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파도를 거슬러 (2)
찰싹!
한바탕 파도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미끄러지듯 앞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는 배.
그런 배의 키를 붙잡고 서 있던 갤리걸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하! 고놈 시동 한번 우렁차다!”
이어 키를 틀어 미끄러지듯 항구를 빠져나간 그는 바로 앞 선교 난간에 차곡차곡 묶여있는 줄 몇 개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확!
하는 소리와 함께 돛이 최대 크기로 전개되었고.
동시에 나는 중심을 잃고 휘청거려야만 했다.
안면에 우악스럽게 부딪혀오는 바람과,
굴곡진 수면 위를 곧이곧대로 가르며 덜컹거리는 선체.
그로 인한 격동 모두 처음 겪는 것이었으니까.
겨우 정신을 차리고 위를 바라보면,
바람 기름을 발랐는지 축축한 돛은 나부낌 없이도 풍만하게 부풀어 있었다.
그 팽배함이 어찌나 치열한지,
끼이익!
끼익!
선체 곳곳에서 신경질적인 소리가 튀어나올 정도였다.
“하하하! 동업자 양반! 어때? 끝내주지?!”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야!”
바람에 귀가 할퀴어지고 있는 터라 우리는 가까이 있으면서도 목청껏 외치며 대화해야만 했다.
“마레소브!”
마레소브?
“그건 뭔데?!”
“바다를 꿰뚫는 송곳이란 뜻이야! 쾌속 선박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지, 이 선체는 최신식인 3세대 마레소브 설계가 적용되어 있어!”
“뭐라고? 잘 안 들려!”
“내 배는 무진장 빠르다고!”
우렁찬 외침과 함께 활짝 웃은 갤리걸이 선교 난간에 묶인 줄 몇 개를 더 풀었다.
“가자! 최고 속도로!”
“미친…!”
앞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격동이 오리라 직감한 나는 얼른 가까운 난간 하나를 껴안아야 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위를 바라보면,
뱃머리부터 배꼬리까지 횡대로 펼쳐져 있던 네 개의 돛 가운데 맨 앞에 있는 걸 제외한 나머지 세 개가 막 종대 방향으로 세워지고 있는 게 보였다.
곧이어,
바람 기름으로 흠뻑 젖은 맨 앞 뱃머리 부분 돛 뒤로,
일렁이는 기류가 흐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아마도 기체로 휘발된 바람 기름일 것이리라.
그렇게 휘발된 기류가 뒤로 쭉 흘러 종대로 세워진 세 개의 돛을 스쳐 지나가면.
그 순간,
휘이익!
하는 폭력적인 바람 소리와 함께.
난간을 껴안고 있던 내 몸이 순간적으로 붕 떠올랐다.
정확히 어떤 원리인지는 모른다.
나는 과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까.
하지만 막연히 생각해보건대,
저 돛의 모양과 배치는,
기체로 휘발된 바람 기름을 2차 추진체로 이용하는 것처럼 보여.
아니 그것보다.
“으아악!”
이 무식하기 짝이 없는 속도는 무엇인가!
고개를 감히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거센 바람이 나를 짓누르고 있다.
* * *
잠잠함,
그 위로 보이는 것은 수평뿐.
직전까지 속도에 시달렸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요한 세상이다.
구름 위에 반쯤 녹은 태양이 톡 터져,
한 수평에 눈부시게 얼룩지고.
그마저도 수면 위로 자글자글 피어오르는 수많은 출렁임에,
점 빛으로 으깨져 반짝인다.
비단 갤리걸의 바람은 배 하나뿐만이 아니었음을,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니 알 것 같구나.
내가 이 풍경을 갈랐다.
가르고 갈라 이 풍경의 품속으로 들어왔다.
그 감정적 만복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황홀한 것이었다.
이런 내 옆으로,
럼주 한 병을 든 갤리걸이 다가왔다.
“어때?”
“아직도 목이 뻣뻣한걸.”
안부를 묻는 그에게 엄살을 부리며 대답하면,
그는 껄껄 웃으며 내 옆에 걸터앉았다.
금전에 맹목적이었던 로사플로의 갤리걸은 이제 없다.
바람 담은 꿈에 한 발자국 다가간 갤리걸만이 있을 뿐.
시원하기도, 대범하기도 하며 이제는 의리까지 간직하기로 한 갤리걸만이 있을 뿐.
“이거 미안하구만, 근데 그거 알아? 사내라면 말이야 어떤 장치를 다루게 됐을 때 그 장치의 한계까지 시험하고픈 생각이 들기 마련이거든.”
“알 것 같네.”
“게다가 릴레이커 주위 바다는 아주 얌전하다고, 육로로 비교하자면 고속도로에 해당한다 이 말이지.”
꿀꺽, 꿀꺽.
짠 내가 다 달아나도록 럼주를 한 모금 시원하게 들이킨 그가 바삐 말을 이었다.
“그러니 달리는 게 인지상정이 아니겠어?”
이어 그는 내게 럼주를 건넸다.
그것을 받아든 나는 속도에 한바탕 어지럽혀진 속을 정돈하기 위해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물로 된 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뜨거웠지만.
뜨거운 만큼 시원하다.
“그래서, 갤리걸 선장. 속도를 확 줄이고 잠잠한 바다에 체류하고 있는 걸 보면 무슨 계획이 있기 때문이겠지?”
다시 럼주를 돌려주며 묻자, 그는 그것을 받아들곤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 이제 얌전한 바다는 끝이야. 우리는 지금 대양 니플리안트 바로 앞에 와 있어.”
“그게 눈으로 보여?”
갤리걸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고갯짓을 했다.
이에 따라 일어서자 그는 중심 돛 기둥에 걸려 있는 그물을 밟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바로 뒤따르면,
어느새 꼭대기에 멈춰선 그가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고 있다.
“저길 봐.”
확 트인 시야,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갤리걸의 손가락을 따라가 보면.
저 멀리.
바다 위에 그려진 진하고 어두운 감색 선이 눈에 들어왔다.
그 감색은,
같은 색의 어떤 물감이나 도료로도 표현해낼 수 없는 위압감을 품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
저것은 말 그대로 ‘깊음’이라는 색깔이니까.
“마치 경계선 같네.”
내 말에 갤리걸은 즉시 맞장구를 쳤다.
“정확한 비유야, 동업자 양반! 니플리안트의 다른 이름이 뭔지 알아?”
“뭔데?”
“잠긴 협곡.”
“말 그대로 협곡을 품은 바다라 이 말인가.”
“그래, 우린 이제 뾰족한 봉우리 같은 파도가 쏟아지는 저 해협을 가로지를 거야.”
바싹 달아오른 긴장감이 내 가슴을 옥죄었다.
그리고 옥죄어진 가슴 속엔,
기대와 흥분으로 달음박질치고 있는 심장이 있다.
“내가 읽은 책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거든.”
이런 내 심장 소리를 듣기라도 한 걸까.
내 기대에 부응하듯 갤리걸은 돛 꼭대기에 매달린 채 설명을 시작했다.
“하늘의 경계선은 대부분 바다에 있대, 탑의 주인들이 암묵적으로 결정한 규칙이라더군. 그래서 육지와는 달리 포악하고 지랄 맞은 날씨가 판을 친다더라.”
그럼 나는 그의 설명에 덧붙여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렇다고 육지가 비교적 날씨로부터 안전한 건 아냐, 오히려 의지 하나만 있다면 언제든지 흉악한 날씨가 몰아칠 수 있는 환경이니까.”
“그럼 육지나 바다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건 매한가지네.”
“그렇지.”
곧 갤리걸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 출발하자고.”
* * *
돛에 바람 기름 얇게 펴 바르고,
방향타와 연결된 키 옆에 또 다른 키를 거머쥔 갤리걸이 그것을 좌우로 한 번씩 크게 돌리면.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선체 양옆으로 여덟 쌍의 노가 뛰쳐나온다.
저것이 바로 여섯 개의 맞물린 톱니로 움직이는 장치인가?
6연 16식이라고 했었지 아마?
이어 갤리걸이 난간에 묶인 줄을 더 팽팽하게 감아 당기자 하나를 제외한 모든 돛이 접혔다.
그 남은 돛 하나마저도 작은 삼각돛 모양으로 접힌 상태였다.
일련의 모든 과정을 진행하는 내내,
갤리걸은 마치 전투를 앞둔 장수와 같이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걸로 준비는 모두 끝났다!”
이제 우렁찬 목소리로 선전을 포고한 그는 나를 힐끗 바라보며 작게 웃다가.
정면을 바라보며 호탕하게 외쳤다.
“덤벼라, 니플리안트!”
삼각 모양으로 접힌 돛을 일거에 펼쳐 바람 기름을 휘발시키면, 그 반동으로 배가 앞으로 뛰쳐나가고.
그 즉시 다시 돛을 삼각으로 작게 접는다.
그에 맞춰 나도 난간을 붙잡고 곧 다가올 경계선에 대비했다.
쏴아아!
찰싹!
수면을 때리고 가르는 그 소리마저 한껏 우중충하고 무겁게 느껴진다.
어느덧 발아래 바다는 우주처럼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방금의 그 잔잔함과 찬란함은 어디로 갔을까.
급변한 바다에서 느끼는 괴리는,
두 발 걷는 자로서 느낄 수 있는 막연한 공포감 그 자체였다.
해서 필연적으로,
나는 마그나베노스를 쫓았다.
만약 낡은 검의 모습으로라도 그것이 지금 내 수중에 있었다면.
그럼 그것으로 이 어두운 바다를 잠재울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금방 사라져버렸다.
저 위,
선교 위에서 마주한 바다를 향해 담담히 나아가는 갤리걸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그래,
이 바다는.
재해로서가 아닌 두 발 걷는 자로서.
뛰어넘는다.
팍!
생각을 마치기 무섭게 선수를 치고 들어오는 날카로운 한 줄기 파도.
끼이익!
비명을 지르며 기우뚱하는 선체.
그에 맞춰 기울어지는 내 몸.
“디안, 내 옆으로!”
갤리걸이 소리친다.
그의 말에 곧바로 난간에서 떨어져 달려가면,
그 과정에서 또 한 번.
파악!
선수 위로 솟구치는 서슬 퍼런 한 줄기 파도가 선체를 뒤흔든다.
그 충격은 마치 내 육신에 직접적인 타격이 들어온 것과 같았다.
그러나 그 덕에.
내 정신은 더욱 선명하고 날카롭게 다듬어져 있었다.
이윽고 갤리걸의 옆에 당도하자,
그는 이를 악문 채 감탄한 듯 내게 말했다.
“이 아래 흐르는 해류가 장난이 아니야! 방향타에 무슨 바위가 걸린 것 같아!”
그리곤 내게 부탁한다.
“나 혼자서 키 두 개를 감당할 순 없어, 그러니까…!”
“내게 맡겨.”
“좋아! 내 두 팔이 부러질지언정 방향을 붙잡아 주겠어!”
그런데,
“어떤 식으로 하면 되는 거지?!”
이런 내 물음에 갤리걸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앞을 보며 외쳤다.
“봐!!”
그 시선을 따라 정면을 바라보면.
뭐….
야…?
왜 앞에 검은 벽이…?
“파도에 휩쓸리지 않게 저놈에게 노를 박아 휘저어! 그렇게 해서 벗어나야 해! 강철 후크를 써서 절벽을 오르는 것처럼!”
뒤이어 갤리걸이 바득바득 이를 씹으며 선체를 좌로 돌리면,
나는 본능적으로 내 앞의 키를 왼쪽으로 돌렸다.
방향타에 비하면 노의 면적은 보잘것없는 것이었음에도,
키에서 느껴지는 무지막지한 반발력은 혀를 내두를 만한 것이었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해 키를 왼쪽으로 돌리면,
그에 맞춰 선체 왼편에 펼쳐진 여덟 개의 노가 마주 오는 파도에 박혀 휘저어졌다.
휘청.
하며 급격히 좌측으로 틀어지기 시작한 선체.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반대 방향으로 키를 돌리는 갤리걸.
끝내.
우리는 그 벽과도 같던 파도를 옆으로 빗겨 흘려보냈다.
그건.
“잘했어, 디안!”
“워후!”
몸에 흐르는 피가 따갑게 느껴질 정도로 짜릿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디안! 이제 시작이다!”
이어지는 그의 말에 다시 정면을 주시한 나는.
허연 거품을 문 채 봉우리 진…,
수백의 파도와 마주했다.
* * *
점점이 빛나던 별들도 다 사라질 만큼,
달빛이 절정에 달하던 때.
그때가 정확히 몇 시인지는 몰라.
뭐 그게 지금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나는 그 시리도록 차가운 밤하늘을 배경 삼아,
얼마 남지 않은 럼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아직도 덜덜 떨리는 손으로 럼주를 건네면,
마찬가지로 덜덜 떨리는 손이 그것을 낚아챘다.
덜그럭.
이윽고 비워진 럼주 병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럼에도 우리 둘은 말없이.
하늘을 바라볼 뿐이다.
그러다가,
갤리걸이 운을 떼듯 푸념했다.
“우리 꼴을 좀 봐, 물에 빠진 생쥐 꼴이잖아.”
그 말대로.
우리는 짜디짠 바다를 뒤집어쓴 채 홀딱 젖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냥 생쥐가 아니지, 니플리안트를 넘어선 생쥐라고.”
이어지는 내 대답에 갤리걸은,
“젠장, 그렇지.”
피식 웃으면서 내게 주먹을 내밀어왔다.
나는
그런 부들부들 떨리는 갤리걸의 주먹에 같은 주먹으로 응수하듯 투박하게 부딪혀주었다.
반갑다, 서쪽 땅.
사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