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떨기 꽃 아래 모루 (19)
“복사본에서 애꾸눈 바치의 이야기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원서에는 해당 이야기의 결말이 적혀 있어.”
상황이 진정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테리아는 추론을 쏟기 시작했다.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그녀의 눈에서 이지적인 분위기가 쏟아져 나온다.
“어쩌면 원서의 주인공은 우리 같은 외부에서 온 방문자가 아닐까 싶어.”
“이유는?”
이어지는 내 물음에 그녀는 이미 머릿속 생각을 정돈한 듯 차분히 대답했다.
“복사본과 원서의 결정적인 차이가 뭘까?”
“아무래도 이쪽 세상으로 넘어갈 수 있는 단서가 있느냐 없느냐겠지.”
테리아는 차가운 오른 검지로 허공을 콕 찍으며 미소지었다.
“맞아, 소설 블레막의 세계로 건너갈 수 있는 단서는 오롯이 원서에서만 발견할 수 있어.”
이윽고 그녀는 마주 앉은 탁상 위에 복사본과 원서를 나란히 올려놓고 설명했다.
“복사본에선 소설 주인공인 알레의 두 아이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돼. 그리고 그들의 시점에서 방금 보았던 검은 눈은 곁가지에 속하는 이야기에 불과하고.”
“해서 복사본에선 검은 눈의 이야기를 그저 예지에 빗대어 애매하게 표현한 건가?”
의중을 간파한 걸까.
내 물음에 테리아는 만족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맞장구쳤다.
“바로 그거야! 반대로 원서에선 곁가지에 불과했던 검은 눈 이야기가 그 결말까지 묘사된 거지.”
이어 헐레벌떡,
원서를 펼친 그녀는 문장 하나를 가리켰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그 가리킨 문장을 쭉 따라 읽어보면.
[유독 강한 햇살 아래, 구릉 너머로 작은 태엽 반지를 낀 디안 베나즈와 테리아 루스가 막 알레카에 접어들었다.]
[그들 중 하나는 블레막의 세상 내 ‘최강’이라 불리는 검사였으며, 다른 하나는 금기로 점철된 차원을 야금하는 대장장이였다.]
“이건…,”
“맞아, 이 세상에 발을 들인 우리의 증거야. 그리고 이걸 잘 봐.”
테리아는 손가락을 옮겨 한 단어를 콕 찍어 가리켰다.
‘최강’
“이 소설이 디안 네게 붙여준 고유의 서술이야. 그리고…,”
다시 원서를 바삐 넘기곤 특정 문단에 손가락을 가리킨 그녀가 끝내 의견의 결론을 도출한다.
“그 고유의 서술은 검은 눈의 두목 바치의 결말에서 또다시 거론되지.”
[애꾸눈 바치는 세계 내 ‘최강’이라 불리는 검사에게 일방적으로 도륙당했다, 그것은 마치 자연재해와 같아서 번복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즉, 우리는 복사본에선 곁가지에 해당하는 이야기들의 개연성으로서 이 소설 속 세상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야.”
“그래서 방문자의 시선으로 그런 곁가지에 속하는 이야기들을 해결할 수 있게 만들어진 게 원서라 이 말인가.”
“바꿔 말하면 원서의 주인공은 곧 방문자다, 라고 할 수 있겠지.”
날카롭다.
숨겨진 의도를 찾아내 정확히 관통한 것 같아.
마법사임에도 스스롤 마이스터라 자처한 타히그가 이 원서를 무슨 목적으로 썼을까를 생각한다면,
그래 테리아의 주장은 더욱 확실하게 맞아떨어져.
정리하자면,
원서는 곧 타히그의 탑이다.
보통 마법사의 탑은 정신적 그릇을 걸고 마법 걸린 물건을 쟁취하기 위한, 일종의 위험한 도박을 하는 장소이지만.
타히그는 자신이 만든 소설 속 내용을 통해 우리에게 마법 걸린 물건들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테리아의 추측이 바로 이것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원서에 적힌 서술대로 한 번 행동해 볼 필요가 있겠지.
* * *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정보였다.
테리아는 빈을 중심으로 근방 지역 거주민들에게,
나는 알레카 중심지를 토대로 각자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수집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3막 초반부의 악당이자 무법자 집단인 검은 눈이 저지른 악행들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단 하나.
경유지 알레카를 하나의 거대한 홍등가로 만드는 것.
거주민들에게 고리대금을 강제하고 경악할만한 이자를 씌워 그들의 땅과 집을 갈취하고,
그럼에도 당연히 갚아지지 않을 빚을 명목으로 여인들은 성적 노동 착취의 대상으로,
남자들은 알레카의 특산품인 햇살을 쥐어 짜내기 위한 노동력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에 강하게 반발한 자들이 몇 있었지만,
바치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제지하는 대신, 대상자들의 한쪽 눈을 산 채로 파내는 행위 따위로 거주민들에게 공포를 심었다.
반대로 그런 바치에게 빌붙어 마을을 집어삼키는 데에 적극적으로 일조한 거주민들도 있었다고 하니 이웃의 입장으로선 참담하기 그지없겠다.
알레카에 작은 깃발이라도 하나 있었더라면,
만약 내가 그 작은 깃발의 주인이었다면 나는 제일 먼저 어떻게 행동했을까.
그래,
우선 적에게 빌붙는 자를 색출해 과감히 그 싹을 자를 것이다.
하나의 배신이 백 개의 빗장을 무색하게 할 테니까.
내 가족 맥레인이 그렇게 무너졌었으니까.
이윽고 외진 골목길로 들어서자 노파 홀로 운영하는 작은 가게가 눈에 띄었다.
노파는 외진 골목에 막 들어선 나를 발견하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주름진 손을 내밀어 가까이 오라는 듯 흔들었다.
그것에 이끌려 가까이 다가가면,
“어떤가, 자네 별을 세 줄까?”
하고 너그러운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그런데 그러면서 드러난 노파의 얼굴은…,
한쪽 눈이 선명한 흉터와 함께 굳게 감겨 있다.
바치에게 고초를 겪은 것일까.
“별을 세다니요?”
조용히 맞은편에 앉아 말을 섞으면 노파는 활짝 웃으며 검은 유리 컵을 뒤집는다.
“0부터 10 가운데 몇 개의 별이 자네 위에 있는지 내 세줄 수 있는데, 별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정도로 팔자가 나약하면 열 개 모두가 반짝이겠지만 자네에겐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 같아서 말이야.”
이것은 분명,
위위키에서 언급한 블레막의 가장 대표적인 설정 중 하나이리라.
해서 나는 노파에게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어르신, 혹 다른 이의 별 개수도 제가 알 수 있습니까?”
그러자 노파는 내가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덤덤하게 대답했다.
“네 개였지, 바치 위에 있는 별은. 그는 그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내 한쪽 눈을 파내버렸어.”
그러면서도 묘한 미소를 지은 그녀는,
“자네,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
남은 한쪽 눈으로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이내 검은 유리컵 밑부분을 향해 시선을 쏟았다.
“드디어 알레카의 그림자가 다 사라지려나.”
“어르신?”
노파는 곧 컵에서 시선을 떼곤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자네의 성정과 자네의 철저함은 이 세상의 별빛을 무색하게 만들어.”
* * *
“어때, 알아낸 게 있어?”
돌아온 나를 반기며 달려 나오는 테리아,
그런 그녀에게 할 수 있는 대답은.
“검은 눈에 막연한 증오만 쌓고 오는 길이야.”
이것 하나뿐이었다.
글쎄 아주 오만가지 이야기를 들었거든.
열 살짜리 소녀를 홍등가에 내세운다는 걸 그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막아내려 했는데,
바치가 그 아버지의 눈을 파내버렸다는 거야.
차마 테리아에게 그 끔찍함을 공유하고 싶지 않아 속으로만 되뇌어 본다.
중립 지역의 무법자들에겐 적어도 낭만이란 게 있었는데.
아니, 그조차도 마지막에 가선 아무런 의미도 없었지만…,
또 재키 같은 놈들을 떠올린다면 시작부터 어긋난 채로 눈을 뜬 자들은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법이니까.
내게서 씁쓸함을 엿보았는지, 그녀는 멋쩍은 눈빛으로 내게 심심한 위로를 건네다가도.
“그거라면 충분해.”
결연한 의지를 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테리아, 네 쪽은 어때?”
그런 그녀에게 물어보면 기다렸다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는다.
“알고 보니 이곳이 알레카의 마지막 사유지더라고, 그래서 바치에 반발하는 자들도 많아. 그들의 생리를 조사하고 간파한 자들 역시 많고.”
“더욱 자세히 듣고 싶은데.”
“문제없지, 내가 그들과 직접 대면시켜줄게.”
테리아는 곧바로 씩씩한 발걸음으로 날 안내했다.
그러다가,
“참, 빈 영감님의 딸분 말이야.”
걸음을 멈춘 그녀가 막 떠오른 무거운 이야기를 내게 해주었다.
“그분이 혼수상태에 빠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뭔지 알아?”
“뭔데?”
“폐병이래.”
“폐병?”
느려진 걸음으로 나와 나란히 걷기 시작한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기억나? 리디굴람의 그 악취.”
“아주 선명하게 기억하지, 떠올리면 그 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사실 그 악취는 하수 시설만 제대로 갖춰지면 금방 해결되는 문제래.”
테리아의 푸르고 반짝이는 눈동자 속에 작은 구름 하나가 담겼다.
“웃긴 건 중심지를 제외한 리디굴람 외곽지에선 개인이 하수 처리 시설을 만드는 게 불법이라는 거야. 그 이유가 뭐게?”
“뭔데?”
“벨로스터 가문의 외가에서 진행하는 사업 때문에. 그들은 매우 비싼 돈을 받고 외곽 지역을 청소해주는 사업을 하고 있데.”
리디굴람의 실질적 지배자인 벨로스터 가문의 외가라면,
그들의 결정에 토를 달 수 있는 자는 몇 없겠지.
“그렇게 벌어들이는 수익이 막대해서 그들은 그 사업을 계속 유지하고 있데, 근데 웃긴 건 우리가 갔던 리디굴람의 중심지엔 하수 처리 시설이 아주 잘 되어 있었다는 거야.”
“아이러니하네.”
“그렇지? 결국엔 빈 영감님의 딸분을 혼수에 빠트린 건 리디굴람이었어. 물론 그 모든 결과의 관여는 남편이 했지만.”
분명 기업과 조합에도,
기형적인 깔때기 모양의 사업을 추진하려는 이들이 아주 많겠지.
테리아가 말한 저 리디굴람의 사례처럼.
어쩌면 처음 만난 게 포개어진 손 조합인 게 리케니엔에겐, 베나즈 가문에겐 아주 큰 행운이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언제나 운에서 요행을 바랄 수는 없는 법.
깃발의 공표와 동시에 우리와 사업을 진행하려는 자들을 능히 걸러 볼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겠어.
* * *
투박하지만 필요한 정보는 모두 빼곡히 들어가 있는 어느 저택의 약도.
그것을 내민 주민은 간신히 분을 삭이며 말을 이었다.
“이것은 ‘호출’이란 걸 받고 끌려간 마을 여인들의 희생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그러자 옆에 잠자코 있던 중년 남성도 이마에 핏대를 내세우며 격한 감정을 드러냈다.
“내 친척은 그곳에 갔다가 거의 산송장이 되어 나왔어, 정강이뼈가 무려 여덟 조각으로 나눠 부러졌지.”
곧 불이 번지듯 개개인의 분노가 이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번지려 하자,
“모두 진정하세요!”
빈과 그의 딸에게 2층을 내어준 여인 라센이 큰 목소리로 그들을 일축했다.
이어 그녀는 간절함을 담은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정말…, 가능한 겁니까?”
그 물음에 담긴 일말의 의심조차 날려버리기 위해,
나는.
“가능합니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즉답했다.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테리아는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를 건네준 마을 주민들이 검은 눈의 시선을 비해 뿔뿔이 흩어지고.
나와 테리아는 오늘 있을 새벽의 일을 대비해 만반을 두르기 시작했다.
“베나즈의 이름에 걸맞은 명성을 오늘에야 비로소 확인할 수 있겠네.”
그 말을 하며 자신이 챙겨온 가방에서 유리관과 어느 액체가 담긴 병을 꺼낸 그녀는,
액체를 유리관에 담고 그것을 끓이기 시작했다.
이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게 뭐야?”
“연금술, 네게 도움이 될 날씨 파편을 만들려고.”
“연금술도 할 줄 알아?”
“그래봤자 기초뿐이야, 마을 사람들에게 이곳에서 뽑은 햇살을 받았으니 쓸만한 섬광쯤은 만들 수 있을 거야.”
“그래서, 그 액체가 가장 중요한 건가 봐?”
내 물음에 테리아는 보기에도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거? 이건 그냥 물이야.”
그냥 물이라니,
조금은 실망인걸.
나는 뭔가 굉장히 거창한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용의 시대 이후가 되면서 물은 투영의 매개가 됐지, 하늘을 그대로 비추어내는 것처럼.”
“그래서?”
“햇살을 쏟아 물에 투영시킨 뒤 이것을 기화시켜 담는 거야. 그럼 그 상태로 아주 잘게 쪼개진 햇살이 되지. 이걸 던져 깨트리면…,”
“잘게 쪼개진 햇살이 순간 증발하듯 동시다발적으로 반짝이겠네.”
“정답.”
이윽고 테리아는 만든 섬광을 내게 건넨 뒤,
“다녀와, 디안.”
제법 애틋한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그렇게 늦진 않을 거야.”
“자신만만한데?”
“베나즈의 이름을 걸고 하는 일인데 그럼 자신만만해야지.”
그렇게 그녀를 뒤로 한 채 무장을 점검한 나는 벤투스 위에 올라타 고삐를 치댔다.
이제,
사냥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