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무저갱 (8)
모습은 마치 강 위를 날아오르는 고고한 새처럼,
그러나 그 발걸음은 절벽을 내려오는 산양처럼.
무시무시한 속력으로 뛰쳐나온 에시오의 손에서 기다란 초승달 하나가 그려졌다.
이에 그려진 초승달을 가르듯 질리스를 내세워 휘두르면.
칵!
곧 두 검이 비명을 지른다.
동시에 나와 에시오를 중심으로 둥글게 퍼져나가는 바람은,
와작!
나무 바닥재를 일으켜 세웠고.
파박!
고급스러운 노름판을 그대로 뒤엎어 버렸다.
단 하나의 합.
그 하나로 벌써 주위는 초토화가 되었다.
그리고 그 초토화의 시발점에서,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친 채 맞대고 있던 검을 슬쩍 비틀었다.
그럼 그는 의외라는 듯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묻는다.
“제법…,”
이윽고 검을 위로 올려 나와 이루고 있던 균형을 깨트린 에시오는 제자리서 한 바퀴 우아하게 돌며 검을 내둘러 쳤다.
이에 그 궤적에 대항해 질리스를 우뚝 세워 잡은 채 자세를 다잡았다.
끼기긱!
찔끔 튀어나온 불똥과 함께 자지러지듯 울려 퍼진 굉음.
그리고 그 강렬한 충격이 내 손목을 통해 전해진다.
생각보다 강한 위력에 내 몸은 한참이나 뒤로 밀려 있었다.
이어서 다시 검을 고쳐 잡고 서 있으면,
마찬가지로 에시오 역시 손목의 감각을 느끼는 듯 검을 휘휘 돌리며 내게 말했다.
“제법이야, 너.”
찌릿하다.
온몸에 잠들어 있던 벼락같은 감정들이 모두 일어난 것처럼 찌릿찌릿해.
저자가 쓰는 비전도,
그 비전으로부터 느껴지는 강함도.
모두 나를 일깨우고 있는 것 같다.
“당신도 그 명성이 거짓은 아니었군.”
담담하게 말하면 그는 대답 대신 다시 앞으로 뛰쳐나와 위로 들친 시미터를 내리쳤다.
통상적인 상단 베기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마치 춤사위 같은 그 유려한 곡선에 대항하여.
[운명의 노래]
[역전]
두 눈을 부릅떠 그 궤적과 검의 윤곽을 감각적으로 느끼며 맞받아쳤다.
그리고 그 부딪침으로,
알았어.
시미터의 길이,
그 굽이,
바깥날의 길이와 안쪽 날의 길이 차이.
마지막으로 에시오, 너의 호흡까지.
다시 춤을 추듯 발로 땅을 두어 번 두들긴 에시오가 한 박자 더 빠르게 움직였다.
그 속도는 눈앞에서 잔상이 남을 정도의 것이었다.
허리를 베는 수평,
카각!
그 수평에 반대되는 상 하단 자르기.
챙!
그리고 갑자기 턱 아래로 들어오는 찌르기까지.
끼긱!
그가 그리는 것보다 반 박자 빠르게 올라타 질리스로 모두 맞받아치면,
이제.
그가 그리는 검술을 어떻게 역전시켜야 하는지도 알아냈다.
지금부터는,
부딪침이 곧 내 공격이다.
그의 궤적이 내가 그리는 궤적의 시작점이 될 것이다.
다시 검을 고쳐 잡고 자세를 잡자 에시오는 전과는 다른 굳은 표정으로 서 있다.
“누구냐, 아이베리아의 어디서 왔느냐?”
고개를 갸우뚱,
흑발을 길게 늘어뜨린 채 섬뜩한 표정으로 묻는 그에게 나는 일말의 흔들림 없이 답했다.
“출신보단 출처를 알아야 할 거다.”
그 답에,
에시오는 그 미모가 아까울 정도로 얼굴을 찡그리며 말없이 이를 깨물었다.
잠시 후, 에시오가 들끓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출처라…,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다는 건가?”
“그래, 그리고 너는 네가 죽였던 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죽을 거다.”
“킥! 너도 기사의 명분 아래 줄타기를 하는 놈이로구나!”
“글쎄, 그럴싸한 명분이 있는 상대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너와 같이 아예 기사이길 포기한 종자라던가…,”
“닥쳐.”
에시오의 두 눈이 번뜩였다.
“네놈을 죽여 그 머리를 사주한 자 앞에 가져다 놓아주지.”
“그럼 더 말 붙이지 말고 얼른 결착을 짓자.”
이번엔 내 쪽에서 먼저 움직였다.
땅을 박차 쏜살처럼 그의 지척까지 다가오면, 그는 자신만의 간격을 유지하기 위해 뒤로 살짝 빠졌다.
곧이어 그의 앞에 도달하기 무섭게…,
뭐지?
양각에서 동시에 검이 날아들고 있다.
아니, 이건 착각이다.
그저 압도적인 속력으로 연속해 휘두른 공격이야.
둘 중 먼저 닿는 것은 왼쪽.
차작!
왼편의 초승달을 걷고 바로 오른편의 초승달을 걷으면, 곧이어 아래에서 초승달이 솟아오른다.
그럼 바로 높이 뛰어올라,
그마저도 체공 시간을 늘리기 위해 몸을 한 바퀴 돌리며 내려오면.
그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턱 밑에 시미터를 댄 채 날 조준하고 있다.
“흐!”
그렇게 약간 지쳐 거칠어진 숨과 함께 악랄한 웃음소리를 낸 그가 그대로 내 앞으로 쇄도해 찌르기를 작렬시킨다.
위력은 둘째치고 그 속도와 기세가 엄청나다.
그의 비전 가운데서도 굵직한 한 줄기 빛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결정적인 공격이야.
하지만,
내 검은,
카가각!!
이미 그의 시미터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찔러 들어오는 시미터의 끝을 타고 들어가듯, 가로 세운 질리스로 그의 검날 위를 긁는다.
이건 순전히 반응 속도라고 치부할 수 없다.
그래, 검을 들고 상대와 부딪쳐야만 발휘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나만의 비전이자 맥레인의 가장 확실한 유산, 운명의 노래다.
드센 불똥을 쏟아내며 에시오는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직후 그가 내 뒤에 멀찍이 착지하고 나서야, 뒤늦게 둘 사이에 감돌고 있던 바람이 터져 나갔다.
얼마나 집중했을까.
곧 먹먹한 귀 바깥으로 아연실색하여 도망치는 도박장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픽.
그리고 그 돌아온 청각에 맞추어.
내 등에 걸려있던 어스름 끝이 갈라졌다.
상쇄했으나,
그의 찌르기 자체의 공격력은 온전히 상쇄하지 못한 것일까.
어쩌면,
그에게 크게 베일 수도 있겠어.
* * *
픽.
볼이 따끔하다.
이윽고 뜨거운 것이 주르륵 흘러내리더니 내 입꼬리를 걸쳐 뚝뚝 떨어졌다.
그것을 따라 고개를 아래로 내려보면.
피다.
뚝뚝.
피가 떨어지고 있다.
그래 나는 분명,
그에게 내 비전 ‘멘체오 프라테’의 1식을 썼다.
그런데 모르겠어,
마치 그의 검에 내 찌르기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뿐이었다고…!
그리고 그 찌르기가 거의 끝나기 직전에 나는.
그래 나는,
죽음을 느꼈다.
그래서 찌르기 막바지에 궤도를 바꿔야 했어.
저 검술은 대체 뭐지?
애초에 알고 있었다는 듯, 내가 내세운 박자보다 정확히 반 박자 빠르게 반응하고 있다.
처음은 그러려니 했는데,
나와 같은 속도파인 줄 알았는데.
아니야.
정확히 두 번째 시작된 합부터는 그의 기류 자체가 바뀌었다.
반 박자 빠르게 움직여,
내가 내지른 검의 궤도를 타고 역으로 자신의 궤도를 그려온다.
난 씨발 살면서 그딴 검술이 있다는 건 들어보지도 못했어.
그럼…, 비전?
아이베리아에서 저런 비전을 갖고 있는 검사가 있다고?
그것 역시 들어보지 못했다!
애초에 저런 비전을 가진 검사라면 아이베리아를 넘어 세 개 대륙에 이름을 알렸을 거야.
‘줄리오 비사’나 ‘가론 에인츠’처럼 말이야…!
대체…, 누구냐,
“누구냐, 너는…!”
처음으로,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상대는 내 물음에 역시나 담담히 대답했다.
“네 목숨 거두는 걸 의뢰받은 사람.”
슬쩍 뒤돌아 그를 바라보면, 마치 내 자신이 빛바래 보일 정도로 눈부신 얼굴이 보인다.
나는 다시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래도 내 검이 아예 닿지 못한 것은 아니다.
적어도 내 비전이 그에게 통한다는 것은 알게 되었으니, 그 본능을 부여잡고 날것의 감각을 지속해 간다면.
승산은 있다.
도박에 비하면 이 대결의 승패가 더 선명해 보일 정도로 말이야.
“그럼 너는 그저 이름 없는 자로서 세상 그 누구도 모르게 죽어가겠군.”
지금부터가,
내 본의다.
[17년, 페르프디]
대지를 한 모금 들이킨 바다
과거 대도시 논타를 침수시킨 재해이자,
지금은 강림의 개념으로서 존재하는 힘의 파편.
그것이 나의 검, 루크바의 자루에서부터 쏟아져 나온다.
자,
이름 없는 자여.
이 박자도 한 번 타보아라.
사뿐히 바닥을 즈려밟고 앞으로 나아가면.
어느샌가 바닥은 흠뻑 젖어있다.
상대는 내 움직임에 맞추어 자세를 붙잡았다.
이미 내 박자를 모두 간파한 듯이.
그런 그의 앞에서 허공에 높이 뛰어오른 나는 몸을 옆으로 기울여 그대로 회전했다.
검속을 최대한으로 늘려 그 파괴력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내 검을 맞받아치기 위해 상대가 검을 내지르기 시작하지만.
그 순간.
그의 얼굴엔 당혹감이 물들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도 허공에 두둥실 떠 있었으니까.
마치 ‘수중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이것이 바로 강림형 인챈트, 페르프디의 힘.
그 페르프디의 힘이 내 비전 멘체오 프라테와 만나 종잡을 수 없는 박자를 쏟아낸다.
자, 너는 내 변주를 받아낼 수 있는가!
한참이 지난 후에야 뚝 떨어지는 내 검격에, 상대는 간신히 빗겨 쳐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기세를 더 몰아,
발하나를 축 삼아 몸을 빙글빙글 돌려 무수한 검격을 쏟아냈다.
물론 그 사이사이엔 수중에서 움직이는 듯한 변주가 들어가 있어서,
그것을 제법 맞받아치던 상대는 결국 박자를 놓치고…,
픽!
베었다.
춤사위를 멈추고 검을 가다듬으면,
마주 서 있던 상대는 붉게 물든 팔을 부여잡고 있었다.
아마 그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겠지?
거기다 나를 표독스럽게 노려보고 있을 거야!
기대감에 얼른 고개를 들어 상대 얼굴을 봤더니,
그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내가 아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
내게서,
한눈을 팔아?
급격하게 치솟는 부아에.
“뭘 보고 있는 것이냐!”
윽박지르며 더욱 강한 기세로 달려나갔다.
그 얼굴, 아주 진창으로 만들어주겠어…!
멘체오 프라테, 3식.
세 점을 연달아 찌르는 이것은, 인챈트 페르프디의 힘과 만나면 그 위력이 배가 된다.
내가 가진 공격력 중 가장 강력한 것이라 자부하는 이것은.
아이베리아의 여덟 검이라는 칭호를 안겨줬던 것이기도 하다.
그래, 이 공격이 바로 내 극의.
세 점 가운데 찔리기 직전까지도 그 순서를 파악할 수 없는 극악의 변주.
달려나감과 동시에 이미 자세는 완성되었다.
세 점은,
놈의 목과 폐 그리고 심장.
이제 놈이 내 사거리에 들어왔다.
여지없는 완벽한 순간을 포착한 나는 그대로.
쉬익!
검을 내질러 바람을 날카롭게 찔렀다.
* * *
틀림없어.
일전에도 이 감각을 느껴본 적이 있다.
그 찰나의 순간,
에시오, 그의 변주가 가미된 검술이 내 눈에 모두 보였어.
그것은 마치 한 조각의 퍼즐이 되어 그에 맞아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다만 익숙하지 않아서.
너무나 낯선 것이어서.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그에게 틈을 허용해버렸다.
그런데 다시 지금,
막 쇄도해 들어오는 그의 공격이.
아까와 똑같이 다 보인다.
이건,
그러니까…,
맞아.
이 감각은 이미 일전에 느껴본 적이 있다.
아직도 정확히 기억해.
타히그의 소설, 블레막 속에서 검은 눈 바치를 상대할 때.
그가 쏜 총알을 튕겨냈던 그때에도 지금과 똑같은 감각이 느껴졌었지.
낯설지만, 분명한 내 감각에 기인해 나타난 반응.
이것은 분명 내가 가진 검술이 나아가려는, 내디디려는 첫걸음의 방향이 아닐까.
그래서,
해서 나는 이것에 내 검술의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그것은 역전을 잇는…,
‘감응’
[운명의 노래]
[감응]
호흡을 가다듬자 두 귀가 집중에 닫혀 먹먹해진다.
모든 것이 느려지고, 동시에 에시오가 내민 속도만큼 달아오른 내 몸이 빨라진다.
그가 찍으려는 세 극점이 모두 보인다.
그 순서도, 그 궤적도 모두 내 감각적 시야 안에서 미리 그려진 것처럼 보인다.
나는 지금,
그의 변주에 감응해있다.
그리고 그 변주에 감응한 나는 다시.
역전을 쓴다.
맨 처음은 폐를 노리는 찌르기,
그 위에 정확히 질리스를 올린 나는 그의 공격을 빗김과 동시에 얻은 궤도로 정확히 상대의 턱 밑을 베었다.
이어 심장에 쇄도하는 두 번째 찌르기마저 올라타 그의 배를 베었다.
마지막으로 목을 노리는 찌르기를 빗겨 그대로 그의 목 중앙을 가르면.
동시에 감응의 시간도 끝이 난다.
마치 가둬놨던 물을 쏟듯.
왈칵하고 쏟아지기 시작하는 시간.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나를 스쳐 지나가는 에시오.
제3의 입장으로 보기에 이 모든 과정은 찰나 중에서도 파편에 해당하는 시간이었으리라.
…,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푸… 욱….”
등 뒤로,
한바탕 피를 토해내는 에시오의 신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쿵.
그는 그대로 무저갱을 향해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