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파도를 거슬러
정박 된 배들이 줄지어 서 있는 선착장.
거기서도 가장 진한 비린내가 느껴지는 끄트머리쯤에 다다르면 개중에 제법 새것 티가 나는 배 한 척이 눈에 들어온다.
그쪽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곧 배 안에서 익숙한 얼굴 하나가 뛰쳐나왔다.
“이게 누구야?! 동업자 양반!”
“오랜만이야, 갤리걸.”
그는 잔뜩 신이 난 얼굴로 나를 맞이해 주었다.
“이야, 로사플로를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나 빨리 나를 찾아오다니! 일은 잘 해결했나? 활짝 핀 얼굴을 보면 아주 잘 해결한 것 같은데!”
마치 반가움에 몸 둘 바를 모르는 들개처럼 그는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쉬지 않고 떠들어 댔다.
이어 킁킁 소리를 내며 냄새를 맡던 그는 곧 은근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건 무슨 향기야?”
그 말에 혹시 내게서 무슨 냄새라도 나나 싶어 리넨 셔츠 깃에 코를 파묻었지만,
“아, 갤리걸 당신도 알다시피 이건 로사플로의 향수…,”
“어허, 날 속일 순 없지. 그곳 토박이인 내가 그 향기를 구분 못 할까 봐?”
단박에 일축한 갤리걸은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몇 번이고 킁킁거리다가,
“동업자 양반! 그 짧은 사이에 아름다운 여인을 만난 거지? 그렇지?”
부러움 섞인 눈빛으로 날 흘기더니,
“하긴, 동업자 양반의 얼굴로 여인을 안 만난다면 그건 직무유기라고 할 수 있겠지.”
조금은 씁쓸한 말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딱 봐도 눈 시릴 만큼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군, 로사플로에 그만큼 아름다운 처자가 있었던가?”
조금 소름 끼친다.
단지 내게서 나는 희박한 향기 하나만으로 송곳처럼 추론을 찔러넣는 그의 모습이 말이야.
배를 타고 타지에 정착해 아름다운 여인과 살 거라는 꿈은 진정 진심이었구나, 갤리걸.
하여 궁금해졌어.
“도대체 무슨 근거를 가지고 그렇게 말하는 거야?”
내 물음에 그는 꺼벙하게 쳐진 눈매와는 어울리지 않는 날카로운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향기에도 엄연한 윤곽이라는 게 있어, 그것을 예민하게 받아들일 줄만 안다면 그 특유의 굴곡마저도 다 쓰다듬으며 맡을 수 있지.”
그것도 비전이라면 비전이겠군.
“삶 묻은 살갗 냄새, 노동 묻은 땀 냄새 정도면 이해가 빠르겠지? 그런 것이야말로 로사플로의 장미 향수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최고의 향기라 할 수 있어!”
그는 다시 부담스럽게 고개를 내밀곤 있는 힘껏 숨을 들이켰다.
“아늑한 흙냄새, 그 속에 여린 마거리트 꽃줄기의 향기가 오묘하게 섞여 있는 걸 보면…, 젠장 두루두루 빠짐없이 완벽한 여자인 게 틀림없어.”
마거리트 꽃줄기라.
덕분에 테리아가 가진 그 특유의 향기에 대해서 알게 됐네.
씁씁.
하고 계속 냄새를 맡으려는 갤리걸에게,
괜히 심술이 난 나는 얼른 뒷걸음질 쳐 그의 행동을 제지했다.
“그나저나 갤리걸, 정말 철저하게 준비했나 보네. 곧바로 릴레이커 항구에 와서 배를 구한 것을 보면.”
그러면서 곧바로 화제를 전환하자 그는 기꺼이 그에 응해주었다.
아주 기쁘게.
“그야 물론! 동업자 양반 덕분에 시기가 좀 더 앞당겨졌을 뿐이니까!”
헐레벌떡 자신의 배를 가리킨 갤리걸은 하나하나 설명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잘 봐, 배에 달린 돛들은 내가 직접 설계한 거야. 하나뿐인 ‘정크 세일’이지! 바람을 풍만하게 감쌀 수 있는 람바베 천을 썼기 때문에 가속력이 무시무시해!”
배에 대해 아는 것이 적어 그의 말을 그대로 이해하긴 힘들었지만,
요컨대 자기 입맛대로 맞춘 배라는 뜻이겠지.
“용골은 귀 큰 자들의 인증이 붙은 라가스타 목재를 썼어. 불법 벌목이 아니라 귀 큰 자들이 직접 장례를 치러준 나무란 말씀! 그 말은 즉 극한의 경량화가 되었다는 뜻이야.”
“정말 대단해, 갤리걸.”
물론 뭔지는 몰라.
“그리고 최신식 노 키를 탑재했어, 6연 톱니에 맞물린 노 키를 돌리면 좌우 8개씩 총 16개의 노가 보조 추진을 시작하지! 이걸 6연 16식이라고 해! 물론 덕분에 연비가 시궁창으로 떨어졌지만…,”
금세 시무룩해진 갤리걸을 뒤로하고 뒤늦게 그의 배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고혹적인 어둠을 간직한 나무 선체,
날카롭게 솟은 선두와 넓게 각진 선미.
그리고 위로 산등성이처럼 날카롭게 솟구쳐 있는 돛들.
왜 갤리걸이 그토록 이것에 바람을 쏟아왔는지,
이 배를 보고 나니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근사한데, 굉장히 멋있어.”
진심 섞인 감탄을 내뱉자 이에 갤리걸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몸을 배배 꼬았다.
“그래서, 손님은 좀 있었어?”
그러나 이어지는 내 물음에 갤리걸은 난처한 표정을 지면서도 부쩍 급하게 대답했다.
“이제 막 개시했는데 뭘…, 시험 주행을 한 번 해보긴 했지.”
“갤리걸, 솔직하게 말해 봐. 이 배도 가진 자금으로 온전히 구매한 게 아니지?”
그가 돈을 아무리 많이 모았다고 해도,
앞서 그의 입 밖으로 낸 저 배의 장대한 성능에 비례할 바는 못 될 게 분명하다.
이런 내 말을 증명하듯,
갤리걸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역시 예리하구만 동업자 양반.”
그는 갑판 위에 발을 들이민 채 담담히 진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래도 악착같이 모은 돈 덕분에 뱃값의 절반 가까이는 충당할 수 있었어, 나머지 절반은 기업의 대출을 받았지. 그 대출 덕분에 릴레이커 항구에서 정식으로 운항할 수 있는 자격도 얻었고 말이야. 해서 하루라도 빨리 항해로 수입을 얻어 기업에 진 빚을 갚아야 하는데…,”
그런 속사정이 있었군.
“종일 돛에 바람을 먹여도 시원찮을 판에 완전 초짜인 나를 찾아오는 손님이 있을 리가 없지.”
그러나 그는 다시 해맑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그런데 웬걸! 동업자 양반이 나를 찾아와주다니! 분명 나와 내 배의 도움이 필요해서 왔겠지?”
“맞아, 갤리걸.”
뭔가 해갈된 듯, 개운한 표정을 지은 갤리걸은 자신의 배를 두들기며 작심한 표정을 지었다.
“목적지는?!”
“사말라의 피로스.”
“오호라! 바다의 장벽이라 불리는 니플리안트 너머에 있는 곳이구먼!”
두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간 그는 이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출발할 수 있어, 다만 데려온 말은 이곳에 맡겨야 해. 내 배엔 말을 실을만한 시설이 없거든.”
망설임 없이 말하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품에 있는 금화 주머니를 꺼내 들면.
“뭐 하는 거야, 동업자 양반?”
“갤리걸, 늘 하는 데로 하는 거 아니었어?”
그는 씩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는 내 배의 투자자야, 그런 자네가 필요로 하는 도움에 값을 매길 수는 없지.”
* * *
[발굽과 편자 - 릴레이커]
미려한 간판을 거쳐 거대한 시설 입구에 들어서자.
“어서옵쇼.”
바로 옆, 매대 뒤쪽에 앉아 있던 남자는 막 들어선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무성의한 인사를 건넸다.
뭔가에 집중하고 있는 듯해서 자세히 보면,
그는 발아래 펼쳐놓은 말판 놀이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말을 맡기러 왔습니다.”
내 말에 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네, 네.”
하고 겨우 말판에서 시선을 떼었다.
직후 나와 내가 끌고 온 말을 번갈아 보던 그는.
“아…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헐레벌떡 매대 밖으로 나와 부담스러울 정도로 허리를 굽혀댔다.
“말을 맡기시러 온 겁니까?!”
그는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벤투스에게 노골적인 시선을 보냈다.
말을 관리해주는 업장의 관리인답게,
단박에 벤투스의 종을 간파한듯싶네.
그렇기에 저리 급작스럽게 태도를 바꾼 거겠지.
“그럼 우선 말의 품종과 서명부터 작성해 주시겠습니까?”
입맛을 다시며 낡은 종이를 건넨 관리인은 직후 서명을 하는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디안, 잿빛의 프레쳅스]
무슨 기대를 했던 걸까.
벤투스의 종을 정확히 작성하자 그는 씁쓸한 얼굴로 마른 침을 삼켰다.
“간판에 지명이 붙은 걸 보면 다국적 사업을 하는 기업 같은데 맞습니까?”
그런 그에게 냉철한 표정으로 질문하자,
퍼뜩 놀란 관리인은 고개를 숙이며 즉답했다.
“그… 그렇습니다요.”
“그럼 그 정도로 수완과 신용이 좋다는 뜻일 테니 알아서 잘 관리 해주리라 믿겠습니다. 뭐, 보험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무… 물론입니다!”
“가격은?”
“프레쳅스 종 같은 경우는 일당 금화 일곱 개입니다.”
“일수를 지나치면?”
“할증으로 일당 금화 하나가 더 붙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금화는 39개.
“일단 닷새 치를 먼저 지불하지요.”
이번 여정에 정확히 며칠이 소요될지는 모르겠지만 늦어도 상관없다.
새를 구해 리케니엔으로 전서구를 보내면 바돈이 곧바로 자금을 지원해줄 테니까.
생각해보니 참으로 아쉽네.
이 릴레이커 항구에 ‘눈감은 첨탑’과 같은 곳이 없다는 게.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나으리! 부디 여정을 무탈하게 마치고 돌아오시길 빌겠습니다.”
연신 허리를 숙여 인사를 전하는 관리인에게 벤투스의 고삐를 건네주었다.
직후 떠나기 전,
나는 벤투스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사고 치면 안 돼, 벤투스.”
사실 제일 걱정되는 건 이곳이나 이곳의 관리인이 아닌 교활한 벤투스 쪽이었으니까.
* * *
갑자기 찾아온 ‘높으신 분’처럼 보이는 손님 때문에 있는 정신 없는 정신 다 내려놓았던 관리인은.
푸릉.
하는 벤투스의 콧김에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어… 어….”
그러니까,
제자리서 발을 동동 굴리던 관리인은 손에 쥐고 있던 낡은 고삐마저 금줄인 양 부들부들 떨며 붙들고 있다가.
대뜸 떠오른 생각에.
“고귀한 프레쳅스여, 기다려다오…!”
벤투스에게 정중히 부탁한 뒤 헐레벌떡 매대 뒤로 뛰쳐들어갔다.
이윽고 집어 든 것은 대표적인 말의 거래 기록표.
그는 그곳에서 보통이라면 펼칠 일이 없는 가장 끝쪽을 펼쳐 그 안에 내용을 찬찬히 훑었다.
“허어…,”
[경매 기록 – 명마]
[프레쳅스 – 불꽃]
금화 2,850,000개
[프레쳅스 – 재]
금화 3,810,000개
빗발치는 숫자에 눈이 돌아갈 대로 돌아간 관리인은 다시 벤투스 곁으로 조심스레 다가와 특유의 잿빛 털을 면밀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분명해…, 재의 후손이다.”
씨암말은 어떤 종이지?
녀석에게 붙은 이름은?
기골이 장대한 것을 보면 어쨌든 명마의 계보를 그대로 이은 녀석인 건 확실하다!
데굴데굴,
머리를 굴리던 관리인은 이제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프레쳅스의 사타구니로 시선을 옮겼다.
달려있다…,
거대한…,
“이런 씨바…, 별들이시여…!”
털썩.
뒤로 엉덩방아를 찍은 그는 막 뒷문을 통해 들어오는 직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곳에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씨암말…, 다 데려와.”
“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시정마들도 다 데려와…,”
“도대체…,”
“어얼르으은…!”
관리인의 닦달에 헐레벌떡 직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관리인은 조심스럽게 일어나 벤투스 앞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맡은 말의 씨를 동의 없이 가져가는 것은 엄연한 불법이지만.
단지 말의 변덕으로 뿌려진 씨라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하여 관리인은 벤투스에게 애걸복걸하며 부탁했다.
“부디 우리 암말들을 이쁘게 봐주게, 아니 그냥 제대로 난봉을 부려줘도 돼! 부탁할게!”
그런 그의 부탁에
벤투스는 그저 잇몸을 드러내며 음흉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 * *
“딱 맞춰 왔군! 출항 준비는 끝났어!”
갑판 위에서 위풍당당하게 소리치던 갤리걸은 곧바로 허리를 숙여 내게 손을 내밀어왔다.
“첫 항해치곤 긴 항해가 될 텐데, 걱정되지 않나?”
해서 그의 손을 붙잡으며 물으면,
“오히려 좋지, 굵직한 경력 하나가 생길 테니까!”
그는 있는 힘껏 나를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어디든 갑니다! 니플리안트의 벽을 돌파한 바다의 전사, 갤리걸!”
그리곤 거창한 말투로 노래를 부르듯 운을 뗀 그는,
“어때, 이러면 손님들이 날 그냥 지나치지 못할걸!”
바람 기름 바른 돛을 활짝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