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09화 (209/365)

209화. 무저갱

“그러니까 닷새 정도 집에서 지내야 할 것 같다고?”

한쪽 눈썹을 살짝 찌푸린 채 묻는 기지어에게,

조엘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네, 이것저것 집안에 손봐야 할 문제도 쌓여 있고 해서 잠시 내려가야 할 것 같습니다.”

“부모님이 남쪽 외곽에 터를 잡으셨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모두 다 기지어님께서 편의를 봐주신 덕분이지요.”

기지어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한쪽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베나즈 가문의 정찰대와 함께 작성하던 지도는?”

그럼 조엘은 총명함을 드러내듯 두 눈을 반짝이며 즉답했다.

“대략 7할 정도 완성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일전에 조언해주신 측량법이 조금 틀린 것 같아서요.”

조엘의 그 말에 기지어는 저도 모르게 입맛을 살짝 다셨다.

“내 측량법이 틀린 것 같다? 어디, 내게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겠나?”

은근슬쩍 기지어가 손짓으로 맞은편을 가리키자, 조엘은 마치 홀린 듯 곧바로 마주 앉은 채 설명을 이었다.

“일러주신 측량법을 토대로 지도를 작성하게 되면 실체감 거리가 매우 불규칙적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같은 거리라고 해도 지형에 따라 실체감 거리가 달라지기에 이를 정확히 분류하려면 다른 측량법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어…,”

“그래서, 그것을 비교해낼 수 있게 새로운 측량법을 만들었다는 건가?”

“만든 것은 아니고 기지어님께서 일러주신 측량법을 응용해봤습니다.”

말을 마친 조엘은 작은 종이에 옮겨 적은 공식과 그 공식이 대입된 지도 일부분을 기지어에게 건넸다.

기다렸다는 듯 그것을 받아든 조엘은,

“고것 참 그럴싸하구먼.”

하고 감탄을 하다가도 순간 두 눈을 번뜩였다.

그의 눈에 오류 하나가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얼른 입을 다문 채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조엘, 왜 닷새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지 물어봐도 되나?”

“물론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부모님이십니다. 제게 편지를 보내오셨는데 두 분이 해결하시기엔 벅찬 일들이 있는 것 같아서요.”

조엘이 담담히 말을 마치자 기지어는 곧 절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당황한 조엘이 따라 일어섰지만,

“일어설 필요 없어, 잠깐 다녀와야 할 곳이 있어서 그런 거니 조금 기다리게. 웬만하면 오늘 중으로 자네의 그 요청에 대한 답을 해줄 테니 걱정하진 말고.”

기지어는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다시 자리에 앉혔다.

“감사합니다, 기지어님.”

헐레벌떡,

밖을 나선 기지어는 이제 곧바로 베나즈 가문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러면 저택 입구에 상주해 있던 시종이 곧 그를 알아보곤 얼른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오셨습니까, 행정관님.”

아직 대대적인 깃발의 공표가 이뤄지지 않아 베나즈 휘하 체계 역시 확립된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바돈의 휘하 시종들은 철저한 교육을 받았는지 막연하게나마 분류한 직위를 토대로 그에 대한 예를 갖추고 있었다.

그것은 꽤 본격적이어서,

기지어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래서 더 그런가, 오늘따라 덜컥 영주가 그리워져서.

지금 영주가 부재중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기지어였지만 그는 구태여 예를 갖춘 시종에게 근엄히 물었다.

“영주님께선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는가?”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전서구를 보내시진 않으셨고?”

“네, 아직까진 없습니다.”

“그래 그래…,”

“행정관님의 방문을 알릴까요?”

시종의 물음에 기지어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저택 안으로 향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서 보는 저택이다.

최근까지 발리르와 켄타나에서 밀려 들어오는 안건들과 소통하기 위해 학술원에서 살다시피 상주해야 했었으니까.

처음, 스승의 편지를 받고 막연한 호승심을 따라 이곳에 왔었을 때가 새록새록 떠오른 듯.

상념에 젖은 기지어는 잠시 말없이 저택 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다 막 2층에서 내려온 바돈이 그를 발견해,

“기지어?”

하고 부르면 그제야 기지어는 특유의 얼빠진 모습으로 그의 부름에 화답했다.

“바돈! 오랜만이야!”

“일은 잘되어 가는가?”

“리케니엔의 토지를 행정으로 정돈하고 발리르와 켄타나의 세금까지 다 조율했지. 정찰대장 할리는 부관의 도움을 받아 그 부대의 수가 서른이 넘었어. 덕분에 빌비온 너머까지 넘나들며 아이베리아의 정세를 슬슬 엿 보기까지 하는 상태야.”

소나기처럼 내뱉는 기지어의 말에,

바돈은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필사적으로 들었다.

그럼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기지어는 픽 하고 웃으면서 핀잔했다.

“내 학술원 사람을 시켜 관련 문서들을 취합해 보내주겠네, 시종장.”

이에 바돈은 머쓱한 표정으로 뒷짐을 지어야만 했다.

“그런데 자네가 이곳엔 웬일인가?”

“참, 그렇지.”

기지어는 잠시 생각하다가도,

“영주님께선 무탈하신가?”

다시 샛길로 새어 디안의 안부를 물으면.

바돈 역시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가로젓기 시작한다.

“그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생각하고 있네. 작은 도움이라도 필요하다면 기꺼이 도와드릴 준비가 되어 있는데도…,”

“뭐, 작은 도움이라도 받아야 할 만큼 쉽사리 절박함에 빠지실 분도 아니잖나. 더군다나 베나즈 가문이 날붙이 따위에 베여 쓰러질 이름도 아니고…,”

“하다못해 자금이라도 보내달라 하시면…,”

“포개어진 손 조합에 진 채무를 부담스러워하셨으니 아무래도 그쪽으로도 경계심이 많으실 테지.”

“쓸데없이 검소하신 것이 흠이라면 흠이겠어.”

바돈의 말에 기지어가 화들짝 놀란다.

“시종장이 지금 모시는 영주를 힐난하는 건가?”

그러자 바돈은 더욱 허리를 곧추세운 채 당당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깃발의 공표가 끝나면 자네는 그 경직된 자금 문제를 제일 먼저 풀어내야 할 것이야.”

이에 기지어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곧이어 껄껄거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벌써 내정 견제를 시작한 건가?! 우리 영주님은 굳이 사치를 곁들이지 않아도 빛이 나는 분이신데?”

기지어의 말에 바돈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치며 대번에 따지듯 달려들었다.

“위신이란 건 어느 정도 사치가 곁들어져야 더 빛나는 법이네, 베나즈 가문은 고지식한 일부가 아닌 세상 전체를 설득해야 하는 입장이니까!”

약간 격앙된 바돈의 말에,

기지어는 순순히.

“그래, 자네 말이 맞아.”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그러자 오히려 바돈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한 발짝 물러서야만 했다.

“젊은 영주가 모두의 명분을 구하기 위해 떠났지, 곧 돌아올 그를 위해서라도 휘하에 있는 자들은 응당 그에 따른 준비를 마쳐놓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렇지.”

“고로 자네는 이미 시종장으로서 일할 준비가 다 되어있는 것처럼 보이는군. 해서 그 의견을 내 겸허히 받아들이겠네.”

“…,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낯선 기지어의 모습에 바돈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야만 했다.

터무니없는 붙임성을 자랑하던 그 괴짜의 모습은 어디 가고, 벌써 사이에 벽을 세우려 드는 기지어의 모습은 분명 바돈에겐 씁쓸한 것이었으니까.

“덧붙여서 말하자면 자금 문제는 깃발 공표와 동시에 자연히 해결될 거야. 아이베리아에 태풍이 돌아왔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숱한 기업과 조합들의 눈이 뒤집어 까질 테니.”

“그럼 그때를 대비해 나와 머리를 맞대주겠는가? 그 범람하는 자들을 제대로 거르기 위해선 제법 촘촘한 채가 필요할 텐데.”

바돈이 조심스럽게 묻자,

기지어는 그 괴짜 기질이 다분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기꺼이.”

그렇게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이어지길 몇 분.

머쓱한 표정을 짓던 바돈이 아차 싶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응?”

“기지어, 이곳엔 왜 왔나?”

“아!”

기지어는 그제야 생각난 것을 붙잡듯, 미간에 주름을 새긴 채 침을 튀겨가며 열변을 토해냈다.

“그러니까 말이야, 학술원에서 진출로를 위한 지도를 작성 중이거든.”

“그런데?”

기지어는 은근한 표정을 지으며 바돈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니 그런데 그 지도 작성에 있어 핵심적인 인재가 말이야 글쎄,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하는 불상사가 생겼지 뭐야?”

기지어의 바람이 닿았을까.

그 말을 들은 바돈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거 큰일이 아닌가?”

“그래서 그 인재가 겪고 있는 개인적인 사정을 내 선에서 해결해 주고 싶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자네 도움이 필요해.”

기지어의 간절한 부탁에,

바돈은 흔쾌히 자신의 목에 걸린 인장을 꺼내 건넸다.

“마땅히 도와야지, 다만 나도 조이 경의 서류를 기다리고 있는 신세라서 말이야. 그러니 자네가 알아서 처리하게.”

기지어는 감복한 표정으로 바돈의 인장을 받아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바돈은 기지어의 팔을 붙잡고 경고하듯 말했다.

“처리 금액이 금화 오백 개를 넘기지 않았으면 좋겠군.”

“이것 참, 빨리 자금 문제를 해결해야겠네그래.”

이에 엄살을 피우듯 푸념을 읊던 기지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바돈은 그제야 붙잡았던 팔을 놓아주었다.

이윽고 기지어가 바돈의 인장을 거머쥐고 저택 밖을 나선다.

그런 그의 얼굴은 음흉함에 젖어 있었다.

“히히 조엘, 자네는 내 곁을 절대로 떠날 수 없어.”

아니 음흉함보다는,

그것은 분명 조금은 사악해 보이는 미소였다.

* * *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한참 거슬러 오르면,

곧 우리를 반기듯 거대한 항구 하나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두 눈으로 온전히 담아낼 수 없을 만큼 길게 뻗어진 장벽.

그 밖으로 건설된 거대한 항구는 단순 규모만도 발리르 성채의 수 배에 해당하는 크기였다.

단언하건대,

리디굴람의 중심지조차 저 장엄함 앞에선 초라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갤리걸 역시 눈앞의 광경에 매료된 듯 벙벙한 표정으로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뒤늦게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윽고 선착장에 다다르기 무섭게 난쟁이 하나가 뛰어와 우릴 향해 양팔을 휘두르며 유도했다.

“방향타 중립으로 하시고! 천천히 천천히, 좀 더 좀 더!”

쩌렁쩌렁,

큰 목소리를 내던 난쟁이는 짧은 팔을 요란스럽게 흔들어대며 끝내 주먹 쥔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좋아요, 좋아요! 다 됐어!”

이어 난쟁이는 우리가 수월히 내릴 수 있도록 나무판을 들이밀어 부두와 갑판 사이를 연결했다.

우리는 그런 그의 호의에 화답하듯 나무판 위를 걸어 부두로 나왔지만,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난쟁이는 얼른 우리 앞길을 막아섰다.

“아이고, 손님. 정박비를 내셔야지요. 이곳은 엄연히 물 담근 손 조합의 부두걸랑요.”

그의 능청에 담담히 물으면,

“얼맙니까.”

그 난쟁이는 유독 내 눈치를 살피더니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 정도 크기의 배면 일당 금화 한 개입니다. 아 그리고 유도비와 유도자의 봉사 값은 따로 지불하셔야 합니다.”

이어지는 그의 말에 갤리걸이 발끈하며 따졌다.

“유도비와 봉사비는 또 뭔데?!”

그럼 난쟁이는,

“제가 손수 깔아드린 발판을 밟고 이곳으로 건너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제 봉사를 거절하실 거였으면 갑판에서 부두로 뛰어 내려오셨어야지요.”

뻔뻔하게 대답했고.

이에 갤리걸이,

“뭔 씨벌…,”

입에 거품을 물고 발작하려는 것을.

“갤리걸.”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애써 진정시킨 나는 담담히 난쟁이의 요구에 응했다.

“좋습니다, 유도비와 봉사 값은 얼마입니까?”

“은화 50개입니다. 참, 추가로 비용을 더 지불하시면 배의 보안도 책임져 드리는데…,”

“필요 없어, 내가 배에 남을 거니까!”

난쟁이의 말을 일축한 갤리걸은 곧바로 내 눈치를 살피며 속삭였다.

“저 씹새들이 보안을 운운한다는 건, 추가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면 배 털리는 게 기정사실이란 뜻이야.”

“괜찮겠어, 갤리걸?”

“그래, 디안 너도 홀로 움직이는 게 더 마음이 편하잖아? 솔직히 내가 가봤자 짐만 될 거라고.”

사실 그의 말대로,

홀로 움직이는 편이 훨씬 편하다.

그렇다고 그를 홀로 두기엔 내 맘이 편치 않아서.

나는 가방에 넣어 두었던 머스킷을 뽑아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난쟁이는,

갑자기 우리에게 넙죽거리며 부쩍 친절을 베풀기 시작했다.

“고… 고객님들! 어떠십니까? 화약 한 줌만 지불해 주신다면 물 담근 손 조합의 모든 걸 걸고 배를 위한 봉사를 다 하겠습니다!”

그거,

제법 좋은 거래 같은데.

생각해보니까,

화약은 사치품이었지.

화폐 대용으로 써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그리하죠.”

머스킷 상부에 달린 망치를 뒤로 젖히자 난쟁이는 얼른 품에 지니고 있던 작은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이윽고 그 안에 담겨 있던 검은 화약 한 줌을 털어 넣자.

그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친절한 모습으로 급변해 있었다.

“성실히 모시겠습니다!”

이쯤 되면 갤리걸에게 머스킷을 건네주는 게 오히려 더 위험하겠어.

차라리 무기 없이 갤리걸을 배에 남겨 놓는 게, 그렇게 해서 난쟁이 조합의 비호를 받게 하는 게 훨씬 안전할 거야.

갤리걸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나를 바라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 머스킷을 다시 가방 안에 넣은 나는,

갤리걸에게 짧은 인사를 건넸고.

이에 맞춰 갤리걸 역시 갑판 안으로 들어선 채 나를 내려다보며 묵묵한 고갯짓으로 대답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

“혹여나 우리가 체결한 거래 외적으로 다른 행동을 벌일 생각이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재고하는 게 좋을 겁니다.”

난쟁이에게 으름장을 놓은 나는,

그의 눈에 깃든 공포를 확인한 뒤 천천히 장벽 한가운데 있는 관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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