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떨기 꽃 아래 모루 (21)
“아무리 그래도 혼자잖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우리가 가서 도와야 하오!”
알레카의 주민 하나가 호기롭게 외치자 바람 먹은 산불처럼 마을 주민들이 그에 감응하기 시작했다.
“맞서 싸웁시다!”
“어차피 여기서 가만히 있어도 죽는 건 매한가지야!”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테리아는 잠자코 있었다.
그녀 역시 홀로 검은 눈의 본거지를 소탕하러 간 디안이 걱정되었으니까.
제아무리 베나즈라고 해도 그것이 절대가 되진 못한다.
게다가 이곳은 아이베리아가 아니기에 그를 지켜줄 갑주 또한 없다.
그 말은 즉 눈먼 것에 당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뜻이다.
그것이 탄알이 될 수도,
아니면 창대가, 칼이, 심지어는 굴러다니는 돌이 될 수도 있어.
상대보다 명확히 우위에 있는 무력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생존이나 승리에 확신을 가져다주진 않는 법이니까.
디안은 엄연히 소설 블레막의 세계관 내에서 최강자로 판별된 외지인이지만…,
말이 소설이지 이곳은 엄연한 또 다른 세상이잖아.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빌 요행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세상.
그래서 테리아는 번져가는 그들의 호승심을 묵묵히 지켜보며 때가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대충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마을 사람들이 가진 무장의 수준을 모조리 파악한 테리아는 거기에서 가능성을 엿보았으니까.
착취당할 대로 당한 마을 주민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최후의 저항을 준비해온 듯 보였다.
다만 무법자 집단인 검은 눈이 조장한 공포에 짓눌려 그 저항의 시일이 모호해졌을 뿐.
그런 그들에게 있어,
디안의 행위는 엄청난 기폭제가 되었다.
그렇게 모두 들고 일어난 마을 주민들이 솜을 끼워 넣은 조잡한 갬비슨을 걸치고,
날만 바짝 세운 형편없는 무기들을 거머쥔 채 기세를 등에 업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에 테리아는 기다렸다는 듯 그들의 행렬을 바짝 쫓았다.
백에 가까운 행렬 위로 수십의 횃불이 출렁거리고,
짤그락 짤그락,
챙 챙.
제식이라곤 발견할 수 없는 그들의 거칠고도 불협한 행군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곧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저택 앞에 그들은 하나같이 초췌해진 표정으로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덜컥.
눈앞에 나타난 무법자의 소굴 앞에서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거기다,
“왜 이렇게 조용한 거지?”
“그분께서 당하신 거야…!”
“우리가 조금만 더 빨리 왔어도 그분이 죽지 않았을 텐데!”
처음 그들의 호기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번졌던 것처럼.
이번엔 공포가 쏟아져 내려 그들 모두를 흠뻑 적셨다.
그러나 그들 사이로,
창백한 얼굴을 한 채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는 이가 있었다.
그는,
아니 그녀는 라센,
그 가녀린 여인이 곧 조잡한 런들 대거를 치켜세우며 울분을 토했다.
“우리의 이웃이 팔려나가고, 우리의 가족이 눈을 잃었다. 이제 뭘 더 기다려야 하는 걸까!”
그러자,
뒤에 도열해 있던 마을 주민들의 얼굴에 주름진 분노가 내려앉았고.
이윽고 불 먹은 화약에 쫓겨 뛰쳐나오는 탄알처럼,
그들은 저택을 향해 뛰어들었다.
동시에.
끼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안에서부터 열린 저택의 대문.
그 소리에 달려나가던 마을 주민들 모두가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이내 열린 저택 문 너머로,
태연히 걸어 나오는 한 남자.
그는 쓰고 있던 검은 후드를 벗으며 오히려 놀란 표정으로 들이닥치려는 마을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부조화를 일으킬만한 광경에,
라센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이에 별 박힌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던 이는,
디안은.
덤덤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끝났습니다.”
* * *
호출을 받고 저택으로 끌려간 이들을 구하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군데군데 탄식이 터져 나왔다.
잔악하게 능욕당한 이웃들의 모습을 보며,
또 그러한 악행의 대가를 받은 무법자들의 시체를 보며 내뱉은 탄식이겠지.
나는 다만,
무법자들의 최후가 마을 주민들이 가진 분노에 걸맞기를 바랄 뿐이다.
“디안.”
저택 안으로 들어간 마을 주민들 뒤로 모습을 드러낸 테리아가 나를 부른다.
그녀는 곧 내 몸을 구석구석 살피곤,
“다친 곳은?”
걱정을 내비쳤다.
“없어.”
“네게 화약 냄새가 나는데…, 혹시라도…,”
살짝 고개를 내밀어 킁킁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어스름을 집어 코에 파묻었다.
…,
미약한 밤공기 냄새만이 날 뿐인데.
테리아의 후각은 굉장히 예민하구나.
“디안, 네가 총을 쏜 거야?”
“아니, 질리스 한 자루로도 충분했어.”
“그럼…, 저들이 네게 총을 쏜 거잖아!”
“그랬지.”
“어떻게…? 그 후드가 막아주기라도 한 거야?”
글쎄, 나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담백하게 내가 느낀 그대로를 설명하기로 했다.
“검으로 쳐냈어.”
“그게 가능한 거야?!”
내 말에 극렬히 반응하여 묻다가도, 그녀는 혼자 수긍한 듯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그 베나즈의 후손이니…, 그럴 만도 하겠네…,”
그런 그녀의 반응에서,
과거 맥레인이 가진 위상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뭔가 더 할 말이 있었을까.
그녀는 꿀 바른 사과처럼 윤택한 입술을 한참이나 움찔거리다가도,
이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잊어버린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게 말했다.
“돌아가자, 디안.”
피식하며 웃는 그녀에게 나는 그에 걸맞은 웃음으로 화답해주었다.
밤이 깊다.
깊은 만큼 별들도 희미하다.
그 아래 나란히 벤투스 위에 올라탄 우리는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다시 알레카로 돌아와서야,
테리아는 할 말이 떠올랐는지 대뜸 말에서 내리며 내게 물었다.
“그래서, 찾고자 하는 건 찾았어?”
“응.”
“그걸 왜 이제 말해!”
“지금 내게 물었으니까.”
“어… 그렇지….”
머쓱한 표정을 지은 그녀는 이제 익숙한 모습으로 내 손을 붙잡고 집 안으로 끌고 갔다.
그렇게 탁상 위에 마주 앉기 무섭게 그녀는 원서를 꺼내 들었고, 나는 품에 넣어 놓고 있던 작은 보자기를 꺼내 들었다.
이어 묶인 보자기를 풀면,
또르르 하고 안에서 검은 구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바치의 검은 눈이야?”
“맞아.”
아주 느린 죽음 끝에 놈에게서 빼낸 물건이지.
“참, 이것 말고도 꽤 흥미로운 것을 가져 왔어.”
서둘러 집 밖으로 나가 벤투스의 안장에 묶어둔 물건을 가지고 돌아오면,
그녀는 호기심으로 충만한 두 눈을 반짝이고 있다.
“그게 뭔데?”
“바치의 검.”
돌돌 말린 천을 풀어헤쳐 붉은 날의 스파타를 그녀에게 보이자,
테리아는 아까와는 달리 좀 더 본격적인 표정으로 그것에 달려들었다.
그래, 그녀는 대장장이였지.
새삼 깨닫네.
정말이지 날카로운 눈으로 스파타를 둘러보던 그녀는 금방 그것의 정체를 까발렸다.
“이터누티, 귀 큰 자들의 금속으로 만든 검이야. 다만 붉은 칠은 한참 이후에 따로 칠해진 것이네. 아마도 주인의 취향에 따른 결과겠지.”
날을 세운 뒤 가늘게 뜬 눈으로 품평을 이어가던 그녀는 눈썹을 찌푸렸다.
“칠은 연금술사가 했네, 과실의 싱그러움을 발랐어. 뭔가 피에서 뽑은 색소인 마냥 거창한 것일 줄 알았는데 말이야. 다만 도색 솜씨가 형편이 없어 검의 균형을 모조리 망가트렸어.”
이윽고 그녀는 스파타를 내려놓으며 결론 내렸다.
“관상용으론 준명품, 병기로는 영 꽝이야. 나중에 여비가 필요할 때 비싼 값을 받고 파는 게 좋겠어.”
“그래, 그렇게 할게.”
“감정비로 판 값에 2할만 받을게.”
새침한 그녀의 제안은 나로선 도저히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참, 중요한 건 따로 있지!”
다시 바쁘게 원서를 넘기던 그녀는,
곧장 원하는 대목을 찾았는지 흥미진진한 얼굴로 벌떡 일어나 내 옆으로 다가왔다.
“이것 봐.”
[참담한 바치의 최후 끝에 남은 것은 그의 상징인 검은 눈뿐이었다.]
[알레카의 소식을 들은 알레의 두 아이는 검사를 찾아와 그것의 진정한 쓰임새를 알려주었다.]
“알레의 두 아이가 찾아온다..?”
이 소설, 그러니까 이 세계의 주인공이 날 찾아온단 말인가?
테리아도 그 내용에 살짝 흥분한 듯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어쨌든 소설 속 세상이다.
그러한 이야기의 주인공을 만난다는 건 누구라도 설레는 일이지 않겠어?
다만 그 시기가 언제인지가 불분명하기에,
또.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부디 다음 날이길 기약하는 수밖에.
* * *
밤을 찬양하던 새들의 지저귐이 끝나고,
아침을 찬양하기 위해 작은 새들이 소란스레 짹짹거린다.
따가운 귀를 매만지며 잠에서 깨면, 맞은편 탁상 위에 고개를 박은 채 곤히 잠들어 있는 테리아의 모습이 보인다.
창문을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에,
그녀의 얇은 금발이 눈 시리게 반짝였다.
금발 사이사이에 섞인 희미한 금발은 그 색이 참으로 신묘해서 나도 모르게 빤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떤 불을 다뤄왔기에,
그 그을음에 머리 색이 변한 것일까?
아니 어쩌면 그녀만이 할 수 있는 불의 다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오른손은 그 불이라는 것을 직접 어루만질 수 있었으니까.
조심스럽게 시선을 옮겨,
옷 속에 살짝 드러난 그녀의 오른 어깨를 쳐다보았다.
미끄러지듯 얇은 목선 아래, 선명한 쇄골이 계곡을 이루듯 솟아있고.
그 옆에 미끈한 어깨 아래로 아주 희미하게 보이는,
의수와 팔의 경계.
마치 물감에 팔 하나를 푹 담근 듯,
비교적 창백한 은빛과 그에 버금가는 흰 피부가 해안선처럼 모호한 대치를 이루고 있다.
저 팔이야말로,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수수께끼겠지.
한참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떼면, 나도 모르게 그녀의 드러난 윗가슴에 그 시선이 멈추었다.
그러니까 이건 불가항력이야.
엎드려 자는 그녀의 드러난 부분 가운데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고…,
고개를 획 돌린 나는 어스름을 벗어 그녀의 목 위를 폭 덮어주었다.
그렇게 탁상 위에 나뒹구는 검은 눈을 집어 들어,
머릿속을 환기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새벽까지 꽤 소란이 일어난 듯,
이른 아침 알레카의 거리는 제법 부산스러웠다.
몇몇 소년들은 갈퀴를 가지고 거리에 걸려 있던 검은 눈의 상징들을 묵묵히 뜯어내었고,
여인들은 거리에 매달린 홍등을 손수 거둬 짓밟히도록 바닥에 방치했다.
다시 알레카는 햇살만이 감도는 곳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다시 화재는 손에 담긴 검은 눈으로.
도대체 이것은 어디에 쓰이는 것일까?
손바닥 위에 또르르 굴려보기도 하고, 집게손가락으로 콕 집어 요리조리 돌려 보던 나는.
검은 눈의 동공에 해당하는 허연 점과 눈을 딱 마주쳤다.
그런데 그 마주침에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위화감이 뒤따르는 것 같아.
유심히 동공에 시선을 쏟다가 앞에서 갑자기 나타난 인기척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면,
그곳엔.
붉은 머리에 범상치 않은 청년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름다운 용모도 그러하고, 뭔가 존재 자체가 희미한 감이 느껴져서…,
곧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그가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는 걸.
“알레의 두 아이.”
“반갑습니다, 디안 경.”
“제 이름을 어떻게 아십니까?”
“이미 아시다시피 제겐 예지 능력이 있거든요, 물론 이 세계 내에 국한된 것이지만.”
사내는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의 존재가 알레카에겐 축복이 되었습니다, 이런 ‘자연재해’에 해당하는 외지인들의 출몰만큼 흥미로운 사건도 없겠지요.”
그런데,
덜컥 궁금한 게 하나 있어.
“알레의 두 아이라는 명칭을 쓰는 걸 보면…, 다른 하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자 사내는 미묘한 표정으로,
“제가 바로 알레의 두 아이입니다.”
구태여 또박또박 내게 대답했다.
그래,
그 대답에 순간 머릿속에 한 줄기 빛이 관통했다.
소설 블레막은 엄연히 탑 내 세상.
두 아이라는 명칭을 개인이 쓰는 것을 봤을 때.
“빙의자였군요, 당신은.”
“날카로우십니다, 그 검술만큼이나.”
알레의 두 아이는 활짝 웃으며 작게 박수했다.
“시간이 없으니 이제 본론만을 말씀드리지요, 당신은 곧 엘릭시르를 손에 넣게 될 겁니다. 두 눈으론 결코 볼 수 없는 것을 봄으로써.”
두 눈으론 결코 볼 수 없다.
하면.
넌지시 손에 들린 검은 눈을 그에게 내밀자,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그 눈에 시선을 쏟으십시오, 그럼 그 눈은 당신이 쏟은 시선만큼의 시간 동안 그것만이 볼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해 줄 것입니다.”
짧게 설명을 마치곤 몸을 돌렸다.
“잠깐.”
아직 묻고 싶은 게 하나 더 있어.
“당신은 지금 붉은 머리의 청년입니까, 아니면…?”
청년은 고개를 돌려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누구인 것 같습니까?”
그의 물음에 나는,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그가 정확히 누구인지를 몰랐으니까.
그래서 그가 사라지고 한참 후에나 퍼뜩 생각이나 집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그렇게 테리아의 머리맡에 있는 원서를 집어,
가장 끝 페이지를 펼쳐보면.
그 안에…,
일찍이 그 안에 담겨있던 해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타히그는 소년의 복수를 돕길 결정했다. 소년 역시 그의 도움을 받길 바랐기에.]
[이윽고 그들은 알레의 두 아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