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03화 (203/365)

203화. 떨기 꽃 아래 모루 (23)

밤하늘을 배경 삼아 호수가 투영해낸 것.

동시에 호수가 밤하늘 속에 숨겨놓은 것.

종합한 단서로 도달해낸 마지막 결론은 그러했다.

햇살이 특산품인 알레카.

알레카를 좀먹고 있던 검은 눈.

하나의 결론을 위해 적재적소에 배치된 이야기적 장치들.

그것은 정말 우연의 일치라고 해도 될 것이었지만,

그래.

이곳은 타히그의 소설 속 세상.

모든 것은 그의 의도대로 진행되었을 뿐이겠지.

내 일련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테리아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짧은 감상을 내밀었다.

“이게 바로 마법사의 탑이라는 거구나.”

이제 노를 저어 잔잔한 호수를 깨트려 나아가,

밤하늘엔 없는 별 쪽으로 향했다.

수면 위 거울처럼 비추어진 밤하늘.

그곳에 걸쳐져 있는 밝은 점 하나.

출렁이는 파문 아래서도 흔들림 없이 반짝이는 그것을 향해 조심스레 손을 뻗으면.

곧 손끝에서 얇은 유리막 같은 감촉이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호수 속의 별 하나를 건져 올렸다.

유리구슬.

그 안에 너울거리는 망울진 빛 뭉치.

테리아는 넋 나간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기꺼이 이지적 호기심을 발휘하여 판별을 시작했다.

“오랜 세월 하늘을 투영했던 호수는 그것을 기억 삼아 별 하나를 빚어내지 않았을까.”

연금술에 대해 잘 알진 못했지만,

그녀의 그 말에 공감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엘릭시르라는 건 빛을 말하는 거였구나.”

그러면서 든 궁금증을 뱉자 테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엘릭시르는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야, 이처럼 빛이 될 수도 아니면 한 모금의 물일 수도 그것도 아니면 한 줄기 바람일 수도 있거든.”

내게 답을 내밀어 주었다.

“단지 호수가 빚은 것이 빛이었기에, 엘릭시르 역시 빛의 모습으로 나타난 거야.”

자연이 연금해낸 정수라 이 말인가.

손에 거머쥐고 있음에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음에도 그것은 여전히 내게 비현실적인 감각을 주고 있었다.

혹여나 깨질까 싶어 조심스레 어스름으로 감싼 뒤에야.

우리는 넋 나간 감상을 끝내고 다시 노를 저어 뭍으로 나올 수 있었다.

나룻배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막 배 밖으로 뛰어나오려는 테리아에게 손을 내밀면.

그녀는 곧바로 내 손을 붙잡고 배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내 손을 놓지 않으려는 듯 제법 힘을 주어 잡다가도.

못내 머쓱한 표정으로 놓으려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빠져나가려는 그녀의 손을 재차 붙잡았다.

그러자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작은 딸꾹질 소리를 냈다.

두 눈은 마치 밤 아래 활동을 개시한 부엉이같이 둥그레서 그 모습이 작은 짐승처럼 보였다.

“진흙에 발이 빠질 수 있으니까 조심해.”

그런 그녀에게 주의 주며 잡은 손을 이끌고 나아가자, 그녀는 아직 벙벙한 표정으로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잘도 따라 주었다.

사실 이건 명분일 뿐이고,

그녀의 손을 금방 놓기는 싫었거든.

그녀가 내 손을 힘주어 잡았을 때, 솔직히 내심 기뻤어.

슬슬 축축한 뭍이 끝나간다.

그럼 계속 손을 잡고 있을 명분도 사라지겠지.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벤투스는 구태여 뭍에서 올라오는 우리에게 먼저 다가왔다.

푸르릉.

뜨거운 콧김을 내밀며 잇몸을 드러낸 벤투스가 내게 고개를 내밀어 오는데,

그걸 또 어떻게 미워할 수가 있겠어.

* * *

다시 알레카의 유리 지붕이 일하기 시작하는 아침.

우린 곧바로 빈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알려주었다.

그러면 그는,

눈 밑 주름 가득 메울 만큼 눈물 쏟으며 우리에게 연신 절에 가까운 인사를 거듭했다.

이곳에서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을 기다리며,

이후에 홀로 남게 될 딸에 대한 걱정에 시달렸던 노인은…,

아니.

한 아버지는 그제야 눈물 뒤로 웃음 지을 수 있었다.

이윽고 알레카의 마을 주민들이 빈을 돕기 시작했다.

그들은 빈을 위해 가장 거대한 유리 지붕이 있는 건물을 내주었는데,

일찍이 빈이 이곳에서 쌓은 신망 덕분에 마을 주민들 역시 그의 딸이 낫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이제 치료를 위해 딸을 운반하는 일만 남은 가운데, 빈은 여러 도움을 한사코 거절하며 마지막 고집을 부렸다.

그 고집은,

자신이 직접 딸을 업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늙은 몸으로 꾸역꾸역.

중년의 딸을 업은 아비는 묵묵히, 버거운 티 하나 내지 않고 주민들이 내준 건물을 향해 걸었다.

“내 딸, 왜 이렇게 가벼워졌나.”

다정하고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탄식과 함께.

이제 나와 테리아는 엘릭시르를 이용해 그녀를 치료할 계획을 세웠다.

호수에서 찾은 엘릭시르는 빛의 모습을 갖고 있었으니.

마땅히 빛으로서 빈의 딸에게 작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실 어제 호수에서 엘릭시르를 찾은 순간, 그 사용법의 해답 역시 찾은 거나 다름이 없었다.

이곳은 타히그의 소설 속 세상.

왜 빛으로 된 엘릭시르가 알레카 인근에 있었겠나?

지붕 위에 올라선 나는 곧 유리 지붕 아래에 비친 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역시 유리 지붕 위에 서 있는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 무언의 신호를 주고받은 뒤.

빈은 딸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그에 맞춰 나는 품에서 엘릭시르를 꺼내 들었다.

유리막 속 망울진 빛, 그것은 해의 시선이 내리꽂히는 지금 가운데서도 가장 시리고 반짝이고 있다.

이내,

그것을 번쩍 들어 올려.

유리 지붕을 향해 내던졌다.

팡!

하는 미약한 충격음과 함께 유리 지붕 위에서 부서진 엘릭시르는,

안에 담고 있는 망울진 빛을 울컥 토해내며 사방에 분출하기 시작했다.

뭐라 설명해야 할까.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광경을 비유하자면…,

폭설이 내리고 있는데, 그 눈 알갱이 하나하나가 결정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빛으로 이루어진 형용할 수 없는 입자들은 곧 유리 지붕에 스며들어 그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건물 아래서 지켜보고 있던 테리아와 마을 주민들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박수를 보냈다.

끝내 한바탕 번쩍이던 별이 지고.

별안간 빛 떠난 자리에 먹먹함만이 감돌기 시작할 때.

빈은 서둘러 딸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에 맞춰 지붕 위에서 뛰어내려 단번에 착지한 나는 테리아와 함께 그를 따라 건물 위를 올랐다.

해서 도달한 지붕 아래.

나와 테리아는 그 문턱 앞에 멈춰 서서.

조용히.

조용히 부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미안하다, 너무 늦었어. 아빠가 너무 늦었어.”

“아빠…, 아버지…, 미안해요, 죄송해요.”

* * *

엘릭시르가 어떤 작용을 거쳐서 그녀를 깨웠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엘릭시르이기에 마땅히 그녀가 의식을 차렸으리라 생각할 뿐이다.

그래, 이해가 없더라도 엘릭시르는 그 자체만으로 기적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러니 이에 대해 누군가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그저…,

‘기적이 발생했다.’

라고 설명할 수밖에.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우리는 떠날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빈의 말에 따르면 다시 바깥세상으로 가기 위해선 온 것을 똑같이 되풀이하면 된다고 했었다.

그 이유로 빈은 먼저 딸 셀리를 안전히 내보내기 위해 알레카를 일찍 떠났다.

그렇게 나와 테리아도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밖으로 나섰는데.

“완전 까맣게 잊고 있었어.”

바깥 하늘을 바라보던 테리아의 말에,

나도 같은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완전히 잊고 있었네.”

태엽 반지를 끼고,

햇살을 비집고 구릉을 넘어왔었지 우리는.

지금 하늘은…,

이제 막 석양을 다 토해내고 제풀에 꺾여 내려가는 해의 모습이 담겨 있다.

아무래도 이곳을 빠져나가는 건 내일로 미뤄야 하겠어.

애써 테리아와 허무함을 나누던 우리는 벤투스 안장에 묶어놨던 짐을 하나둘 풀기 시작했다.

그런 우리를 옆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소녀.

라시는,

“우리가 할 수 있어!”

대뜸 일어나 소리치더니 방방 집안으로 뛰어들어간다.

그리곤 언니 라센을 끌고 온 라시는.

“오빠랑 언니가 우리에게 아침을 줬으니까! 우리도 아침을 줄 수 있어!”

확신에 찬 목소리로 씩씩하게 재차 소리쳤다.

그 말에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라센은,

포근한 미소로 웃다가도 이내 진지한 표정을 하곤 거리로 달려나가 모두가 다 들리도록 소리쳤다.

“모두 아침을 준비하세요!”

그런 언니를 따라 라시 역시 거리로 방방 달려나가,

“아침을 준비하세요!”

하고 소리치면 곧,

마을 주민들이 거리 밖으로 나온다.

라센은 그런 그들에게 무언가를 얘기하면, 그들은 기꺼이 수긍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라센이 허겁지겁 우리에게 달려와 숨을 헐떡이다가도.

“가세요, 조심히.”

손가락으로 알레카 저 너머를 가리키며 히죽 웃으면.

나와 테리아는 서로 미묘한 감정을 주고받다가도 라센의 그 확고에 찬 표정을 보곤 벤투스 위에 올라탔다.

떠남을 직감했나.

벤투스는 벌컥 박동을 들이키며 금방이라도 바람이 될 준비를 마쳤다.

고삐를 살짝 놀려 움직이면,

벤투스는 알레카의 거리 사이를 유려히 가로지르고.

그런 가로지르는 우리 뒤로는.

알레카의 유리 지붕들에서 하나둘 강렬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 와중에도 저 먼 거리에선,

“아침! 아침을 준비하세요!”

한 번 넘어졌는지 볼에 흙을 묻히고 있는 라시가 열렬히 소리를 치고 있었다.

유리 지붕에 저장해놓은 햇살이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고,

그 뒤로 달려 나온 몇몇 마을 주민들이 기꺼이 우리를 위해 칭송하며 손뼉 친다.

알레카를 완전히 다 빠져나왔을 땐.

하늘은 햇살로 물들어 밝게 빛나고 있었다.

말머리를 돌린 나는.

마치 빛으로 자라난 나무와 같이,

장성한 빛의 근원이 된 알레카를 내려다보았다.

그 아래 가장 앞장서서 두 손을 흔드는 라시와 바로 뒤에 웃으며 손 흔드는 라센.

그리고 열렬한 인사를 전하는 마을 주민들.

그들의 안녕에.

안녕.

말머리를 다시 돌리고,

햇살에 젖은 구릉을 향해 박차를 가하면.

벤투스는 한 줄기 바람이 되어 날아가고.

그에 맞춰 테리아는 내게 더욱 기대온다.

구릉에 내리쳐진 햇살 막을 가로질러 이내 그 너머로 넘어가니.

소설 블레막 내 우리의 이야기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 * *

한낱 짧은 꿈을 꾼 듯.

구릉 너머로 쏟아지듯 내려온 우리는 막 어둑해지는 하늘 아래 내동댕이쳐졌다.

그런 우리 앞에는,

멀리 편자 모양 성벽의 리디굴람이 보였다.

테리아는 제법 시원섭섭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돌아온 거네, 우리.”

“그래, 돌아왔네.”

타히그의 세상은,

다시 떠올려도 가슴 두근거릴 그런 곳이었어.

리디굴람에 들어서서,

마치 현실을 일깨우는 것 같은 지독한 악취를 거쳐.

빈의 만물상으로 들어서자 그 안에 있던 노인은 여지없이 우리를 반겼다.

“무엇을 찾고 있는가?”

그는 팔자주름을 실룩거리며 우리에게 물었고,

이에 테리아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재회를 찾고 있습니다.”

그럼 노인은 곰곰이 생각을 더듬거리다가,

“그런 게 내 가게에 있었나아…?”

고심 끝에 힘겹게 결론을 내뱉었지만.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만물상의 문이 다시 한번 벌컥 열렸다.

그 소리에 우리는…,

작은 미소를 지어 나눴다.

“형님!”

망각을 박찬 노인이 두 눈을 반짝이며 막 만물상에 들어온 이에게 달려오면,

“아우야, 내 아우야.”

마찬가지로 만물상을 찾아온 노인 역시 달려가 서로를 끌어안았다.

테리아의 말 대로,

만물상엔 막 뜨거운 재회가 입고되었다.

* * *

빈은 잡동사니로 이루어진 미로 속에서 어렵지 않게 오르미그의 기름을 찾아내었다.

물론 그에게 있어서 어렵지 않은 것이지 다른 이였으면 기름을 찾기 위해 만물상 전체를 뒤엎어야 할 위치에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에게 물었다.

“찾는 것이 또 있을 텐데, 무엇인지 말해 보게.”

이에 반신반의하면서도 기대에 부푼 테리아가,

“소로스티와 살렌의 고성도 찾고 있습니다.”

조심스레 물어보면.

빈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다시 미로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 그의 반응에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수확물을 마주한 농부처럼 어벙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그렇게 다시 빈이 걸어 나왔을 땐,

그의 수중에 흙이 담긴 유리병이 함께였다.

“우리 가게 이름이 괜히 만물상이겠는가, 적어도 찾고자 하는 물건들 가운데 두 개쯤은 팔아줘야 만물상이라 할 수 있는 거겠지.”

오르미그의 기름,

그리고 소로스티.

우리는 목표했던 세 물건 가운데 두 가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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