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무저갱 (2)
끝없이 줄지어진 행렬,
관문은 그들을 끝없이 소화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서서 차례를 기다리던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행렬에 만연한 분위기를 파악했다.
적어도 행렬의 절반은 상인으로 보여.
본인 몸보다 큰 짐을 진 채 무뚝뚝하게 걷는 난쟁이 무리.
신경질적인 얼굴로 앞 대열을 밀치는 인간들.
그런 그들 옆에는 언제나 중무장한 자들이 따르고 있다.
세이버.
런들.
저 머릴 보이는 남자는 버프 코트 밑에 도끼를 무려 여섯 개나 숨겼다.
아,
보아하니 저 도끼는 프랑시스카일 것이다.
투척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도끼인데 그것을 들고 다니는 걸 보면 굉장한 실력의 소유자일 거야.
그 외에도,
갬비슨을 비롯해 기름으로 삶은 가죽 갑옷까지 다양한 무장을 한 자들이 속속들이 보인다.
행렬 자체를 병기 전시로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다채로워.
어쨌든 나도 검을 다루는 사람이니,
그것은 내겐 참으로 흥미로운 구경거리였다.
상인과 그에 고용된 경비병을 제외하고 나면,
행렬 앞쪽으로는 마치 우대를 받는 듯한 화려한 마차들이 줄지어 있었고 뒤쪽으로는 여러 목적을 가지고 방문한 자들이 순순히 줄을 지어 따르고 있었다.
마차들 대부분은 같은 문양이 그려진 깃발을 매달고 있었는데,
그 깃발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굳이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마차에서 애라도 낳는 거냐? 하여간 니플리엔 놈들…!”
“좀 지나갑시다! 거 썅 이곳에다가 좌판이라도 펴야 할 판이라고!”
바로 내 옆, 그리고 뒤에서 시끄럽게 들려오는 항의만으로도 저 마차에 달린 깃발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으니까.
니플리엔.
아이베리아 서쪽을 지배하고 있는 제국.
저 깃발이 바로 그들의 상징이로구나.
흰색 바탕 위에 크게 새겨진 붉은 별.
그 펄럭이는 깃발을 보는 것만으로도 왜인지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켜야 했다.
기사왕의 검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그리고 직후 깃발의 공표가 이뤄졌을 때.
저 서쪽 제국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우리에게 어떤 서신을 보내올까.
짧은 시간 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다 퍼뜩,
날 선 감각 하나가 내 왼쪽 관자놀이를 쿡쿡 찔러댔다.
그것에 눈동자만을 움직여 기민하게 반응하면.
곧 앞쪽 마차 행렬 끄트머리에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런 내 시선의 변화를 알아챘다는 듯,
그는 곧이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 자루를 내게 드러냈다.
마치 위협하려는 것처럼.
그렇게 드러난 자루와 폼멜의 양식은 딱 봐도 인챈트가 실린 무기임이 틀림없었다.
오해를 풀어줘야겠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에게서 관심을 떼었다.
그쪽엔 볼일이 없다는 뜻을 나름대로 전한 것이다.
그러면 그는 내 행동에 수긍한 듯 군말 없이 자루를 후드 속에 감춘 채 다시 마차 뒤를 따랐다.
갑옷을 입고 있진 않았지만,
그는 분명 니플리엔의 기사일 것이다.
그 역시 주변에 위협이 될만한 요소를 찾기 위해 신경을 곧추세우고 있었던 걸까.
상대의 감각에 걸린 것을 복기하듯,
천천히 복장부터 점검을 다시 해보자.
어스름을 뒤집어쓰고 있는 터라 몸 밖으로 드러난 건 하나도 없다.
테리아가 빌려준 검,
질리스는 분명 무기에 일가견이 있는 자들이라면 죄다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의 명품이었기에 함부로 드러내고 다녀선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조차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감각으로 나를 특정한 것을 보면…,
단순히 그의 감각이 어스름을 뚫을 만큼 날카로웠다는 거네.
* * *
드디어 기나긴 행렬을 따른 끝에 관문에 도달했다.
동시에 관문 너머의 풍경을 살짝이나마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 풍경은…,
내 기대와는, 또 내 상상과는 많이 동떨어진 것이었다.
“잠깐! 거기!”
관문을 통과하려는데, 그곳을 지키던 경비병 하나가 나를 불러 세웠다.
“후드 벗어.”
자락이 긴 버프 코트,
가슴에 새겨진 검은 원.
이 관문과 장벽에 주둔하는 경비병일까?
빠르게 좌우를 살피자 그와 같은 복장을 한 자들이 행렬의 이동을 주도하고 있는 게 보인다.
이에 군말 없이 그의 말에 따라 후드를 벗자,
그는 내 얼굴을 보고는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묻는다.
“어떤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그것도 존대로.
“개인적인 일입니다.”
그에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그는 고개를 잠시 갸웃거리다가도,
“안내자는 있습니까?”
영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이었다.
안내자?
내 찌푸려진 눈썹을 살펴보던 경비병은 알았다는 듯 금세 귀찮아진 표정으로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됐소, 지나가시오.”
그의 말에 얼른 후드를 뒤집어쓰고 관문 너머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면,
그제야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풍경이 내 눈에 자세히 들어왔다.
그러니까 눈앞에 보이는 그곳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빈곤과 폭력이 엉켜진 미궁.
그래 그것이 가장 적절한 설명이 아닐까 싶다.
그 장엄했던 항구와 장벽의 위용이 무색할 정도로 이곳은 질서와는 매우 동떨어진 곳이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골목길은 그 초입부터 목매단 시체가 보였고,
그 바로 옆 골목길엔 시체처럼 널브러져 누워 있는 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문득,
시선을 좀 더 먼 곳에 둬보면,
행렬 맨 앞에 있었던 마차는 벌써 저 멀리 거대한 골목 사이를 가로질러 이동하고 있었다.
뒤이어 관문을 넘어온 상인들은 경비병들을 앞세워 골목 하나를 골라 들어갔고,
상인이 아닌 자들은 골목 안에서 마중 나온 자들과 합류해 불쑥 저 미궁 속으로 발을 들였다.
그 모습은 중립지역의 포드 외곽과 흡사한 것이었지만.
그 위험도는 포드완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높아 보였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곳에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비교적 위험 요소가 적어 보이는 골목을 골라 들어갔다.
오물의 지린내가 진동하는 그 골목엔,
온몸에 문신을 새긴 귀 큰 자들이 점점이 무리 지어 있었으며, 대부분 골목에 들어선 내게 노골적으로 적대하는 시선을 보내왔다.
아랑곳하지 않고 좀 더 깊숙한 곳까지 이동하자,
길거리엔 날붙이 따위에 죽은 듯 보이는 시체들이 피 웅덩이를 그린 채 널브러져 있었고.
두 발 걷는 자들은 그런 시체 주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이동하고 있었다.
그 광경은,
무법지대였던 중립지역에서조차도 결코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도대체 이곳은 뭐 하는 곳이기에?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다음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그곳은 비교적 크고 깨끗했고 여러 물건을 파는 상점들도 줄지어 서 있었다.
이곳에 대한 정보를 구하지 못한다면,
아무래도 이동 간 낭패를 볼 확률이 높을 것 같군.
해서 상점가를 기웃거려보면.
웬 덩치 큰 남자 하나가 은근슬쩍 내게 다가왔다.
말끔히 정돈된 수염을 쓰다듬던 남자는 조용히 내 근처를 서성였고, 도중에 후드 속 내 얼굴을 훔쳐보려는 듯 노골적으로 행동했다.
그 외에도 민머리에 비쩍 마른 사내도 내 주위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해서 슬슬 분위기가 묘해졌다.
적대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이 어떤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하여 주변을 서성이던 덩치 큰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말 좀 묻겠습니다.”
그럼 남자는 인자한 표정으로 불쑥 내게 다가왔다.
“뭘 도와줄까?”
그러면서 그는 후드 속 드러난 내 턱을 살펴보며 기름진 입꼬리를 씩 올렸다.
“이곳을 안내해줄 자를 찾고 있는데…,”
“그런데 너 피부가 정말 하얗네.”
남자는 내 말을 툭 끊고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얼굴 좀 자세히 보여줄 수 있어?”
투박한 손으로 내 후드를 가리키던 남자는 은근슬쩍, 내 어깨 위로 손을 얹으려 했다.
이에 한쪽 발을 뒤로 물려 따끔하게 경고를 하려던 찰나.
“씨발, 너네 뭐해?”
저 멀리서 날카로운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에,
덩치 큰 남자를 비롯해 내 주위를 서성이던 자들이 헐레벌떡 멀리 떨어지거나 도망치기 시작했다.
상점 주인들도 침을 삼키며 바짝 긴장했고, 개중에 몇몇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하기 바빴다.
“얼른 안 꺼져?!”
사내의 불호령에 덩치 큰 남자는 얼른 멀리 도망가버렸다.
그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면, 문신으로 가득 한 상체를 드러낸 채 당당히 이쪽으로 걸어오는 귀 큰 자 하나가 보였다.
“바로치 놈, 어깨째로 잘릴 뻔했네.”
갈색의 짧은 머리, 녹색 눈동자.
마른 몸에 신경질적으로 튀어나온 근육들.
딱 보아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사내다.
“형씨, 안내자를 찾는 거지?”
은근히 친근을 부리며 묻는 그에게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해주지, 내 이름은 람비야. 푸리나스의 람비.”
“디안.”
“디안, 성씨는 알려주지 못하는 건가?”
그 물음에 다시 고개를 끄덕이면,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수긍했다.
“딱 봐도 이곳이 처음인 것 같은데…, 따라와 천천히 안내해 줄 테니까.”
턱짓과 함께 불쑥 앞으로 걸어나가는 그의 뒤를 바짝 쫓아가자 곧 거대한 광장 같은 것이 나타났다.
그런 광장을 등진 채 나를 돌아본 람비는,
양팔을 번쩍 든 채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는 ‘게헨나’야, 온갖 씹진창이 모여 고인 곳이지!”
그런 그의 외침 뒤로는,
막 누군가가 길거리에 걸어 다니는 행인에게 다짜고짜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게헨나?”
“그래, 그리고 형씨는 아마도 피로스가 목적지겠지? 피로스는 게헨나를 통과하면 바로 나와. 둥근 성벽으로 개지랄을 해놓은 곳이지.”
피로스로 가기 위해선 이곳을 무조건 거쳐 가야 한다는 건가?
“그거 알아? 피로스는 기업 ‘퍼비스’의 수도야.”
“기업의 수도라고?”
“그래, 퍼비스의 궁댕이는 존나게 커서 앉을 자리 역시 존나게 커야 하거든.”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앞장을 선 채 광장으로 들어섰다.
그러다가 그와 같이 문신을 새긴 자들과 마주치면 그들은 여지없이 다가와 람비에게 친분을 드러냈다.
“람비!”
“뭐하고 있냐?”
“저놈은 누구야?”
“새끼들아, 병신 동네 주민인 거 티 내지 마.”
“오, 천하의 쌍놈 람비가 안내자를 한다고?”
“차라리 아침에 싼 내 똥에다 길을 묻겠다 씨발!”
“디안! 소개하지 여기는 병신 하나, 병신 둘…,”
능청스럽게 소개를 이어가던 람비는,
“다 푸리나스의 이름 아래 묶인 가족이야.”
마지막에 마주한 자들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럼 마주한 세 사람은 람비에게 주먹을 들이밀었고, 그런 그들에게 람비는 주먹을 맞대며 요란스러운 인사를 거듭했다.
“나 간다, 씹새들아!”
“잘 지켜라, 네 이쁘장한 애인 안 따먹히게!”
“키키킥, 이 새끼 또 지랄병 도졌네!”
귀에 까칠한 사포를 욱여넣은 기분이다.
“이해해줘, 이곳 사는 놈들의 인사법이란 게 다 저따위거든.”
“금방 익숙해질 것 같네.”
그의 말에 담담히 대답하면, 곧 마음에 들었다는 듯 람비는 금세 쾌활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형씨, 될 수 있으면 그 시꺼먼 후드로 얼굴을 잘 가리고 다니는 게 좋을 거야.”
그는 걸음을 멈추곤 나지막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이곳은 이쁘장하기만 하면 성별마저 무의미해지는 곳이거든, 그만큼 발정 난 새끼들이 널려 있다고. 형씨 정도 얼굴이면 그 새끼들은 물불을 안 가리고 들이댈 거야. 그 덩치 큰 새끼처럼.”
점점 굳어지는 내 표정을 살펴보던 람비는,
“그런데 형씨는 그런 놈들에게 따먹힐 만큼 약해 보이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와 푸리나스의 가족들은 그런 발정 난 놈들과는 상종도 안 하니까 그쪽으로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러면 무슨 목적으로 날 안내하는 거지?”
이어지는 내 물음에,
“아직은 알려주기 싫은걸, 그런데 뭐 딱히 의도적으로 접근한 건 아니야. 일단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었으니까.”
그는 말끝을 흐리며 다시 앞으로 걸어나갔다.
“아무튼, 게헨나에 온 걸 환영해.”
광장 중앙을 가로지르며 내뱉는 그의 뒤늦은 환영에.
나는 답하듯 묵묵히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