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증거
라스 발기지르,
뱀 같은 눈을 부라리던 그가 막 단상에 올라왔다.
그런 단상 주위를 둥글게 아우르고 있는 청중석은 이미 만석이었다.
이제 라스는 연설의 포문을 열기 위해 과감히 단상 위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쿵!
그것으로 좌중을 모두 압도하지는 못했어도 그들의 시선을 점으로 모으는 데는 충분했기에,
“여러분.”
라스는 만족한 얼굴로 본격적인 연설을 시작했다.
“고향 발기지르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말 그대로 제 가족이었습니다.”
침울하고 원통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좌중들은 열렬히 동감하기 시작했다.
“저는 제 가족을 위해 평생을 노력해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 가족은 무참히 짓밟혔고 저는 그런 가족을 뒤로한 채 눈물을 머금고 이곳에 섰습니다.”
“그의 용기에 박수를!”
곧 라스의 연설에 한 남자가 환호를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그 남자는,
쉬갈 마스렌.
종교기업 빌렌의 고문이자 발언가이며 한때 발기지르의 재상이었던 자였다.
그 말인즉슨 라스의 측근이라는 뜻이고, 또 그 말은 곧 라스가 흘리는 콩고물을 가장 달게 받아먹는 자란 뜻이다.
그의 그 유별난 성화에 좌중들은 못 이기는 척 박수에 동참했다.
이에 한층 더 자신감을 얻은 라스는,
“아이베리아의 전설이라 불리던 테티르 론바즈는 이제 과거의 망령이 깃든,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할 이름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망령을 씌운 자들 역시 이 땅에서 하루빨리 철거되어야 하는 것들이지요.”
손가락으로 허공을 콕 찍으며 신랄한 연설을 이어갔다.
“빌비온의 통합? 이뤄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리케니엔의 주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씁시다! 우리 연합의 이름으로 빌비온을 재통합시키는 겁니다. 북쪽 티히트라의 광산과 동쪽 켄타나의 은행을 빌비온의 중심인 발기지르의 이름으로 통제합시다!”
라스는 이미 알고 있다.
종교기업 빌렌, 그 고문인 쉬갈의 입김이 작용한 이 자리에 순수한 목적을 가지고 참석한 자 따위는 없다는 것을.
그래서 라스는 베나즈라는, 아이베리아에서 불문율로 취급받는 그 이름을 구태여 꺼내지 않았다.
이 자리는 단지 저들에게 주어질 것이 무엇인지, 그것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자리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대변하듯,
라스의 그 연설이 끝나기 무섭게 좌중은 일거에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올려 환호했다.
대의가 꼭 고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생각이야말로 구차한 아집에 불과한 것이지.
고결을 고집할수록 얼룩지기 쉬운 법이니까.
라스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조용히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자 쉬갈에 대번에 달려와 그의 손을 붙잡는다.
“라스, 되었네!”
“언제쯤 출병합니까.”
“당장 내일이라도 할 수 있어, 이미 소집에 응한 자들이 한둘이 아니야. 그 아이베리아의 불문율이니 하는 것들에 민감히 반응하는 고지식한 기사들조차 몇몇이 연락을 먼저 해올 정도라고!”
“그럼 그놈들에 대한 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고결한 대의만큼 값싼 것이 또 뭐가 있겠나?”
“그럼 지금 저 자리서 박수치는 놈들이 가장 관건인데…,”
라스는 눈썹을 찌푸린 채 턱을 괴었다.
“빌비온을 거들떠보려 하지도 않았던 자들이 그래도 기회가 엿보이니까 저리 아귀처럼 달려드는 꼴이 좀 역겹군…,”
“사업이라는 게 다 그렇지, 결국 저자들도 그럴싸한 명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고향을 빼앗긴 지주의 억울함을 풀어준다는 것만큼 깔끔한 명분이 또 어딨겠어?”
“떼어도 티히트라의 광산까지입니다, 쉬갈. 그 선을 잘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알겠네, 이 사람아. 그건 그렇고 벌써 모인 병사들의 머릿수만 해도 팔백이네, 그 가운데 기사가 무려 열여덟이고.”
“중요한 건 그 기사들이 쥐고 있는 재해겠지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지금 하던 것처럼 지분 문제를 좀 더 생각할 때라고.”
쉬갈은 라스의 등을 두들기며 위로했다.
그리고 그 순간까지도,
박수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 * *
켄타나의 기사, 가버트 로셀란이 기마대를 이끌고 막 발리르에 도착했다.
최근 벌어졌던 전투에서 뼈저린 패배를 겪은 켄타나는 군비를 크게 늘려 병사들을 재무장시키는 데에 여념이 없었는데,
그것을 반영하듯 가버트가 끌고 온 병사들의 무장 역시 출중했다.
내심 켄타나의 증강된 기세를 뽐내기 위한 정치적인 의도도 섞여 있었을 테지만,
적어도 가버트는 그런 의도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막 발리르에 도착하자마자 멍한 표정을 짓고 있어야만 했는데,
막 훈련을 마치고 복귀한 듯 보이는 베르융의 본대와 성문 앞에서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검은 플레이트 메일로 무장한 베르융은 온몸이 흙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그뿐인가,
그의 뒤를 바로 따르는 부장들을 보라.
마찬가지로 흙을 뒤집어쓴 태산 같은 남자, 테티르 론바즈.
그 뒤로 발기지르의 3기사라 불리는 가르웨, 가르렝, 요함버크.
중무장한 그들의 사열만으로도 이런 압박감이라니!
하지만 가장 중요한 대목은 따로 있다.
뒤를 따르는 병사들,
그들 역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듯 몸 성한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도 그들 사이에선 오를 대로 오른 독기로 만연해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졸여질 정도였다.
“가버트.”
“베르융 경.”
베르융이 낮은 목소리로 인사하니 가버트는 얼른 가슴에 손을 얹고 예를 갖춰 답했다.
“그대를 보니 마음이 든든하군.”
베르융의 그 말에, 방금까지 독기를 표출하던 병사들이 누그러진 얼굴로 가버트의 기병대에게 손을 들어 반가움을 표했다.
그럼 가버트와 마찬가지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기병대들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며 반색하기 시작했다.
“들어가지, 할 얘기가 많아.”
베르융이 고삐를 당겨 발리르에 입성했다, 가버트는 얼른 그가 이끄는 부장 맨 뒤편에 따라붙었다.
이내 들어선 발리르 내부는,
발기지르라고 불렸던 시절, 그가 보고 들었던 내용과는 동떨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종교기업 빌렌의 강압적인 정치의 증거였던 그 유명한 공개처형대조차 보이지 않았다.
주민들은 훈련에서 복귀하는 병사들을 지켜보았고,
한껏 신이 난 아이들은 졸졸 따라다니며 꺾은 꽃 가지 따위를 장난치며 던져대기 바빴다.
앞장선 베르융에게 몇 주민은 고개 숙여 존경을 표하기까지 했는데, 베르융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쳐가며 화답해주었다.
“가르웨.”
“예.”
직후 성관에 진입하기 무섭게 베르융이 부장 중 하나인 가르웨를 불렀다.
“병사들을 쉬게 하라, 큰일이 코앞까지 닥쳤으니 지금부터는 대비에 온 신경을 쏟아야 한다.”
“알겠습니다.”
“요함버크는 내 문서를 받는 즉시 리케니엔으로 달려가 전달하라, 그리고 그 답을 가져오도록.”
“명 받들겠습니다.”
차분하게 진행된 명령에 부장들은 각자의 역할을 이행하기 위해 행렬을 이탈했다.
테티르는 그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는 듯,
“베르융, 내 집에서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지. 오늘 저녁 어때?”
베르융 옆에 나란히 달라붙었고, 이에 베르융은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곧 테티르는 가버트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가버트 경, 이따 저녁에 보지.”
그 모습에 살짝 소름이 돋은 가버트는, 고개를 두어번 떨듯 끄덕여야만 했다.
* * *
약속한 저녁.
테티르의 집에 모인 세 기사는 가벼운 차림으로 술상에 둘러앉았다.
이윽고 테티르가 바로 술병을 집어 베르융과 가버트의 잔을 채우려는데,
“제가 하게 해주십시오.”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지은 가버트가 벌떡 일어나 테티르에게 예를 갖췄다.
“그럼 그렇게 하게.”
테티르는 그 특유의 호쾌한 웃음을 지으며 가버트에게 술병을 건네었다.
이제 가버트는 조심스럽게 베르융의 빈 잔부터 채웠다.
“엘르길 경을 대신해 술잔을 채웁니다, 부디 개의치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잘 받았다고 전해주게, 그 역시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겠지.”
이어 테티르의 술잔을 채운 가버트가,
“이 가버트가 직접 테티르님의 술잔을 채웁니다.”
제법 당당한 모습을 취하자 테티르는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호탕하게 웃었다.
“젊은 친구가 대범하기까지 하군, 마음에 들어.”
곧이어 테티르는 가버트에게서 술병을 빼앗아 그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무거울 걸세, 그 술잔에 담긴 게 말이야. 우린 직전까지 서로에게 칼을 겨눠 싸웠었으니까.”
가버트는 그런 테티르의 말에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들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서로 부딪혀 꺾은 것이 한둘이 아닐뿐더러…,”
“잘 아네, 아직 발리르와 켄타나 사이에 증오가 남아있다는 것 말이야. 그것이 쉬이 지워지지 않을 것도 잘 알지. 그러나 우리는 물이네, 그려진 물길 위를 정직하게 걷는 물 말이야. 그런 우리 앞에 두 갈래를 하나로 묶은 물길이 생겼으니 물로써 마땅히 흘러야 하지 않겠는가.”
테티르는 자조하듯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술잔을 들었다.
“나는 가로막힌 물길 앞에 고이고 고인 썩은 물이었네, 그리고 최근 그것이 무너지며 새로운 길이 열렸지. 그 길은 아주 깊은 대류였네. 자네를 비롯한 켄타나 전체가 말려들 정도로. 그러니 그저 여지없이 흘러 보세, 결국 끝에 가서는 다 같은 물이 되지 않겠는가? 증오마저 뿌옇게 되도록 우리부터가 열렬히 흘러가 보세.”
전장 한가운데를 휘어잡던, 그 공성추 같은 사내가 맞나 싶어.
가버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테티르를 빤히 쳐다보았다.
과연 전설은 전설이로구나.
가슴 속 뻐근함을 느끼던 가버트는 조용히 술잔을 들어 올렸다.
그럼 그 술잔에,
한참이나 말이 없었던 베르융이 제일 먼저 부딪혀왔다.
“그러나 대류 따위로 멈출 길도 아니지. 젊은 기사여, 기회가 된다면 영주님과 한 번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게. 그럼 그 복잡한 마음들을 갈무리할 수 있을 거야.”
이미 가버트는 리케니엔의 영주를 마주한 적이 있다.
비록,
투구에 가려져 있었지만…,
저 두 기사가 말하는 대류가 어떤 걸 의미하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였어.
테티르는 술잔을 번쩍 들며 외쳤다.
“흐르세! 흘러 보세!”
이에 시커먼 두 남자는 화답하듯 목을 뒤로 젖혀 술잔을 가볍게 만들었다.
* * *
새벽녘 아래.
나와 테리아는 한참 동안 하늘에 새겨진 푸른 궤적을 쫓아 달렸다.
그녀는 이제 내게 서슴없이 애정을 보여주었고,
나도 그것에 있어선 숨김없이 솔직하게 굴었다.
한창 서로 사랑을 속삭였을 때 했던 음어에 재미를 들렸는지, 잠시 속도를 줄였을 때 그녀는 내 귓가에 입술을 파묻고 이렇게 속삭이기도 했다.
“단검 만드는 거푸집에 플랑베르주 같은 걸 넣으면 어떻게 해? 아직도 두 다리에 감각이 없잖아!”
잔망스러운 표정으로 잔뜩 도발을 거는 그녀를 내려보고 있노라면,
곧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달래기 위해 속으로 애써야만 했다.
“나 학회의 활동명을 정했어, 단검집으로 할까 봐.”
이어지는 도발에 결국 나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줄기와 허리를 희롱하듯 간질여야만 했다.
그럼 그녀는 안장 위에서 몸부림치다가 이내 내 등에 몸을 파묻곤 항복했다.
그렇게 서로의 애간장을 한참이나 녹여가다가,
슬슬 궤적의 끄트머리쯤에 도달하자 우리는 공공의 장소로 나온 듯 정도를 지키며 진지함을 내비쳐야만 했다.
“거의 다 왔어.”
테리아는 황금이 녹은 푸른 눈동자로 하늘 위 끝난 궤적을 바라보며 전방을 손가락질했다.
그렇게 그녀의 손짓에 따라 벤투스를 몰고 좀 더 깊은 숲속으로 향하자.
끝내 우리는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가 쏘아낸 혜성을.
그것은 거대한 화구 속에 파묻혀 아직도 붉은 기운을 쏟아내고 있었다.
충격으로 반쯤 갈라진 그 안엔,
뜨거움관 상반되는, 달에서 뽑아온 듯한 은빛을 내뿜는 검날 파편들이 박혀 있었다.
다만, 검날의 부러진 부분은 전과는 달리 벌겋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테리아는 말에서 내려,
오른손으로 서슴없이 그 뜨거운 것 안에 박힌 검날들을 뽑아 들었다.
그리곤 뒤돌아,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다시 떨어진 밤의 제왕이 변형을 허락했어.”
“그럼…,”
“재탄생하게 될 거야, 오늘, 어쩌면 내일. 기사왕의 검이었던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