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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노래-215화 (215/365)

215화. 무저갱 (7)

“믿을 수가 없군! 또 이기다니!”

아무런 의미도 없는 패,

그 위로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은 에시오가 다시 한번 판돈 위에 걸린 것들을 휩쓸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에 그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아니 감히 할 수 없었다.

당장 에시오와 둘러앉은 두 사람조차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급급했으니까.

그마저도 후덕한 남자가,

“애석하게도 판돈이 다 떨어져 버렸는데, 그만…,”

식은땀을 줄줄 쏟으며 에시오에게 간청하듯 빌어봤지만.

“네 손에 달린 그걸 걸면 되겠네, 소시지 매듭이라기엔 지나치게 화려한 것 같지 않아?”

에시오는 광기 서린 눈으로 후덕한 남자의 손가락에 걸린 반지를 노려볼 뿐이었다.

이에 남자는 군말 없이 덜덜 떠는 손으로 끼고 있던 반지를 빼 판 위에 올려놓아야 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알레아로 조직원들은,

창백해진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눈치를 볼 뿐이다.

개중에 조직 내 간부로 보이는 이에게 둘 정도의 조직원이 달라 붙어왔다.

그들은 일찍이 귀빈 대접을 위해 먼저 와 준비를 했던 삼인방이었다.

“형님…, 어쩝니까…?”

왼편에 서 있던 사내가 귓가에 대고 급박히 속삭였다.

“어쩌긴 뭘 어째, 그냥 이대로 죽 닥치고 있어.”

아까의 여유로움은 어디 갔는지, 가운데 남자는 부하의 속삭임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럼 묵묵히 서 있던 오른편의 덩치 큰 사내가 조심스레 그에게 묻는다.

“형님, 도박사 쪽은 모르겠지만 저 남자는 기업 아실케즈의 고문입니다. 이 일을 방치한다면 틀림없이 우리 조직에 후폭풍이 들이닥칠 거예요.”

“얼간아, 그래서 아이베리아의 기사를 어떻게 처리하자고? 그것도 그냥 기사가 아니라 여덟 검 중 하나라 불리는 괴물을 우리가 어떻게?”

가운데 남자는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재차 일갈하듯 속삭였다.

“예전에 마약 잘못 놀린 카멘토 놈들이 기사들에게 작살났던 때를 잊었나 본데, 이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하지만 그 일갈에도 덩치 큰 남자는 담담하고 차분하게 반론했다.

“하지만 형님, 기업 아실케즈는 그 악명 높은 비츠 용병단과 계약 상태지 않습니까? 저 남자가 후에 그 용병단을 이끌고 온다면 그것 역시 우리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아! 그래서 어떻게 하자고?!”

덩치 큰 남자는 눈을 번뜩이며 좀 더 은밀하게 고개 숙여 속삭였다.

“틈을 만들어주자는 겁니다, 저 기업가가 어떤 조치를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조직에까지 갈등이 번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저 둘을 부딪치게 만들어라?”

괜찮은 계획이다.

가운데 남자는 부하의 말에 수긍했다.

“너, 애들이랑 같이 가서 기사의 칩 정리를 돕도록 해. 겸사겸사 그 시간 동안 쉬는 시간도 종용해가면서.”

직후 왼편의 부하에게 지시를 내리자 그는 대번에 펄쩍 뛰었다.

“왜 제가 갑니까…?! 계획을 내놓은 놈이 가야지…!”

“계획을 내놨으니까 네가 가야지 새끼야!”

간부의 호통 섞인 속삭임에 왼편에 서 있던 부하는 하는 수 없이 손짓으로 주위의 조직원들을 불러 모았다.

그렇게 대여섯이 모이자마자 에시오 쪽으로 걸어가면,

그 모습을 간부와 오른편의 부하가 마른 침을 삼키며 구경한다.

“고객님, 칩 정리를 도와드리겠습니다.”

공손한 물음에 예상과 달리,

에시오는 점잖을 떨며 흔쾌히 승낙했다.

“좋아, 그렇게 해. 워낙 많으니 시간이 꽤 걸릴 거야.”

곧바로 장정 다섯이 에시오의 옆에 매달려 칩들을 정돈하기 시작하자,

그 부산스러움에 눈썹을 꿈틀거리던 에시오는 의자를 뒤로 물려 뻐근함을 풀려는 듯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후덕한 사내는.

“잠시 쉬는 시간을 갖는 게 어떻습니까?”

조심스레 에시오에게 물었고, 에시오는 역시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군, 두 사람도 될 수 있으면 쉬는 시간에 그 메말라 버린 운을 좀 적셔 오라고. 주변에 오입질 할 곳은 아주 많으니까.”

적나라한 비아냥과 함께.

* * *

겨우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후덕한 남자는,

2층 난간에 위태롭게 기댄 채 한참을 뒤뚱거리며 품을 뒤졌다.

그렇게 깊숙한 주머니 안쪽에서 겨우 찾아 꺼낸 건,

감색 가죽이 덧대어진 작은 함.

그 안에는 둥글게 뭉쳐진 흙덩이가 들어 있었는데, 남자는 그것을 집어 들고는 얼른 입안에 넣었다.

그가 입안에 넣은 것은 작은 산의 변조품,

더 정확히는 ‘비상 연락망’에 속하는 물건이었다.

기업 아실케즈의 간부들에게만 지급되는 그것은 통상 신체 일부를 대기만 하면 되는 것과는 달리,

특이하게도 혀를 가져다 대야만 제 능력을 발휘하게끔 만들어져 지금같이 입안으로 집어넣어 구슬려야만 했다.

이같이 만들어진 이유는,

구태여 혀로 구슬려 써야 할 정도로 자신이 위급하다는 걸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한 마디로 절박함을 내비치기 위한 과정을 넣은 것이다.

물론 말이 그렇고, 지금 당장 흙덩이를 사탕 먹듯 입안으로 구슬리던 남자도 알고 있다.

비용 문제로 여러 가지 과정을 넣어 함부로 쓸 수 없도록 조치해놓았다는 걸.

절박함을 내비치기 위한 과정?

비상 연락망에 그딴 일련의 과정이 배치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 아닌가?

한줄기 불평이 스쳤지만 그래도 남자는 직면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충분히 적신 흙덩이를 머금은 채 나직이 말했다.

“근처에 대기 중인 비츠 용병단에게 알린다, 알레아로의 주사위에서 구원을 요청하니 서둘러 집결해 올 수 있도록.”

이후 남자는 입안에 머금은 흙덩이를 바닥에 뱉어,

그것을 발로 짓밟아 비벼 인멸했다.

* * *

다시 시작된 판,

그리고 달라진 기류.

그것을 제일 먼저 눈치챈 것은 에시오였다.

후덕한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미약한 여유로움,

그리고 그런 여유로움을 가져오기까지 있었던 앞 전의 일들.

‘알레아로 새끼들이 틈을 만들었다’

날것에 가까운 본능으로 결론을 도출한 에시오는 삐죽.

입꼬리를 올리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 모든 과정의 전제에는 에시오의 의도가 깃들어 있었다.

해서 방금의 미소는 단지 지금 상황이 자신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음을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자, 카드를 나눠볼까?”

그럼에도 에시오는 태연하게 허리를 쭉 빼고 노름을 재개했다.

“맞다, 그쪽은 판돈이 없다고 그랬지?”

초조하게 뭔가를 기다리는 듯, 시종일관 다리를 달달 떠는 남자에게 말을 걸면.

남자는 식은땀이 튈 정도로 펄쩍 뛰며 반응한다.

“그… 그렇습니다.”

“그럼 아 해봐.”

잘빠진 얼굴로 우악스럽게 입을 벌리며 후덕한 남자를 닦달하자,

“아… 아….”

남자는 별수 없이 에시오의 말에 따라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럼 그때를 놓치지 않고 두 눈을 번뜩인 에시오가.

팍!

날렵한 바람 소리를 내며 말 그대로 의자를 박차고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판 위에 올라온 그는 입 벌린 남자 앞에 쭈그려 앉아.

“이걸 걸자, 내가 판돈으로 받아줄게.”

그의 금칠 된 이빨을 집게손가락으로 붙잡았다.

“아… 아아아!”

후덕한 남자는 당황한 듯 몸부림을 쳐보지만, 에시오의 다부진 손에 붙잡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우악스러운 힘이길래.

곧 금니를 집은 쪽에서,

으적.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끄으으으으으!”

발작하듯 벌벌 떨며 비명을 지르는 후덕한 남자를 뒤로하고, 에시오는 입안에서 뽑은 금니를 판 위에 던져놓았다.

“아 그리고, 위대한 도박사 쥐새끼는 이번 판이 끝나면 판돈이 다 없어지겠네?”

피에 젖은 손을 판 위에 스윽 닦아내던 에시오는,

말을 마치기 무섭게 고개를 돌려.

그 옹이구멍처럼 검은 두 눈으로 라이릭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다음 판돈으론 뭘 걸지 기대해보겠어, 너무 억울해하지는 마. 명분은 네가 줬으니까.”

하지만 라이릭은 이번에 작심한 듯 참지 않고 울분을 토해냈다.

“쿨럭…, 웃기히 마아…, 살히아 새이…!”

다만 턱이 탈구되어 발음이 어눌하게 새어서,

이에 미간을 찌푸린 에시오가 그에게 다가가 손수 턱을 맞춰 주었다.

으득 으득.

거리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흐으으… 으으!”

라이릭이 발작을 거듭하고 나면, 이제 에시오가 더욱 무서운 눈초리로 그에게 쏘아붙였다.

“다시 말해 봐.”

라이릭은,

기세에 눌리지 않고 응수했다.

죽을 운명을 알아챈 개미처럼.

“웃기지 말라고 했다, 살인자 새끼야. 기사고 여덟 검이고, 도박 판돈을 위해 살인 청부를 뛰는 주제에.”

“그리고 너는 그 돈을 솎아 먹으려고 달라붙은 빈대 새끼지, 아니야?”

“그래, 어차피 무저갱 위를 돌아다니는 건 똑같지. 다 쓰레기 새끼들이라 이 말이야. 그런데 말이야? 쓰레기에도 급이라는 게 있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쏘아붙이는 라이릭에게,

에시오는 얼음장 같았던 얼굴을 풀며 물었다.

“급은 내가 정하는 거다, 쥐새끼야.”

“네가 무슨 자격으로.”

“유구한 힘의 논리로.”

“그걸 말하기엔, 넌 이제 솔직히 기사라고 부르기도 모호한 살인자잖아?”

“키…,”

라이릭의 말에,

에시오가 급작스럽게 어깨를 떨며 웃었다.

“키키킥…!”

목을 한껏 긁으며 튀어나온 그 웃음소리는 말 그대로 광기의 재현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키키킥, 쥐새끼야! 그것도 내가 정하는 거야.”

뭔가 벌어지기라도 할 듯,

일촉즉발의 기류가 흐르는 그 상황 속에서.

한껏 눈치를 보고 있던 후덕한 남자는.

어두운 창밖 너머로 보이는 일렁거림을 발견하곤 슬슬,

의자를 뒤로 빼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일렁거림이 대번에 커지자 기다렸다는 듯.

“여기! 이 새끼야! 얼른!”

후덕한 남자는 자리를 박차고 물러나며 소리쳤다.

쨍그랑!

하는 신랄하기 짝이 없는 유리의 비명이 사방에서 울려 퍼지고, 안의 조명에 흠뻑 젖은 파편이 반짝거리며 비산한다.

흘러들어온 그림자처럼, 깨진 유리창 너머로 스멀스멀 쏟아져 들어오는 열,

아니 열다섯의 중무장한 병력.

그들이 순식간에 판 위에 올라와 있는 에시오를 둘러쌌다.

갈고리,

쇠 그물,

폴암 류의 창과 투박하지만 그만큼 위력적인 글라디우스.

그리고 목에 프릴이 달린 검은 갬비슨.

마치 두 발 걷는 자를 사냥하러 온 듯한 그들의 행색을,

단 두 번의 눈 움직임으로 간파한 에시오는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 하나하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비츠의 용병단이군, 그렇지?”

그러자 에시오를 둘러싼 자들 가운데 하나가 대답했다.

“이 이상은 서로에게 손해니 이쯤으로 하는 게 어때? 아무리 아이베리아의 기사라고 해도 우리를 상대론 무사히 돌아갈 순 없어.”

“하, 언제부터 용병 나부랭이가 아이베리아의 기사에게 그런 같잖은 말을 할 수 있게 됐지?”

에시오는,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기지개를 피듯,

아니 우아한 새 한 마리가 날아오르려는 듯.

이어지는 유려한 그의 팔 움직임.

그 끝엔 어느샌가,

초승달 같은 시미터가 들려 있었다.

몸에 검집을 두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이질감이 느껴지는 그 발도에,

용병들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한 번 쳐야만 했다.

“오늘 너희들의 무지를 바로잡아주마.”

곧,

무방비한 자세로 주위 모두에게 선언하듯 말하는 에시오.

그것을 기점으로,

용병들은 망설임 없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동시에,

정확히 셋이 목이 떨어진 상태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것은,

비전.

[멘체오 프라테]

아이베리아의 여덟 검 중 하나라 불리는 에시오의 검술.

동쪽 지방의 춤을 기반으로 쌓아 올린 검의 사위이자.

사각이 존재하지 않는 무위.

허리를 꺾어 날아오는 갈고리를 엮어 쳐내고, 그 꺾은 상체째로 몸을 유려히 돌려 시미터를 만월 그리듯 돌려 베면.

이어 몸 갈린 용병 둘이 또 나가떨어진다.

병기끼리의 부딪침을 최소화하고, 공격의 각을 신체의 춤으로 창조해내는 그것은 반대로 상대에겐 극한의 사각을 찌르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검은 무리 사이에서 고고한 학처럼 두어 바퀴 춤을 추듯 휘날리면,

어느새 용병은 반절이 줄어 있었다.

* * *

바람결로 느껴질 정도의 살기가 2층에서 쏟아져 내려온다.

해서 즉시 계단 난간을 붙잡고 단숨에 오르면.

그것은 기다렸다는 듯,

한 무리의 죽음 가운데서 고고히 나타났다.

“너는 용병이 아니야, 그렇지?”

은연중에 흐르는 내 살기를 포착한 것일까, 그는 피 묻은 시미터를 내게 겨눈 채 물었다.

그럼 나는,

테리아가 빌려준 검 질리스를 뽑아 든 채 담담히 되물었다.

“에시오, 맞나?”

이에 그는,

“보다시피.”

피 묻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는 미소와 함께 내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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