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소해
아직,
숨이 붙어있다.
“그르륵… 끄륵….”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피 웅덩이에 빠진 에시오는 한참을 허우적거리며 목을 끓였다.
충격에 젖은 두 눈의 초점은 점점 희미해져 갔지만, 그럼에도 그 시선은 끝까지 내게 집중되어 있었다.
나는 그 앞에 서서,
지지부진한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곧,
“그르르륵…,”
힘 빠진 숨과 함께 입과 코로 피거품을 뿜어낸 에시오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 피에 흠뻑 젖은 시미터를 내 쪽으로 밀어왔다.
이에 나는 그런 그의 마지막 의중을 받아들였다.
기꺼이 그 피 웅덩이 속에 손을 뻗어 그의 검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것을 확인한 에시오는 그제야,
천천히 눈을 감았다.
솔직히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궁금했어.
무슨 의도였는지도 알고 싶었고 말이야.
하지만 이제 더는 궁금하지 않아.
그저 어림짐작만 해볼 뿐.
에시오, 그나마 너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기사의 조각을 내게 건네준 것이냐.
가지고 있을 자격이 없다는 걸 뒤늦게라도 뉘우친 것이냐.
그렇다면 나는,
“잘 가라…, 에시오.”
씁쓸히 동정해주겠다.
프스스.
하는 망자의 숨결이 에시오로부터 들려왔다.
그의 몸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피 웅덩이에 반쯤 가라앉았다.
그리고 이에 맞춰,
소란스러운 현장 한가운데를 고고히 거슬러 올라 나타난 빈센 다르마야.
그는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죽은 에시오를 내려보다가, 이내 울컥 쏟아지려는 울분을 간신히 어금니로 씹어 넘기며 작게 중얼거렸다.
“다르마야는 진 빚을 반드시 갚는다.”
그리곤 태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끝났군요, 전부.”
허무함이 짙게 묻은 말투로 물었다.
“끝났습니다, 전부.”
이에 대답하기 무섭게 빈센은 허리에 달린 회중시계를 힐끗 바라보곤 몸을 돌린 채 내게 말했다.
“마차를 준비했습니다, 피로스로 모시죠.”
그러다가 걸음을 우뚝 세운 그가,
금방이라도 푸른 기운이 쏟아질 것만 같은 두 눈으로 날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다르마야는 진 빚을 반드시 갚아야 하니까요.”
그 안엔 꽤 묵직한 중의가 담겨 있었다.
그러면서 한때,
그의 모습으로 의태 했었던 당시에 저런 비슷한 말을 한 기억이 떠올라서.
그 부끄러움에 입술로 자조를 그린 나는 천천히 뒤를 따랐다.
* * *
도박장 밖으로 나서면 곧, 그 앞에 게헨나의 삶과는 매우 동떨어져 보이는 거대한 마차가 보였다.
장담하는데, 네 마리의 흑마가 이끄는 그 마차는 지금껏 내가 봐왔던 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빈센의 등장에 맞춰 마차는 자동으로 그 문을 활짝 열었고, 그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간 그는 이제 푸른 눈으로 날 바라보며 공손히 손짓했다.
“들어오시지요.”
빈센의 안내를 받고 마차 안으로 들어서자 검은 가죽으로 이루어진 실내가 보였다.
날이 어둑해지는 와중에도 마차 안은 밝았는데, 이는 차창에 붙어있는 유리관 속 반딧불이 덕분이었다.
그 은은한 빛과 푹신한 가죽으로 뒤덮인 내부는,
표현하자면 딱 그가 가진 부의 단편을 훔쳐본 듯한 느낌이었다.
빨아들이듯 내 몸을 흠뻑 받아들인 가죽 의자.
그 안에서 어색하게 앉아 있는 나를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던 빈센은 갑자기 뭐가 그렇게 흥미로웠는지 얕은 미소를 머금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로군요, 제 개인적 취향이 반영된 마차 때문에 혹 불편하지 않으실까 걱정했거든요.”
이윽고 빈센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육중한 마차 문이 스스로 움직여 굳게 닫혔다.
“베직스, 피로스로 곧장 가줘.”
이내 차창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기수에게 목적지를 전달한 빈센은, 다시 마주 앉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부럽습니다.”
그리곤 대뜸 운을 뗀다.
“무엇이 말입니까?”
“당신의 그 강함 말입니다.”
그 말에 나는 고민 없이 즉답했다.
“당신은 충분히 강합니다.”
그럼 빈센은 나긋이 고개를 끄덕이며 푸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잘 압니다, 휘두를 수단을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강함이 성립된다고 말씀하시려는 거겠죠.”
내가 전하려는 의중을 정확히 꿰뚫었다.
이어 그는 슬픈 얼굴로 차창을 내다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가끔은 직접 발휘해야만 의미 있는 일이 있기 마련이지요.”
그의 눈에서 푸름을 품은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이제껏 참은 것이 용해 보일 정도로,
그것은 참 애처로워 보였다.
그를 위로해볼까도 생각해봤지만, 나는 곧 그만두길 결심했다.
침묵이 최고의 위로일 때도 있으니까.
그래서 그를 따라 나는 한동안 차창 너머에 온 신경을 쏟았다.
마차는 그 어떤 거친 길 위에서도 빙판 위를 미끄러지듯 흔들림 없이 굴러갔다.
네 마리의 흑마가 맞추는 합 역시 매우 절묘해서 잘 모르고 들으면 말 한 마리가 내는 발굽 소리라 착각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질주를 거듭하는 마차 앞을,
게헨나의 그 누구도 막지 않았다.
빈센의 수단이 게헨나 전체에 강력히 작용하기라도 하는 듯, 딱 보아도 험해 보이는 무리조차 오히려 군말 없이 길을 터주기 바빴다.
“한동안 아이베리아 전역이 떠들썩해지겠군요.”
이윽고 감정을 추스른 빈센이 오랜 침묵을 깼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 정확히는 아이베리아의 내로라하는 무인들이겠군요. 귀하께서 여덟 검 중 하날 부러트렸지 않습니까.”
그는 제법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수많은 검사가 그 공백을 자신의 이름으로 채우기 위해 고군분투하겠지요. 귀하께선 그 명예에 관심이 없으십니까?”
그것에 몰두하기엔,
내 앞에 놓인 과업이 너무 크다.
해서 나는 고개를 가로젓는 것으로 대답했다.
역시나 내 의중을 단박에 간파한 빈센은 부드럽게 화제를 전환 시켰다.
“참.”
차창 너머는 어느새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사방에 거대한 첨탑을 낀 성벽이 보여.
“피로스는 처음이시겠군요.”
“그렇습니다.”
곧 마차가 성벽 안으로 들어섰다.
그에 맞춰 빈센은 차창을 손짓하며 말했다.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사치품의 고향이니까요.”
직후 펼쳐진 차창 밖 풍경.
나는 두 눈을 더욱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 * *
검은 정장, 높이 솟은 모자.
올려 입은 바지, 광이 나는 구두.
허리 아래로 풍만하게 부풀어 오른 드레스와 화관.
장식 달린 부채 너머로 힐끗하게 보이는 화려한 화장.
아이베리아에선 쉬이 보기 어려운, 그런 행색을 한 자들이 거대한 길 가운데를 자유로이 거닐고 있다.
안에서 오색의 조명을 내뿜는 건물들은 빼곡히 줄지어 늘어서 있고,
저 너머론 산 대신 거대한 관악기와 같은 굴뚝이 빳빳이 고개를 세우고 있다.
혹시 이것도 소설 속 어느 세상이 아닐까 싶은 착각이 들 정도로,
이곳은 내게 있어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어때요, 기사의 땅과는 영 딴판이지 않습니까?”
“그렇네요.”
직전까지 게헨나에 있어서였을까.
이곳에 만연한 여유로움마저 뻣뻣한 느낌이 들었다.
그저 벽 하나뿐인데,
그 벽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간극은 여기서 아이베리아의 거리만큼이나 동떨어져 있구나.
“피로스는 사치의 사치를 위한 도시입니다. 그러나 이 안에서도 엄연히 계층이란 것이 존재하지요. 누군가는 화약을 그저 과시하기 위한 한낱 향료로서 흩뿌리겠지만, 다른 누군가는 그 떨어진 화약의 잔향마저 긁어모아야 하는 신세거든요.”
“그러나 그마저도 벽 바깥의 게한나보다 나은 처지겠군요.”
“그렇지요, 엄밀히 말하면 게헨나는 기업 퍼비스가 피로스를 보호하기 위한 명목으로 유지 시키는 곳입니다. 자세한 내막은 기업 비밀이겠지만…, 이러한 관계 사실만큼은 모르는 이가 없지요.”
“피로스를 보호하기 위해 외곽을 우범지대로 만든다…,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군요.”
“기업 국가라는 게 다 그렇죠, 위험한 발상이라고 해도 그것이 숫자 적으로 이득이라면 그들은 철저한 계산을 필두로 기꺼이 움직일 겁니다.”
빈센은 이어 차창에 기댄 채 메마른 감정을 드러냈다.
“이곳의 이상은 죽은 지 오래지요, 아니 아마 온 세상 대부분의 이상이 다 말라비틀어져 죽었을 겁니다. 그 아이베리아조차 기사왕의 실각으로 이상이 메말라 버렸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금도 두 발 걷는 자들은 그 메마름 위에 이상을 심으려 하지요, 당신도 그렇고 나도.”
“그렇네요, 이런 말을 하면서도 내 이상은 무럭무럭 자라나길 소망하고 있다니 이것보다 아이러니한 게 있을까요?”
슬픔을 많이 누그러트린 그는 이제 웃었다.
아니면 우울한 감정을 애써 감출 정도로 이미 완숙한 자이거나.
“제가 시간을 너무 빼앗았군요, 얼른 이동하도록 합시다.”
빈센이 차창 밖으로 손을 휘휘 젓자, 마차는 어느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어느 한 가게 앞에 멈춰 서자.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가게 안에서 중무장한 병사 넷 사이에서 늙은 상점 주인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주문하신 물건입니다, 혹 불안하시다면 경호를 위한 병력을 붙여드릴 수도 있습니다.”
잔뜩 긴장한 듯한 주인은 차창 너머로 주먹만 한 함을 빈센에게 건네었고,
그것을 받아든 빈센은 나를 흘깃 보곤,
“글쎄, 경호는 딱히 필요 없을 것 같군요.”
태연히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함에 딸린 작은 금박 표지가 밑으로 미끄러지듯 흘러내렸는데,
그 안에 적힌 것은..,
[872,000]
빈센은 흘러내린 그것을 감추듯 얼른 떼어냈다.
그러나 이미 변해버린 내 표정을 보았는지,
그는 태연히 웃으며 손에 쥐고 있던 금박을 차창 너머로 던져버렸다.
“다르마야니까요.”
빈센,
당신의 수단은 생각 이상으로 더 강한 것 같은데.
그나저나 살렌의 고성이 대체 뭐 하는 화약이길래…,
저런 말도 안 되는 가격인 거지?
빈센은 들고 있던 함을 담담히 내게 건네며 말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살렌의 고성은 지금 값의 절반도 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최근에 누군가 살렌의 고성을 사가면서 가격이 월등히 뛰었죠.”
“그렇다고 해도 그런 가격일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사실, 당신의 능력을 생각하면 숫자 외에 다른 수단으로 능히 이것을 손에 넣었을 겁니다. 아니 지금이 그렇군요. 당신의 능력을 제가 샀고, 그 대가를 치르는 거니.”
“잘 받아가겠습니다.”
그가 건넨 함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그는 무거운 짐을 막 내려놓은 사람처럼 홀가분한 표정을 지으며,
좀 더 본격적으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디안, 당신에게 해줄 말이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부탁받은 것을 전해주는 겁니다.”
“누구에게 말입니까?”
“내게 불현듯 찾아왔던 점성술사. 그녀가 내게 당신을 만나면 이 말을 전해달라 했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빈센은 그때를 회상하듯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자신의 운명이 작위적으로 느껴진다면, 그건 자신의 운명이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라고.”
…,
짧은 시간,
빈센의 말을 수도 없이 곱씹었다.
그러나 곱씹으면서 느낀 것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모호함뿐이었다.
이어 빈센은 마차 바닥에 있던 상자를 열어 그 안에서 작은 유리구슬 하나를 꺼내었다.
“이것 역시 그녀가 당신에게 전하는 물건입니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제게도 익숙한 물건이지요.”
“그게 뭡니까?”
빈센이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별빛입니다. 아주 오래된. 일전에 보여드렸던 그 호롱 안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종류이지요. 다만 빛깔이 굉장히 희미해 이 별빛에 기록된 과거나 미래는 아주 찰나일 겁니다.”
“그럼…,”
“네, 그녀는 아마도 이 별빛을 통해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과거나 미래가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