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떨기 꽃 아래 모루 (17)
알레카를 돌아다니면서 알게 된 것이 몇 있다.
이 마을은 햇살 그 자체를 특산품으로 파는 곳이라는 것과,
그런 특산품과는 어울리지 않게 마을 군데군데 홍등가가 있었다는 것.
이러한 대목은 내 앞에 앉아 조용히 책을 정독하고 있던 테리아가 다시 한번 되짚어주었다.
“책에는 이렇게 쓰여 있어, 알레카는 빌레뇽과 상페즈 사이에 있는 경유지이며 햇살이 특산품인 곳이다. 다만 햇살을 특산품으로 삼으면서 그곳의 그림자도 더욱 짙어졌을까, 밤이 되면 알레카는 일대에 가장 유명한 홍등가로 변모했다.”
위위키로는 확인할 수 없던,
그 세세한 내용의 열거를 들으니 당장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더욱 와닿는다.
그러고 보니 알레카의 건물 지붕 대부분이 유리였었지.
아마도 저것을 통해 햇살을 특산품으로 가공하는 것은 아닐까.
직후 테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원서와는 달리 복사본인 이 책에선 이방인에 대한 묘사가 적혀 있지 않아, 마찬가지로 원서에 적혀 있었던 이 세상으로 향하는 단서까지도. 그 말은 이곳에서 우리가 직접 빈을 찾아야 한다는 거야.”
“다행인 점은 마을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것뿐이네.”
“이제 막 3막을 읽기 시작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유의미한 단서가 분명 나올 테니까.”
“벌써 2막까지 다 읽은 거야?”
내 물음에 테리아는 살짝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곤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내용이 재밌는 것도 한몫하는 것 같아. 그나저나 2막까지 읽으면서 알아낸 정보가 있는데 한 번 들어볼레?”
안 들을 이유가 없지.
“말해줘.”
테리아는 목을 가다듬고는 책을 앞으로 넘겨 자신이 원하는 문장을 어렵지 않게 찾아내곤 정독하기 시작했다.
“1막, ‘열린 세상’의 내용 중 이런 서술이 있어. 난쟁이들의 소문으로는 갤모라 산맥엔 비경 찾는 나침반이 숨겨져 있다고 한다.”
“비경 찾는 나침반이라…,”
“딱 봐도 마법 걸린 물건을 말하는 거잖아?”
“그렇네.”
위위키에 적힌 내용을 토대로 소설의 내용을 쌓아본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타히그의 소설은 그의 탑 내 세상이다.
일반적인 마법사의 탑과는 달리 타히그의 탑은 오롯이 그의 소설을 통해서만 입장할 수 있다.
여타 다른 마법사의 탑과 같이 타히그의 탑 내 세상이자 소설 속 세상인 이곳에는 마법 걸린 물건들이 산재해 있다.
다만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은 그 마법 걸린 물건의 실마리가 바로 소설 속 내용에 있다는 것.
따라서 비경 찾는 나침반을 구하기 위해선 1막에 해당하는 세상으로 들어가 그곳 어딘가에 있을 갤모라 산맥을 수색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럼 이제 이것을 동기 삼아 개념적으로 이 소설 속 세상을 이해해보자.
만약 나와 테리아가 비경 찾는 나침반을 찾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원서 1막 부분에 적혀 있는 단서에 해당하는 문장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1막에 해당하는 무대로 입장하게 되겠지.
알레카가 3막의 주 무대인 것처럼.
자 이제 생각을 조금 비틀어서.
우리가 찾는 것은 마법 걸린 물건이 아닌 사람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3막의 단서를 통해 이 세상으로 넘어온 사람.
그가 굳이 3막의 무대 안으로 들어간 이유가 뭐겠는가?
그야 3막의 내용 가운데 묘사되었을 마법 걸린 물건 중 하나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겠어?
마찬가지로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지 테리아가 말했다.
“3막에 서술된 마법 걸린 물건들을 따라가다 보면 틀림없이 빈을 만날 수 있을 거야.”
“꽤 많은 시간이 소모될 것 같은데.”
내 대답에 그녀는 멋쩍게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 무대가 알레카라곤 해도,
3막의 물건들이 모두 다 알레카 내에 있다고 서술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1막의 비경 찾는 나침반처럼, 물건 중 하나가 알레카 인근 산맥에 있다고 서술되기라도 한다면…,
수색의 범위는 말 그대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
애초에 물건이 아니라 그 물건을 찾고 있는 자를 발견해내야 하기에 특정을 짓고 수색을 하기도 어려워.
순간 느껴지는 막막함에 두 손의 힘이 빠져버렸다.
그것을 벤투스도 느꼈는지 녀석은 제자리에 멈춰 서서 앞발로 바닥을 치대길 반복했다.
일단은 테리아가 3막을 모두 읽을 때까지 나는 알레카를 돌아다니면서 사소한 정보라도 긁어모아야겠어.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겉에 붉은 칠을 한 호롱이 빛나는 거리, 그 거리엔 아이들이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천진을 쏟고 있다.
한 폭에 공존시키기엔 제법 버거운 두 모습의 충돌은,
동시에 현실에서도 충분히 있을 법한 모습이었기에 내심 씁쓸함이 느껴진다.
그렇게 다가오는 우리를 피해 길을 비킨 아이들 가운데,
땋은 머리가 인상적인 소녀 하나가 쭈뼛거리며 벤투스의 뒤를 따랐다.
나는 그런 아이에게 너그러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말의 뒤를 쫓는 건 위험해.”
그러자 소녀는 내 얼굴을 보며 작은 입술을 뻐끔거리다가도, 이내 얼굴을 붉히며 벤투스 옆쪽으로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아이의 행동에 나는 고삐를 당겨 벤투스의 머리를 소녀로부터 멀리 떨어트려 놔야 했다.
그렇게 다가온 소녀는,
등자 위치까지밖에 안되는 자신의 키를 극복하기 위해 까치발을 들고선 두 손으로 입 주위를 가린 채.
“빈 할아버지를 찾고 있죠?”
최선을 다해 우리에게 속삭여주었다.
그 말에 테리아는 책 읽던 것을 멈추고 놀란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았고,
나는 그런 테리아의 얼굴과 소녀의 얼굴을 당황스럽게 번갈아 볼 수밖에 없었다.
* * *
소녀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알레카 외곽에 있는 집 단지였다.
그중 작은 집 하나를 골라 들어간 소녀는 낡은 신발을 내팽개치듯 벗으며 아이 특유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내었다.
“언니! 나왔어어!”
그러자 안쪽에서 호리호리한 체형의 여인 하나가 소녀를 맞이하면서도,
그 뒤를 따르던 우리를 보고는 잔뜩 경계하는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빈 영감님이 찾는 분들이신가요?”
도대체 우리를 어떻게 알고 찾아낸 것인지 궁금했지만, 반대로 우리로서는 빈을 찾고 있었던 입장이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그나저나 우리가 찾고자 하는 대상이 먼저 우리를 찾고 있었을 줄은 몰랐는데.
이윽고 여인은 안심한 듯 한숨을 쉬면서도 옆에 찰싹 붙어 있던 소녀를 닦달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대뜸 낯선 사람에게 달려들면 어떻게 해?! 먼저 내게 알려줬어야지!”
“하지만 빈 할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확실했는걸?”
천진하게 대답하는 소녀를 차마 계속해서 구박할 수 없었던 여인은 어쩔 수 없다는 미소로 그저 머리를 세게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렇게 조심스레 집안으로 들어서면 여인은 괜찮다는 듯 우리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이내 나와 테리아는 여인의 동의를 통해 맘 편히 집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곧이어 소녀는 우당탕 우리 앞으로 달려 나와,
“2층으로 올라가셔야 해요!”
드센 길잡이 역할을 자처했다.
작은 집 위에 무엇을 얹든 그보다 클 리가 없듯이.
계단과 직결된 협소한 복도 끝에 딸린 작은 방.
그 문을 열면 곧 안에서 백발의 등 굽은 노인이 우리를 반긴다.
“반갑네.”
* * *
“내가 그대들을 통해 품은 궁금증만큼이나, 그대들 역시 나를 통해 품은 궁금증이 클 거야.”
입에 물고 있던 파이프를 내려놓은 노인 빈은 친근하게 달려드는 소녀를 무릎 위에 앉힌 채 우리 둘에게 조곤조곤 설명을 이어갔다.
“급하지 않게,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게 서로 간의 궁금증을 풀어보기로 하세.”
“저희를 어떻게 찾으신 겁니까.”
곧바로 이어진 테리아의 질문에 빈은 뒤로 넘긴 흰 머리를 쓸어내리며 낡은 눈꺼풀을 깜빡깜빡.
생각을 되짚곤 곧바로 유수처럼 말을 쏟아냈다.
“내가 이곳에 온 지도 벌써 7년이나 지났군. 이 정도 시간이면 설사 꿈이라고 하더라도 정착하기엔 충분한 시간이겠지.”
7년.
7년 동안이나 이 세상 속에서 살아왔단 말인가.
“그 오랜 시간 동안 이곳에서 지내다 보니 어느덧, 언젠가 다가올 내 죽음에 기꺼이 슬퍼해 줄 이웃들이 생겼네. 그 말은 나는 이미 이곳 알레카에 녹아들 대로 녹아들었다 이 말일세.”
주름진 얼굴로 담담함을 내놓던 노인은 이제 나와 테리아의 손에 걸려 있는,
반지 ‘같은’ 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렇다 보니 이 늙은이의 부탁을 들어주는 이웃들도 적잖이 생길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물며 밖에서 만물 장사하던 양반이 그렇게 발품 팔아 구한 것들을 잊을 수 있을까.”
이어 잠자코 말을 듣고 있던 소녀가 삐져나온 햇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상한 반지, 술병 달린 모자, 밤 망토!”
그리곤 위풍당당한 얼굴로 소녀는 작은 손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중에 무려 두 개나 갖고 있어!”
본인이 모은 단서들을 일찍이 이곳 이웃 주민들에게 일러주었다 이 말이군.
만약 그러한 단서를 통해 이곳에 온 이방인들이라면 이는 틀림없이 자신의 만물상을 통했을 테니까.
나와 테리아는 노인의 설명 끝에 수긍을 내놓을 수 있었다.
이제 노인은 반대로 우리에게 질문했다.
“그럼 이제 알려주겠는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는지?”
“오르미그의 기름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즉답에 노인은 알 것 같다는 듯 피식 웃으면서도 미안함을 내비쳤다.
“하기야, 칠라드가 외지인에게 그런 귀한 물건을 팔 리는 없지. 분명 그것은 내 만물상에 있는 것이지만 내가 아니면 찾을 수가 없을 걸세…, 동생의 망각으로 이리저리 어지럽혀져 있을 테니.”
이윽고 빛바랜 그의 눈동자가 번뜩인다.
“이 노인이 가장 중요한 질문을 놓쳤어, 내 동생…, 반은 잘 지내고 있는가?”
그의 불안을 바로 잠재우고 싶었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약속이라도 한 듯 나와 테리아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밉지 않은 변덕을 부리며…,”
노인은 이런 우리 둘의 모습을 바라보며 해맑게 웃는다.
그러면서,
다시 주름에 박힌 그림자를 드러내며 착잡한 표정을 지은 그는 목에 걸린 무언가를 내뱉듯 호소하기 시작했다.
“늙은이로부터 용무를 보기 위해 젊은 와중의 시간을 바쳐가면서까지 이곳에 오게 해 미안하네.”
그리곤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난 자네들이 원하는 것을 지금 당장 줄 수 없어.”
그럼 테리아는 묻는다.
“그러한 이유가 해결된다면요?”
이 말에 노인은 슬쩍 뒤쪽에 닫힌 미닫이문을 흘겨보곤 처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 그대들이 원하는 걸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주겠네.”
슬슬 담론의 봉우리가 보이는 것 같군.
“그럼 말씀해주십시오, 왜 이곳에 온 것인지. 무엇을 찾고자 그리 오랜 시간 동안 이곳에 있었는지.”
내 말에 노인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뒤쪽에 닫힌 미닫이문을 열었다.
그렇게 드러난 너머엔…,
한 중년의 여인이 누워 있었다.
숨은 쉬고 있으나 감긴 눈꺼풀은 쉬기 위해서가 아닌 것 같은 그런 여인이.
노인은 이미 오래전부터 본인 속에서 그 씁쓸함이 짓물러 터져버렸는지 담백한 말투로 우리에게 말했다.
“내 딸일세. 보다시피 못 깰 잠에 빠져있지.”
세월에 바짝 오그라든 손으로 누워 있는 딸의 이마를 쓸어내린 그는,
“그리고 이 3막의 이야기 가운데엔, 내 딸아이를 일으킬 물건이 존재한다네.”
끝내 눈물을 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