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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노래-213화 (213/365)

213화. 무저갱 (5)

그 이름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나.

그 이름에 의태하여 온갖 시늉을 벌여봤는데.

하여 듣는 순간 나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안이 벙벙해져서 입은 진득한 꿀 한 바가지 머금은 듯 무겁게 닫혀버렸으니까.

물론 이런 내 상황을 알 리가 없는,

빈센 다르마야는 조금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이 과정에서 제가 어떤 실수라도 저질렀습니까? 그렇다면 미리 사과드리고 싶군요, 아이베리아의 예법은 잘 몰라서요.”

“아닙니다.”

그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맞잡은 손을 놓아준 뒤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이에 빈센은 입꼬리를 날카롭게 들쳐 올리며 되물었다.

“그럼 문제없는 거겠지요?”

“문제없습니다.”

진품 앞에 놓인 가짜 신세가 된 양, 그 머쓱함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기구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작위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만일 이것이 그저 우연이라면, 그것은 아마도 가장 엉성하게 만들어진 우연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자와 만났더니 정말 얼이 빠진 느낌이야.

굳이 비유하자면 테티르 경이 휘두른 메이스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하지만 언제까지고 기구한 만남에 집중을 낭비할 순 없는 노릇이니,

얼른 차분함을 차리고 보자.

“아무래도 제가 실수한 게 맞는 것 같습니다만…,”

그럼 맞은편에 앉아 있던 빈센 다르마야가 멋쩍은 얼굴로 내 눈치를 살피고 있다.

그 표정을 보아하니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나 혼자서 궁상맞은 고찰을 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그래서 무안함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나는 태연히 입을 열었다.

“잠시 생각할 거리가 있었습니다.”

“어떤…?”

“그 의뢰, 자세한 내막을 좀 알아야겠습니다.”

됐다.

이 정도면 자연스러웠어.

동시에 주제의 흐름에 따라 나는 그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내막이라…, 내막이랄 것도 없습니다. 그저 제겐 복수의 대상일 뿐이니까요.”

“아무 이유 없이 당신의 누이와 형님이 죽임을 당했단 겁니까?”

내 말에 빈센은 두 눈 가득 표독을 집어 먹었다.

“이유라면 하나뿐이지요, ‘다르마야’이기 때문에. 하지만 방금도 말했듯이 적어도 ‘제겐’ 놈은 복수의 대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당신이 다르마야인 이상 그 이유가 모호해질 이유 역시 없습니다. 알고 있는걸 모두 말씀해주시지요.”

“방금 악수를 통해 모든 얘기가 다 된 줄 알았는데요.”

“그 악수는 마주 앉은 이 자리에 대한 성사를 의미한 것입니다. 어쨌든 이 만남을 위한 과정은 적어도 ‘제겐’ 껄끄러운 것이었으니 그에 대한 당신의 양해를 제가 받아들인 거라 생각하십시오.”

의도완 달리 뻔뻔하게 응수했지만,

빈센은 곧장 혀를 내두르며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베리아의 기사는 혀로도 사람을 베는군요, 좋습니다. 제가 아는 것들을 모두 말씀해드리지요.”

이어 빈센은 테이블 위에 두 팔을 얹어놓은 채 천천히 말을 이었다.

“경에게는 생소하겠지만 다르마야라 하면 동쪽에서 열에 아홉은 알 정도로 유명한 가문입니다. 정확히는 재력 적인 부분으로요.”

잘 알다마다.

그것을 빌미로 당신의 이름을 빌려야 했었으니까.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빈센은 좀 더 고개를 내민 채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가문은 당연하게도, 그 자식들 역시 두 자릿수가 넘어갈 정도로 많지요.”

“그럼 당신은 그 가운데서 몇…?”

“이젠 저도 모릅니다, 까먹었어요.”

빈센은 씁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런 가문의 자식들에겐 다 저마다 맡는 역할이란 게 있지 않겠습니까? 이를테면 모난 곳 하나 없이 완벽하고 냉철한 후계자 역할의 장남이라던가, 그 장남을 견제하는 모난 곳 하나 정돈 있는 차남이라던가. 보이지 않게 뒤로 온갖 일을 꾸미는 장녀나 천연덕스럽기만 할 뿐인 차녀나…,”

이윽고 좀 느슨한 모양새로 고쳐 앉은 그는,

“마찬가지로 그저 방탕에만 관심을 쏟으며 후계 따위엔 관심조차 없는 망나니 역할도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법이지요. 그리고 그 역할을 맡은 것이 바로 접니다.”

그래,

분명 빈센 다르마야는 그 성정이 망나니에 가깝다고 했었다.

그런데 뒤늦게 생각해 보면, 그가 보였던 행동들은 망나니와는 거리가 매우 멀게 느껴진다.

“참 웃기게도 저는 그 역할 덕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그의 말을 들어보니,

조금은 알 것도 같네.

“망나니가 되어야만 생존할 수 있다면, 까짓거 망나니로 살아야지 별수 있겠습니까? 당장 눈앞에 정적 제거라는 명분으로 형제자매를 죽이는 형제자매가 있는 마당에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행동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군요?”

“그만큼 제겐 절박한 일이니까요, 디안 베나즈 경.”

빈센의 눈에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눈물이 망울졌다.

그것은 그의 푸른 눈동자에 젖어 푸르스름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제 속내를 알고서도 유일하게 도움을 주셨던 누이와 형님이셨습니다. 그분들은 저와 같이 큰일을 도모하고자 자신들의 생명줄이었던 자금을 기업 퍼비스 쪽으로 돌려놨지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두 분이 죽임을 당했다.”

“그것도 아이베리아의 기사에게 말입니다.”

말 그대로 구린내가 진동하는군.

“아이베리아의 기사를 청부살인의 패로 쓰는 것이 가능한 배후가 몇이나 있겠습니까? 분명 또 형제자매 중 하나이거나 혹은 기업 퍼비스 쪽과 관련된 자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거기까지가 당신이 찾은 결론입니까?”

내 물음에 빈센은 눈물 하나를 떨어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상의 결론은 필요 없습니다, 내 형제자매를 죽인 범인이 누군지 알게 된 이상…,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으니. 이후에 중요한 건 그 기사를 처리할 실력자를 구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를 찾았다…, 우연히 만난 점성술사의 말을 믿고?”

“당연히 긴가민가했지만 이렇게 찾았고 또 만났잖습니까. 그러니 저로선 이제 믿고 그에 따를 수밖에요.”

빈센은 작은 호롱을 만지작거리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이 호롱불로 당신의 실력을 직접 확인한 이상, 제겐 이제 확신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 빈센 다르마야.

당신의 이름을 빌려 쓴 그 대가를 지금 지불하겠어.

아이베리아의 깃발, 베나즈의 명의로서.

* * *

랑온의 기사 엔시오.

빈센이 말하기를 그는 아이베리아의 여덟 검 중 하나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아이베리아의 여덟 검이란 명칭을 이미 들어본 적이 있다.

심지어 여덟 검 중 하나인 기사와 직접 마주친 적이 있었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

눈이 두껍게 쌓였던 겨울.

토르킨 선생님을 찾아 한참을 이동하던 때.

길목 한가운데서 바큇살에 사람들을 목매달아 놓았었던 그 기사.

이름이 뭐였지? 가물가물해서 기억이 잘 안 나.

하지만 빈센이 말한 에시오가 아닌 건 확실하다.

그는 결투를 통해 일개 가문의 남자들을 모두 죽였다고 했었어, 그리고 소문을 퍼트리기 위해 석상처럼 길목을 지키고 있었지.

지금 이렇게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도 그때 그 기사의 살기등등함이 유독 짙었기 때문이었다.

아, 이제 생각났다.

그의 이름.

라비온의 기사 켈론.

그래 맞아, 확실해!

그를 지나 교각에 쌓인 배의 무덤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곳에 그에 대한 소문이 다 퍼져 있었던 것도 기억난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재지 않아도 알게 되는 정보가 몇 있다.

리케니엔을 다스리느라 아이베리아 내 쉽게 접할 수 있을 가십조차 잘 모르지만,

어쨌든 들은 것과 겪은 바를 종합하자면…,

아이베리아의 여덟 검은 당사자들의 협의를 거쳐 완성된 명칭이 아닌 항간에서 자연스레 붙여졌을 것이다.

켈론은 본인 입으로 자신을 여덟 검 중 하나라 말하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그 명칭은 소문을 들은 자들의 입에서 멋대로 붙여져 오르내렸었으니까.

또,

빈센이 말하는 기사 에시오와,

내가 직접 만나 봤던 기사 켈론은 그 성향이 아주 다른 것 같거든.

그런 성향 다른 자들이 모여 팔자 좋게 여덟 검이란 명칭을 논의했을 가능성은 없잖아?

적어도 내 기억 속 켈론은 최소한 살인 청부를 하는 기사와는 상종하지 않을 자일 것 같기도 하고.

하여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여덟 검은 모종의 관계로 묶인 어떤 단체가 아니다.

그저 각자 떠도는 여덟 늑대를 두 발 걷는 자들이 하나로 묶어 부르는 것일 뿐.

그럼 그중 하나와 적대하여도 나머지가 나를 적대할 명분도, 아니 이유조차 없다는 뜻이겠지.

“빈센, 이제 의뢰에 대해 질문하겠습니다.”

생각을 마치고 말을 꺼내기 무섭게 빈센이 두 눈을 반짝여왔다.

“뭐든지, 내가 아는 거라면 다 대답하겠습니다.”

“에시오의 행방에 대해 파악한 것이 있습니까?”

빈센은 별다른 고민 없이 답했다.

“제가 왜 그의 유력한 배후로 다른 형제자매 외에 기업 퍼비스를 꼽았는지 아십니까?”

“그가 퍼비스와 긴밀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겠군요.”

“바로 맞췄습니다, 놈은 퍼비스에게 후원금을 받으며 기업의 집행자 노릇을 하고 있거든요.”

“그렇다면 그 배후는 당신의 형제자매가 아닌 퍼비스일 가능성이 더욱 크지 않겠습니까?”

빈센은 이번엔 고개를 대번에 가로저었다.

“바꿔 말해볼까요? 기업의 후원금 몇 푼에 집행자 노릇을 하는 걸 보면 그는 충분한 돈만 있으면 쉬이 조종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다르마야는…,”

“돈이 많지요.”

“예, 또 말하다간 입이 닳을까 봐 말 못 했는데 대신 말씀해주시니 고맙군요.”

씁쓸한 능청을 떨던 그는 재차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다르마야의 자금 유동성은 산이 꼬집고 있는 수맥 줄기만큼이나 다양하고 복잡합니다, 형제자매 가운데 하나가 에시오에게 의뢰를 넣었을 가능성도 빼놓을 수 없을 만큼.”

형제자매들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그 말을 하는 와중에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빈센의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그 두려움을 뚫을 주도면밀함을 내놓는 걸 보면.

왜 그 형제자매 가운데서도 그를 돕고자 하는 이가 나타났는지 알 것 같다.

애초에 망나니이기를 자처해 살길을 도모하는 것부터가,

평범과는 거리가 멀잖아.

“배후는 결국 에시오가 가진 돈 일부의 출처에 달려 있단 얘기로군요.”

“그 말은 배후를 알아낼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백 번 세탁한 옷에 정확히 어떤 얼룩이 묻었는지 알 수는 없으니까요. 특히나 돈은 세탁에 아주 약하거든요.”

그의 말에 나는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놈을 제거함으로써 지지 않는 핏자국을 남기겠다, 그겁니까? 당신의 형제자매든, 퍼비스든 누구든 쉬이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그럼 빈센은,

갑자기 입술을 파르르 떨더니 곧 식은땀을 흘렸다.

“이 만남이 왜 여섯 번이나 실패했는지 이제야 좀 알 것 같군요, 경은 타인의 본질을 너무 쉽게 꿰뚫습니다. 제 호롱에 담긴 별빛도 당신의 그 눈빛만큼은 못하는군요…,”

그저 자연히 맺어진 생각을 내뱉었을 뿐인데,

그것이 그를 찌르는 송곳이었나 보다.

“어쨌든, 에시오는 알레아로의 거리에서 도박을 즐겨 한다는 정보까지 입수한 상태입니다. 하여 그들의 거리를 중점으로 조사한다면 어렵지 않게 마주칠 수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아,”

빈센은 아차 싶은 얼굴로 나를 붙잡았다.

“가장 중요한 것을 묻지 않았군요, 어쩌면 제게 있어선 가장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르는 것을요.”

“어떤…?”

“이 일에 대한 대가 말입니다, 저는 당신에게 정확히 무엇을 지불 해야 하는 겁니까?”

슬쩍 떠보는 듯하면서도 부담스러운 눈치를 보이는 그에게 나는 태연히 대답했다.

“살렌의 고성, 그 화약 한 줌이면 됩니다.”

그럼 빈센은 안도한 표정으로 씩 웃는다.

“돈으론 구할 수 없는 걸 말씀하실까 두려웠습니다. 그것이라면 문제없지요. 미리 준비해놓겠습니다…, 그럼…?”

“…, 이 일로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없습니다.”

내 말에 빈센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그를 뒤로한 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밖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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