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19화 (219/365)

219화. 소해 (3)

숲 냄새가 채 가시기도 전,

대충 가죽 갑옷에 묻은 것들을 손으로 털어낸 할리가 리케니엔의 학술원으로 들어섰다.

그럼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기지어가 얼른 반겼다.

“할리, 수고 많았네.”

할리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이어 그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두루마리를 기지어에게 건넸다.

그 두루마리는,

베르융의 인장으로 굳게 봉인되어있었다.

그렇게 두루마리를 건네자마자 인사와 함께 밖으로 나서려는 할리를,

“할리.”

기지어가 불러 세웠다.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는가?”

그럼 할리는 다시 예를 갖춰 뒤돌아 대답했다.

“지도상 빌비온의 국경선까지 쭉 둘러보았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었습니다, 국경선 너머 깃발들은 아직 이 땅에 관심조차 없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등잔 밑이라 불리는 빌비온답군. 한 깃발이 한 땅을 통합하였음에도 그것이 그저 잔 밑의 불이라니.”

“그럼에도 그 뜨거움을 눈치챈 자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할리의 물음에 기지어는 씩 웃었다.

“자네의 그 경계심이 마음에 드는군, 맞아. 절대로 없을 수가 없지.”

이어 할리가 가져온 두루마리를 흔들어 보이며 말을 잇는다.

“지금도 이렇게 뜨거움을 참지 못하고 불어 끄려는 자가 있잖은가?”

그 말에 뭔갈 깊게 생각하던 할리는,

“영주님께서는…,”

기지어에게 불안감을 살짝 드러냈다.

“아직이야, 0의 상징을 복원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제아무리 영주님이라고 해도 금방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겠지.”

할리의 불안감에 동조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기지어의 말에 할리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러나,

“곧 돌아오실 것이다. 우리라는 불꽃을 위로 올려줄 등잔을 손에 쥐고서. 그럼 그제야 보이겠지. 빌비온 너머 깃발들 모두의 모습이,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휘날리는지까지도.”

이어지는 기지어의 말에 할리는 순간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벅참을 느꼈다.

“그러니 할리, 밤중의 부엉이처럼. 석양을 헤엄치는 수리처럼 이 빌비온 안에서 바깥을 애써 엿봐주게.”

착!

할리는 두 발을 꼿꼿이 세운 채 칼 같은 제식을 보였다.

베르융 산하 정찰대로 편재된 게 불과 보름인데, 그 보름의 시간 동안 그는 이미 완벽한 군인이 되어있었다.

“내 앞에서까지 제식을 보일 필욘 없어, 난 그저 리케니엔의 한낱 행정가일 뿐이야.”

“하지만 엄연히…,”

“귀족은 더더욱 아니고. 스승님 아래에서 배웠던 세상에 급이라는 벽은 없었어. 물론 그것을 남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네, 왜 물처럼 흘러가듯 살아가길 원하는 자들도 있잖은가? 나도 그 물줄기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게.”

“그 물줄기 위에 올라탄 자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도 그 가운데 하나지요.”

“이런, 자네 자연신앙 쪽이었나?”

“그게 그렇게 되는 겁니까?”

기지어는 특유의 괴짜 같은 모습으로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아닐세 아니야…,”

그러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기지어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할리, 자네가 다시 보이게 되는군.”

이에 할리는 얕은 미소를 지으며 두 눈빛을 과거에 파묻은 채 대답했다.

“메리안님께서 생전에 제게 아주 많은 것을 가르쳐주셨거든요.”

“그러니까 더 궁금해지는군, 베나즈 가문의 안주인이 어떤 분이셨는지 말이야.”

할리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는 뭔가 떠오른 듯 다시 활짝 웃으며 말한다.

“그렇게 궁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영주님이 그분과 굉장히 많이 닮으셨거든요. 그 성정이 조금 무뚝뚝하고 투박하신 것만 빼면…,”

“하하! 그렇지. 영주님이 좀 무뚝뚝하긴 해.”

이윽고 할리는 제식을 벗은 인사를 마지막으로 학술원 밖을 나섰다.

다시 혼자 남겨진 기지어는 말없이,

베르융의 인장이 박힌 봉인을 뜯어 두루마리를 펼쳤다.

기지어.

비록 비옥한 땅은 아니나, 그 위를 살아가는 자들의 열정만은 비옥하기에 추수가 기대되는 계절이 다가오고 있네.

영주님의 등장 이후로 리케니엔을 비롯한 이곳 작은 서쪽 땅 빌비온엔 많은 변화가 있었지.

그러나 이제는 변화가 아닌 날개 달린 것으로 우화 하기 직전인 상황에까지 다다르게 되었네.

…, 나는 투박한 사람이라 표현이 서투니 이해해주게, 앞의 인사말도 내 안사람이 흘려준 첨언을 주워 적은 것이거든.

서둘러 각설하고 본론을 전하네.

이틀 전, 기사 테티르와 가르웨가 국경 너머 어느 이름 모를 교역소가 있는 순환로까지 순회를 다녀왔었네.

그리고 그곳에서 몇 가지 정보를 입수했지.

기지어,

라스 발기지르가 슬슬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아.

지금은 빌비르로 명명된 이곳을 되찾기 위해 여러 가지로 준비를 하는 것 같더군.

뒷배로 끼고 있는 기업의 발언가들과 그에 동조하는 깃발들, 기사들이 몇이나 모일지는 우리로선 알 수가 없네.

하여 빌비르의 주둔군 250을 전진 배치하여 앞쪽을 바짝 긴장시키기로 하였고 조이 역시 켄타나의 기마병 80을 지원해주기로 해 일시적인 방어선은 구축해놓았네.

이제 이 방어선이 가진 결의 방향은 자네가 정하게.

신하 된 도리로서 영주님이 돌아오실 길을 평탄하게 만들어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공표와 동시에 천국과 지옥이 동시에 펼쳐질 텐데 말이야.

회신 기다리겠네.

- 베르융 오르테

찬찬히 내용을 훑은 기지어는 말없이 두루마리를 닫았다.

등잔 밑 뜨거움에 쫓겨났던 자가 그 그림자 진 자리를 되찾으려 하는구나.

그래, 어쩌면 이것은 깃발의 공표 전에 주어진 값진 ‘예행’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베나즈 휘하의 힘이 지금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볼 수 있겠어.

기지어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질 거란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는다.

전설,

7기사 중 하나인 테티르 론바즈와.

기사왕의 측근인 조이 크레비디, 그리고 맥레인 베나즈의 뒤를 잇던 검 베르융 오르테까지.

등잔 밑인 이 땅,

빌비온 안은…,

이미 뜨거움으로 충만해 있으니까.

* * *

구름.

그 위로 건설된 시장.

정확히는 배와 건물들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만들어진 하나의 덩어리진 사회.

빙 캐러반.

그 모습은…,

이 여정에서 본 것들 가운데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절경이었다.

하나는 타히그의 소설을 빠져나갈 때 보았던 만들어진 아침이었고,

다른 하나는,

테리아 루스.

그리고 마지막이 바로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구름 위 사회, 빙 캐러반.

구름 위로 쫙 깔린 유리 재질의 바닥은 결정화된 얼음처럼 보였지만, 그 외양과는 달리 미끄럽지는 않았다.

숨은 무겁고,

바람은 차다.

봉우리 진 바다 위에 선 것처럼 사방은 구름 한 점 없는 높은 하늘로 점철되어 있다.

자연스럽게 이동하는 빈센을 따라 무리 진 구름 위 건물들 사이를 가로지르면,

곧 그 너머로 선착장 하나가 보인다.

아니, 선착이 아니라 정박이라고 해야 할까?

배들은 마치 구름 위에 닻을 내린 채 두둥실 떠오른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러한 배들 가운데 유독 낯이 익은 것이 하나 발견했는데, 이는 곧 반가움으로 번졌다.

저 멀리.

나와 마찬가지로 휘둥그레진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갤리걸과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디안!”

헐레벌떡 구름 위를 달려 내게 달려왔다.

“아니 글쎄 갑자기 하늘에서 구름 하나가 내려오더니 내 배를 감싸는 거야! 그런데 디안 네가 나를 불렀다고 하더라고! 그러더니 갑자기 후룰루룰루 배가 떠올라! 그러다니 호롤롤로로 하고 끝없이 하늘로 올라가데?!”

이어서 장황한 말을 늘어놓으며 두 손을 휘휘 젓기 시작한 그는 한참 후에야,

“자네 얼굴을 보니까 왜 이렇게 반가운지! 난 또 무슨 해적에게 나포되는 줄 알았어!”

안도감에 젖은 모습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니플리안트를 거쳐 되돌아가기엔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말이야, 일을 처리하면서 알게 된 이들이 도움을 줬어.”

내 설명에 갤리걸은 금방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빈센, 이쪽은 저를 위해 기꺼이 니플리안트를 거친 선장 갤리걸입니다.”

“빈센 다르마야라고 합니다, 이렇게 대단한 선장님을 뵙다니 영광입니다.”

내 소개에 감명을 받은 듯, 갤리걸은 고맙다는 눈빛으로 나를 흘겨보다가 곧바로 내밀어오는 빈센의 손을 붙잡았다.

“반갑습니다, 하하! 제 배에게 불가능이란 없지요.”

그렇게 한차례 인사를 나눈 갤리걸은,

다시 주위에 펼쳐진 풍경을 보고는 뭔가 확 깬 듯.

멍한 표정으로 두 다리를 덜덜 떨었다.

* * *

빈센은 ‘윗 구름’이라 불리는 빙 캐러반 내 손꼽히는 최고급 여관을 나와 갤리걸에게 제공했다.

덕분에,

고층 위에 서성이며 고요를 마음껏 맛볼 수 있었다.

해서 지금껏 스쳐 지나가야 했던 생각들을 차근차근 정돈하기로 했다.

그럴 여유가 지금까지는 없었으니까.

곧바로 품 주머니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고급 함을 꺼내 들었다.

화약, 살렌의 고성.

기사왕의 검을 복원하기 위한 마지막 재료.

도대체 이루어질 공정 속에서 이것이 무슨 역할을 하기에 이리도 값비싼 것일까?

이것뿐만 아니라 오르미그의 기름과 소로스티도.

그 특이한 형질을 생각하면,

테리아가 과연 어떤 공정을 펼칠지 기대가 된다.

또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니 실감했어.

끝이 보이는구나.

기사왕의 검이 정말 내 손에 들어오는구나.

이제 진짜로,

베나즈의 이름으로서 살아가겠구나.

세상이 나를 베나즈의 가족이라 기억하겠지.

맥레인,

지금은 메리안과 함께 있겠지요.

당신의 허락으로 당신의 가족이 된 제가, 이제 세상에 동의를 구하려 합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이름을 부정하는 자를 마주친다면.

저는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끝끝내 쓰러트릴 것입니다.

쓰러트렸음에도 설득되지 않는다면, 그들 앞에서 증명하겠습니다.

목에 걸린 가문의 인장을 손으로 감싼 채.

조용히 속으로 되뇌듯 기도했다.

그러면 막 고조되었던 흥분이 뜨겁게 가라앉았다.

직후 뜨거운 가슴과 차갑게 식은 머리로 다른 문제들을 후벼팠다.

살렌의 고성이 담긴 고급 함을 내려놓고,

가죽 주머니에 넣어 놓았던 구슬, 정확히 말하자면 별빛을 담은 그것을 꺼낸 나는.

조용히 그 빛의 결과 색깔을 주시했다.

세공소에서 수많은 별을 보고 살았었다.

그렇기에 별빛만으로도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아낼 수 있어.

영롱한 흰 빛,

그 사이로 새어 나오는 불그스름한 기운.

이 별의 이름은..,

‘베리스텔라’

의문의 점성술사는 이 별빛을 통해 내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어.

생각해보자,

세공소에서 봤던 이 별은 항상 북쪽에서 남쪽으로 떨어져 내리듯 움직였었지.

지리상으로 본다면…,

북쪽의 아이베리아를 긁고 내려와 남쪽의 중립지역까지 훑는다.

그 과정에서 별빛으로 어느 과거를 박제한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나와 관련되어 있다면.

…,

생각은 여기까지 하자.

수많은 고심을 헤엄치는 것보단, 뭍으로 나와 진실 그 자체를 마주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때도 있으니까.

* * *

구름이 바다 한가운데서 멈춘다.

그곳이 목적지인 자들은 하나둘 구름 위에 내렸던 닻을 올려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그리고 나와 갤리걸 역시 그들 가운데 섞여 있었다.

갤리걸이 한창 닻을 올리기 위해 배 위에 올라서면, 그때 나는 빈센과 조촐한 이별을 나눴다.

“감사합니다, 빈센.”

“그 인사는 제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디안 경.”

빈센은 보석 같은 푸른 눈을 번쩍이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당신으로 인해 적들은 이제 나를 감히 업신여기지 못할 겁니다.”

“이다음 계획은 무엇입니까?”

“형제자매의 죽음으로 욱여넣어야 했던 울분들을 조금씩 풀어나가야겠죠, 그것은 곧 적들을 향한 교두보로 건설될 겁니다.”

“부디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그대 역시 살렌의 고성으로 원하는 바를 폭발적으로 이룰 수 있기를.”

나와 빈센은 그렇게 조금은 단단한 악수를 나눴다.

이제 갤리걸의 부름에 배 위로 오른 나는,

슬슬 떨어져 가는 구름 속에서.

빈센과 서로의 확신을 주고받으며 그렇게 헤어졌다.

유랑하듯 나풀거리며 떨어진 구름은 바다 위에 우리를 놓아주었고,

그렇게 나는 다시.

아이베리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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