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195화 (195/365)

195화. 떨기 꽃 아래 모루 (15)

일단은 말이야,

소설 블레막의 세상에 들어가기 위해선 먼저 그 내용 가운데 입구에 걸맞은 문장을 찾아야 해.

입구에 걸맞은 문장이란,

첫째.

유별나지만 현실에도 있을 법한 물건이 묘사되어 있어야 하고.

동시에 둘째.

특정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그 과정이 서술되는 중이어야 해.

사실 형님의 가게가 유독 특별한 만물상이 된 이유는 바로 저 ‘유별나지만 현실에도 있을 법한 물건’을 모으기 위해서였지.

발품을 팔며 구하기엔 형제 모두가 늙었으니, 그들이 알아서 오게끔 형님이 이 구역의 거름망 역할을 한 거야.

간만에 옛이야기를 떠들어대니까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 들어.

하지만 언제 내가 또 자네들에게 망각을 부릴지 모르니 이참에 할 말들을 다 쏟아낼까 해.

사실은 말이야,

난 단지 가게를 지키는 것에 불과해.

그대들이 찾는 물건은 분명 형님이라면 이 가게 어디엔가에 아주 소중히 보관하고 있을 테지만,

그것의 위치는 설령 내가 젊었을 적의 쌩쌩한 정신머리로 돌아온다 한들 알 수가 없어.

한마디로 이 늙은이가 젊은이들에게 객기를 부렸다 이 말이야.

이건 참으로 미안하네.

반대로 그런 객기를 부린 대상에게 대뜸 형님을 비롯해 이런 꺼내면 안 될 것 같은 얘기를 하느냐 궁금하겠지.

이 늙은이가 그래도 그 오랜 세월 동안 보는 눈 하나는 건졌어.

형님 어깨너머에서 수많은 골동을 보다 보니까,

아 이제 두 발 걷는 자들도 좀 보여.

그런데 이 눈으로 자네 둘을 보면, 이게 또 범상치 않은 걸 내가 바로 느꼈단 말이지.

이곳에 쌓인 골동품 어딘가에 꼭꼭 숨어있을 진귀한 물건들처럼 말이야.

* * *

노인은 낡은 입에서 젊음으로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유수를 쏟아내었다.

그것을 듣고 있노라면 괜히 마음이 뜨듯한 무언가에 뭉개져 버리는 느낌이 든다.

이어서 노인은 타히그의 소설 ‘블레막’에 관한 이야기를 더 해주었다.

원서 하나로 소설 속 세상에 넘어갈 수 있는 인원은 총 다섯 명.

그 말은 타히그가 손으로 직접 쓴 블레막의 원서가 총 일곱 권이니 그쪽 세상으로 넘어갈 수 있는 최대 정원은 서른다섯 명이라는 소리다.

아마도,

다른 원서를 소유한 자들 역시 그 세상에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겠지.

이어서 노인은 책 세상에서 현실로 나오는 방법을 설명했는데,

그 방법이 생각보다 굉장히 간단한 것이었다.

바로 소설 속 세상에 들어가기 위해 썼던 그 물건의 소유권을 포기하는 것.

단지 그것만으로 자연히 소설 속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그런 간단한 방법임에도 소설 속으로 들어간 노인, 빈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 혹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는 뜻이겠지.

아니,

반은 분명 자신의 형님에게 안부를 전해달라 했었어.

그 말은 소설에 들어간 빈의 안위가 안전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것마저도 뜻하지 않은 망각으로 인해 내뱉어진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르미그의 기름을 구하기 위해선 소설 속 세상에 들어간 빈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다.

칠라드의 상인들은 우리에게 결코 기름을 팔지 않으려 들 것이고, 그렇다고 리디굴람이 아닌 다른 곳에서 기름을 구하려면 정말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할 테니까.

그렇다고 강제성을 띤 방법으로 기름을 구한다면…,

아니.

적어도 기사왕의 검을 복원하는 그 과정에서.

불경한 일은 없었으면 한다.

그로 인해 고결함을 잃는다면 동시에 가장 큰 명분을 잃어버리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까.

아이베리아의 깃발이라면, 깃발로서 살아가기로 맹세했다면 마땅히 고집해야 할 부분이리라.

고심 끝에 작심한 내가 테리아를 바라보자,

그녀 역시 결심을 굳혔는지 내 눈을 마주쳐오며 확신을 내비쳤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노인, 반은.

먼지 쌓인 블레막의 복사본 두 권을 건넸다.

* * *

소설 블레막은,

그 세상의 가장 정확한 나침반이다.

반은 그 말과 함께 책을 건넨 뒤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제부터는 나와 테리아,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부디 장고로 번지지 않길 빌며 치열하게 생각을 나눠야만 했다.

우선 반이 우리에게 건넨 복사본을 펼쳐보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목차.

[1. 열린 세상]

[2. 알레의 두 아이]

[3. 갈등]

[4. 불을 머금은 산]

[5. 낙하]

그러나 이것에 집중하고 있던 나와는 달리 테리아는 대번에 책 중간을 펼치고는 곧바로 두 눈을 반짝였다.

“디안.”

“왜?”

“봐, 복사본에는 없어.”

“무엇이?”

테리아는 곧장 매대 위에 놓인 원서를 들고 와 복사본과 나란히 세워 보였다.

그렇게 나란히 나열된 두 소설의 같은 페이지를 번갈아 살펴보던 나는,

“아.”

그녀의 말대로 원서엔 있지만, 복사본에는 있지 않은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햇살로 담근 술이 유명한 알레카엔 외지인인 빈도 있었다.]

이런 내 깨달음에 덩달아 신이 났는지, 테리아는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복사본과는 달리 원서에는 이 세상으로 건너간 자들의 서술이 적혀 있어.”

“그럼 혹시 다른 원서를 통해 건너간 자도?”

내 의견에 우린 약속이라도 한 듯 원서 속 비슷한 내용을 가진 문구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디안, 아무래도 해당 원서를 통해 건너간 자들만 기록되는 모양이야.”

금세 결론에 도달해버렸다.

이윽고 테리아는 자신의 의견을 담담히 내비쳤다.

“우린 특정한 사람을 찾기 위해 이 소설로 들어가는 것이니까 그 목표가 있는 항목만을 중점적으로 찾아보는 게 좋겠어.”

그러면서 복사본에서 목차를 펼친 그녀는 희고 얇은 손가락 끝으로 한 항목을 가리켰다.

“바로 이 항목에서 빈이 서술되었어.”

그녀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긴 곳은,

[3. 갈등]

그렇다면…,

“이 항목 안에서 소설 속으로 건너갈 서술을 찾아야 한다는 거네.”

내 의견에 테리아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휘휘 끄덕였다.

“솔직히 말이야.”

이윽고 그녀는 벅차오르는 목소리로.

“조금은 설레, 아니 무진장.”

자신이 느낀 소감을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

“세상 구경한 지 이틀 차에, 남들은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세상으로 들어간다는 거 말이야.”

그것은 솔직하면서도 나이에 걸맞지 않은 앳됨이 묻어 있어서, 되려 내가 보기엔 처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늦어도 너무 늦었잖아.

마땅히 한참 전부터 부렸어야 할 감정인데.

생각해 보면 그녀에게서 느끼던 동질감이 바로 이런 부분이 아닐까 싶다.

나도 제 나이에 걸맞지 않은 감정을 뒤늦게 부렸었거든.

시몬 바스티유…,

아니 그냥 ‘가족들’을 통해서.

자, 소회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 소설 속 세상으로 건너갈 후보 문구들을 엄선해보자.

테리아는 원서를, 나는 복사본을 들고서 해당 항목을 차근차근 정독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따로 추려낸 문구는 이러했다.

[알레카에 인접한 구릉 너머로 작은 태엽 반지를 낀 외부인이 나타났다. 그날은 유독 햇살이 강했다.]

[술병 딸린 모자를 쓴 주정뱅이는 알레카의 주민들도 모르게 어느샌가 그곳에 정착해 있었다. 그가 깨어났을 땐 어두운 골목길에 기댄 채였다.]

[베일처럼 드리워진 검은색 두 발 걷는 자는 한밤중에 서쪽으로부터 나타나 일레카에 도착했다. 그는 혼자였다.]

곧이어 테리아가 의견을 내놓았다.

“우리 자체만으로 당장 실현 가능한 것은 ‘베일처럼’으로 시작하는 문장이야.”

그러면서 그녀는 내 어깨를 뒤덮고 있는 어스름을 가리켰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가락으로 해당 문장의 끝을 가리켰다.

“하지만 이 문장은 구태여 혼자임을 강조하고 있어, 이건 말 그대로 개인을 위한 문장이야.”

“둘 중 하나가 먼저 세상에 들어가 있으면 좀 더 일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단지 그것만으로 위험을 감수하고 싶진 않네.”

“그 말은 날 그만큼 지켜주고 싶다는 거야?”

잔망스럽게 날 바라보며 장난을 거는 테리아에게.

도리어 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러자 그녀는,

“어… 어?”

오히려 더욱 당황하여 서둘러 내 눈길을 피한다.

이럴 거면 왜 잔망스레 장난을 친 건지.

그녀의 무안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나는 흘리듯 말을 이었다.

“적어도 스케비와의 약속을 저버리면 안 되잖아.”

“그… 렇지! 그래…,”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숨어지내야 하는 그런 모종의 이유를 가진 널 홀로 노출 시키는 건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야.”

“알… 겠어.”

금발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두 귀가 붉게 익었다.

멋쩍은 듯 툭 튀어나온 입술은 반짝거린다.

그러다가도 슬쩍 내 눈치를 살피는데,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나와 딱 마주치자.

그녀는 괜히,

“왜… 왜!”

성질을 부린다.

나보다 감정이 서툰 사람은 처음 본다.

* * *

테리아와 합의한 끝에 우리는 소설 속 세상으로 건너갈 문장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렇게 고른 문장은,

[알레카에 인접한 구릉 너머로 작은 태엽 반지를 낀 외부인이 나타났다. 그날은 유독 햇살이 강했다.]

바로 이것.

비교적 다른 문장과는 달리 조건이 까다롭지 않았고 무엇보다 밝은 대낮에 이동하는 것이었기에 안전하기로는 제일 좋아 보이는 게 그 이유였다.

반은 이런 우리를 멀찌감치에서 지켜보고 있었을까.

마침 문장을 골라낸 그때에 딱 맞춰 나타나 우리에게 온화한 미소로 말을 걸어왔다.

“무엇을 찾는가?”

그 말에 나와 테리아는 씁쓸함을 나눠야했지만.

“농일세.”

허허 웃으며 장난임을 고백하는 그를 향해 금방 미소지어야만 했다.

“형님은 소설 속 세상으로 건너가기 위해 여러 준비를 섭렵하셨지.”

호롱불 하나를 들고 골동품 하나를 골라 그 위에 걸터앉은 노인은,

이제 우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래, 어떤 문장을 골랐는가?”

해서 테리아가 대답하면 그는 다시 헐거운 무릎을 손으로 짚은 채 일어나 비교적 깔끔한 매대 뒤편에서 작은 함을 꺼내왔다.

그것은 투박하지만 크기가 작아 아기자기함이 느껴지는 철제 함이었는데,

노인은 그것을 열며 안에 있는 내용물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몇 년 전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난쟁이 부부 하나가 찾아와 이것을 우리에게 팔았지.”

철제 함에 든 것은 한 쌍의 반지.

아니 반지‘처럼’보이게끔 만든 투박한 무언가였다.

“인연이라는 결실에 유독 특별한 것이 필요했는지, 글쎄 태엽 장치 부품을 떼어 반지 비슷한 것으로 깎아 만들었다는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푸념을 이었다.

“형님은 기회다! 하면서 대단한 값을 주고 이것을 샀네, 알고 봤더니 소설 속 세상에 들어가기에 적격인 물건이어서 그랬던 거지.”

그런데 어째서,

“형님께선 왜 이 물건을 쓰시지 않은 겁니까?”

내 물음에 그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중얼거리듯 답했다.

“그야…, 차마 그것을 사용하기가 꺼려졌기 때문이지…, 날이 늦었으니 필요하다면 이곳에서 쉬고 가시게. 내일 날이 밝기 무섭게 소설 속 세상으로 가야 할 테니.”

* * *

해가 밤을 지운다.

그에 맞춰 눈꺼풀에 내려앉은 잠을 지운 나와 테리아는 밖을 나서 벤투스 위에 올라타 리디굴람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향한 곳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구릉지.

그 앞에서 우린 헐겁기 짝이 없는 반지를 나눠 끼고서.

막 유랑하는 구름 사이를 관통해 내려오는 햇빛을 가로질렀다.

이윽고 구릉 하나를 건너면.

밝은 햇살에 가려져 있던 너머엔…,

마땅히 보여야 할 리디굴람은 온데간데없고.

난생처음 보는 마을 하나가 저 멀리 보인다.

그 순간 우리는 소설 속 세상에 들어갔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 * *

반은 슬슬 자신의 머리에 망각이라는 먹구름이 드리울 것을 직감했다.

그 전에,

그들이 형님에게 무사히 도달했는지 확인해야만 했던 그는,

급히 원서를 뒤적이다가.

되려 새롭게 추가된 내용을 확인하고는 너무 놀라 혼잣말을 중얼거려야만 했다.

“보는 눈이 있는 줄은 알았는데.., 이건 골동 사이에 명품이 아니라 명품 가운데 명품이었구먼…,”

[유독 강한 햇살 아래, 구릉 너머로 작은 태엽 반지를 낀 디안 베나즈와 테리아 루스가 막 알레카에 접어들었다.]

[그들 중 하나는 블레막의 세상 내 ‘최강’이라 불리는 검사였으며, 다른 하나는 금기로 점철된 차원을 야금하는 대장장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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