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소해 (2)
“전할 것은 이걸로 끝입니다. 그 이상은 제가 아는 것이 없으니 뭐라 질문하셔도 드릴 말씀이 없군요.”
흔들림 없이 유유히 골목을 가로지르는 마차,
그 안에서 조용히 말을 마친 빈센은 이제 붉게 얼룩진 내 소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원래 이 질문이 가장 먼저였어야 할 텐데…, 많이 다치셨습니까?”
“그리 깊은 상처는 아닙니다, 벌써 피가 멎었거든요.”
내 대답에 빈센은 고개를 살짝 가로저으며 혀를 내둘렀다.
“여덟 검 중 하나를 상대로 얕은 상처뿐이라니, 다시 상기해 보아도 놀라울 따름이군요.”
“그는 강했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제가 베일 뻔했지요. 이 상처는 그가 가진 강함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겸손하시군요.”
“검 앞에선 겸손해야지요, 그것도 검을 든 기사 앞에서라면 더더욱.”
내게서 무엇을 엿보려 하는 것일까.
내가 사는 세상을 이해해보려는 듯, 빈센은 한참 눈을 가늘게 뜨고 있다가 뒤늦게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뭔가 생각이 났는지 회중시계를 들여다보던 그는,
“잘됐군요, 당신의 시간을 좀 더 빼앗을 수 있겠어요.”
“무슨…?”
“베직스! 상점가로 가지.”
빈센은 곧바로 차창에 대고 소리쳤다.
그러자 마차의 방향이 급격히 틀어진다.
“경황이 없어 차마 생각도 못 하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활기를 되찾은 빈센은 다시금 차창에 대고 기수에게 말했다.
“베직스, 가는 길에 렌달을 태웠으면 해.”
그럼 기수는 다시 마차 방향을 틀어 큰길을 향해 미끄러지듯 달려나갔다.
이런 혼잡한 양상 가운데서도 마차는,
잠잠한 수면처럼 지독하게 고요했다.
그 고급스러움이 아찔하게 느껴질 정도로.
“빈센, 아까부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차차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빈센은 어울리지 않게 시치미를 떼었다.
이내 마차가 큰 길가에 우뚝 멈춰 섰고,
곧이어 활짝 열린 문 너머로 흰 수염을 가진 초로의 남자가 조심스럽게 올라탔다.
“렌달, 어서 들어와.”
“도련님.”
살짝 묵례하며 빈센에게 공손히 인사를 전한 그 남자는 이어 나와 눈이 마주치자,
같은 묵례로 인사를 거듭했다.
하여 고개를 살짝 끄덕여 화답하면, 그는 조심스럽게 내 옆자리에 앉았다.
“도련님, 일은 잘 끝내신 겁니까? 제가 나서서 처리했어야 하는 일이었는데…,”
“렌달, 내 형제자매의 일이야.”
“잘 압니다, 그래서 더 걱정했습니다. 안위를 내던지면서까지 투신하실까 봐.”
“처음엔 그럴 생각이었거든.”
빈센은 새파란 눈으로 날 흘겨보며 얕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이분이 그럴 여지조차 주지 않게 일을 마무리 지어주셨어, 소개가 늦었군. 이쪽은 아이베리아의 디안 베나즈 경이시다. 디안님, 이쪽은 제 수행원인 렌달입니다.”
비센의 소개에 옆자리의 남자와 정식으로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디안 베나즈입니다.”
“반갑습니다, 디안 경. 저는 빈센님을 수행하는 렌달이라고 합니다, 자칫 가장 어려울 수 있었던 일을 흔쾌히 해결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쳐진 눈매로부터 느껴지는 온화함,
턱을 뒤덮은 덥수룩한 수염에서 느껴지는 포근함.
왜인지 모르게 매튜 아저씨가 떠오르네.
“도련님이 만나셨다던 그 점성술사의 얘기가 사실이었군요, 여덟 검 중 하나를 부러트릴 기사가 찾아올 거라는…,”
“그래, 이제 그 얘긴 그만하자고. 내 형제자매의 죽음을 곱씹는 것만큼 괴로운 것도 없으니까.”
“그러나 그분들의 희생 덕분에…,”
“알아, 렌달. 그래서라도 난 더 뻔뻔해질 생각이야.”
빈센의 단호한 얼굴을 본 렌달은 조용히 몸을 뒤로 젖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를 여지없이 끌어 당겨주는 사이로군.
“그런데 도련님, 이제 어디로 향하실 생각입니까?”
“동쪽으로 가야지, 그곳에 있는 자금들도 회수해야 하거든.”
렌달이 내 눈치를 살피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아뇨, 도련님. 지금 말입니다.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그럼 빈센은 렌달과 마찬가지로 날 보곤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렌달, 아이베리아에서 건너온 귀한 손님에게 그래도 최소한의 대접은 하고 보내 드려야 하지 않겠어?”
빈센은 눈짓으로 내게 양해를 구한 뒤,
대뜸 피 묻은 소매를 붙잡아 들고서 렌달에게 보여주었다.
그럼 렌달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허둥지둥 움직이며 반응했다.
“이런…,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여기에 있었군요.”
그렇게 한창 길목 사이사일 접어들던 마차가 길목에 멈춰섰다.
동시에 문이 열리고 렌달이 제일 먼저 내려 수행을 시작하면.
빈센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내게 말한다.
“그럼, 가실까요? 겸사겸사 설명도 함께 해드리겠습니다.”
* * *
“빙 캐러반…?”
“네, 빙 캐러반이요.”
빈센은 태연하게 대답하며 옷 한 벌을 집어 점원에게 건넸다.
이미 점원의 손엔 열 벌이 넘는 옷이 걸려 있었지만…,
아, 동시에 그의 입꼬리도 귀에 걸려있었다.
“이름이 특이하지요? 사실 그 이름의 유래가 조금은 웃기거든요, 위대한 선장인 조드리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 있는데 그게 운…, 그러니까 운 좋은 날이었던가? 아무튼, 그곳에 나오는 지명 중 하나의 이름이 바로 빙 캐러반이거든요.”
“아니…, 그래서 그 빙 캐러반이 뭐라고요?”
분명 방금 두 귀로 들었음에도 실감이 잘 나지 않아 다시 물으면, 빈센은 또 다른 옷을 점원에게 건네며 대답했다.
“부유 상단 말입니다, 빙 캐러반은 구름 지대 위에 세워진 상인 연합이거든요.”
“그러니까, 그 빙 캐러반이라는 게 곧 피로스 상공을 거쳐 지나간다 이 말입니까?”
“그렇죠.”
“그리고 그걸 타고 갈 거라고요?”
“네, 역시 이해가 빠르시네요.”
이해가 안 되어서 다시 묻는 건데.
“그러면 그 촉박한 시간도 아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검은 바다를 바로 건너 아이베리아 인근 해역에만 내려도 근 이틀 정도는 더 단축할 수 있을 겁니다.”
“그건…, 그렇지요.”
“그래서 이렇게 제가 객기를 부려가며 당신의 시간을 빼앗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생각을 전환하도록 합시다. 당신은 고용인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누리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놓치는 건 고용인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실책 중 하나지요.”
장황하게 말을 늘여놓던 빈센은,
어느새 두 명으로 불어난 점원들에게 보란 듯이 고급스러운 구두 쪽을 가리켰다.
그럼 빈손의 점원이 허겁지겁 달려가 구두들을 조심스레 부둥켜안기 시작한다.
멍하니 그의 뒤를 따르고 있자니,
이런 내 표정을 살피던 빈센은 조금 염려스러운 얼굴로 걱정을 내비쳤다.
“역시…, 아이베리아 출신이시군요. 빙 캐러반이란 존재 자체가 잘 이해되지 않으실 테지요. 하긴…, 생각해보면 깃발의 주인 자체가 하나의 재해로 군림하고 있는 그 땅에서 팔자 좋게 하늘을 유랑할 구름 같은 건 없겠죠…,”
그게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왜 용의 시대 이후를 관통하는 가장 유명한 문장이 하나 있잖습니까? 이제 구름은 순환의 증거가 아니다. 그들 하나하나가 객체가 되어 유랑하는 것이 바로 이 시대를 표현하는 가장 대표적인 대목이다.”
그러고 보니 그의 이름을 사칭하였을 때 탔던 것도 하늘을 날고 있었지.
빙 캐러반도 같은 종류일까.
“사실 제 어렸을 적 꿈이 구름 사냥꾼이었습니다, 거칠게 하늘을 유랑하며 떠도는 구름을 붙잡아 그 위에 배를 만드는 게 그렇게 멋져 보였거든요. 구름을 다듬어 용골로 만든 뒤에 그곳에 살을 붙여 쾌속정을 만든다, 소년의 모든 로망이 다 담겨 있지 않습니까?”
빈센의 말을 들으니 괜히 내 가슴이 뛰었다.
결국엔 나도 그와 같은 또래라서, 그가 하는 말이 덜컥 멋지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그가 살아가며 보았던 그 세상의 단편을 엿보는 것 같아 괜히 흥미진진했다.
어쨌든 그가 살았던 세상은,
역시 내가 알고 있던 세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었으니까.
같은 세상을 살아도 서로 다른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는 거.
그건 아마도 지금 이 세상에서만 겪을 수 있는 일이겠지.
“과감히 각설하고 제가 감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저를 조금만 믿고 따라와 주시길 부탁드린다는 겁니다. 당신이 게헨나에서 제게 보여준 것처럼, 이번엔 제가 할 수 있는 걸 보여드리는 것뿐이니까요.”
구태여 이렇게까지 말하는 그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긍정뿐이었다.
해서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이면 그는 그제야 안심한 얼굴로 다시 태연하게 몇 벌의 옷을 더 골랐다.
벌써 그의 옆엔 점원 세 명이 진지한 표정을 하며 달라붙어 있었다.
“그런데 빈센, 그렇게 많은 옷을 다…,”
“이거, 그러니까 제가 제공해드리는 복지입니다. 말했지 않습니까? 어쨌든 아직 우린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이니 그 사이에 필요한 정산은 다 마쳐야지요.”
“굳이…, 이러실 필요까진 없습니다.”
“아뇨, 더 한 것도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제 입장에선 말입니다.”
그의 단호한 표정을 보니 뭐라고 감히 말을 내놓지 못하겠네.
아까 마차에서 말했던 것을 악착같이 지키려는 듯.
그는 좀 더 뻔뻔해지려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그렇지만 나는 이미 그의 속마음을 들여다보았기에, 그것이 더욱 애처로워 보일 뿐이다.
단둘이 마차를 타고 있었을 때 그가 보여주었던 그 한 방울의 눈물.
그리고 애써 삼키며 억눌렀던 그 과정을 모두 다 봤으니까.
* * *
처음 느껴보는 재질의 옷을 두르고, 단출하지만 그만큼 수려한 구두를 신고서 밖을 나서면.
그제야 빈센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빈센은 걸음을 뒤로 물려 내게 손짓했다.
그 손짓에 따라 걸어나가자 곧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거울 하나.
빈센은 그 거울 옆에 서서 다시 한번 내게 손짓했다.
그렇게 앞으로 걸어나가자 거대한 거울은 다가오는 나를 유감없이 비추어주었다.
해서 거울 속에 담긴 내 모습은,
참으로 어색해 보였다.
아이베리아의 복식과는 거리가 먼, 몸의 윤곽이 선명히 드러난 정장을 입은 내 모습이.
“참 잘 어울리는군요, 그 모습으로 누구의 이름을 빌려도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에요.”
뜨끔.
빈센이 대뜸 내놓는 말에 속이 살짝 쓰려왔다.
그렇게 진심으로 감탄해주는 빈센의 얼굴 위로 갑자기 거뭇한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아니, 그 그늘은 가게 전반에 물밀 듯이 들어와 있었다.
이에 빈센은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이곳에 도달했나 봅니다, 빙 캐러반 말입니다.”
가게 밖으로 나서는 그를 따라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면.
곧 보이는 하늘의 풍경.
구름을 물감 삼아 인위적으로 하늘 위를 칠한 듯.
펼쳐진 하얗고 풍성한 구름, 그것이 말 그대로 지대처럼 하늘에 넓게 깔려있다.
그리고 그 거대한 구름의 테두리에서 곧,
두꺼운 쇠줄이 떨어져 내리니 그것들이 도시 곳곳에 묶여 팽팽하게 당겨지기 시작했다.
해서 팽팽해진 쇠줄만큼 아래로 당겨져 오는 구름의 위압감에,
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에 실소를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철렁 내려앉은 가슴 위로 떠 오른 아차 하나.
“빈센, 이곳에 같이 온 제 동료…,”
그러나 그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늘을 손가락질하며 대답했다.
“보십시오.”
그의 손가락질을 따라 다시 시선을 구름 쪽으로 옮기자.
구름의 테두리가 조각조각 나뉘어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들은 위로 올려다보면 영락없는 조각구름들이었지만, 이내 도시 쪽으로 가라앉듯 내려와서야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조각구름들 위엔,
한 척의 배가 건설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밑동이 구름에 반쯤 파묻혀있는 배.
“동료분은 이미 렌달과 함께 저곳으로 향하고 있을 겁니다. 일반적으로 선박을 운반하는 구름이 제일 먼저 이곳에 내려오거든요.”
이제 빈센은 주머니에 한쪽 손을 넣은 채 마차 안으로 들어섰다.
“자, 이제 갑시다. 덕분에 헤어짐은 더 가까워졌겠지만 동시에 목적지에도 가까워질 테니까요.”
그의 말에 나는 기꺼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마차 안으로 따라 들어섰다.
이제 기수의 우렁찬 신호와 함께 마차는 다시 바닥을 긁으며 굴러간다.
피로스 곳곳에 내려앉은 조각구름 중 하나를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