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00화 (200/365)

200화. 떨기 꽃 아래 모루 (20)

알레카 동쪽 길을 따라 이동하다 보면,

얼마 안 가 거대한 저택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럴싸한 외벽만 있었다면 그 자체로 고성이 되었지 싶을 정도로 대단한 규모.

거기다 일개 무법자의 본거지라고 생각하기 힘든 고풍과 사치로 범벅이 되어 있다.

글쎄 저 저택을 날 밝았을 때 봤다면 그나마 규모에서 감탄을 느꼈을지도…,

하지만 밤 아래서 보니 그저 알레카의 피를 빠는 기생충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본디 기생충은 숙주보다 몸집이 커지면 기고만장해져서 주객을 전도하려 들지.

처음 리케니엔에 도착했을 때 마주쳤던 산적들처럼 말이야.

비록 소설 속 이야기라곤 하나 어쨌든 이곳 실체는 마법사의 탑 내 세상.

어느 세상이든 두 발 걷는 자들이 사는 곳이라면 기생충이 들끓기 마련이므로,

그것들을 구제할 처방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그에 대한 처방으로서 기꺼이 작용할 준비가 되어있다.

이것은 토르킨 선생께서 가르쳐주신 기사의 본질이기도 하며, 베나즈의 이름을 가진 자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명예이기도 했다.

또한,

나는 기생충에 완벽히 주객 전도되어 무너져 내린 시몬 바스티유의 산증인이기도 하기에…,

그로 인해 소중한 것을 잃어봤기에 누구보다 증오할 자신이 있어.

그렇게 벤투스를 끌고 저택 뒤편으로 이동한 뒤,

덤덤히 안장에서 내려와 테리아가 건네준 섬광을 벨트 주머니에 차곡차곡 끼워 넣었다.

이어 별빛들을 조명 삼아 알레카의 피로써 완성된 저택의 약도를 한눈에 담고는,

그것들을 머릿속에 단박에 각인시켰다.

다음으로 저택 내부를 상상으로 건설한 뒤 가장 효율적인 동선까지 모두 짜내고서야,

마지막으로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검을 뽑아 이리저리 휘둘러 균형을 조율하며 신체를 가다듬었다.

생각해보니,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명품에 해당하는 검을 휘둘러 보는 것은.

토르킨 선생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지.

‘장인은 도구 탓을 하지 않는다’라는 말보다 어리석고 멍청한 이야기는 없다고 말이야.

애초에 장인이라 불리는 자들은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오만을 부리지 않는다고 했다.

상기한 문장은 그저 보통의 두 발 걷는 자들이 장인을 보며 느끼는 대표적인 감탄사일 뿐.

바로 지금,

그러한 말에 절절한 공감을 보내고 싶다.

테리아가 내게 빌려준 검.

질리스.

이것은 셀레어보다 날카롭고 가벼우며 날 끝에 치우쳐진 무게감 때문에,

그 균형감이 매우 공격적이었다.

비록 인챈트의 힘까지 가정한다면 셀레어가 이 검보다 훨씬 더 위력적이었겠지만,

글쎄.

반대로 검술에 일가견이 있는 자라면 능히 질리스를 들고서도 인챈트를 발휘하려는 셀레어를 상대로 가능성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만듦새가 치밀하기 짝이 없군.

울컥, 하며 가슴이 금방 두근거렸다.

지금까지는 인챈트에 의존하며 검의 구조적 한계 덕분에 워해머인 유스티아를 주력으로 휘둘러 왔었는데.

오늘 기생충을 구제하는 과정에서…,

맥레인이 만들어 주었던 그 날 선 감각을 일깨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손목을 돌려 질리스를 한 바퀴 휘두르자,

쌔액!

하는 날카로운 바람 비명이 내 귓불을 간질였다.

어떻게 휘둘러야 가장 위력적인지,

이 검이 원하는 궤적은 무엇이고 그 궤적에 이을 또 다른 궤적은 어떤 것이 가장 좋을지.

짐승의 것과 같은 본능으로 파악한 나는 이제 조용히 질리스를 검집에 물린 채 저택 뒤쪽으로 침투했다.

약칠 된 쪽문이 있는 담벼락을 단숨에 뛰어넘어,

방치됐음에도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정원 속으로 달려든 뒤 예민한 감각을 사방으로 펼치자,

금세 이마 곳곳이 근질거리기 시작한다.

눈앞에 보이는 복도 끝에 둘,

정원 외곽 셋.

그리고 그 너머에 꽤 시끄럽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다섯.

…,

다섯 무리 속엔 미약한 화약 냄새가 느껴져.

그 외 감각에 걸려 들어온 것은,

어떤 소년의 신음,

여인의 비명.

거친 숨을 껄떡대는 많은 수의 사내들.

속이 슬슬 매스껍다.

일단은 감각 내 들어온 것들부터 처리하자.

어스름을 뒤집어쓰고 미리 짜놓았던 동선대로 가장 먼저 정원 외곽을 향했다.

“그래서, 또 무릎을 박살냈냐?”

“항상 그 자세는 무릎이 거슬린단 말이지.”

“내일 순번으로 들어올 애들한텐 그런 짓 하지 마라.”

상체를 대충 덮은 사슬 갑옷.

윤이 나는 가죽 하의.

방금 막 안에서 더러운 짓을 하고 나왔는지 걸친 무장이 형편없다.

“왜, 내일 들어올 얘들 중에 눈여겨본 애라도 있는 거야?”

“그거 아쉽게 됐네! 내일 순번은 위대한 바치의 봉사 조거든.”

이죽거리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묵묵히 뒤에서 접근한 뒤,

조용히 질리스를 뽑아 들어.

“알지? 바치의 봉사를 위해 들어갔던 애들 대부분이 산송장에 되어 나오는 거?”

“아주 개박살이 날거다 하하… 억?!”

일격에 두 사람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

이어 급격하게 무너지는 두 신체의 턱밑을 두 개의 궤도로 정확히 그어 넘긴 나는,

막 상황을 인지하는 나머지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었다.

“꺽… 커걱…!”

두 장정이 울컥거리며 발작하지만, 목이 그어져 아무런 비명조차 내뱉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심장을 단번에 관통당한 남자는 불과 몇 초 지나지 않아 부르르 떠는 것을 멈췄다.

질리스는 사슬 갑옷을 면 옷 가르듯 아주 부드럽게 잘라버렸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적들의 무장은 고려할 대상이 아니다.

두목이라면 필시 좋은 무기를 갖추고 있을 테지만, 나머지는 질리스의 품질을 상회하는 걸 갖고 있을 리 없을 테니.

“푸훅… 훅….”

“거르륵… 거르륵.”

심장을 관통당해 절명한 남자와는 달리,

목이 그어진 두 남자는 물 밖에 나온 고기처럼 뻐끔뻐끔 피거품을 토해내고 있었다.

고통스러울 것이다.

고픈 숨을 아무리 들이켜봐도 삼켜지는 건 극악한 통증뿐일 테니까.

그저 냉소를 담은 눈으로 둘을 내려다본 나는,

다음 동선을 향해 곧바로 이동했다.

정원 외각을 가로질러 복도 끝으로 단숨에 이동하면, 보초를 서고 있던 두 남자가 기민하게 반응하여 자세를 다잡는다.

그러나 자세를 다 잡는 그 시점에,

이미 나는 앞발로 땅을 박차 도약까지 마친 상태였고.

그들이 내 모습을 인지하여 눈동자가 따라올 때쯤엔 목이 베인 후였다.

쉬지 않고 바로 복도에서 나와 다시 정원 외곽을 통해 반대편,

즉 저택의 정문이 있는 쪽으로 이동하자.

처음 펼친 감각으로 인지했던 다섯 장정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동시에,

그런 다섯 장정 주위에 펼쳐진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광경은,

냉정으로 붙잡고 있던 이성을 살짝 놓칠 만한 것이었다.

벌거벗은 시체들이,

마치 물건을 쌓은 듯 켜켜이 놓여 있다.

개중엔 아직 숨이 붙은 채로 신음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다섯 장정은 그저 입에 연초를 꼬나물며 서로 시시덕거리고 있을 뿐이다.

기습으로 천천히 갉아먹으려고 했는데,

이젠 그런 시간마저 아까워졌어.

그러니,

그냥 불러들여 모조리 밟아 죽여야지.

* * *

주름진 얼굴.

빨린 양쪽 뺨.

그리고 짙은 눈썹 아래 맺힌 살기.

검은 눈의 두목 바치는 알레카에서 수금한 은빛 동전들을 자루에 담은 뒤,

빼놓았던 검은 의안을 집어 다시 빈 눈구멍에 끼워 넣었다.

정상적인 푸른 눈과는 달리 의안으로 대체된 한쪽 눈은 전체가 꺼먼 모습이어서 평범한 자들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만한 인상이었다.

이어 검은 의안의 초점을 맞추기 위해 관자놀이를 몇 번 툭툭 두들긴 바치는,

작은 손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곧,

“발라독!”

바치는 밖에 대기하고 있을 자신의 수하를 불렀지만,

동시에 들려온 것은 대답이 아닌.

“억!”

누군가의 비명이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그 비명을 시작으로 별안간 묵직한 우당탕거림이 사방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에 바치는 기민한 감각으로 단박에,

“알레카의 개들이 기어이 다른 곳에 손을 벌렸구나.”

바깥에 있을 적들의 규모를 가늠했다.

들이닥치는 기세와 분전을 하는 소리로 보아하니 적어도 수십 이상의 수준 높은 적들이 닥쳤음을 알아챈 그는,

뒤에 거치된 자신의 단짝이자 무기인 스파타를 집어 들었다.

혈석이라 불리는 난쟁이의 합금으로 만들어진 그 무기는 바치의 또 다른 상징이기도 했다.

“어디 끝까지 와 봐라, 알레카의 개들아!”

바치는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성큼성큼 방문을 박차고 밖을 향했다.

그리고는,

“바크!”

누군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기 시작한다.

바크,

그는 바치의 아들이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바치의 또 다른 피해자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래도 자식이라고 바치는 바크를 끔찍이 아꼈고, 그런 아낌을 받고 자란 바크는 조직 내에서 자연스레 이인자의 자리에 들어설 수 있었다.

“바크!”

그런 아비를 닮아서일까.

바치는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자연스레 가장 은밀한 위치에 있는 복도로 발을 들였다.

“아직도 방아질 중이냐!”

이어 첫 방문을 왈칵 열면,

간신히 숨이 붙은 채 널브러져 있는 여인 하나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다만 바치가 찾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방을 다시 나서는데,

번쩍!

벼락일까,

아니면 순간 태양이 밤을 찢고 고개를 내민 걸까.

갑작스럽게 일대가 일순간 반짝였다.

그리고 그 빛이 사그라들기 무섭게 들려오는,

“으아아악!”

“아아악!”

자지러지는 비명.

“씨발…, 뭐야!”

당황한 바치가 성큼성큼 복도 밖을 빠져나가려는데,

다시 한번.

번쩍!

하는 섬광과 함께 막 그가 지나친 유리창에 붉은 피가 튀었다.

이때부터 바치는,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래도 그의 기민한 감각은 일반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선 것이었으니까.

이윽고 중앙 정원으로 나간 바치는,

“허어…,”

놀란 숨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팔과 다리가 낱개가 되어 사방에 비산되어 있고, 그마저도 숨이 붙은 이들은 고통에 남은 생명의 심지를 불태우고 있는 와중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당한 공격들은 하나같이,

일격에 이뤄졌다.

이제 바치는 생각을 고쳤다.

쳐들어온 것은 알레카의 개들이 아니라 괴물들이란 것을.

그렇지 않고는 눈앞에 보이는 장면을 설명할 수 없었다.

바치는 분노를 끓이며 정원 밖으로 나와 손목으로 스파타를 휘휘 휘두르며 만반을 다하기 시작했다.

“나와라, 창녀들의 더러운 그림자들아!”

마치 자기의 죄를 시인하듯,

이곳에 벌어진 일방적인 죽음에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검을 휘두르는 그에게,

아주 보란듯이.

번쩍!

또 다른 섬광이 그의 뒤편에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섬광이 멎기 무섭게 뒤쪽에서 날아든 핏방울.

그것이 바치의 볼을 두들긴다.

“뭣!”

곧바로 자세를 다잡고 뒤를 돌아보면,

그곳엔.

밤이 서 있다.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은 어스름을 휘날리며,

막 베어 넘긴 누군가의 머리를 집어 들고 있던 그는 말없이 그것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고작… 한 명이었나…?”

허망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밤을 노려본 바치는 스파타를 거두고 남은 빈손으로 품에서 작은 머스킷 하나를 꺼내 들었다.

“고작 한 새끼한테 당한 거야!”

고함을 지르며 머스킷을 조준한 바치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탕!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동시에 들려오는,

피익!

하는 힘 빠진 쇳소리.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바치는 눈 앞에 펼쳐진 장면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아니,

놓칠 수 없었다.

방아쇠를 당긴 순간,

동시에 그의 앞에 날카로운 불똥이 튀었기 때문이었다.

정황상,

검으로 탄알을 쳐낸 것이다.

가능한가?

아니, 애초에 혼자서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걸 생각하면.

이마저도 가능할 거라고 상정했어야 했다.

바치는 곧바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현명을 쏟기로 작심했다.

“거래를…,”

그러나 운을 떼기 무섭게,

그는 순간 눈앞에서 사라진 밤을 쫓기 위해 이성을 재촉해야만 했다.

겨우 재촉하여 움직인 시선에는,

이미 자신의 턱밑에 도달해 있는…,

끔찍이 아름답지만 동시에 아무런 표정도 없는 이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렇게 시린 은빛이 바치의 한쪽 뺨을 스쳤다.

마치 한겨울의 바람처럼,

스산하기 그지없는 감촉에 바치는 그 자리에서 뒷걸음질 쳤고,

그 뒷걸음질에 맞추어,

방금까지 힘을 주어 스파타를 쥐고 있던 그의 팔이 말끔히 떨어져 나갔다.

“어… 어?”

신경보다 먼저 도달한 인지에 부조화를 느낀 바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좀 더 뒷걸음질 치면,

동시에 그의 반대쪽 팔도 스르르 떨어진다.

“어…,”

이어 고개를 들어 뭔가 말하려고 하면 상체가 무너져 내렸고,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니 자신의 한쪽 다리가 어느샌가 떨어져 나가 있었다.

“히… 히히”

고통 없이 무너져내리는 자신을 보며 정신을 완전히 놓아버린 그가 웃음을 짓는다.

그러다가.

“히히… 어어억! 억!”

뒤늦게 찾아온 고통에 목청껏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어스름을 뒤집어쓴 남자가 바치를 내려다보며 그 굳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오늘 밤은 아주 길 거다, 벌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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