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92화 (192/365)

192화. 떨기 꽃 아래 모루 (12)

베나즈 저택 마당에 마련된 자리, 그곳에 모인 수십의 사람들 앞으로 한 남자가 절뚝거리며 나타나자.

소란스러웠던 자리는 순식간에 침묵으로 젖어 들었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색하게나마 예를 갖추었고, 개중엔 이런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은 듯 눈알을 굴리며 주위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했다.

그렇게 마련된 자리 가운데 가장 상석 앞에 멈춰 선 남자는.

“모두 반갑습니다, 기지어입니다.”

자리에 모인 그들을 향해 너그러이 손짓하였다.

기지어의 그 말에 자리에 모인 이들은 얼른 비어있는 자리를 골라 앉았다.

“이렇게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기지어 답지 않은 허례허식 가득한 목소리는,

적어도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트리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초대된 이유는 아주 오랜 선대 때부터 리케니엔에 쭉 살아온 토박이거나, 비록 이주를 통해 건너왔지만 땅 빗질하는 기술에 능통하기 때문입니다.”

자리에 모인 이들을 추켜세워주듯 말하는 기지어는 슬슬 날카로운 눈빛으로 본론을 꺼내었다.

“다들 아시다시피 베나즈 가문은 지금 마지막 후계이신 디안님에 의해 다시 일어서는 중입니다.”

앞에 느긋했던 말투와는 달리, 급진적이고도 은근한 목소리로 순식간에 분위기를 휘어잡은 기지어는 이제.

고개를 약간 까딱이는 것만으로도 술잔을 기울이려던 자의 행동을 제지할 수 있었다.

“베나즈 가문은 억누르고 있던 이 땅 위에 아주 차근차근하면서도 확실히 일어섰고, 그 결과 리케니엔을 중심으로 빌비온을 묶었지요.”

자리에 모인 자들 가운데 약간 얼치기 끼가 있던 남자도 기지어의 그 말을 알아듣곤 금세 진지함에 물들었다.

“이제 리케니엔은 엄연히 빌비온의 중심인 수도로서 그 역할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그 말인즉 변방인 발리르의 빗장이 되어야 하는 막중한 행정적 책임이 뒤따른다는 말입니다.”

자리에 모인 자들은 이제 눈앞에 음식은 뒤로한 채 모든 시선을 기지어에게 집중했다.

“이러한 책임은 결코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저는 리케니엔을 든든히 받쳐줄 기둥을 건설할 생각입니다.”

그 말에 좌측에 앉아 있던 정정한 노인 하나가 물었다.

“기둥이라는 말은 곧 지주세력을 만들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기지어는 정중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맞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잇듯, 그 대답에 이번엔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있던 중년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왜 이 자리에 마땅히 함께할 법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겁니까?”

이에 기지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즉답했다.

“이 자리는 엄연한 심사를 통해 마련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은 기본적인 자격이 충족되었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그 말에도 쉽게 수긍하지 못한 듯 중년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따지듯 되물었다.

“그 심사라는 것에 형평성이 부족한 건 아닐까 염려되는군요.”

기지어는,

중년 남자의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 행동은 이 자리에서만큼은 명확히 결례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러한 행동에 누가 채 따지려 들기도 전에 기지어는 거침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형평성이라는 게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당당한 그의 말에 중년 남자는 벙벙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빌비온의 수도, 리케니엔의 행정관입니다. 리케니엔의 행정관은 좁게는 리케니엔, 넓게는 빌비온의 안위만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물론 지금은 집행관의 업무도 제가 보고 있습니다만…, 이 자리는 집행관으로서 마련된 것이 아니니까요.”

기지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절름발이임에도 특유의 정력적인 걸음걸이로 상석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거침없는 언변을 쏟아내었다.

물론 그가 아무 이유 없이 일어선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일종의 계산된 행위에 속했다.

자신에게 고정된 그들의 시선을 환기하고, 동시에 일어선 자신을 따라 보는 그들의 시야를 넓힐 수 있도록.

“기준은 이렇습니다, 리케니엔이라는 이곳에 얼마나 진심으로 토착하고 있는가? 베나즈라는 깃발을 얼마나 진심으로 믿고 있는가?”

결정적으로,

절름발이인 자신이 구태여 일어나 열변을 토해냄으로써 그만큼 베나즈라는 깃발에 열정적이라는 걸 호소하기 위함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기준을 예시로 들어볼까요?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은 슬하 자식들이 베나즈의 깃발 휘하에서 군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 말은 여러분들의 가문이 마땅히 의무를 다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기지어는 순간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반문한 중년 남자를 손가락으로 콕 찍었다.

“마땅히 보여야 할 사람이 이 자리에 보이지 않는 것은, 그의 가문이 군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 말에 중년 남자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주는 결코 가벼운 단어가 아닙니다, 아이베리아는 노예가 해방된 땅이지만, 이 순간에도 이 땅 어딘가의 지주는 왕처럼 군림하며 노예를 부리고 있을 테니까요.”

기지어는 그들에게 쐐기를 박듯 단언했다.

“그러니 지주라는 단어엔 형평성이란 게 붙을 수가 없습니다.”

곧이어 기지어는 고개를 까닥이며 멀찌감치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조엘을 불러들였다.

그렇게 달려온 조엘은 품에 안고 있던 거대한 종이를 마련된 식탁 위에 펼쳤고,

펼쳐진 종이 안엔,

축소된 리케니엔의 영지가 아주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었다.

숲이 숨겨놓은 작은 오솔길 하나조차 빼놓지 않고 그려진 그 지도는 군사적인 자료로 치면 최고 기밀에 속하는 것이었지만,

자리에 모인 자들 대부분은 이미 알고 있는 지리라는 듯 지도 앞에서 태연함을 내비쳤다.

물론 그런 그들도 압도적인 완성도를 자랑하는 지도 앞에서 감탄만큼은 숨길 수가 없었나 보다.

“이 지도를 저분이 그린 게 확실하오?”

“두 눈이 멀쩡한 것을 보면 새를 통해 그린 건 아닌 것 같은데!”

“이 사람아, 새를 통해서 그린다 한들 몇 년은 걸릴 거야! 거기다 리케니엔의 인근 숲은 계절에 따라 그 모양이 계속 변한다고.”

그들의 연이은 감탄 앞에서 귀를 붉힌 조엘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기지어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 조엘의 눈빛을 받은 기지어는,

말없이 그의 등을 팡팡 두들겨주었다.

그렇게 기지어가 지도 곁에 모인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리케니엔의 영지를 여러분에게 공평히 양도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소작 단위로 다수에게 땅이 제공되었지만, 이제는 여러분들이 한 구획을 묶는 매듭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아차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은 기지어 그는,

“말미가 서두를 앞섰군요.”

특유의 카리스마를 드러낸 표정으로 앞에 모인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리케니엔의 지주로서, 마땅히 그에 해당하는 책임을 짊어지시겠습니까?”

곧이어 기지어가 눈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올리자,

자리에 모인 대부분은 그런 기지어의 행동에 화답하듯 각 자리에 놓인 술잔을 들어 올렸다.

* * *

해가 정점에서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한 시간.

베나즈 저택, 테라스 난간에 바돈과 기지어가 나란히 기대어 서 있다.

“바돈, 이제부터 매달 지주의회가 열릴 거야. 마땅히 시종장으로서 그 의회의 주제가 되어주게. 그들의 회계에 거짓이 없는지 명명백백히 따져줘야 해.”

“여부가 있겠는가, 그들 과반수가 내 이웃이고 친구였네. 그런데 갑자기 지주라니?”

“깃발의 공표로 기업과 조합이 리케니엔에 물리게 되면, 그때부턴 크고 작은 권력의 흐름이 종잡을 수 없이 흘러 거세지기 마련이지.”

“그래서?”

“물길이 하나라면 거센 흐름 앞에서 금세 범람하기 마련이지만, 물길이 여러 개로 갈라져 있다면 거센 흐름도 곧잘 소화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지주세력을 만들어 리케니엔 내 권력을 세분화시킨 것인가?”

“그렇지, 거기다 지금부턴 포개어진 손 조합에 진 빚을 본격적으로 갚아나가야 할 시기야. 그 일을 수월히 진행하기 위해선 땅을 계획적으로 굴려줄 지주들이 필요해.”

바돈은 눈 앞에 펼쳐진 리케니엔의 풍경을 바라보며 넌지시 말을 이었다.

“그러다 지주 하나가 다른 맘을 품게 된다면.”

그러자 기지어는 바돈의 그 물음에 오히려,

안도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그것마저도 베나즈 가문에겐 기회야, 그들에게 마땅한 본보기를 제시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기는 것이니까.”

이러한 기지어의 말에 바돈은 씁쓸함을 곱씹어야만 했다.

“부서져야만 더 견고해질 수 있다는 건 슬프구나.”

기지어는 바돈이 중얼거린 그 말에 뒤이어 씁쓸함을 따라 씹었다.

“태초부터 완전무결한 견고는 존재하지 않지만, 만약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 자체로 망가진 상태가 아닐까.”

“꽤 그럴싸한 이야기로군.”

“내 스승인 토르킨 선생께서 하신 말씀이거든. 같은 돌이라도 견고를 포기하고 다듬어진 것은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견고를 품고 그 쓰임새를 다 하지만. 이미 견고하기에 포기할 이유를 모르는 돌은 그저 아이의 발길질을 기다려야만 하는 신세를 벗어나질 못하니까.”

바돈은 기지어의 말을 조용히 경청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다만 세상이 요구하는 견고에 디안님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네.”

같이 하늘을 올려다본 기지어는 반대로 자신만만한 얼굴로 우렁차게 소리친다.

“디안 베나즈는 마땅히 세상에 벼려져 그 세상을 벨 것이다!”

“깜짝아!”

소스라치게 놀라는 바돈을 바라보며,

기지어는 쾌활하게 웃어 재꼈다.

그러나 그 둘은 내심,

물가에 내놓은 자식이 있는 양 부정할 수 없는 불안함을 가슴 깊숙이 끌어안고서.

늘 그랬듯 디안이 제자리로 돌아오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 * *

“테리아.”

안장 위에 올라타 손을 내밀면,

테리아는 어제보다 좀 더 익숙한 모습으로 내 손을 붙잡았다.

그녀는 보기와 달리 몸이 매우 가벼워서 한 손으로도 쉽게 들어 올릴 수 있을 정도였다.

어제는 서로의 과거를 조금씩 나눴다.

테리아는 엄격한 아버지에게 온갖 어려운 기술을 배운 이야기를,

나는 억지로 수많은 노래를 암기하며 불러야 했던 이야기를 했었지.

아직은 둘 다 과거로 한 상을 차려 상대에게 대접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그저 조심스럽게,

마치 운 때듯 과자처럼 과거의 한 조각을 떼어 나눠 먹었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분명 어제보다 더욱 가까워져 있었다.

애초에 세상 밖으로 처음 나온 테리아에겐 기댈 사람이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심리가 작용한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동질감 때문일까.

나는 아주 오래전 메말라 있었던, 이성에 대한 마음이 스리슬쩍 고개를 쳐들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고.

그 낯섦에 스스로 부쩍 경계해야만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내면의 변화에.

안도하고 안심했어.

인간인 나로서 살아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아리아가 내게 존재를 부여했다면,

맥레인은 내게 결정을 부여했고.

지금 테리아는 내게 사람임을 상기시켜주었다.

누가 보면 이미 그녀가 내게 거창한 존재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맞는 말이지.

나, 지금까지 아리아와 케니를 제외하면 또래 이성 친구와 어울려 본 적이 없거든.

그마저도 케니는 또래라기보단 누이로서 나를 보살펴 주었잖아.

첫사랑이었던 아리아와 마찬가지로,

나와 묘한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동질감을 품은 그녀는 심지어.

아리아만큼이나 아름답기까지 하다.

“디안, 저기 봐. 리디굴람이야.”

이윽고 내 앞에서 천연한 눈동자로 어딘가를 가리키는 그녀에 의해 퍼뜩 정신을 깬 나는,

저 수평선 너머로 솟아있는 장벽을 뒤늦게 발견하고 거침없이 고삐를 놀렸다.

이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그것은,

마치 말의 편자 모양과 똑같은 성벽이었다.

이곳이 바로 리디굴람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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