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14화 (214/365)

214화. 무저갱 (6)

한 남자가 막 입 밖으로 자줏빛 연기를 내뿜으며 들고 있던 연초를 비벼 끈다.

그런 그의 주위는 형형색색의 연기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 연기 사이사이에는,

색의 가짓수만큼이나 다양한 표정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이곳은,

절망, 그리고 환희.

단 두 개의 감정만이 존재하는 곳이지만, 그것을 그려내는 얼굴의 면면들은 다 다르다.

그들이 느끼는 환희가 다 달랐고,

그들이 느끼는 절망 역시 다 달랐으니까.

“자 돌립니다!”

“19! 19! 나와라, 제발!”

“걸어.”

“응하시겠습니까?”

“해.”

“난 죽어.”

“자, 뒷패 깝니다!”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아이고, 내 혀가 많이 불편하셨구나. 그런데 내 혀가 부적이야 부적, 털면 털수록 짝짝 붙어 짝짝! 와! 봐봐 내가 붙는다고 했지!”

“형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밤중에 별이 되더라도 금화 하나 마차비로 주는 마당에, 그것 하나도 못 빌려줍니까?! 예!?”

“너 이 씨발…, 지금까지 그 마차비로 내가 얼마를 줬냐, 그런데 끝까지 이곳에 아득바득 쳐 기어 와서는 뭐? 너는 새끼야 오늘 내 손에 죽었어.”

휘휘,

저마다의 사정으로 나부끼는 모양을 따라 휘청이는 형형색색의 연기.

그 너머로 주사위는 또 구르고,

다시 때 묻은 패는 뒤집혀 졌으며,

숫자 위로는 매몰된 인생이 쌓여 간다.

게헨나의 알레아로는 바로 이런 곳이었다.

온 세상의 도박이 모두 모여 있는 곳.

그러나 그것 외엔 아무것도 없는 곳.

말 그대로 두 발 걷는 자들을 천천히 소화하는 늪이었으리라.

그리고 그곳에 막,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던 출입문이 벌컥 열렸다.

이내 들어온 것은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 세 명.

그중 좌측에 있던 남자 하나가 도박판 하나를 기웃거리더니 한 남자가 깔고 앉은 의자를 바라보곤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고객 새끼님, 여기에 똥통 가져오지 말라고 몇 번을 얘기했어요?”

“에이, 형씨 왜 그래?! 똥 싸러 가다 내 자리 물리면 그럼 형씨가 책임질 거야?”

“얼마 잃으셨어요.”

“얼마 안 잃었어, 그리고 방금은 금화 200개를 땄지!”

남자의 해맑은 대답에,

정장 입은 사내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그가 깔고 앉은 통에서 흘러나오는 냄새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따가 아가들 보낼 테니까 그때 통 갈도록 하세요, 알겠어요?”

“아이고, 고마워 형씨!”

정장의 사내는 냄새로부터 도망치듯 얼른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럼 중앙에 있던 사내가 슬쩍 고개를 돌려 막 돌아온 이를 꾸짖었다.

“막내야, 교수님께 너무 뭐라고 하지 마라. 한때 저 손으로 바람의 연금 공식을 써 내렸었으니까.”

“에이 형님, 지금은 다른 바람을 잡고 있는데요.”

넉살스레 받아치는 사내의 말에 가운데 있던 사내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그것이 퍽 웃긴 듯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허, 그건 그렇네.”

교수라 지칭한 남자를 먼발치에서 지켜보던 사내는 이내 말없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런 그의 표정은 마치 벌레 보는 듯한 경멸의 것이었다.

이윽고,

오른편에 묵묵히 서 있던 덩치 큰 사내가 고개를 푹 숙이며 입을 열었다.

“형님, 곧 귀빈들께서 오십니다.”

이에 퍼뜩 정신을 차린 가운데 사내는 옷매무새 가다듬고는 바삐 걸음을 옮겼다.

* * *

미로 같은 게헨나에서 누구나 쉬이 찾아올 수 있는 유일한 큰 길목, 그 가운데 지어진 거대한 건물.

[알레아로의 주사위]

그것은 이곳을 지배하고 있는 4대 조직 중 하나인 알레아로의 상징이었다.

그런 그들이 게헨나의 중심지에 이런 거대한 건물을 운용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기업 퍼비스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여 게헨나에서 ‘알레아로의 주사위’는 일종의 성역에 가까운 취급을 받고 있기까지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성역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그 안은 게헨나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밑바닥, 즉 무저갱에 가까운 곳이었다.

다만 무저갱이라고 해도 그곳은 엄연히 체계를 갖춘 도박장이었기에.

소위 귀빈이라 불리는 손 높은 자들도 빈번히 방문했다.

바로 오늘날에도.

알레아로의 주사위 앞에는 휘황찬란한 마차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각 마차에는 중무장한 종자들이 둘 이상씩 붙어서 호위를 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호위하고 있는 마차엔 마땅히 달려있어야 할 깃발이나 상징이 모두 제거된 상태다.

곧이어 마차 문이 열리면,

종자들은 서둘러 그들을 수행하기 위해 마차 문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럼 그 꿇은 무릎 위로,

하나둘 마차 안에서 불쑥 발들이 튀어나온다.

그렇게 종자의 무릎을 밟는 것으로 게헨나에 첫발을 내디딘 그들은 유별난 금색 가면을 쓴 채로 줄지어 알레아로의 주사위 안으로 향했다.

해서 검은 정장을 입은 알레아로의 조직원들이 달라붙어 수행의 수행을 거듭해 그들 모두를 2층으로 올리면.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

금가면을 쓰고 있던 여인 하나가 제일 먼저 그것을 시원스레 벗어 던졌다.

“얼른 판 까세요.”

이에 질세라 바로 이어서 금가면을 벗은 우악스럽게 생긴 여인 역시,

“미리 준비해놨어야 하는 거 아니야? 거기, 술 한잔 타와. 최고급 벨길라르로 말이야.”

아직 준비되지 않은 판에 걸터앉은 채 알레아로 조직원에게 날카로운 신경을 드러냈다.

“어머, 오늘도 오셨네. 판돈은 많이 챙겨오셨나?”

“챙길 필요가 있나요, 그냥 늘 상 오던 대로 오면 되는걸.”

“그런가, 난 잘 모르겠네요. 항상 술에 취한다고 먼저 일어나셨잖아요? 나는 그게 판돈이 다 떨어져서 핑계 대는 건 줄 알았는데.”

“그럴 리가요, 보다시피 최고급 벨길라르가 아니면 술은 아예 입도 대질 않는데. 그게 여간 센 술이어야죠.”

“그렇죠?”

하하, 호호.

두 여인 사이에 오가는 것은 웃음소리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살벌함 뿐이었다.

반대로 다른 판에 자연스레 모인 남자 넷은,

서로를 날카롭게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은 끝까지 가보자고.”

흰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남자가 먼저 운을 떼면,

“안 그래도 그럴 참이오, 전번의 일을 결착 지어야 하지 않겠소?”

짧은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넘긴 남자가 비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이어 거대한 풍채를 가진 곱슬머리 사내가,

“어찌하겠소, 카드? 주사위?”

종목을 물으면.

“당연히 카드지.”

“카드, 그것뿐이오.”

둘은 동시에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상석에 해당하는 판엔 이미 세 남자가 찜이라도 해놓은 듯 자리를 꿰차고 차분히 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은 곱슬한 주홍 머리를 한 남자였고,

다른 한 명은 반 즈음 머리가 벗겨진 후덕한 남자였으며.

마지막 한 명은 흑발의 긴 머리를 가진 날렵한 인상의 남자였다.

잔뜩 긴장한 흑발 남성과는 달리,

주홍 머리를 한 남자는 매우 여유로운 표정이었으며, 후덕한 사내 역시 표정 속에 느긋함이 진하게 녹아 있었다.

“다시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에시오 경.”

이윽고 주홍 머리 남자가 긴 흑발의 남성에게 인사를 건네자,

“반갑소, 라이릭.”

그 인사에 남자는 흑발을 뒤로 넘기는 새침한 모습과는 다르게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러자 곧 이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후덕한 사내가 대뜸 자리에서 일어나,

“이거, 아이베리아의 전설을 실물로 뵈니 정말 영광입니다.”

두 눈을 반짝이며 에시오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러나 에시오는 그를 힐끗 쳐다볼 뿐,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이곳까지 왔으면 그냥 얌전히 도박만 하다 가시오, 괜히 바깥 이름 들먹이지 말고.”

숨이 멎을 것만 같은 살기를 내뿜었다.

이에 순식간에 폭삭 늙어버린 듯 쭈글쭈글해진 남자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그 모습을,

라이릭은 교묘한 눈짓으로 모두 담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조용히, 알레아로의 조직원이 개시한 카드노름을 시작했다.

* * *

에시오는 두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손에는 지금 숫자 2를 가진 카드가 무려 3장이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뿐일까.

바로 전에 벌어졌던 판도 크게 이겨 한 번에 금화 십만 개 가까일 얻은 상황.

이렇다 보니 그는 지금껏 검으로 그려왔던 승리보다 더한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거기다 그가 이토록 희열에 젖을 수 있었던 것은,

상대가 라이릭인 덕분도 컸다.

어느샌가 에시오의 판에 끼어들기 시작한 라이릭은 실력 있는 전문 도박꾼으로,

근래 들어 에시오는 그에게 거의 이겨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그런 그를 완전히 짓눌러버리고 있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이윽고 상대방의 노출된 패들을 모두 확인한 에시오는 자신의 패가 가장 높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

기어이 기사 기질이 다분한 승리욕을 드러내며 모든 돈을 내걸었다.

애초에 라이릭과 계속해서 붙었던 것도 그 고질적인 승리욕 때문이었으니까.

이참에 그를 완전히 낭패시키리라.

에시오는 그렇게 마음먹었다.

그렇게 서로의 패를 드러내 승패를 가리는 때가 찾아오자, 라이릭은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한 라이릭의 모습을 재빨리 확인한 에시오는,

순간 두 다리가 달달 떨릴 정도로 승리에 흠뻑 젖었다.

“역시 아이베리아의 기사는 다르긴 다른가 봅니다.”

라이릭의 한탄에,

에시오는 그 날카롭고 수려한 외모를 활짝 피었다.

감색 눈썹, 짙게 뻗은 속눈썹, 그리고 날카롭게 솟은 오뚝한 코.

그 코만큼 뾰족한 턱.

이 모든 것이 아우러진 그의 얼굴은 누가 봐도 수려하다 느낄만한 것이었지만, 특유의 서려 있는 광기 탓에 오히려 무섭다는 인상을 팍 풍겼다.

이제 카드를 까기 직전,

라이릭은 힘 쭉 빠진 목소리로 푸념하듯 에시오에게 물었다.

“그런데 에시오 경,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이베리아의 여덟 검 중 당신은 몇 번째입니까? 매번 궁금했었는데…,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아 물어보는 겁니다.”

그럼 에시오는 기꺼이 웃으며 화답했다.

“재보진 않아서 모르겠지만, 그놈들을 상대로 질 거란 생각은 들지 않소, 뭐 이게 마지막이라고 하니 아쉽구만, 라이릭.”

곧이어,

에시오가 손에 쥐고 있던 카드를 펼치자,

후덕한 남성이 탄성을 내뱉었다.

“히야…, 높은 패를 가지셨군요…!”

“행운이라는 게 결국 마지막에 오는 것이 진짜거든.”

의기양양해진 에시오가 두 팔을 펼쳐 판 위에 올라온 칩들을 채가려 하는 그 순간.

“그러게 말입니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라이릭이 쥐고 있던 카드를 내려놓았다.

그렇게 완성된 그의 카드는,

다섯 장 모두가 공통된 그림과 공통된 문양이었다.

* * *

눈빛만으로 판을 쪼개버릴 요량인 양, 무시무시한 살기를 한바탕 쏟은 뒤 자릴 뜬 에시오를 뒤로.

라이릭은 옆에 앉은 후덕한 남자를 향해 은근한 말투로 말을 걸어왔다.

“이보쇼, 아이베리아의 기사? 좆까라지, 그는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호구요. 검 좀 휘두르는 게 뭐 대수라고, 내 기본적인 기술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생초짜 주제에 말이야.”

“그… 게 무슨 소리요?”

“이제 놈과는 볼 장이 끝났으니 하는 말이오.”

후련한 표정을 짓는 라이릭과는 달리,

후덕한 남자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사색이 되었다.

“기사? 도박판에 들어오면 다 내 먹잇감이지, 어쨌든 그쪽과도 꽤 즐거운 노름판이었소. 뭐 그쪽이 잃은 것은 없지만, 그래도 재미난 구경은 했잖소?”

“어어…, 어…,”

이제 막 자리를 일어서려는데,

후덕한 남자의 반응이 영 심상치가 않다.

마치 발작을 일으키는 것처럼…,

해서 그 위화감에 라이릭이,

“왜… 그러는 거요?”

하고 물으면 그제야 그의 등 뒤로.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적어도 실력 있는 도박꾼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여러모로 실망이야….”

딱딱,

순간적인 두려움에 이빨을 부딪친 라이릭이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보면,

공허를 담은 듯한 두 눈으로 노려보는 에시오가 있다.

이에,

“이… 이봐 여기 판이 끝났는데 상대가 인정하지 않아! 중재하라고 중재!”

라이릭이 말을 더듬으며 급히 주위에 소리쳐보지만,

어째서인지 알레아로 일당들은 그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왜 쟤네들이 네 말을 못 듣는 줄 알아? 저 찌끄레기 새끼들은 나를 감당할 수 없으니까, 저 새끼들이 네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알레아로 놈들의 목을 전부 다 비틀어버릴 테니까.”

“허… 허억…!”

“자리에 앉아, 쥐새끼야.”

라이릭은 에시오의 살기에 바짝 얼어붙어 감히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면 에시오는 친히,

퍽!

주먹으로 그의 턱 한쪽을 간단히 탈구시켜 자리에 앉혔다.

그 장면에 발작하듯 후덕한 남자가 일어나면.

“너도 앉아, 이 씹새야.”

에시오는 광기를 씹어뱉으며 이죽거렸다.

그리고 태연히, 비단 같은 긴 머리를 뒤로 넘기며 본인의 자리에 앉은 에시오는.

“자, 우리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판을 시작해 볼까?”

라이릭과 후덕한 사내를 번갈아 보며 싱긋 웃었다.

“참, 쥐새끼야. 이걸 말 안 했네. 네가 오늘 처먹은 그 돈 말이야, 실은 동쪽의 다르마야인지 뭔지 하는 것들 둘을 처리하고 받은 돈이거든. 걔들 엄청난 재력가 같았는데, 죽을 때는 마치 닭 같더라고, 목뼈가 어찌나 말랑한지 금방 으스러져 꺽꺽거리는 게 아니겠어? 난 걔들 뼈도 금으로 된 줄 알았는데 조금은 실망했지 뭐야.”

딱딱.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지,

라이릭은 탈구된 턱으로 잘도 이빨을 부딪쳐 떨었다.

“자, 카드 나눠야지?”

태연히,

카드를 아무렇게나 나눈 에시오는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자신의 패를 내놓으며.

“와…, 정말 엄청난 패가 나왔어… 대박….”

소스라치게 놀란 것처럼 광기 서린 표정으로 연기를 시작했고,

직후 공허 담긴 두 눈으로 라이릭을 흘겨보며.

“설마 이 큰 패에 덤비려는 건 아니겠지?”

비웃듯이 이죽거리면, 라이릭은 입술 밖으로 걸쭉한 피를 흘리며 앞에 놓인 카드를 뒤집힌 채로 내밀었다.

마찬가지로,

후덕한 남자 역시.

“주… 죽겠습니다.”

카드를 뒤집지도 않은 채 에시오에게 내밀었다.

“와! 나 오늘 운이 정말 좋은 것 같아. 기세를 몰아 좀 더 본격적으로 해보자고, 알겠지?”

* * *

형형색색의 연기가 자욱한 무저갱.

그곳에 막.

어스름을 뒤집어쓴 자가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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