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떨기 꽃 아래 모루 (16)
둥근 유리 지붕과 양 떼.
알레카라는 곳은 딱 그것만으로 설명이 가능한 곳이었다.
마을엔 다양한 두 발 걷는 자들이 살고 있었는데, 종간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 별다른 충돌 없이 온화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동시에 외지인인 나와 테리아가 마을에 들어서는 것을 보면서도 저지는커녕 경계조차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
그들은 오래전부터 ‘우리 같은’ 외지인들에게 이미 익숙해 보였다.
그러한 마을의 반응을 확인하기 전까지 간간이 숨까지 참아가며 긴장했던 테리아는,
위 모습을 모두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안심했는지 슬슬 말문을 트기 시작했다.
“이곳은 종간의 다름 가운데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건가?”
“그래 보이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우리 정말 다른 세상으로 온 거지?”
“엄밀히 말하면.”
“디안, 궁금하지 않아? 우리야 책에 적힌 내용을 따라 이 세상으로 넘어왔다지만, 누군가는 그저 기행을 일삼았을 뿐인데 우연의 일치로 이곳에 왔을 수도 있잖아?”
그거 제법 그럴싸한 이야긴데?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원인 모를 실종이 왜 그리 많았던 것인지 조금은 이해가 돼.”
“왜?”
테리아는 살짝 고개를 까딱거리며 대답했다.
“사업을 하다 보면 누군가를 찾아달라며 기도하는 이들을 제일 많이 보게 되거든. 알지? 나와 스케비가 벌이는 사업의 특성상…,”
“그래,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네.”
밤중에 고인 그림자가 언제 괴물로 드리워질지 모르는 세상이니까.
“물론 그렇게 실종된 자들 대부분은 괴물에 의해 희생당했겠지만, 차라리 그렇게 말할 바에야 별세계로 전이되어 버렸다 설명하는 게 더 나을 때도 있어. 그런데 이렇게 직접 다른 세상을 접해보니까, 정말 실종된 이들 가운덴 분명 우리와 같이 다른 세상으로 넘어간 자들도 있지 않을까 싶어.”
“그럴지도 모르겠네.”
테리아,
그녀는 아까부터 짧은 대답만을 반복하는 내가 원망스러웠는지 고개를 불쑥 들어 아래에서 나를 째려보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이성으로서는 한없이 매력적이어서 덜컥 심장이 내려앉을 정도였지만.
반대로 그녀는 예민한 감각을 내세운 내 얼굴을 살펴보곤 군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어 아까와는 달리 살짝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한다.
“미안, 내가 너무 들떴었어.”
그러나 그녀의 그런 행동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평생 접고 다녔던 날개를 지금 막 나부끼며 몸 떠오르는 걸 느끼고 있는 와중이었을 테니까.
그런 새로운 경험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천진은 인고의 세월 따위론 막을 순 없지.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던 엔제이 아저씨처럼 말이야…,
그건 그렇고 내 얼굴에 묻어 있는 예민함을 단박에 간파해낸 것을 보면,
그녀의 안목은 그저 기술적으로만 국한된 것이 아닌 것 같네.
어쨌든,
알레카에 접어든 직후부터 계속해서 감각을 곧추세우고 다녀본 결과.
이곳엔 없는 것 같다.
우리를 향한 일말의 적개심조차도.
그것을 확인한 나는 그제야 곤두세웠던 감각을 거두고 좀 더 누그러진 말투로 그녀에게 때늦은 답을 내놓았다.
“정말 실종된 자들 가운데 이 같은 별세계로 넘어간 자들이 있다면 그들이 무사히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길 바라야겠네.”
이런 내 말에,
그녀는 살며시 내 가슴팍에 등을 대어 무게를 싣고는 마찬가지로 누그러진 목소리로 답했다.
“응, 그러길 바라.”
사업이니 뭐니 해도,
그녀도 결국 절박을 내비치는 자들에게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걸까.
* * *
잠시 숨을 돌릴 겸 마을 변두리로 빠져나오기 무섭게,
테리아는 익숙한 모습으로 먼저 나서 작은 모닥불을 지폈다.
그렇게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우리는 앞으로의 일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의 기틀은 테리아가 먼저 제시했다.
“반의 말대로 소설 블레막의 세상에 들어왔으니 이 세상의 가장 정확한 나침반인 소설을 읽어봐야겠지.”
그녀는 반이 건네준 소설을 꺼내 들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나는 평생 읽을거리를 통해 세상 구경을 해왔으니 블레막의 정독은 내게 맡겨줘.”
나는 그런 그녀에게 벨트에 딸린 작은 가방에서 수첩 하나를 꺼내 건넸다.
이어서 그 수첩에 대해 채 설명도 하기 전에,
테리아는 얼룩진 금빛 홍채를 번뜩이며 반응했다.
“이거…, 위위키 맞지?”
“이게 뭔지 알고 있어?”
당황한 내 물음에 그녀는 순간 금발을 휘날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위위키, 어디서 구한 거야?!”
“론다이트의 탑에서 구했어.”
“세상에, 그럼 탑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는 소리네!”
놀람에 놀람을 더하면 딱 저런 표정이지 않을까.
겨울잠 열 번 치를 해낼 거대한 당근을 발견한 토끼가 이런 표정이지 싶은데.
그러나 그녀는 대뜸 경직된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다.
“그러면, 0을 갖고 탑을 등반했단 말이야?”
“그렇지.”
“세상에 그래놓고 잘도 탑 밖으로 빠져나왔구나?”
“론다이트의 마법사와 어떻게 이야기가 잘 됐어.”
테리아가 유성을 쏟아내듯 내 앞으로 고개를 불쑥 내민다.
“설마 마법사를 죽인 거야?”
“… 아니, 그는 되려 자신의 탑에 0이 있는 걸 부담스러워했어.”
“현명한 선택을 했네, 무턱대고 0을 집어 먹다간 자신의 입이 찢어진단 걸 알고 있던 거지.”
별다른 추가 설명 없이도,
그녀는 내 말을 듣고 스스로 곱씹으며 이해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다시 관심사는 위위키 쪽으로.
“그런데, 위위키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지금까지 말을 안 했어?!”
사실, 방금 막 위위키의 존재가 생각났거든.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으니까.”
대충 얼버무리듯 변명하면,
그녀는 또 뭔가를 수긍했는지 혼자 진지하고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녀는 대번에 적극적인 모습으로 변해 내 옆으로 불쑥 다가왔다.
“소설 블레막이 이 세상의 나침반이라면, 위위키는 이 세상의 자석을 먹인 나침반이란 말씀이지!”
탐구욕이 대단하네.
그녀는 위위키를 든 내 손을 서슴없이 붙잡아 자신이 들고 있던 소설의 책등을 가져다 대었다.
곧,
위위키의 책등에 새로이 새겨지기 시작하는 글귀.
[위위키/블레막]
이윽고 그녀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내 손에 들린 위위키를 바라보다가,
찌릿.
얼른 펼쳐보라는 듯 나를 흘겨보았다.
그렇게 위위키를 펼쳐보면,
그 작은 수첩에 적힌 내용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녀는 개의치 않고 내 옆에 더욱 가까이 붙어왔다.
위위키,
고맙다.
열 이상의 꽃을 스친 가을바람이 이런 향기를 갖고 있지 않을까.
내 옆에 찰싹 붙은 그녀의 목덜미에선 그런 향기가 물씬 풍겨왔다.
이에 덩달아 심장이 벌컥거리지만,
애써 이 심장 소리를 감추기 위해 애써본다.
그렇게 겨우 펼쳐진 위위키에 집중해보면, 거기엔 질서정연하게 정돈된 목차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1. 마이스터 타히그의 세 번째 작품 ‘블레막’
2. 줄거리
3. 설정
4. 일곱 권의 원서
4-1. 엔첼리다르 경매
4-2. 바생크 가문
5. 여담
그리고 그러한 목차를 조용히 읽어나간 나와 테리아는 이제 약속이라도 한 듯 다음 페이지를 향했다.
1. 블레막은 변절 마법사(1) 타히그의 세 번째 소설로 내용상 그의 탑 3층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주제로 하고 있다.
(1) 스스로 마법사이길 부정한 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타히그는 현자의 법칙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온건파이며 스스롤 마이스터라 자칭했다.
2. 대략적인 줄거리는 블레막의 주인공인 ‘알레의 두 아이’가 모험을 떠나며 마주한 역경을 이겨내는 것이다.
3. 설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위대한 숫자 – 상대의 강함을 숫자로 나타낸 것이며 그렇게 결정된 숫자는 해당 세계관 내에선 결코 번복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개념으로 작용한다. 10부터 0까지(2) 있으며 숫자가 낮을수록 강하다는 의미다.
약속된 역경 – 알레의 두 아이를 비롯해 세상을 모험하길 마음먹은 자들이라면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말한다. 이 역경은 적용 대상을 좌절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극복한다면 아주 명확한 성장의 단서(3)를 제공한다.
(2) 여기서도 그가 온건파임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대놓고 현자의 법칙 중 하나인 인챈트의 개념을 소설 속 세계관에 버무렸으니…,
(3) 이를테면 가장 간단하게 마법 걸린 물건이 보상으로 주어진다던가. (타히그 식 개연성 꼼수…,)
4. 블레막은 다른 타히그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원서’가 존재한다.
원서는 타히그가 직접 손으로 쓴 것만을 지칭하며 그의 세 번째 작품인 블레막은 총 일곱 권의 원서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미 그의 원서는 수집가들 사이에서 아주 유명한 물건인데 그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원서 자체가 타히그의 탑으로 들어가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특히 블레막은 타히그의 원서 가운데서도 가장 인기가 많은데 내용상 환상적인 물건들이 많이 묘사되었다는 게 그 이유다.
그 말인즉슨 블레막의 세계관 내에서 노력만 한다면 묘사된 물건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4)(5)
(4) 원서를 통해 이동한 소설 속 세상은 엄연히 타히그의 탑 내 세계이지만 빙의를 비롯한 짓궂은 마법사의 변덕을 걱정하지 않고 마법 걸린 물건을 구하는 데에 집중할 수 있다.
(5) 앞서 말했듯 타히그는 온건파다. 마법사의 증표와도 같은 탑을 노출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 정도로 자신이 마법사임을 부정하는 걸 보면 일반적인 마법사들처럼 탑 내 등반자들에게 변덕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원서를 자신의 탑에 연결 지은 걸 보면 말 그대로 작가적 욕망이 더 크다고밖에…,
4-1 엔첼리다르 경매를 통해 블레막의 원서 한 권이 낙찰되었다.
낙찰가는 금화 25만 7천 개(6) 상당으로 비교적 낮은 가격인데 낙찰자를 비롯해 해당 물건을 경매로 내놓은 이 역시 비공개되어 내부적으로 정치적 문제가 얽혀있지 않았을까 하는 풍문만이 돌고 있다.
(6) 최근에 낙찰된 타히그의 원서가 통용 금화로 48만 개였다.
4-2 아이베리아 동쪽, 벤트 만의 유력 가문인 바생크 가문이 블레막의 원서를 구매했다.
이례적으로 바생크 가문은 소식지를 발간하는 기업과 조합의 힘을 빌려 같은 원서를 소유한 자들에게 경고문을 날렸는데 그 내용이 이렇다.
바생크 가문은 블레막의 5막인 ‘낙하’에 원하는 물건이 있으므로 원서 소지자들은 알아서 5막을 피해가길 바란다라고(….)
5. 상대적 초기작 원서들은 대부분이 소실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아마도 현자의 법칙에 반발하는 대부분의 강경파 마법사들이 빙의자를 통해 소실을 유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온건파인 타히그의 행보에 유력한 가문이나 재력가들은 더욱이 수집욕을 불태웠으며 그러한 수집욕이 오히려 그의 작품을 보호해주는 방패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대강,
블레막이라는 세상이 어떤 생리로 돌아가는 것인지는 알아낸 것 같다.
그럼에도 막연한 부분이 남아 있어,
틀림없이 해당 소설을 정독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겠군.
테리아 역시 얼추 이해를 맞닥트렸는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러다가,
순간 내 어깨에 자신의 상체 전반을 기대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그녀는 퍼뜩 내게서 멀리 떨어졌다.
이내 애써 태연한 모습으로,
“흥미로운 내용이었어.”
내게 말하지만.
두근두근.
말 사이사이 들려오는 그녀의 버거운 심장 소리에 나는 피어올라오는 웃음을 속으로 곱씹어야만 했다.
직후 그녀도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지,
“아무래도 블레막을 천천히 정독해봐야 할 것 같아, 그러니 디안 너는 날 믿고 이 세상 속 이야기를 진행하도록 해. 가능한 막힘없는 조언을 해줄 테니.”
제법 결연한 눈동자로 말했다.
이에 나는 안장 위에 올라타 그녀에게 손을 뻗으며 대답했다.
“그럼 가보자, 블레막의 3막 ‘갈등’ 속으로.”
이제 그녀는 거리낌 없이 내 손을 붙잡고 안장 위로 안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