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94화 (194/365)

194화. 떨기 꽃 아래 모루 (14)

노인은 당당함을 넘어선 무덤덤한 모습으로 재차 우리에게 말했다.

“그게 분명 어딘가에 있긴 할 텐데, 어디에 있는진 몰라.”

“그럼 저희가 직접 찾아봐도 되겠습니까?”

그런 노인에게 정중히 묻자,

“그건 안 돼.”

그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 저었다.

“이래 보여도 이 물건들은 각 규칙에 따라 정돈된 것이라고, 외지인이 그것을 함부로 헤치게 둘 순 없어.”

꽉 막힌 노인의 주장에 우리는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다만,

“그렇다면 기억을 조금만 더 더듬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재차 그에게 정중하게 물으니 그 역시 다른 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호롱불 하나를 들고 우리에게 따라오라 턱짓한 노인이 산더미처럼 쌓인 물건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기 시작한다.

나와 테리아가 그의 뒤를 급히 따라 물건 사이를 헤집고 들어갔지만.

“디안?!”

“놓쳤어.”

그 짧은 사이 물건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간 노인을 놓쳐버렸다.

미로보다 더한 복잡함은 물론이고, 여기저기 엉켜있는 물건들 대부분이 내 감각을 흐트러트리는 것들이야.

저 반쯤 뒤집혀 방치된 나침반 바늘은 왜 나를 가리키고 있으며,

높은 곳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구슬은 도대체 무엇으로 만들어졌길래 안에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일렁거리고 있는 걸까?

이렇듯 물건들이 내놓는 익숙함 속 미묘한 뒤틀림이 내 감각을 아주 손쉽게 어그러트렸다.

테리아 역시 잡다한 물건들을 유심히 살펴보곤 자신이 느낀 것을 내게 말했다.

“딱 보아도 고물에 불과한 물건들도 많이 보이는 걸 보면…,”

“보면?”

“왜 칠라드의 상인들이 우리를 이곳으로 안내했는지 알 것도 같아.”

테리아는 조심스레 물건들 사이에 뾰족하게 튀어나온 쇠막대 하나를 손으로 잡았다.

“생각해 보면 오르미그의 기름은 방문자의 정체를 밝히는 것 말고도 오만가지 고급 공정에 다 들어갈 정도로 귀중한 소재야.”

“그런 고급 소재를 외지인인 우리에게 팔 리가 없다?”

그녀의 의중을 알아듣고 대답하면,

그녀는 약간의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정확히는 칠라드 소속 상인들이 말이지, 그런 소재가 재고로 들어왔다면 그들은 우리보다 아까 무대에서 보았던 벨로스터 가문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판매하려 하지 않겠어?”

“그래서 우리가 이 만물상에 오게 됐다 그건가.”

이곳은 칠라드 인증이 박혀있지 않은 곳이었으니까.

애초에 화려한 석탑 도시 내에서도 가장 허름한 곳이었잖아.

“봐, 디안.”

쑥.

하고 잡고 있던 쇠막대를 뽑은 테리아는 그것을 내게 보여주며 설명을 이었다.

“이 쇠막대는 말 그대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까 노인의 말에 따르면 이건 이 만물상에서 공식으로 판매하는 물건이겠지.”

“판매한다는 건 즉, 그 물건이 이 가게에서 만들어졌거나.”

“만물상이 다 그렇듯, 싼값에 매입한 물건을 되파는 것이거나.”

말을 마친 테리아는 부쩍 신난 얼굴로 내 얼굴을 꼬집듯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한다.

“왜?”

그 시선에 당황한 내가 묻자,

“너랑 대화하는 게 재밌어서, 상대방의 가려운 의중만을 꼬집는 재주가 있구나?”

그녀는 반질거리는 입술을 움찔거리며 칭찬을 하다가도,

멋쩍은 얼굴로 들고 있던 쇠막대를 제자리에 말없이 꽂아 넣는다.

그리곤 휙 몸을 돌려 애써 물건을 찾는 척하지만,

그녀의 금발 사이로 드러난 귀 끝은 아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내 그녀는,

“흠흠.”

괜히 목을 가다듬고는 각설하고 이 대화의 본질적인 내용을 열거했다.

“아마도 칠라드의 상인들은 이 만물상을 쓰레기장 비슷하게 취급하고 있을 거야. 가당치도 않은 물건을 매입해달라 오는 진상 모두를 다 이 만물상으로 보내 처리했겠지.”

“그래서 오르미그의 기름을 구하려는 우리 역시도 이 만물상으로 보내진 것이고?”

“응.”

그런데 이러면 의문 하나가 생긴다.

“하면 어째서 이 만물상은 계속해서 다른 상인들이 보내는 손님들을 감당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 말에 테리아가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있을 때쯤.

불쑥,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인 우리 뒤에서 노인이 나타났다.

그런데 노인은,

호기심 가득한 두 눈으로 우리를 찬찬히 살피더니만 이어 온화한 얼굴로 물었다.

“무엇을 찾는가?”

그런 노인의 말에 나와 테리아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아무런 말이 필요 없는 수긍을 나누었다.

* * *

“오르미그의 기름이 있느냐고?”

노인은 우리의 물음을 재차 곱씹다가 확신에 찬 얼굴로 대답했다.

“아 그럼 있지, 분명 있고말고.”

그러나,

“그런데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어.”

끝내 머릿속 사고의 벽에 가로막혀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테리아는 다시 한번,

“저희가 직접 찾아봐도 되겠습니까?”

조심스레 물어보면 역시나 노인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단호함을 내비친다.

“그건 안 돼, 엄연히 정돈된 물건을 그대들 마음대로 휘젓게 할 순 없어.”

그럼 대화는 다시 도돌이표를 맞이하여,

“그럼 기억을 조금만 되살려서 기름이 있는 곳까지 안내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내가 했던 것처럼 테리아가 앞 전과 똑같은 질문을 했고, 이에 노인은 흔쾌히 따라오라며 걸음을 나섰다.

그리고 그런 그를,

“영감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나는 불러 세웠다.

방향을 달리할 필요가 있어.

설령 그를 바짝 쫓는다고 해도 그 기억의 더듬이 언제 끝날지도 모를 일이고,

설령 기다린다고 해도 찾아질까 확신할 수도 없는 상황이니까.

내가 배운 노래 가운데도 이런 가사가 있잖나,

‘세월은 모래, 쌓이면 쌓일수록 황량한 사막이 되지.’

‘그러나 쌓인 세월 가운데서도 당신은 영원한 나의 오아시스’

나도 모르게 리듬을 담아 속으로 불러버렸다. 어쨌든 요지는 그가 앓고 있는 증상을 생각했을 때 지금 방법은 옳지 않다는 말이다.

정말 애석하게도, 그가 앓는 증상은 황량한 사막 가운데서도 보이는 오아시스 대부분이 신기루로 변해버리는 것이니까.

토르킨 선생께서도 자신의 소원은 그러한 증상 없이 곱게 늙어 죽는 것이라고 하셨어.

“왜 나를 불렀어?”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노인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내게 묻는다.

동시에 테리아 역시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우선 가장 기본적인 것 먼저 시작하자, 비유하자면 사막의 제대로 된 입구부터 알아보는 것이지.

“그 전에 영감님께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그래? 그게 뭔데?”

“이 만물상 가게는 제 기억에 아주 오랫동안 선명히 남을 것 같아서요, 해서 이와 관련해 영감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허허, 그런가?”

“하여 감히 여쭙는데, 영감님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비교적 가장 선명한 오아시스를,

그 황량한 사막 가운데서 찾아주시기를.

내 물음에 주름진 미간을 찌푸리며 최대한 고심을 거듭하던 노인은,

고개를 기울여도 보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재고해 보기도 하면서 끝내.

세월의 굴곡진 얼굴로 천진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내 이름은~”

나와 테리아는 그런 노인의 입에 시선을 집중한 채 저도 모르게 입 모양을 따라한다.

“내 이름은 반이야.”

“반…?”

“응, 내 이름은 반이야.”

아무래도 방향을 제대로 잘 잡은 것 같은데.

테리아는 반짝이는 눈으로 내 눈치를 살핀다.

곧이어 나는 노인에게 물었다.

“하지만 영감님, 이 가게 이름은 빈의 만물상인걸요?”

그러자 노인은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느냐는 듯 내게 되려 따지듯 물었다.

“아 그럼, 여기는 빈의 만물상이지!”

“그럼 영감님은 이곳 주인이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아 나도 주인 맞지!”

“그럼 빈은 누구입니까?”

“내 형이야, 나는 반이고 형 이름이 빈이야.”

노인은 되짚기에 지쳤는지 어느 알 수 없는 골동품 하나를 의자 삼아 주저앉았다.

그런 그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좀 더 캐묻기로 했다.

“그럼 형님분께선 어디에 계십니까?”

“나 피곤해.”

“영감님, 저희가 꼭 알아야 해서요.”

“뭘 알아야 해?”

“형님이 어디에 계신지요.”

“아!”

노인은 활짝 웃으며,

“자네들 기름을 찾는다고 했어, 그렇지?”

나와 테리아를 번갈아 보며 애써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직접 찾아보면 금세 찾을 수 있을 거야.”

“영감님…,”

이윽고 그가 막무가내로 움직이려는 찰나,

테리아는 그 앞을 가로막고 아주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영감님, 잊으셨어요? 저희는 형님분인 빈을 찾으러 왔잖아요.”

그 말에 노인은 입을 쩍 벌리다가도,

“아차차, 그랬지.”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 벗겨진 자신의 머릴 매만졌다.

“그래서, 형님이 어딨느냐고?”

“네.”

테리아의 말에 노인은 다시 오랜 생각에 잠겨있다가 곧 우리에게 따라오라는 듯 턱짓을 하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난잡하게 어질러진 물건들 사이로 드러난 넓은 공간.

그곳은 위치상으로 대강 짐작해 봤을 때 계산대가 있던 곳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니나 다를까, 드러난 공간 한가운데엔 유독 말끔하게 치워진 매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노인은 그곳에 도달하기 무섭게 매대 앞으로 가 걸음을 멈추고는, 이윽고 우리 둘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은 이곳에 있어.”

그의 말을 따라 테리아와 함께 매대로 가보면.

매대 위에는,

펼쳐진 책 한 권만이 있을 뿐이다.

“영감님, 형님이 계신 곳이 정확히 어디라고요?”

내 물음에 노인은 이번엔 별다른 고민도 없이 곧바로 손가락으로 펼쳐진 책을 가리켰다.

“형은 지금 저 안에 있어.”

여러 장고 끝에 결론을 말하던 앞 전과 달리, 저 책에 관련해선 확신에 찬 모습으로 대답하고 있다.

그렇다는 건,

정말 그는 진심을 말하고 있다 볼 수밖에 없어.

그 대단한 기술자인 테리아조차 노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한 표정으로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와중에,

노인은 우리에게 자신의 사막 속 가장 선명한,

아니 어쩌면 선명해야만 할지도 모르는 오아시스를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타히그의 소설 ‘블레막’의 원서야. 이것과 똑같은 원서가 세상에 여섯 권 더 있어.”

그는 이윽고 펼쳐진 책을 몇 장 넘기더니 손가락으로 어느 대목을 짚었다.

그 짚어진 대목에 나와 테리아가 동시에 고개를 내밀어 보면,

정말 믿을 수 없게도 그 손가락이 가리킨 곳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햇살로 담근 술이 유명한 알레카엔 외지인인 빈도 있었다.]

“이게 대체…?”

내 의문에 노인은 씁쓸하면서도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설명을 이어갔다.

그 모습은 마치 손주에게 옛이야기를 해주는 할아버지와 같았다.

“타히그는 용의 시대 때부터 유명한 마법사였지만, 용의 시대 이후엔 현자의 뜻에 감화되어 마이스터가 되기로 결심 한 자야.”

노인은 이내 책 표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며 저자에 적혀 있는 타히그라는 이름을 가리켰다.

“그는 자신이 만든 세상으로 소설을 만들었는데, 이게 너무 재밌어. 그래서 탑 밖 세상에 펴져 많은 두 발 걷는 자가 읽었지.”

이어 책등을 우리에게 보여준 노인은 손가락으로 책등 위 끝을 강조했다.

“대부분은 난쟁이들에 의해 복사되었지만, 이것은 타히그 그가 직접 손으로 집필한 일곱 원서 가운데 하나야.”

그러면서 환희에 찬 얼굴로 우리에게 말한다.

“그리고 일곱 원서는 타히그의 세상을 직접 접할 수 있어.”

“그 말은…, 형님께선 지금 이 책 세상으로 들어가신 상태란 말입니까?”

“그래.”

내가 책을 가지고 작은 세상이라고 비유하긴 했지만,

그게 진짜일 줄은 몰랐는데.

아니, 애초에 용의 시대 이후인 지금 세상에서 이런 당황은 의미 없는 것이겠지.

현실의 울타리가 모호해진 세상이니까.

생각해 보면 애초에 나는 보석으로 만들어지고 있었잖아.

차분히 노인의 말에 수긍한 나는,

테리아와 암묵적인 동의를 나눈 뒤 그에게 물었다.

“저희도 들어갈 수 있습니까, 이 책 세상 속으로.”

그러자 노인은,

반색하면서도 살짝 충혈된 눈으로.

“그럼…, 가서 형님께 전해주게. 나 여기에 아직 잘 있다고.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세월의 모래로도 덮지 못한,

아주 거대한 오아시스를 내비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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