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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노래-212화 (212/365)

212화. 무저갱 (4)

상체를 비롯해 얼굴까지 창백해진 람비는 조심스럽게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뒷걸음질에 맞추어.

골목에 고인 그림자처럼 스멀거리며 나타난 장정 다섯이 내 주위를 포위했다.

다만 우락부락한 상체를 드러내고 있는 그 다섯 장정 역시 창백한 얼굴로 덜덜 떨고 있어,

나타난 의도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치 괴물을 마주한 것 같은,

그래서 겁을 집어먹은 듯한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이질적이어서.

오히려 내 쪽에서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저들 중 누군가라도 발작하여 내게 달려들 것 같았으니까.

나를 포위하고 있는 자들 가운데 살의를 가진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들은 그저 자신만의 안위를 걱정하느라 급급해 보여.

해서 괜히 움직여 그들의 조바심을 부추길 필요는 없지.

“괜찮아, 직전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내게 천천히 설명해주기만 하면 돼. 난 들을 준비가 됐어.”

람비를 포함 나를 포위한 다섯 장정의 심기를 건들지 않고 최대한 유순하게 운을 뗐는데도,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흠칫거리며 놀랐다.

이어 나는 양팔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적대할 의사가 없음을 표현했다.

그럼 그제야,

딱딱거리며 이빨을 부딪치던 람비는 주위 동료들에게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말한다.

“…, 무기 내려.”

이에 다섯 장정은 너 나 할 것 없이 들고 있던 무기를 내렸다.

“잘 생각했어, 람비.”

“미안해, 형씨. 속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 애초에 우린 주문자가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거든.”

“진정하고, 내 질문에 답해줬으면 좋겠어.”

내 말에 람비는 아직 하얗게 질린 얼굴을 얼른 끄덕였다.

“주문자는 누구야?”

“지금 상황이 잘 풀린다면 곧 만나게 될 거야, 주문자에게 형씨를 데려가는 것까지가 계약이니까.”

“방금 너는 주문자가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다고 했어, 그게 언제부터였지?”

“언제부터가 아니야…,”

“아니라고?”

“…, 그래.”

람비는 마른 입술을 적시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는 이미 형씨를 여러 번 만났을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알 수 없는 소리에 절로 고개가 기울어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는 나와도 아주 많이 만났을 거야.”

“람비.”

“그는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어.”

“람비.”

“해서 나는 그의 경고를 무시하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다고!”

“람비!”

두려움에 횡설수설하기 시작한 그에게 호통을 치자,

딸꾹.

하며 짧게 경련을 일으킨 람비가 또렷한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럼 이윽고,

차분함을 되찾은 그가 담담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흘 전, 그는 게헨나에 와서 곧장 우리 푸리나스를 찾았어. 앞서 설명했듯 우리만이 취급하는 거래를 위해서였지.”

그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여주자 제법 평정을 되찾은 람비는 수월히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는 이틀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바로 전날에 자신이 찾고 있던 자가 내일 이곳에 올 거라고 했어.”

“그 찾는 것이 바로 나였나?”

“그래, 처음엔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가 아닐까 했었어. 왜 그 있잖아? 납치된 자식의 행방을 쫓다가 그 방향을 미리 알게 되는 경우가 있으니까.”

“하지만 아니었군.”

“그래, 아니었어. 이어서 그는 갑자기 대뜸 우리 조직의 비밀부터 알려주지도 않은 조직원들의 이름까지 술술 대더군.”

대체 누구길래?

빙의자?

아니면 순례자?

그것도 아니면…,

베나즈 가문에 볼일이 있는 자?

“거기에 더해 내가 죽어가며 내뱉던 말이라며 이야기하는 것이, 씨발 내가 정말 뒤진다고 생각하면 할 법한 말들이더라고. 남의 입으로 내 유언을 듣는 것만큼 좆같은 경험은 없을 거야.”

“람비, 길이 새고 있잖아.”

“그래… 그래…, 어쨌든 그는 마치 예언자 같았어. 그런 그가 우리에게 본격적으로 의뢰하기를, 내일 게헨나에 자신이 찾고 있는 자가 올 거래. 그자는 자연스레 푸리나스의 거리로 흘러들어 올 테니 구태여 찾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고도 했었고.”

“그리고 그의 말대로 이뤄졌군.”

“그렇지, 보다시피…,”

람비는 본인도 어이가 없다는 듯 벙벙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근데 그다음 주문자가 하는 얘기들이 가관이었어, 해당 거래에 대해 여러 가지 수단을 포함한 의뢰를 이용해 봤다는 거야.”

“이를테면?”

“형씨를 강압적으로 끌고 오는 것부터 아예 시체로 데려오라는 것까지 우리에게 시켜 봤다더군.”

“결과는?”

“싹 다 형씨한테 뒈졌데. 우리 조직 자체가 궤멸 될 정도로.”

솔직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다.

“마치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존재로 들리는데.”

“우린 믿을 수밖에 없었어, 과거고 미래고 예지고 뭐고 그냥 우리 조직을 다 간파해버린 그 순간부터 믿을 수밖에 없었다고!”

“그래서, 이 순간조차도 그가 미리 일러준 내용에 불과한 건가?”

람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말고는 다 형씨 손에 뒈질 운명뿐이라고 그가 단언했으니까. 그래서 우린 그가 설명해준 내용대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진행하고 있는 거야 지금.”

“그래서 이다음은?”

“…, 형씨가 내 설명에 수긍하고 주문자를 만나러 가는 거야.”

천천히,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은 나는 람비를 똑바로 바라보며 답했다.

“안내해.”

* * *

푸른 천이 널린 골목,

그중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쪽문 하나.

그 너머로 펼쳐진 비밀스러운 술집 안으로 들어서면.

곧 구석진 곳에 앉아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짧은 금발.

그 샛노란 기운과 어울리는 젊음.

그리고 새파란 눈동자.

이마를 뒤덮은 앞머리는 둥근 유리 위로 쏟아진 빗물처럼 곱슬하다.

그런 그가 내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천진한 표정으로 나를 반긴다.

“왔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어 자신의 회중시계를 열어보던 남자는,

“음, 13초 정도의 오차가 있어 걱정했는데 다행히 미래를 바꿀 만큼의 시간은 아니었나 보군요.”

감상을 남기듯 중얼거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반갑습니다, 이렇게 현재의 실물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히죽,

실눈을 그리는 미소와 함께 악수를 청하는 그에게.

나는 묵묵히 지나쳐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럼 곧 청년은 멋쩍은 표정으로 홀로 손을 흔들어 허공과 악수하고는 얼른 착석했다.

“이 상황이 다소 언짢으실 거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 무례를 용서해 주시지요.”

말투에 격식이 묻어나오는 것을 보니,

깃발을 가진 자로 보인다.

“용건이 뭡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면,

그는 푸른 눈을 번뜩이며 당황한 기색을 엿보였다.

“이런, 역시 대단한 강단을 갖고 계시는군요.”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연기는 거기까지 하는 게 좋을 겁니다.”

“무슨…?”

“이 대화마저도 당신의 상정 안에 있는 것 아닙니까?”

청년은 다시 실눈을 그리며 히죽 웃었다.

“네, 그렇습니다. 사실 귀화와의 만남은 이번이 일곱 번째이지요. 지난 여섯 번의 만남은…, 그리 유쾌하진 않았습니다. 제 거짓말을 모두 간파하시고 그에 대한 대가로 검을 뽑으셨으니까요. 결국엔 귀하와 대면하는 유일한 방법은 솔직해지는 것뿐이더군요.”

나를 만난 게 이번이 일곱 번째라고?

도대체…,

“솔직히 세 번째 만남까지는 귀하의 능력을 시험하는 데에 소비할 거라 예상했습니다만…, 단 한 번만으로도 충분하더군요. 대신 나머지 만남은 지금 이 만남의 성사를 위해 소비해야 했지만요.”

이윽고 그는 양손을 맞잡은 채 기쁨을 드러냈다.

“확실히, 점성술사의 말이 맞았어요. 당신이야말로 제가 찾고 있는 자에 가장 부합한 사람입니다.”

“…,언제까지 못 알아먹을 감상을 남발하실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아! 죄송합니다,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무엇이든 질문해주십시오. 모두 다 솔직히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전 만남의 결과처럼 제 몸이 최소 여덟 조각으로 나뉘게 될 테니까요. 하하!”

히죽,

웃는 그의 모습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던 나는.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매듭에 집중했다.

“점성술사 이야기는 뭡니까.”

“제겐 꼭 이루고 싶었던 숙원이 있습니다. 내 일생의 소원이라 해도 될 만큼 간절한 일이기에 그에 걸맞은 확실한 조언도 필요한 상황이었지요.”

그는 테이블 위에 있는 술잔을 옆으로 치우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마치 우연처럼, 어느 날 신비한 점성술사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곤 이렇게 말했지요. ‘지옥에서 숙원의 열쇠를 찾게 될 것이다’ 이를 해석하면 보다시피…,”

“그 점성술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얘기해 보십시오.”

내 질문에 남자는 눈을 지그시 감고 기억을 더듬었다.

“음…, 일단 아름다웠습니다. 마치 머리에 겨울을 이고 있는 듯했죠. 한마디로 눈부셨달까…? 그런데 두 눈은 참으로 공허해 보이더군요.”

모호한 것에 더 시간을 소비할 순 없으니,

다음 매듭으로 넘어가자.

“이제 당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수수께끼로 나를 설득해 주십시오. 그래야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모순이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질 테니.”

담담한 내 물음에,

그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실눈을 그린 채.

하얀 후드 속, 허리춤에 숨겨놓았던 작은 호롱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일반적인 호롱과는 거리가 먼 아주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직각으로 점철된 기하학적인 외형은 그렇다 치고…,

안에 피워진 불빛의 색이 눈 시릴 정도로 새하얗다.

“귀하께 문제 하나 내겠습니다.”

이어 대뜸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은 남자는 내게 묻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과거는?”

실눈 속, 푸른 안광을 드러내며 낸 그 문제에.

나는 적잖은 고심을 해야 했지만.

끝내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런 내 눈치를 살핀 사내는.

이내 정답을 알려주었다.

“바로 별입니다.”

손가락 하나를 치켜세워,

위를 콕 찌르듯 가리킨 그는 설명을 잇는다.

“사실 우리가 별이라 부르는 것들은 엄밀히 말하면 별의 흔적에 불과한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별이 흘린 과거이지요.”

이어 위를 찌르던 손가락을 움직여 테이블 위에 올라온 호롱을 가리킨 그는,

“그리고 이 호롱 안에 담긴 빛은 바로 그 별이 흘린 과거입니다.”

활짝 웃으며 말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마법사의 작품이라는 겁니까?”

“아, 상투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렇습니다. 하하! 그래도 기왕 아름답게 표현하자면 밤하늘에 떠오른 과거 하나를 담아낸 호롱이지요.”

“하면…, 그것이 당신의 그 특별한 능력의 원천이라 그겁니까?”

“그렇습니다, 앞서 말했듯 우리가 보는 별은 그가 쏟은 과거의 흔적이고 그 과거는 시간적 개념에 속하지요. 어두운 밤, 호롱불에 의지해 길을 찾아 나서는 것처럼, 이 호롱불은 과거와 미래를 오갈 길을 밝혀준답니다.”

절로 혀가 내둘러진다.

인챈트만으로도 이 세상이 벅찰 지경인데,

마법의 무궁무진함은 그 벅찬 세상을 무한히 확장 시켜버리는구나!

“해서 이 호롱불에 의지해 많은 과거와 미래를 엿보았습니다, 물론 그에 대한 대가는 꽤 큽니다만…, 그것을 감내할 만큼 제가 절실하거든요.”

“직접 마법사의 탑을 등반한 겁니까.”

그는 내 질문에,

다시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뇨, 샀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가문의 보물 중 하나이지요.”

저런 것조차도 사고 팔리나?

“…, 그럼 이제 마지막 매듭을 풀어봅시다. 당신의 숙원이라는 게 뭡니까?”

내 마지막 질문에,

그는 처음으로 살기를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아이베리아의 여덟 검 중 하나인 랑온의 기사, 엔시오를 베어주십시오. 그 대가로 귀하께서 원하는 모든 것을 지불하겠습니다.”

“이유는?”

“그가 제 누이와 형님을 죽였습니다.”

“복수입니까?”

“복수이자, 당신에겐 불명예를 저지른 기사의 처단이란 명분이기도 합니다. 아닙니까, 디안 베나즈 경?”

…,

이젠 놀랍지도 않다.

이쯤 되면 그가 내 이름을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거겠지.

이 거래,

부정할 수 없다, 구미가 당겨.

그래서…,

성사의 의미로 그에게 손을 먼저 내밀어 보였다.

그럼 이제 그는 한껏 누그러진 표정으로 내 손을 굳세게 맞잡는다.

“아직도 의뢰인의 이름을 모르는군요.”

내 말에 그는,

맞잡은 손을 흔들다가도.

또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빈센, 빈센 다르마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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