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떨기 꽃 아래 모루 (26)
벤투스의 부드러운 편자 소리에 맞춰,
우리는 자연히 서로의 과거를 되짚어갔다.
그녀의 오른팔을 자른 건,
그녀의 아버지가 몸담고 있던 조합의 난쟁이들이었고.
비단 그들이 아니었어도 어머니 쪽 뿌리의 기술자들이 언제라도 쳐들어와 같은 짓을 저질렀을 것이라고 했다.
난쟁이와 귀 큰 자 사이에 있는 종간의 벽을 생각하면 확실히 그 사이에서 혼혈이 나올 가능성은 적다고 봐야겠지.
게다가 부모 모두가 기술적 소양을 가진 자들이라고 한다면.
그들에게 있어서 테리아는 현자의 법칙에 제대로 반박하는 존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을 거다.
그런데 그런 나머지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괜히 가슴이 쓰라릴 정도로 울컥했다.
이 세상엔 이미 인챈트가 걸린 물건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있잖아.
그것들은 분명 종간의 협의를 통해 나온 것일 테고.
그런 협의가 만연한 세상이건만,
단지 피가 섞였다는 것만으로도, 협의가 필요 없다는 이유만으로도 핍박받아야만 한다는 건.
이기적이고 또 가혹하기 짝이 없다.
맥레인이 내게 이렇게 말했었지.
인챈트에는 수많은 이해가 얽혀있다고.
당장 마그나베노스에 얽힌 것만 생각해봐도 그 이해관계가 얼마나 복잡한가?
결국엔 그들이 테리아를 핍박한 건,
지금 구축되어있는 정치적, 사회적 이해관계 때문이 아니겠어?
적어도 나는,
그녀의 손에서 복원된 검을 가지고.
같은 것을 그리진 않을 것이다.
그리할 것이다.
* * *
날이 어둑해질 때쯤.
그 옛날 세공소에서의 마지막 날.
더는 강제로 밤하늘을 보지 않아도 됐던 그때까지.
있었던 모든 이야기를 담담히 그녀에게 이야기해주었다.
이에 그녀는 작게 웃다가, 또 숨죽여 흐느끼다가.
끝내는 붉어진 눈시울로 다행을 뱉었다.
“맥레인은 좋은 사람이네.”
“난쟁이 아르테서스 만큼이나 좋은 사람이었지.”
내 대답에 그녀는 슬픈 감정을 배출하듯 픽 하고 웃었다.
“우리 닮았다, 삶이.”
그리곤 시원섭섭하게 말을 잇는 그녀에게,
“그러게, 닮았네.”
나는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정해진 운명이란 게 있는 걸까? 너와 내가 이렇게 만난 것도 미리 정해진 운명인 건 아닐까?”
그녀의 질문에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별 하나 뜨지 않은 새파란 밤이다.
“그럼 나는 내 운명을 원망하겠어.”
“왜?”
“내가 느끼고 겪은 모든 것이 그저 운명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진 길에 불과하다면, 그것을 발판삼아 움직이는 내 모든 행위 역시 운명이라는 이름 아래 펼쳐지는 작위적인 연기에 불과할 테니까.”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 속엔,
내 눈동자 속에 박혀 있는 별이 들어있었다.
“그러니까 테리아 널 만난 것도 내가 그렇게 결심했기에, 네가 그렇게 버텼기에 만들어진 운명이라고 생각해.”
“운명이 우리를 만든 게 아니라, 우리가 운명을 만들었다니…, 발칙하지만 그만큼 두근거리는 말이네.”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는 이내 내 말에 수긍한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운명이란 것이 내 뒤꿈치에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 운명이 내가 남긴 발자취로 남았으면 좋겠다.
아리아가 디안에게,
맥레인이 디안에게.
남긴 것과 같이.
* * *
분명 바람보다 느리게 이동했을 텐데,
분기점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테리아는 묵묵히 말에서 내려 안장에 걸린 자신의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멋쩍은 얼굴로 날 바라보며.
“너무 늦게 오지는 마, 준비하는 데에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테니까.”
이내 두 뺨을 붉히며 휙, 가방을 중심 삼아 빙그르르 돌았다.
“정말 꿈 같다, 바깥세상에서 겪었던 일 모두가.”
나지막한 감상을 남기며 터벅터벅,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그녀에게.
나는 마음속에서 팽팽하게 줄다리고 있던 두 감정 중 하나에 힘을 싣기로 했다.
그러고도 쉽사리 움직이지 못해,
움직여 디안, 이 등신아.
속으로 몇 번을 다그쳐야 움직일 수 있었다.
안장에서 뛰어내려, 성큼성큼 그녀에게로 걸어간 나는.
대범하게 그녀의 오른팔을 휙 잡아채 돌려세웠다.
그럼 막 너울거리며 쏟아지는 파도처럼, 그녀는 눈동자 속 푸르름을 흘리며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거기에 대고 나는,
느낀 감정을 있는 그대로 솔직히 내밀었다.
은근슬쩍 턱을 위시한 채 고개를 내밀면.
그녀는 아랫입술을 한 번 깨물고는 내 쪽으로 고개를 조심스럽게 내민다.
그럼에도 닿지 않자 그녀는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까치발까지 세웠다.
그렇게 불쑥.
들이닥친 그녀의 입술이 곧 내 입술에 부딪혔다.
서툴고 어색한 그녀의 투박함은 얼얼한 것이었지만 그만큼 달콤했다.
이어 본인의 실수를 인지한 것인지, 테리아는 놀란 얼굴로 까치발을 슬슬 내리려 하고 있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은 나는,
그녀의 두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안고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좀 더 열성을 보이고 싶었을까.
다시 있는 그대로 까치발을 세우는 그녀의 몸짓에 맞추어 나는 그녀를 더욱 끌어당겼다.
간간이 흘러나오는 그녀의 숨은,
평생 삼키고 싶을 정도로 달았다.
그녀의 두 팔은 어느새 내 목에 감겨 있었다.
그에 맞춰 나는 손으로 그녀의 작은 등을 받친 채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의외의 다부짐 속에 느껴지는 부드러움이 좋았다.
둘 다 이성에 무감각해야만 했던 삶을 살아서였을까.
그것을 이참에 해갈하려는 듯 우리는 조금 우스울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그러다,
“앗.”
테리아가 맞물린 입술 사이로 신음 하나를 내뱉었다.
이내 자연스럽게 떨어진 입술.
그리고 한눈에 들어온 서로의 얼굴.
금방이라도 물러 터질 것같이 붉게 농익은 테리아는,
조금은 무안한 표정으로 내 시선을 피했다.
“미안…, 다리에 쥐가 났어.”
한계까지 들어 올린 까치발 때문이었을까.
그녀의 한쪽 발이 덜덜 떨리고 있다.
조심스럽게 끌어안은 손을 풀어 그녀를 놓아주자, 그녀는 헝클어진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다가도 제대로 쥐가 났는지 중심을 잃고 절뚝거렸다.
그러고는 내 눈치를 살피며,
“와… 하하…,”
하고 배시시 웃다가도 뚝 그치며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안녕.”
어색함에 쫓겨 도망치려는 듯, 그녀는 곧장 절뚝거리며 뒤돌아 갔다.
그러다 막 계단 모양으로 내려앉은 지반에 발을 내민 그녀가 뒤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 * *
“생각보다 일찍 왔네!”
막 돌아온 테리아가 반가워서,
스케비는 곳곳에 설치된 유리 통로를 이리저리 이동하며 그녀와 가장 가까운 곳으로 달려왔다.
“뭐야! 무슨 일 있어?”
“왜… 왜!”
찍 하며 외치는 스케비의 말에 화들짝 놀란 테리아가 되묻자, 움찔움찔 코를 달싹이던 스케비는.
“왜 그렇게 빨개졌어? 설마 오르미그를 직접 사냥한 건 아니겠지? 아냐 뼛속까지 무인 집안인 베나즈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지…!”
잔뜩 호들갑을 떨며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테리아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아직 입술 사이에 물려 있는,
작은 용암 덩어리 같은 그 감정이 금세 휘발될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조바심을 내었다.
그리곤 조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스케비를 째려보자,
되려 스케비는 움찔거리는 코를 멈추고 바짝 얼어붙었다.
“왜… 그렇게 봐?”
“너만 아니었어도….”
“내가… 뭘 했는데?!”
쥐의 머리로 용케 억울함을 표출한 스케비가 호소하듯 작은 앞발로 유리관을 두들기자,
테리아는 새침한 표정으로.
“아냐, 아무것도.”
작게 흥얼거리며 짐을 풀기 시작했다.
이에 스케비는 걱정을 그만두기로 했다.
저 노래를 흥얼거리는 건 그만큼 테리아의 기분이 좋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녀가 마지막으로 노래를 불렀던 때가 언제였던가.
노래 하나 모르고 살아왔던 아르테서스에게 가르쳐줄 때 빼고는 그렇게 많이 부르지도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바깥세상을 그리 무서워하면서도 막연한 동경을 품고 있더니,
다행히 아주 재밌는 경험만을 골라 겪었구나.
감상에 흠뻑 젖어있던 스케비는 이제 코를 들썩거리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유리 통로를 거슬러 테리아에게 다가갔다.
“뭘 구해왔어? 나도 볼래!”
그럼 그녀는 대답하듯 좀 더 크게 흥얼거렸다.
* * *
내 재촉에 벤투스는 바람을 치달아 남쪽으로 거침없이 이동했다.
그 속도를 증명하듯 주위 모든 풍경이 뭉개졌지만,
위로 보이는 하늘만큼은 선명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선명한 하늘이 아침을 그릴 때쯤.
[못다 팬 장작 길]
나와 벤투스는 마주한 두 갈래 길 앞에 멈춰 섰다.
벤투스의 거칠어진 숨도 돌릴 겸 변두리에서 작게 자리를 펼친 나는 지도를 펼쳐 현재 위치를 확인했다.
이제 오른 길을 따라 평원 하나를 지나치면 만 하나가 나온다.
그리고 그 만에는 릴레이커 항구가 있지.
갤리걸,
그가 무사히 로사플로를 빠져나와 바람대로 배를 구했다면 분명 그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내게 쪽지를 남긴 것을 보면,
그만큼 자신감이 있다는 뜻일 테니.
그나저나 화약의 성지 피로스는…,
가진 지도의 서쪽 끝에 아주 간신히 걸쳐져 있다.
이 거리라면 분명 내 생에 있어 가장 먼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대륙 아이베리아 서쪽에 흐르는 대양,
니플리안트.
피로스는 그 니플리안트 너머로 펼쳐진 서쪽 땅 사말라에 있다.
분명 이곳은 아이베리아와는 전혀 다른 문화와 전통을 갖고 있겠지.
막연히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아도 마땅히 떠오르는 것은 없다.
내가 가진 정보는 고작 지도에 적힌 지명뿐이니까.
그렇기에,
막연함을 뚫고 가려는 지금 순간이 더 벅차게 느껴졌다.
가슴에 뻑적지근함이 느껴질 정도로.
서쪽 땅 사말라.
그곳에 있는 화약의 성지 피로스.
그곳의 문물들을 보며 견문으로 소화해낼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들이켜 볼 것이다.
개중에 깃발의 주인으로서 갖춰야 할 소양이 있다면,
마땅히 갖출 수 있도록 이해하고 노력해 볼 것이다.
그래야만 기사왕의 검을 들고 되돌아왔을 때.
내 깃발을 위해 고심하고 분투했을 자들을 충분히 납득시킬 수 있을 테니.
“벤투스.”
푸릉.
이미 숨을 다 골랐는지 벤투스는 앞발로 땅을 치대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에 부응하듯 나는 단박에 안장 위로 올라타 녀석을 다시금 재촉했다.
* * *
시원하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들리고,
소금기 가득한 냄새가 느껴지기 시작하면.
곧,
내 눈앞에 나타나는 거대한 항구도시.
[릴레이커]
닻 모양 팻말 앞에 잠시 멈춰선 나는 저 멀리 도시 한가운데 솟아있는 종탑에 자연스레 시선을 빼앗겼다.
조합의 솜씨라고밖에 볼 수 없는 유려한 모양과 높이다.
이런 내 시선을 느끼듯,
종탑 꼭대기에 매달린 종이 휘청였다.
땡-
묵직하면서도 청량한 종소리.
그것이 릴레이커 일대를 뒤덮는다.
그러한 종소리를 신호 삼아, 나는 릴레이커 항구 속으로 기꺼이 달려 들어갔다.
온 사방에 넘쳐나는 구경거리에 조금이라도 시선을 쏟았다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다 쏟을 것 같아서.
오롯이 선착장을 향해 말을 몰아갔다.
그렇게 도착한 선착장 앞,
오만가지 모양과 오만가지 문양의 돛이 내세워진 그곳에서.
나는 곧 막연함과 부딪쳐야만 했다.
눈에 보이는 배의 수조차 헤아리기 힘들 지경인데,
이곳에서 갤리걸의 배를 어떻게 알아보고 찾을 수 있겠어?
하여 선착장 곳곳에 붙은 공고를 살펴보면,
[초 쾌속선 – 베라말르호]
금화 단 3개로 모십니다.
단 이틀!
옹벨르 해협을 아울러 남쪽 크사르가까지 횡단하는 데 필요한 시간입니다!
*모자나 가발의 분실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바람에 빠진 머리카락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해협의 유랑자 – 아지스기르]
초호화 유랑선 아지스기르에 탑승하실 귀인들을 모십니다.
동쪽 룸길 해류를 따라 빙산을 관람한 후 만개의 시장이라 일컬어지는 다카르반을 들러 여러분들의 수집욕을 자극해 드리겠습니다.
*쪽 구름 선단을 운영한 경력이 있는 41년 차 베테랑 선장, 올지온스가 직접 모십니다.
*탑승객들은 아지스기르에 올라타기 전 그에 합당한 자격(인장 및 증표)을 제시해주셔야 합니다.
*자격을 제시하지 못하실 경우, 미리 지불하신 표 값은 환불해드리지 않습니다.
흥미롭고 재밌는 내용투성이다.
그래,
차라리 선박을 살피기보단 이 많은 공고를 하나하나 살펴보는 게 어쩌면 더 현명한 방법일지도 모르겠어.
…,
…,
그렇게 말을 끌고 공고를 하나둘 섭렵하기 시작한 지 두어 시간이 흘렀을까.
이제 두 눈에도 짠 내가 배기지 않았을까 싶은 그때.
그것은 기꺼이 내 눈에 들어와 주었다.
[어디든 모십니다! 바다의 신참 갤리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