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흐트러지는 밤
구름에서 벗어나 돛을 배 불린 지 몇 분이 지났을까.
[릴레이커]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만 같은 표지가 저 멀리 보인다.
배로 가득 찬 항구도시는 다가오는 우리를 반기듯 연신 종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선착까지 마치면, 미리 다가와 있던 다른 배의 선장들이 손수 우리의 하선을 도왔다.
“바다의 신참이 기어이 일을 냈구먼.”
“니플리안트에 배가 찢기지 않은 게 다행이야.”
그들은 하나같이 갤리걸을 보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고, 동시에 등을 두들기며 격려까지 해주었다.
빈센 앞에서도 곧잘 거드름을 부리던 갤리걸이었는데,
지금은 몸 둘 바를 모른 채 그저 얼굴을 붉히고 있구나.
바닷사람들 사이에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낭만의 한 종류가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그들의 격려 사이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나는 그 뜨거움에 쫓기듯 멀리 떨어졌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갤리걸이 미안함을 담은 눈빛으로 나를 살폈지만,
되려 그에게 고갯짓하며 괜찮다고 안심시킨 뒤 얼른 자리를 떴다.
직후 찾아간 곳은,
[발굽과 편자 – 릴레이커]
벤투스,
잘 지내고 있었을까?
설마 날 애타게 찾느라 밤새 잠 못 이루고 있진 않았을까?
그런 걱정에 허겁지겁 마구간 내부로 들어서면,
“어서옵쇼.”
매대 뒤편, 처음 봤던 당시와 똑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심드렁한 인사를 건넨다.
아니,
그는 흘깃거리며 내 얼굴을 확인하더니 갑자기 아연실색하며 득달같이 매대 밖을 뛰쳐나와 허리 숙여 인사를 올렸다.
“아이고!! 오셨습니까요!”
“말을 찾으러 왔습니다.”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인가?
아니면 벤투스가 무슨 사고를 쳤을지도 몰라.
아마도 사고를 쳤을 거야.
해서 녀석을 찾으러 온 나를 이렇게 반기는 걸 거야.
방금까지 벤투스와의 의리 같은 걸 상상하던 내가 우스울 정도로, 그 짧은 시간 나는 극도의 경계를 품으며 마구간 직원 뒤를 쫓아야만 했다.
그런데 웬걸.
그의 안내를 따라 들어간 축사 안엔 기름을 바른 듯 번지르르한 벤투스가 홀로 고고히 서 있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녀석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거친 콧김을 내밀며 다가와 이마를 들이밀었다.
“벤… 투스….”
그 모습에 감격한 나는 비단같이 부드러운 녀석의 갈기를 한껏 쓰다듬었다.
너도 내가 보고 싶었던 거구나.
그래, 그랬어.
“정말 관리를 잘 해주셨군요.”
“아…! 물론입니다! 저희 발굽과 편자는 모든 고객님께 최상의 봉사를 보장하거든요!”
뭔가에 가슴 한쪽이 찔린 듯, 화들짝 놀라 대답하는 그의 모습이 살짝 의심스러웠지만.
사실 그런 것은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그 영악한 벤투스가 지금 내 앞에서 강아지처럼 꼬리를 치며 반가워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
이어 남자는 한껏 눈치를 보다 은근슬쩍 내게 말을 걸어왔다.
“참고로 비용에 관한 문제는 따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이것은 아이베리아에선 지극히 평범하게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특히 귀하와 같은 분께는 더더욱…,”
아,
예컨대 눈 감은 첨탑에 묵었을 때 겪었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는 거지.
하지만 그렇다기엔…,
그리 민감한 사업의 주제를 다루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아니다.
오히려 더욱 예민한 부분일 수도 있겠어.
아이베리아 내에서 말이 가지는 위상을 생각한다면 말이야.
내심 납득하며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다.
그러면서 문득 기업과 조합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아이베리아만큼이나 깐깐한 땅도 없구나 싶다.
하긴,
기사왕의 이상도 기업의 개입을 시작으로 무너져 내렸었으니까…,
이 땅에 기업과 조합에 대한 경계심이 거의 알레르기 수준으로 극심한 것도 이해가 된다.
그러니까 깃발 주인의 입장으로서 본다면 말이야.
그 ‘양보 될 수 없는 상충’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아.
하지만 처음 이곳에 방문했을 때, 그는 분명 내게 금액과 관련해서 상세하게 설명까지 했었다.
혹시 이후 과정에서 상부의 지시라도 있었던 것인가 싶어,
“괜찮습니다, 지불하죠.”
한 차례 거절하자 그는 더욱 창백해진 얼굴로 허리까지 숙여 가며 양해를 구해왔다.
그것을 두고 계속 실랑이 벌여봤자 시간 낭비일 것 같아서,
결국엔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 내막에 개입하는 것부터가 그의 삶을 파괴하는 것일 수도 있고, 구태여 지금 베나즈의 이름을 내세워 활동하는 것 역시 꺼려지는 것도 사실이니까.
내 수긍에 남자는 제법 홀가분한 표정을 지으며 더욱 극진한 자세로 나를 받들었다.
그렇게 벤투스를 이끌고 밖으로 나서는데,
문득 왼편에 살짝 열린 문 너머로 축사 하나가 보였다.
그 안에는 수려한 외모와 갈기를 가진, 딱 보아도 암말로 보이는 말들이 모여 있었는데…,
하나, 둘, 셋…,
총 열 한 마리인가?
“저 축사 안에는 암말뿐입니까?”
궁금증에 못 이겨 남자에게 질문하자,
그는 벅차오르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희 마구간이 소유하고 있는 씨암말들입니다. 모두 다 문서화 된 족보를 갖고 있지요.”
“그렇군요.”
마지막으로 슬쩍,
열린 문틈 너머로 축사 안쪽을 한 번 더 들여다봤더니 개중에 몇 마리는 다리가 아픈지 절뚝거리고 있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걸까 싶지만,
시간이 촉박한 입장이니 궁금증은 이쯤에서 접어두기로 했다.
다음에도 바깥으로 여정을 떠날 기회가 주어진다면,
발굽과 편자를 꼭 다시 이용해야겠어.
“참, 귀하의 말 편자를 두꺼운 손등 조합에서 만든 최고등급 편자로 교체하였습니다, 앞으로의 여정 가운데 그 어떤 거친 길 위를 달려도 말과 탑승자 모두 쾌적함을 누리실 수 있을 겁니다.”
아니, 저쪽에서 의지만 있다면 빌비온 내에 사업할 권리까지 줘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돌아가면 이 부분에 대해선 바돈과 기지어와 함께 상의해 봐야겠다.
“정말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감사를 전한 뒤 등자를 밟고 안장 위로 단번에 올라갔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건만,
다리 사이로 들어오는 안장의 감촉이 참으로 낯설면서도 설레었다.
혹시나 해서 슬쩍 뒤돌아보면,
아니나 다를까.
남자는 신을 받든 양 이마를 바닥에 묻은 채 절까지 올리고 있었다.
도대체…, 뭔데?
푸르르르릉!
“우악!”
벤투스는 왜 또 이렇게 기합이 잔뜩 들어간 거야?!
* * *
“디안!”
벤투스를 타고 뒤늦게 선착장을 찾아가면 갤리걸이 기다렸다는 듯 뛰어나와 내게 손을 흔들었다.
“갤리걸.”
“그 정장에 말까지 타니까 갑자기 함부로 대하면 안 될 것 같은데…?”
내 모습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갤리걸은,
제법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지금까지 부렸던 제 모든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지 마, 그런 거.”
“그래.”
그것참 행동 빠르네.
“이제 떠나는 건가?”
“맞아.”
“참! 자네 짐은 내가 따로 포장해 뒀어, 그대로 안장 뒤편에 싣고 가면 될 거야.”
“고마워, 갤리걸.”
한바탕 배를 청소한 건지 먼지를 뒤집어쓴 그가 배 위로 올라가 조심스레 짐가방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잘 가, 어디서 객사하지 말고.”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아니,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 그것도 아이베리아라면 더더욱.”
“맞는 말이지,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해 볼게. 갤리걸, 너도 파도에 잡아먹히지 않게 조심해.”
“내가 누구야, 니플리안트를 관통한 사나이라고! 그건 그렇고…, 진짜 가는 거네.”
“응.”
“다음번에 만날 때쯤이면 높은 확률로 자네에게 존대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인데.”
그 말에 나는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아니, 다시 만나도 그대로일 거야. 그때에도 거친 바다를 정복해보자고.”
“좋지, 럼주는 내가 쏜다.”
피식,
하고 웃는 갤리걸의 얼굴 주름 속에서 진한 아쉬움이 느껴져 온다.
그것이 너무나 좋아서.
나는 한참을 그와 마주 서서 이별을 나눴다.
* * *
“벤투스, 대체 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데?”
솔직히 좀 얼떨떨하다.
몸 안에 난쟁이의 기계장치라도 설치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녀석은 쉬지 않고 엄청난 속도를 유지해냈다.
이대로 간다면 오늘 늦은 밤 안으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겠어.
벤투스의 몸이 식지 않게 어스름을 덮어주고,
그 앞에 작게 불을 지핀 뒤 잠깐의 여유를 만끽한 나는,
곧 테리아를 만날 수 있겠다는 사실에 괜히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야만 했다.
크나큰 과업이 내 앞에 나열되어있는 이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어떤 죄책감이 느껴질 정도였지만.
어떻게 하나,
나도 사람인데.
맥레인이 옆에 있었다면 아마 진지하게 그에게 고민을 털어놨겠지.
이성에 대한 질문도 아주 많이 했을 거야.
그럼 당신은 어떤 대답을 했을까.
삑삑-
이름 모를 곤충이 서정을 부르짖었다.
그것을 신호 삼아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불을 끈 뒤 충분히 휴식을 취한 벤투스 위에 올라탔다.
조금만 더 가면 도착한다.
그 사실을 벤투스도 알고 있다는 듯 우리는 다시금 바늘처럼 바늘을 꿰뚫어 갔다.
삐삐-
골골-
욱욱-
목적지에 도달해 멈추면,
귀를 뒤덮고 있던 바람 소리도 일제히 멎어버리고.
이내 밤중에 일어난 이름 모를 것들의 합창이 사방에서 들려온다.
저 멀리 흐르는 물소리,
그 위에 쌓인 벌레 소리.
그리고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새 소리.
로사플로의 사람들조차 보이지 않는 야심한 밤.
그들이 오늘날까지도 섬겼을 바위 앞으로 다가가자 그 주위의 땅이 자연스레 푹 꺼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나선형으로 기울어진 지반을 밟고 아래로 향하면.
저 멀리서 바쁜 발소리가 들려왔다.
“디안…!”
한달음에 달려와,
여지없이 내 품속으로 뛰어든 그녀.
테리아가 여기저기 주워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반가움을 쏟아냈다.
열 꽃을 스친 가을바람 향기는 덤이었다.
한바탕 반가움을 쏟아내던 그녀는 이제 머쓱한 표정으로 떨어져 나와 내게 물었다.
“빨리…, 왔네.”
“생각보다 빨랐지.”
“그만큼 급한 일이었으니까…,”
“비단 그것뿐만은 아니었어.”
솔직한 내 맘을 전하자, 그녀는 기꺼이 그것에 잔뜩 데어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상기된 두 뺨이 채 식기도 전에,
이글거리는 열정을 담은 두 눈으로 내게 자신만만히 말했다.
“준비는 다 끝났어, 이젠 시작만이 남았지.”
* * *
대장간 내부는 그간의 작업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증명하듯 어지럽혀져 있었다.
스케비 역시 온몸에 검댕을 묻힌 채 쓰러져 있었는데,
“어어…, 무사히 돌아왔네…,”
움찔거리는 코 밑으로 작은 세모를 그리는 입이 애처로워 보일 정도였다.
“대체 무슨 작업을 한 거야…?”
조심스레 테리아에게 물어보니 그녀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채 털털히 대답했다.
“난제 하나를 풀었어, 물리적인 방법으로 말이야.”
그렇게 가벼운 경험담 마냥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그녀는 이윽고 흐드러진 금발을 뒤로 질끈 묶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고갯짓했다.
“보여줄게.”
그렇게 그녀를 따라 안쪽 작업실로 향하면.
작업대 위로 검은 바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거야, 작업의 결과물 말이야.”
솔직히,
이해하기가 힘들어 쉽게 대답을 하겠다.
이런 내 맘을 알겠다는 듯,
그녀는 열정적인 모습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기사왕의 검의 원료, 그러니까 밤의 제왕이라 불리는 소재를 복원 지점으로 되돌리기 위해선 그 어떤 공정도 아닌 ‘기만’이 필요해.”
“… 기만?”
일반적으로 야금술에 저런 단어가 들어가는 기술이 있었던가?
“응, 기만. 말 그대로 밤의 제왕을 속이는 거지. 그렇게 속임으로써 변형점을 꾀어내는 거야. 그렇게 끌어낸 변형점을 이용해 야금을 시작하면 복원은 성공적으로 끝나.”
하나도 못 알아먹겠는데.
내 얼굴을 유심히 지켜보던 테리아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더 쉽고 간단하게 재차 설명을 해주었다.
“지금 보이는 이 검은 바위는 혜성이야, 정확히는 혜성을 만든 거지. 비유하자면 이 바위 자체는 기사왕의 검이 들어갈 거푸집이라고 생각하면 돼.”
“세상에…,”
“이 돌은 소로스티를 구워 만든 거야, 보다시피 지금은 소로스티가 부러진 기사왕의 검날을 편애한 상황인 거고. 곳곳에 오르미그의 기름을 발라 자연적 열전도가 될 수 있게 조치해 놓았어, 이 작업은 아주 미세한 공정이 필요해서 스케비가 고생 좀 했지.”
이건…,
재료만 구한다고 해서 가능한 영역이 아니다.
결국엔 핵심은 기술이라 이건가.
왜 타히그의 소설 블레막이 그녀를 두고 차원을 야금하는 대장장이라 비유했는지.
이젠 좀 알 것 같아.
“그래서, 디안…? 살렌의 고성은…?”
“구했어, 그런데 부족하진 않을까 걱정되네.”
그녀의 물음에 품에서 작은 함을 꺼내 건네자,
“이 정도면 아주 충분해.”
그것을 받아든 테리아는 아주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해서…, 이 살렌의 고성은 무슨 역할을 하는데?”
이어지는 내 질문에.
“그야…,”
그녀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킨 채 답했다.
“이 공정에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추진체 역할을 하지.”
화약의 발화만으로,
능히 우주를 긁을 수 있는 추진력이 발생한다 이 말인가…?
“용의 시대, 가장 낮은 용이라 불린 살렌이 분노를 드러내며 내쉬었던 숨. 그것이 바로 이 살렌의 고성이거든.”
더 이상 의심 같은 여지를 둘 필요가 있을까.
그래,
곧 그녀의 손에 의해 혜성 하나가 쏟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