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흐트러지는 밤 (2)
테리아의 작업실,
그곳에서도 유일한 2중 문으로 철저히 봉인되어 있던 곳이 막 테리아의 손에 의해 열리려 하고 있다.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안쪽 문은 육중한 금속 문이다.
그뿐인가?
문을 여는 방식도 상당히 난해하다.
문손잡이의 꺾는 각도에 따라 잠금장치의 톱니도 맞춰 움직이는 방식인 것 같은데,
그 각도의 기울기란 것이 모두 미세한 영역에 속해있는 것이어서 바로 옆에서 지켜봤음에도 가늠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이 미세한 각도를 지키지 못한다면 저 문은 절대로 열리지 않는다는 건데…,
테리아 정도 되는 기술자가 자신의 거처이자 작업실 가운데 저런 비밀스러운 보안을 차려놓았다?
그럼 아마도 저 문손잡이 한번 잘못 기울였다간 뼈도 못 추릴 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뜻일 거다.
차원을 야금할 정도의 대장장이라고 하면,
두 발 걷는 자의 척추 따위를 접는 것쯤은 일도 아닐 테니까.
분명 손잡이를 잘 못 꺾는 순간 형용할 수 없을 무언가가 튀어나와 목표 대상을 흔적도 없이…,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돌아 묻는 테리아에게,
“아니야. 아무것도.”
한창 가상의 보안장치에 시달리고 있던 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대답해야 했다.
이에 그녀는 픽 하고 웃으며 말없이 잠금장치가 풀린 육중한 문을 당겨 열었다.
곧 문 너머로 드러난 그곳은…,
서고다.
수많은 두루마리가 보관되어있는 서고.
테리아는 그곳에 들어서기 무섭게 여러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곳은 도안들을 보관해놓는 곳이야. 아버지가 남기신 유산이자, 그 아래서 써 내려가기 시작한 내 발자취가 모두 모여 있지.”
그녀는 천천히 나아가, 비교적 새것으로 보이는 책장 사이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그 두루마리를 묶은 매듭 끝엔,
[테리아 루스 - 도안 – 질리스]
검의 기원적 출저를 증명하는 것이 적혀 있다.
“이 검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곳에 담겨있구나.”
해서 놀라움을 드러내며 검 자루 위에 손을 얹은 채 대답하자,
그녀는 턱을 슬쩍 들며 당당한 표정을 짓다가도 이내 쑥스럽게 미소지으며 답했다.
“응.”
돌이켜보면,
질리스는 인챈트가 깃들지 않았을 뿐이지 지금까지 내가 휘두른 것들 가운데 가히 최고의 물건이었다.
셀레어라는 명품을 들어봤기에 그보다 훌륭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고,
아이베리아의 여덟 검 중 하나를 직접 꺾어봤기에 이것이 가진 실전성이 얼마나 뛰어난지 체감할 수 있었으니까.
내가 가진 모든 능력을 변명의 여지 없이 능히 발휘해주었지.
뒤늦게 알았어.
이 검 하나만으로 그녀의 능력을 대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문득 토르킨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 하나가 떠올랐다.
헤아림은 언제나 내 뒤에 있지만, 잠시 멈춘 순간 그 어떤 것보다 나를 빠르게 지나치는 것이라고 했었지.
지금이 바로 이 경우가 아닌가 싶네.
모든 걸 겪었음에도 그에 대한 소감이 지금에야 절절히 느껴지는 것을 보면.
잠시 후 테리아는 조용히 질리스의 도안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은 뒤에,
이번엔 상당히 낡아 보이는, 그러나 먼지 하나 없는 책장으로 가 늙은 두루마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것을 묶고 있는 매듭 끝에는,
[아르테서스 루스 – 별길 – 밤의 제왕]
그녀의 것이 아닌 투박한 글씨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이제 그것을 들고나와 작업실 책상 위에 놓고 펼치면.
그 안에 잠들어 있던 케케묵은 그림 하나가 나타났다.
그림은 어느 과거, 한날의 밤을 기록한 것처럼 보였는데 유독 그사이를 가로지르는 혜성의 궤적이 눈에 띄었다.
곧 테리아는 그 궤적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그림은 밤의 제왕이 이 땅에 찾아왔을 때 썼던 별길의 기록이야.”
이어 가느다랗고 창백한 오른 손가락 끝으로,
물 표면을 매만지듯 그림에 그려진 혜성의 궤적을 따라가던 그녀는.
“이제 우리가 이 길을 똑같이 걷게 해야 해.”
강한 의지가 담긴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 * *
모두 익숙한 별들이었다.
그럴 수밖에,
밤하늘은 한때 내 삶의 일부였으니까.
해서 테리아의 계산에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어느 별자리 사이를 가로질렀는지, 또 어느 별빛을 정확히 묻히고 갔는지를 알려주면 그녀는 대답하듯 그에 대한 풀이를 쏟아내었다.
그 대목에서 나는,
테리아 루스라는 존재를 확신하였다.
그녀의 이지적 면모,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순수한 열정.
고독했을 삶 속에서도 유감없이 심지를 불태울 수 있었던 그 근원을 엿본 것이다.
누가 이 모습을 보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쭉 삐져나온 금발을 찰랑거리며 칠판의 여백을 죽여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말이야.
그렇게 내 설명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
턱을 괴고 있다가도 간간이 칠판을 허옇게 칠하기를 반복하던 그녀는 끝내 손에 쥐고 있던 분필을 던지며 호쾌하게 소리쳤다.
“됐어!”
이어 두 뺨에 하얀 분가루를 묻힌 채 잔뜩 흥분한 그녀는 뒤돌아 나를 바라보면서도,
저 구석에 혼절하듯 잠들어 있는 스케비를 흘겨보더니.
이내 대범하게 내 품에 들어와서는 푸른 눈동자 속 금빛 동공으로 야릇한 신호를 보내오며 까치발을 들었다.
급하고도 서투른 그녀의 움직임은 투박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지만,
그렇기에 내 애간장은 더욱 속절없이 녹아버렸다.
방금까지 이지적인 금자탑을 쌓아 올렸던 그녀가 무지한 이성 관계에 투신하여 몰두하는 그 간극만으로도.
굳어있던 내 말초가 다 깨어나는 느낌이야.
흠뻑, 그녀가 내지른 입맞춤을 맞받아치면.
투박한 만큼이나 호흡을 조절하지 못한 테리아가 금세 숨을 헐떡이며 빠져나가기 위해 소심히 몸부림친다.
그래서 살짝,
힘을 풀어 그녀에게 공간을 제공하면.
그녀는 내 턱 바로 밑에서 후후거리며 얇은 숨을 내뱉었다.
그러면서도 뭐에 홀린 듯, 흐리멍덩한 두 눈으로 날 빤히 올려다보던 그녀는.
“히히…, 후…,”
숨을 몰아쉬면서도 잔망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사실은 말이야, 계속 생각났어.”
다시 한번, 스케비의 눈치를 쭉 살펴보던 그녀는 안심하고 내게 발칙함을 드러냈다.
“이곳에 돌아오고 나서부터 계속, 밤마다. 입술에 닿는 바람마저 민감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런 그녀에게 화답하듯,
나도 스스럼없이 발칙함을 드러냈다.
“그다음이 무엇일지도 생각해 봤어?”
그 노골적인 질문에 테리아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끄덕였다.
“응, 새벽마다.”
자의든 타의든, 이성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었던 남녀의 부딪힘은.
화약보다 더한 폭발력을 자아냈다.
그 폭발력은…,
아마도 발렉손의 숨결보다,
살렌의 고성보다 더 강력할 것이리라.
이미 내 한쪽 손은 그녀의 허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다.
이에 맞춰 그녀의 두 팔은 내 겨드랑이를 스쳐 등을 감싸 안은 채였다.
테리아는 흐드러지듯 내려온 금발 사이로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제 밖으로 갈까? 큰일을 치러야 하니까.”
“그래, 나가야지. 큰일을 치르기 위해서는.”
* * *
테리아도,
나도.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그래도 둘 사이에 고조된 기류를 조금이라도 가라앉히기 위해 그녀에게 질문하면,
“그런데 이렇게 별다른 준비도 없이 밖으로 나서다가 누군가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앞장서던 그녀는 뒤돌아 걸으며 금발을 귀 뒤로 넘기며 대답했다.
“최근까지 스케비와 함께 이 근방에 ‘계시’를 내렸거든. 그 누구도 숲에 출입하지 말라. 라고.”
드러난 그녀의 귀 끝은,
두 뺨과 마찬가지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고조된 기류를 가라앉히기는 개뿔, 더욱 고조된 나는 은근한 말투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숲엔 아무도 없겠네.”
그럼 테리아는 도발적인 미소를 지으며 다시 획 돌아 짧게 대답했다.
“아무도.”
이내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리디굴람으로 가기 위해 나섰던 그 출구를 통해서.
그녀가 손수 빚은 혜성을 등에 진 채 나온 나는 서둘러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에 맞춰 그녀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별길을 살폈다.
“우리 세상에서 별들은 움직이지 않는 존재이니, 계산한 궤적만을 따라 쏘아 올리면 돼.”
직후 고급스러운 함을 열어 그 안,
둥근 유리에 담긴 푸른 화약 살렌의 고성을 혜성 곳곳에 부어 펴 바른 그녀는.
혜성의 시작점이 될 별길을 주시하며 조심스럽게 혜성을 잡아끌었다.
“테리아, 차질은 없을까?”
“모든 것은 내 계산 안에서 이뤄질 거야, 그러니 이 혜성이 떨어질 곳에 미리 도달해 있기만 하면 돼.”
그래도 때가 임박하니,
살짝 고조된 감정이 가라앉은 우리는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원하던 지점에 혜성을 놓은 채 테리아가 작은 성냥에 불을 붙였다.
그리곤 그것을 내게 건네며,
확신의 찬 얼굴로 끄덕인다.
나는 그 성냥불을 건네받아, 순간 무거워진 마음을 내려놓듯 혜성을 향해 던졌다.
이윽고 성냥불이 푸른 화약에 닿기 무섭게.
번쩍!
하고 터져 나오는 푸른 섬광.
동시에 짙게 뿜어져 나오는 하얀 연기.
그 사이로.
마치 우주에서 잡아당기듯 붕 떠오르는 혜성.
그것이 푸른 꼬리를 길게 늘어트린 채 엄청난 속도로 날아올랐다.
끝내 까마득히 올라가 눈으로도 쫓지 못할 만큼 솟아오른 혜성은,
잠시 후.
푸른 섬광과 함께 밤하늘에 하얀 자수를 놓기 시작했다.
한밤의 별을 만들었다는 그 생각만으로, 나와 테리아는 서로를 마주 보며 오만가지 감정을 나눴다.
그 벅차오름에 나는 열렬히 휘파람을 불었고,
벤투스는 이에 바람처럼 화답해 내게 나부껴왔다.
그렇게 테리아와 함께 안장 위에 올라타 저 위, 푸른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궤적을 그리는 혜성을 따라 달려가는데.
뭐라 설명 못 할 자유로움에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다가,
“오랜 빗장을 거둔 느낌이야.”
테리아는 내 등에 얼굴을 파묻은 채 소리 질렀다.
그 목소리의 진동이 내 등을 타고 온몸에 울렸다.
하긴, 그럴 테지.
비단 귀 큰 자와 난쟁이 사이의 혼혈이라는 이유만으로 고독한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 테니까.
정확히는,
기사왕의 검.
그것이 가장 결정적인 이유로 작용했을 거야.
그러니 그녀의 그 절절한 해방감에 십분 공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테리아. 이 이후엔 어떻게 할 생각이야?”
큰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으면, 마찬가지로 내 등으로 그 진동을 전달받은 테리아는 더욱 얼굴을 파묻은 채 대답했다.
“글쎄, 대장장이들이 주관하는 학회에 좀 더 진지하게 활동해볼까 생각 중이야. 그곳은 가명을 쓰는데에 부담이 없는 곳이니까.”
방금 그녀가 보여줬던 그 열정을 생각하면, 그래.
이미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던 그녀에게 그것보다 더 좋은 무대는 없겠지.
“디안, 넌?”
이어지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은,
금방 대답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일이 아니었으니까.
이런 내 맘을 알고 있다는 듯, 그녀는 뒤에서 나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디안.”
“응, 테리아.”
“이 속도대로라면 우리가 혜성보다 한참 이르게 도착할 거야.”
그 말에 나는 자연히 벤투스의 질주를 제지했다.
동시에 귀를 덮고 있던 난폭한 바람도 서서히 사라져갔다.
끝내 완전히 멈춰 선 벤투스.
그 안장 위에서 미끄러지듯 내린 나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테리아 루스.
보기에 날카로움이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쉽사리 다가가기 힘들 정도의 신비를 두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내 앞에서 한 차례 흐트러진 듯한 모습으로 다가와 맹목적인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곧, 픽 하고 미소지은 그녀가 한탄하듯 말했다.
“좀 웃겨, 갓 태어난 새가 된 것 같은 기분이야.”
“왜?”
“처음 본 대상을 각인하잖아, 맹목적인 대상으로.”
“그래서, 나를 맹목적인 대상으로 각인한 거야?”
테리아는 말없이 입술을 쭈뼛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미칠 듯이 사랑스러웠다.
“난 잘 몰라…, 그러니까 서툴러…, 이런 거 말이야.”
“기뻐, 널 만나게 되어서. 날 좋아 해주는 널 만나게 되어서.”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궁금하여 흘러내린 금발을 손수 뒤로 넘겨주면.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깨물었던 아랫입술을 툭 내밀며 말했다.
“야, 나랑 하… 합금할래…?”
그것은 어쩔 줄 모른 끝에 내뱉은, 그녀가 가진 순수함이었다.
그 뾰족한 눈매가 안쓰러워 보일 만큼, 맑은 눈물을 머금은 채 두 손으로 입고 있던 리넨 셔츠 끝자락을 쥔 그녀에게.
이제 나는 마지막 인내심을 부수며 쏟아지듯 그녀에게 범람했다.
좀 더 과감하게,
그녀의 입술 위를 뒤덮고.
좀 더 은밀하게,
그 입술 사이를 비집고.
열 꽃을 스친 가을바람을 내 온몸에 배기도록.
그렇게 다시 서로의 얼굴을 느긋하게 마주 보게 되었을 때도.
혜성은 우리 사이로 유유히, 아주 느릿하게 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