.
엄마 소리도 나질 않아.
다만 속으로 들려오는 내 목소리만이 들릴 뿐.
숨어.
숨어야.
숨어야 해.
달달 떨며 집을 둘러보다가.
지하실로 들어가 구석진 곳에 몸을 웅크리고 있으면.
왈칵!
하는 소리와 함께 위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두두두두.
몇 갠지 셀 수 없는 발소리에.
달달달달.
몸 안엔 한바탕 눈보라가 몰아친다.
무서워.
무서워무서워무서워무서워무서워.
무릎 위에 이마를 포갠 채 두 눈을 질끈 감으면, 이대로 밝은 아침이 찾아오지 않을까?
하면 정말로,
머리 위로 밝은 기운이 느껴진다.
하여 고개를 슬쩍 들면.
“아.”
횃불을 든,
감히 마주치기조차 무서운 남자가 나를 매섭게 내려다보고 있다.
그는 날카로운 갈고리 같은 손으로 내 팔을 잡아끌었다.
붕.
엄청난 힘에 그대로 몸이 들리면,
남자는 나를 끌고 위로 올라간다.
“악… 악….”
한쪽 팔을 붙들려 당겨지는 아픔에,
짧은 신음만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올 뿐.
눈물도, 울부짖음도 감히 나오질 않았다.
“찾았어.”
“숲으로.”
“끝내자고.”
자기 전 들고 다녔던 인형처럼.
그들의 손에 들린 나는 인형처럼 팔랑거렸다.
한쪽 어깨가 뜯어질 듯이 아파.
그 아픔에 내 손에 들렸던 인형이 떠올라 미안해.
불현듯 떠오른 미안함에 그제야 눈물이 흐른다.
아빠 소리가, 엄마 소리가 그쳤을 때도 흐르지 않았던 눈물이 그제야 흐른다.
그러나 눈물만이 쏟아질 뿐,
입 밖으론 아무런 말도 내뱉질 못하겠어.
그렇게 숲 깊숙한 곳까지,
나는 무서워 가지 못했던 곳까지 가서야.
남자는 나를 썩은 그루터기 위에 엎어 놓았다.
“왜 세상 밖으로 나와 눈을 떴느냐, 그냥 계속 감고 있으면 좋았을 것을.”
“너는 위대한 기술자들 사이에서 태어난 위법이다.”
“규칙을 뛰어넘는 존재는 있어선 안 되는 법.”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는 몰라요.
모르겠어요.
“흐윽… 흐윽….”
겨우.
겨우 입 밖으로 흐느낌이 나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 중 세 남자가 다가와 위에서 나를 그대로 짓눌렀다.
손 하나는 등, 손 하나는 머리,
다른 손 하나는 어깨, 또 다른 손 하나는 펼친 오른팔을 붙들고.
썩은 그루터기에 엎드려진 채 옴짝달싹 못 하게 짓눌려지니, 숨도 채 쉬기가 버거워.
“커헉… 헉… 커헉!”
겨우 힘을 다해 숨을 들이켜야만 했다.
“그렇다고 작은 것을 죽이기는 꺼려지는데.”
“직접 끝낼 필요는 없어, 놈의 애비가 말했듯 세상으로부터 심판을 받도록 하면 돼.”
“도끼를 가져와라.”
숨쉬기조차 버거운 와중에도.
그들의 대화는,
너무나 선명하게 내 귀에 내려앉았다.
“녹이 슨 도끼니 자연에 사그라지지 않을지언정 파상풍에 죽을 것이고.”
“파상풍에 죽지 않을지언정 피 냄새를 맡은 맹수가 심판의 대리자로서 역할을 다할 것이며.”
“그 심판은 혼재된 기술들의 집합체가 되어 법칙 위의 법칙이 될 오른팔을 거세함으로써 시작될 것이다.”
그루터기 위에 짓눌린 채,
그들이 주고받는 끔찍한 이야기를 들으며 떨고 있던 나는.
정말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어,
거친 숨만이 오가는 입 밖으로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다.
그 말은…,
“사… 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작은 나로서 큰 자들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진심 어린 호소였다.
“나는… 위배같은 거 안 할게요. 나는… 몰라…, 다 안 할게요.”
눈물을 흘리며 꺽꺽 흐느끼는 와중에,
그들은 나를 더욱 세게 짓눌렀다.
“끄으… 윽 허억…!”
금방 숨이 막혀 목구멍이 틀어막힌 채 오들오들 떨고 있던 나는…,
이제 오른팔 위로 번쩍 솟아오르는 녹슨 도끼를 마주해야만 했다.
“허억… 허억…!”
도끼는 이내,
바람을 가르며 그루터기 위에 펼쳐진 내 오른팔을 향해.
* * *
───── 허!
탑의 변덕도, 인챈트의 흔적도 없는 하늘 일진데.
나는 왜 비에 흠뻑 젖었는가.
“허… 허…,”
가쁜 숨을 몰아쉬며 둥근 이마 위를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땀을 닦아 내린 나는.
생생했던 모든 것이 꿈이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얼마나 매섭게 상체를 일으켜 세웠는지 딱딱하게 굳은 허리 근육으로부터 뻐근함이 느껴졌다.
그래,
디안 베나즈.
그와 서로 약간의 과거 이야기를 나눴었지.
그 탓에 그에게는 섣불리 말할 수 없었던, 심연 속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일까.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안도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고 있으면.
“아직 밤은 길어.”
맞은편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별들도 몰려오는 어둠에 눈 깜빡일 야심한 시간인데,
디안,
그의 눈 안에 담긴 별은 아직 감길 생각 없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태연한 표정으로 모닥불 근처에 앉아 있던 그는 넌지시 나를 바라보며.
“그러니 맘 편히 꿈에서 건져 올린 것들을 내려놓도록 해.”
담담히 말했다.
그것은 위로였을까.
그래, 위로가 맞을 것이다.
그의 존재 덕분에 방금까지 버거웠던 내 맘이 한결 가벼워졌으니까.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동시에 그에게서 느껴졌던 동질감이 매우 선명해진 것 같아.
이제는 그 동질감이 무엇인지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어.
디안 베나즈.
너도 나와 같이.
심연 속 기억으로부터 뛰쳐나온 적이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