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떨기 꽃 아래 모루 (18)
이 세상으로 넘어온 건 빈뿐만이 아니었다.
셀리.
그의 딸도 함께였다.
다만 그녀는 내 눈앞에 보이는 바와 같이 숨만 붙어 있는 그런 상태였고,
빈은 그런 딸 옆을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이제 빈은 창백한 딸의 이마를 쓸어내리며 그간 있었던 일들을 천천히 나열하기 시작했다.
* * *
내 딸은 결혼에 실패했네.
찾아보자면 분명 근처 어디에선가도 쉽게 볼 수 있는 파국이었지.
다만 아비 된 자로서 직접 겪어보니 그 참담하기가 가혹할 정도로 끔찍하더군.
어느 날, 그러니까 만물상이 아닌 일반적인 상점을 운영하고 있었던 옛적에.
딸이 내게 이렇게 말했어.
‘아빠, 나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라고.
꽃다운 나이에 솔직한 고백을 내뱉던 딸아이의 얼굴은 태양보다 눈 부셨지.
그녀를 사랑에 빠지게 한 남자는 올레도즈.
비록 몰락하여 그 세가 기울어졌지만, 명색이 이름 있는 가문의 장남이더군.
그래도 귀족의 가문이라고 그의 가족들은 내 딸을 탐탁지 않아 했네.
애초에 내 딸과 연이 닿은 이유도 리디굴람에 상점을 운영하는 우리 집안 재산 때문이었던 것 같았고.
하지만 올레도즈,
그를 만나고 나서부턴 생각이 조금 바뀌었어.
그는,
과연 내 딸이 사랑에 빠질 만한 매력적인 사람이었지.
자네처럼 그 역시 아름다운 용모를 갖고 있었던 데다가, 진심으로 내 딸을 사랑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었거든.
아,
이 둘의 사랑만 있다면 외부의 반대에도 꿋꿋하게 가정을 건설할 수 있겠구나 싶었어.
저자라면 내 딸아이를 기꺼이 행복하게 만들 수 있겠다 싶었어.
그래서 나는 딸아이를 보냈네.
동시에 올레도즈가 내 딸아이와 함께 가정을 건설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
하..,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어.
언제부터인가 가끔 우리에게 찾아왔던 딸아이가 발길을 뚝 끊더군.
시기상으로 자식을 낳아 그 어린것에 채여 사느라 우리에게 오기가 힘들겠거니 했었는데…,
그래서 딸아이가 손주와 함께 오는 날을 대비해 차곡차곡 집안에 반가움을 쌓아놓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 남자가 우리 집에 찾아왔어.
그의 행색은 보는 것만으로도 악취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었지.
딱 봐도 리디굴람의 가장 변두리에서 거슬러 올라온 사람 같아.
아니나 다를까, 그는 변두리에서 싼값에 심부름을 해주는 꾼이라더군.
그런 그가 썩어 문드러진 앞니를 드러내며 하는 말이.
당신 딸이 심부름을 시켜서 왔다는 거야,
…,
살려달라고.
나 여기에 있으니까 찾아달라고.
그날 처음으로 나는 노란 하늘을 봤어.
그런데 그 와중에도 딸아이를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뭐라 설명하지 못할 안도감까지 느꼈지.
그렇게 심부름꾼을 따라 리디굴람의 가장 변두리에 있는 아주 허름한 집에서,
딸아이를 찾았네.
스물이 넘어서도 밉지 않은 어리광을 쏟아냈던 아이는,
힘없이 누워 있었어.
몸에는 멍 자국이 가득했고 허벅지는 끓어오르는 지독한 성병의 온상이 되어 붉게 물들어선…,
하필 왜 그 장면이 이 늙은이 뇌리에 박혔을까.
선명한 만큼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열거하기가 무서운 기억이었네.
나락의 구렁텅이에 떨어진 딸아이를 거두고 나서야 나는 그간 있었던 사정들을 헤아렸네.
올레도즈는,
그래 그놈은 별빛을 뒤집어쓴 괴물 놈이었던 거지.
거짓 사랑을 내세워 희롱하는 괴물.
처음은 있는 것 없는 것 다 내주는 척, 헌신하는 척, 사랑하는 척하며 스며들었다가.
단물을 다 빼먹고 빠져나가는 괴물.
둘의 사랑을 기원하며 지원해줬던 돈으로 올레도즈는 도박을 일삼았다고 하더군.
리디굴람의 변두리 사이에선 이미 유명인사일 정도로.
내 딸아이는 그의 욕구 배출기이자 돈줄의 수단이었던 게지.
나중에는 우리에게 보여줄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자 그는 그녀의 몸을 팔아 자금을 충당했어.
리디굴람 중심지에서 상점을 운영하는 자산가의 어린 딸은 변두리에선 아주 가치가 높은 상품이었던 거야.
결과적으로는…,
이 아비라는 놈이 딸아이 하나 지키지 못했어.
뭐에 눈이 멀었던 걸까.
딸은 무조건 행복할 거라는 환상을 지나치게 뒤집어썼기 때문일까?
나는 도대체 무엇에 맹신하여 딸아이를 나락으로 몰아넣었을까.
어쩌면,
이 모든 일은 다 내 탓일지도 몰라.
어리석은 아비 탓에 딸이 망가져 버린 거야.
* * *
“당신 탓이 아닙니다.”
내 말에 눈물을 뚝뚝 쏟고 있던 빈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어느 누가 사랑에 죄를 묻겠습니까. 만약 사랑으로 죄를 묻는다면 세상은 이미 지옥이 됐을 겁니다.”
이어지는 그 말에 옆에서 숨죽이고 있던 테리아는 곧 흐를 것 같은 눈물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다만 기만으로 사랑을 속삭이는 것은 틀림없는 죄입니다. 방향을 제대로 잡으십시오. 자책에 빠져선 기필코 결론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담담히 이어지는 내 조언에 빈은 은은한 미소와 함께 날 바라보며 답했다.
“현명은 주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 자네를 보니 참으로 맞는 말 같아.”
빈은 그러면서 내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너무 늙었네, 이 쇠약한 몸과 정신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자책밖에 없어.”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는 돌연 감추고 있던 불꽃을 눈동자에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다만 비교적 젊은 몸과 젊은 정신을 갖고 있었을 적엔, 내 아비란 이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지.”
그는 자신의 품에서 소설 블레막을 꺼내 들었다.
다만 복사본의 표지와는 다르고 그 테두리가 제법 낡아 보이는 것을 보면,
틀림없는…,
“알다시피 이것은 타히그의 소설일세, 이 세상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지. 그리고 이건 일곱 권의 원서 가운데 하나고.”
“총 두 권의 원서를 손에 넣으신 겁니까.”
“그렇네, 청년 때부터 악착같이 모아왔던 재산을 이 소설을 구하는 데에 써왔지. 참으로 후련하더군. 그래도 내가 지금껏 쌓아온 것들로 유의미한 걸 손에 넣는다는 건 말이야.”
그는 곧 원서를 펼쳐 2막에 적혀 있는 문단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어스름이 판치는 심야, 조용한 도시 마잔티의 중앙 거리에 날개 달린 옷을 입은 셀리 도노르가 나타났다.]
[그녀는 죽음의 속삭임을 자장가 삼아 곤히 잠들어 있었지만, 그 유명한 마잔티의 네 의사가 곧 그녀를 발견하고 거두었다.]
“2막을 통해 딸분을 먼저 보내신 거군요.”
“그래, 마잔티는 소설 세계관 내에서 유명한 의료 도시이기도 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곳에 먼저 보냈네.”
펼쳐 내민 원서를 거둔 빈은 설명을 이어갔다.
“하지만 바깥세상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딸의 속병까지는 고치지 못하더군, 하는 수없이 원래 계획대로 3막을 통해 이 세상으로 들어온 내가 마잔티로 가 그녀를 데리고 알레카로 온 거야.”
그는 창을 통해 쏟아져 내리는 햇살을 바라보며 말했다.
“알레카에는 생명을 꽃피우는 햇살이 가득한 곳이니까, 그나마 딸아이를 요양하기엔 적격이었거든. 문제는 그녀의 곁에 붙어 요양을 거듭하다 보니 어느새 내가 너무 늙어버린 거야. 3막에 있는 그 물건을 구하기엔 너무 쇠약해져 버린 거지.”
얼마나 많이 살펴보았을까.
원서를 다시 펼친 빈은 단 한 번 만에 찾아낸 문장을 가리키며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테칸테 호수에는 전설로 내려오는 소문이 하나 있다. 바로 호수 어딘가에 ‘엘릭시르’가 잠들어 있다는 것. 연금술사들에겐 만능의 공식이며 생명체에겐 꺼지지 않는 불로 작용하는 그것이 말이다.]
“엘릭시르…,”
테리아의 푸른 동공이 반짝인다.
“이제 움직이기도 힘든 이 늙은이에겐 말 그대로 꿈만 같은 문장이기도 하네.”
“그래서 그것을 저희가 구해 온다면.”
내 말에,
빈은 주름진 얼굴로 절박을 쏟아내며 우리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것을 구해만 준다면 비단 기름뿐만이 아니라 그대들이 찾고자 하는 물건을 내 여생을 다 바쳐 구해다 주겠어.”
겉은 쇠약하기 그지없는 노인이나,
딸을 일으켜 세우려는 그 염원만큼은 손대기 힘들 만큼 뜨거운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테리아는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원서를 쭉 읽어봐도 되겠습니까?”
빈은 그 부탁에 흔쾌히,
자신의 품에 있던 원서를 건네주었다.
* * *
소녀가 테리아 주변을 기웃거린다.
책에 집중하고 있던 테리아는 그런 소녀의 행동에 관심을 주지 않을 수가 없어.
“왜 그러니?”
하고 물으면,
소녀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면서 사뭇 진지한 얘기를 꺼냈다.
“언니 이쁘다!”
그 말에 테리아는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말했다.
“너도 예뻐.”
그러자 소녀는 두 볼을 붉히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이름이 뭐니?”
“라시, 언니 이름은 라센이야.”
발을 배배 꼬며 대답하는 소녀에게, 테리아는 품에서 동전 하나를 꺼내.
그것을 오른손으로 잡아,
아주 평온한 표정으로 꾹꾹 접어 별 모양으로 만든 뒤 소녀에게 건네주었다.
반질반질한 은 동전을 구겨 만든 별은 테리아 그녀의 솜씨를 자랑하듯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었는데,
소녀의 눈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는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신에게 건네는 그것을 조심스레 받아들였다.
“별이다, 그치 언니.”
천진하게 동전이었던 별을 바라보며 묻는 소녀에게,
테리아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빙그레 답했다.
“라시는 달처럼 이쁘니까.”
그런 그들의 모습을,
멀찌감치 떨어진 계단에 앉은 채 훔쳐보고 있던 나는.
찰나의 순간 테리아와 눈을 마주치는 바람에 얼른 고개를 돌려야 했다.
그리곤 괜히 칼자루를 쥐고 검집 안에서 시퍼런 날빛을 확인하고 있는데,
별안간 갑자기 바깥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그것도 꽤 심각한.
“이번이 마지막 경고다, 명심해!”
“경고? 대체 우리가 왜 그런 경고를 들어야 하는 거지?”
“너 이 씨발, 몸 파는 창녀 주제에 어딜 따박따박 대들어!”
밖으로 나가보면 웬 우락부락한 사내 하나가 작은 여인을 몰아붙이고 있다.
“그러는 너희는? 우리 같은 애들 피 빨아가며 연명하는 씹새끼 주제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여인이 뒤로 한참이나 나뒹군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라시의 언니, 라센이 번개처럼 달려 나와 나뒹군 여인에게 달라붙었다.
“멜! 괜찮아?!”
이윽고 라센이 덩치 큰 남성을 째려보자,
“왜, 나랑 그렇게 떡 치고 싶냐?”
남자는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그녀를 있는 힘껏 희롱했다.
그러면서도 한 손에 든 육각 메이스를 번쩍 치켜세운 그는 주위에 몰려든 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잘 들어! 우리 ‘검은 눈’이 마지막으로 너희들에게 하는 경고니까! 앞으로 이틀 내에 빚을 갚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너희들이 가장 잘 알겠지?!”
그래서,
저 작자의 혀를 어떤 각도로 베어 볼까 싶던 찰나에.
테리아가 대뜸 내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
이윽고 남자가 대동한 패거리와 함께 행패를 부리며 돌아가고 나서야.
테리아는 소설을 펼쳐 내게 보여주었다.
[검은 눈은 알레카의 가장 거대한 그림자였다. 애꾸눈 바치를 필두로 모여든 무법자들은 경유지로 격상한 알레카를 이용해 원대한 사업을 꿈꾸고 있었다.]
“디안, 저들은 3막 초반부에 등장하는 악당이야. 알레카의 주민들에게 강제로 돈을 빌려준 뒤 막대한 이자를 빌미로 부동산을 점유하는 녀석들이지. 이곳의 홍등가도 다 검은 눈의 작품이었어.”
그리운 촙의 말을 빌리자면,
대단한 쌍놈들이란 거네.
이어 테리아는 본론을 이야기하듯 진지한 얼굴로 다음 내용을 내게 말해주었다.
“알레의 두 아이는 애꾸눈 바치가 끼고 있는 의안이 무엇인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것은 분명 제3의 눈이라 불리는 신묘한 물건이었지만 바치는 그것을 그저 자신의 빈 눈구멍에 채워 넣는 것에 쓰고 있었다.”
“마치…, 마법 걸린 물건과 같은 묘사네.”
“바로 맞췄어.”
테리아는 이어서 소설 속 내용 중 한 부분을 계속해서 읽어 내려갔다.
“알레의 두 아이 중 하나는 예지 능력이 있어 어렵지 않게 바치의 미래를 볼 수 있었는데, 그 미래가 어찌나 참담하던지 알레의 두 아이는 그를 직접 단죄하길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이번엔 빈에게 받은 원서를 펼쳐 그 안에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애꾸눈 바치는 세계 내 최강이라 불리는 검사에게 일방적으로 도륙당했다, 그것은 마치 자연재해와 같아서 번복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