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떨기 꽃 아래 모루 (24)
리디굴람을 빠져나와 남쪽의 큰길을 따라 한참을 이동하다 보면 곧 교역소 하나가 나온다.
[요콘의 향방]
하여,
[요콘의 솥]
우리는 작은 교역소에 딸린 여관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규모가 작을 뿐이지 교역소를 오가는 마차들은 하나같이 고급스러운 것들이었는데,
개중에는 금을 싣고 가는 마차도 간간이 보였다.
금의 운반로라기엔,
확실히 교역소의 규모는 터무니없이 작아 보이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연히 운반을 지속하는 것을 보면, 다른 믿을만한 안전장치가 있다는 소리겠지.
예를 들자면,
금실은 마차에 달린 같은 문양의 깃발일 수도 있다.
위상도 엄연한 무기니까.
특히나 깃발이 난립한 아이베리아에서는 그 위상이 더더욱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기에,
유통로 하나를 온전히 지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하여 내심 부러웠다.
저 깃발이 거머쥔 위상이.
전역에 걸쳐져 있는 베나즈의 오명을 모두 씻어낼 수 있을 만큼,
나는 베나즈의 깃발에 위상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디안?”
테리아가 마주 앉아있는 내 손등을 쿡쿡 찌르며 부른다.
나간 넋을 추슬러 허겁지겁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픽 웃으면서도 내 심중을 어렵지 않게 간파해냈다.
“누가 깃발의 주인이 아니랄까 봐.”
“어떻게 알았어?”
“같은 대비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당연히 알지.”
그녀는 의기양양하면서도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금의 유통로에 이런 작은 교역소라니, 그런데 너는 아까부터 마차에 달린 깃발에만 시선이 가 있잖아.”
“앞으로는 주의해야겠네.”
“뭐를?”
“행동으로 쉬이 의도를 드러내지 않도록.”
“그건 같은 깃발끼리나 해!”
“물론 테리아 네겐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내 말에 그녀는 눈을 요리조리 굴리다가 머쓱한지 고개를 내린 채 앞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잠깐 보인 행동만으로 의중을 파악해낼 만큼 누구보다 날카로운 지성과 이치를 갖고 있지만,
반대로 세상을 등지고 살아간 탓에 감정을 속이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그래 이곳에서 가장 큰 대비를 가진 건 다른 게 아니라 테리아 그녀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 많이 알고 싶었다.
그녀에 대해서.
무엇으로 대화의 물꼬를 터야 할까?
하면,
“테리아.”
멋쩍은 표정으로 창밖 지나가는 마차에 신경을 쏟고 있던 그녀는 내 부름에 또 순진한 표정으로 응했다.
“스케비는 무슨 일 때문에 그런 신세가 된 거야?”
그 말에 그녀는 대뜸 한숨부터 내쉬었다.
“아버지의 오랜 친구였어, 뭐 그것도 스케비가 일방적으로 주장한 관계겠지만.”
그리곤 시선을 사선으로 둔 채 과거를 회상하며,
제법 즐거운 이야기인 듯 나지막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버지가 작품 세 개를 완성하면, 스케비가 그중 하나를 떼다 팔곤 했어. 물론 가끔 물건 판 돈을 들고 잠적할 때도 있었고.”
“그것참 골치 아픈 영업사원이었네.”
내 말에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어느 날에 아버지가 만든 물건이 명품임을 간파한 어떤 무리가 그를 납치한 거야.”
그녀의 이야기는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렇게 물건을 빼앗은 무리는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서 스케비를 마법사의 탑 안으로 밀어 넣었데.”
확실히, 인멸의 수단으로 쓰기엔 확실한 방법이네.
“그런데 그거 알아? 어떤 소식지에 적힌 기사를 봤는데, 그 기사의 서두가 이거였어. 마법사의 탑, 유기의 온상이 되다.”
“뭔가 씁쓸한 기사네.”
“그러게, 두 발 걷는 자들이 가진 불신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그때 살짝 엿볼 수 있었던 거 같아.”
바꿔 말하면,
그로 인해 마법사들의 탑은 더욱 굳건한 건설을 할 수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들의 상상으로 만든 세상도 결국,
두 발 걷는 자들이 채워져야 비로소 완성될 수 있을 테니까.
세상 돌아가는 생리라는 게,
언제나 좋은 소리를 내며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어쨌든!”
이야기가 곁길로 빠지기 직전, 테리아는 강한 어조로 내 이목을 집중시킨 뒤 이야기를 계속했다.
“스케비는 탑 안에서도 제 버릇 남 못 주듯 입을 놀려대며 잘 살았던 모양이야. 그곳에서 벌어지는 도박판을 섭렵할 정도로.”
“여러모로 대단하네.”
“그치, 그러다가 굉장한 실력의 도박사를 만났는데.”
은근한 눈빛으로 고개를 내밀어오는 테리아에게,
순간 몰입했다.
그리고 그러한 몰입에 부응하듯 그녀는 무시무시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
“그 도박사가 탑의 주인인 마법사였던 거야.”
그것참,
속된 말로 엿 된 거네.
“처음 그의 정체를 몰랐던 스케비는 당연하게도 그를 이기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계속해서 덤벼들었데.”
호승심이란 게 어쩔 땐 제일 무서운 법이지.
“결국엔 스케비는 판돈을 모두 잃었지만…, 마법사는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또 다른 제안을 해왔어.”
“스케비의 정신 일부를 요구했나?”
“아니, 슬프게도 마법사는 스케비에게 빙의할 맘이 없었데.”
그게…, 슬퍼할 일인가?
내 아리송한 표정에 그녀는 히죽 웃었다.
“스케비가 그랬어, 빙의자가 되면 좀 더 재미난 인생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고.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마법사는 난쟁이인 스케비에게 빙의할 생각이 없었나 봐.”
“왜?”
“난쟁이에 빙의해봤자 특유의 좁은 사회 안에서 살아야 하는 건 변함이 없고, 또 그 사회 내에서 안경잡이 짓을 해봤자 도태될 뿐이니까.”
갑자기 그녀의 이야기에 감정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손재주가 좋지도 않아, 외모가 뛰어나지도 못해, 거기에 난쟁이 사회를 벗어나 살 정도로 강인하지도 않은데? 내가 마법사여도 스케비에겐 빙의하지 않았을 거야!”
“그… 래.”
“대신 마법사는 호승심에 대한 대가를 걸겠다 약속하면 계속해서 도박에 응해주겠다 했어.”
“그리고 스케비는 그 제안에 응했겠네.”
“그렇지.”
내 대답에 흡족한 표정을 지은 그녀는 이제 흘러가듯 태연히 읊조렸다.
“그리고 그 결과는 보다시피…,”
“쥐의 몸에 빙의된 거고?”
테리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녀는 끝내,
“하지만 그런 그가 곁에 있었기에 숨어 살면서도 바깥세상을 훔쳐볼 수 있었어, 그건 내 삶에 있어서 제법 큰 활력소거든.”
스케비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말 속에 담겨 있는 고독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도 엿볼 수 있었어.
분위기가 가라앉은 게 부담스러운 것인지 테리아는 은은한 미소를 띠며 썩 유쾌함을 내비쳤다.
* * *
직후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어진 소설 블레막에 대한 이야기로 한참을 떠들었다.
테카테 호수에서 엘릭시르를 건져 올렸던 그 순간.
유리 위에 엘릭시르를 던져 깨트렸던 그 순간.
그것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내 뇌리에서 벗어나지 않을 장면이었으리라.
“그래서, 말해줘.”
어느새 테리아는 과일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검은 눈 일당과 벌였던 싸움은 대체 어떻게 진행된 거야?”
“글쎄, 뭔가 미사여구를 덧붙여 설명해주고 싶어도 과정 전체가 굉장히 간결해서…,”
“그럼 그 간결한 채로 말해 봐.”
테리아는 양손으로 턱을 괸 채 두 눈으로 궁금을 쏟았다.
“테리아, 네가 만들어 준 섬광을 뿌리고 열댓씩 베었지.”
담담히 운을 떼는 내게,
그녀는 손바닥을 들이밀며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따졌다.
“아니…, 그렇게 간결하게는 말고…,”
“그래? 첫 섬광 첫 타격은 아래에서 위로 올리는 수평 베기로 적의 넓적다리 혈관을 끊었고…,”
기억을 더듬어 설명하는 나를 보고,
테리아는 끝내 경악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역시 베나즈는 베나즈인가 보네…, 차라리 너의 그 검술을 실제로 구경해봤으면 좋겠다. 그럼 그 담담함을 나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럴 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하지만 그녀 덕분에 다시 상기해보니,
검은 눈 일당과 싸움을 벌이면서 처음 느껴보는 위화감이 들었던 적은 있어.
그러니까 바치가 쏜 총알을 튕겨냈을 때.
그것은 분명 맥레인을 통해 완성된 내 검술이 아니었다.
본능? 아니면 그보다 앞선 감각?
다만 위화감 속에 이질적인 것은 없었던 건 확실한데…,
이것마저도 내가 가진 비전의 연장 선상일까?
만약 바치가 보다 더 수준급의 실력이었다면,
나와 대등한 합을 주고받을 정도의 검사였다면.
그럼 아마도 그때 느꼈던 위화감에 대한 답을 내놓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운명의 노래 ‘그다음 소절’이었을 지도 몰랐을.
“참.”
길바닥에서 야영하지 않아도 되어서 그런지, 그녀는 부쩍 흥이 오른 모습으로 운을 뗐다.
“알려줄까? 우리가 구한 물건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이어 그녀는 옆에 놓아두었던 짐가방 속에서 얇은 유리병에 담긴 오르미그의 기름을 꺼내 들었다.
“오르미그의 기름엔 또 다른 이름이 있어.”
“어떤 이름인데?”
“불의 기억, 닿은 불길의 온도는 물론이고 그 불길의 춤사위까지도 기억해서 붙여진 이름이야.”
담담히 설명하는 그녀에게,
이번에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내 쪽에서 지어야만 했다.
“그쪽 세계는 역시 어렵네.”
“생각해보면 간단해, 불은 아니지만 불과 같은 성질로 전도 역할을 하는 기름이라고 생각하면 말이야.”
궁금하네,
“어떻게 그런 성질을 갖고 있을 수 있지?”
테리아는 이지적인 눈빛으로 내 물음에 흔쾌히 답했다.
“오르미그는 땅을 기는 뱀이거든, 그것도 불을 뿜는. 기름은 그 오르미그의 목젖에서 나오고. 아마도 불을 뿜기 위한 기관으로서 존재하는 거니까 그런 성질을 갖고 있지 않을까?”
“그렇겠네.”
“다음으로는…,”
신난 얼굴로 다음, 흙 담긴 유리병을 꺼낸 그녀는 흥얼거리기까지 하며 설명을 이었다.
“설마 리디굴람에서 소로스티를 구할 수 있었을 줄이야! 덕분에 우리가 움직여야 할 동선이 절반 가까이 줄었어!”
신이 난 듯 고개를 좌우로 작게 흔들다가 뚜껑을 열어 안에 담긴 흙냄새를 맡은 그녀는 이내 흡족한 표정을 짓다가,
“맡아볼래?”
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내게 권하였다.
그래서 맡아보면.
전혀 예상치 못한 냄새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곡물의 고소함이 진하게 느껴지면서도,
달콤하게 녹인 설탕 냄새?
금방이라도 손으로 덜어 입에 집어넣어도 될 만큼 맛있는 냄새다.
“너 그러다 흙 퍼먹겠다.”
킥킥거리며 놀리는 그녀의 말에 얼른 고개를 뒤로 물린 나는 그럼에도 놀란 소감을 솔직히 전할 수밖에 없었다.
“순간 냄새 때문에 되게 맛있는 음식처럼 느껴졌어.”
이어지는 내 순수한 소감에 그녀는 공감을 내비쳤다.
“맞아, 소로스티는 두 발 걷는 자에겐 아주 맛있는 냄새를 풍기거든.”
“얘도 분명 다르게 불리는 이름이 있을 것 같은데.”
“당연히 있지, 한 번 맞춰볼래?”
“어…, 사료…?”
“…, 아니, 편애하는 흙이야.”
“그… 으래.”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던 테리아는 결국,
“푸학!”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소로스티는 주어진 상황을 마치 편애하듯 그러한 방향으로 변질하려는 성질이 있어. 그래서 소로스티가 있는 목걸이 섬, 모닐은 계절에 따라 그 모양이 아주 천차만별로 변모한다고 알려졌지. 마찬가지로 달콤한 냄새가 나는 것도 냄새를 맡으려는 자들을 편애하기 때문이야.”
“그거 정말 특이한 흙이네…,”
“부자들 사이에선 방향제로 아주 고가에 거래되는 희귀품이기도 해.”
설명을 이어가다가도,
다시 참았던 웃음을 쏟아내는 테리아를 보니.
내 입꼬리도 절로 올라갔다.
그러면서 문득 창밖을 내다보면.
어느새 날은 완전히 어둑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