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증거 (2)
혜성에서 거둔 칼날을 가지고 다시 돌아오면.
테리아는 못내 아쉬운 눈치를 보다가도,
진지한 얼굴 속에서 잘도 애정 어린 눈빛을 드러내며 내 볼에 입을 맞춰주었다.
대장간이자 그녀에게 있어선 평생의 은신처이기도 한 그곳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스케비가 진지한 목소리로 묻는다.
“돌아왔구나, 되돌아갈 것을 들고서.”
그럼 테리아는 전과는 사뭇 다른 말투로 대답했다.
“네, 스케비.”
이제 그녀는 나를 살짝 돌아보며,
“그럼…, 준비 좀 할게.”
입가에 아직 묻은 여운을 드러낸 채 휙 하고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 그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고 있던 내 옆으로,
스케비가 자각자각 네 발을 바삐 놀리며 다가왔다.
“고대해왔을 일생일대의 작업이니까, 동시에 대장장이라면 누구나 신성시할 일이기도 하고.”
“제가 다 긴장됩니다.”
“나도 그래, 하지만 그만큼 기대되는군. 다시 모습을 드러낼 검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말 그대로 복원 작업이 아니었습니까?”
“검의 형태로 되돌아가는 것은 맞으니 복원이라 할 수 있겠지만, 과거와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가는 의미로서의 복원이라면 그건 아니야.”
스케비는 앞발을 들어 올린 채 코를 킁킁거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기사왕의 검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부러졌고 이제 그 부러진 것을 두들기는 것은 테리아이니…,”
“그녀에 의한 검으로 복원된다, 그 말이로군요.”
“그래.”
“이해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대된다는 그 말에도 십분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왜?”
“혹시 그 과정에서 그녀에게 탈이라도 생길까 두렵습니다.”
스케비는 찍찍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오히려 이로써 테리아는 자유를 가로막고 있는 빗장 하나를 거둬들이는 기분을 느낄 거야. 그것을 위해 두들기는 삶을 살았고 이제 그 결실을 보는 순간이니까.”
어느새 스케비는 앞발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리고 장담하는데, 테리아는 작업 중에 다칠 만큼 어설픈 대장장이가 아니야. 그녀는 내가 아는 모든 대장장이를 통틀어 최고의 실력을 갖고 있거든.”
그의 말 깊숙한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자부심에 나까지 자연스레 고취되었다.
그래서 단순하게 궁금한 점이 하나 생겨 물으면,
“그녀의 아버지인 아르테서스보다 더 말입니까?”
스케비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즉답했다.
“훨씬.”
* * *
테리아는 새하얀 가죽으로 된 작업복을 입은 채 내 앞에 나타났다.
마치 예복처럼 보일 정도로 작업복의 옷매무새는 그 용도에 어울려 보이지 않을 만큼 정갈해 보였다.
또 특이하게도 오른팔 전체가 드러나 있는 형태여서, 자칫 그 일면만 놓고 봤을 땐 어떤 드레스가 아닐까 하는 착각이 일어날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된 나로서는,
그녀의 그 옷으로부터 느껴지는 결연한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이제 테리아는 느슨하게 묶은 머리를 재정돈한 뒤.
내 앞으로 다가와 슬쩍 고개를 숙였다.
“디안 베나즈, 검의 복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습니까?”
이어 예를 갖춘 목소리로 묻는 그녀에게,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대답했다.
“확신합니다.”
그럼 그녀는 조용히 오른팔을 올려, 그 손등을 내 앞에 내밀며 말을 잇는다.
“그 확신의 맹세를 보이십시오, 그러면 나는 기꺼이 움직여 과거의 것을 현재로 되돌릴 것이니.”
그녀는 슬쩍,
눈길을 돌려 내 목에 걸린 인장을 쳐다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길을 살핀 나는 곧장 목걸이를 벗어 그 인장을 손에 쥐었다.
이에 테리아는 잘하고 있다는 듯 내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내민 오른손등 위로 녹은 양초를 조심스레 부었다.
분명 살갗을 뜯어낼 정도로 뜨거운 것이었겠지만, 그녀의 오른손등은 마치 기름을 바른 듯 번지르르해질 뿐 그 어떤 변화도 나타나질 않았다.
그렇게 손등 위에서 빠르게 식어가는 양초 위로,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인장을 들어 살포시 찍어 눌렀다.
“잘했어.”
테리아는 오른손등 위 하얗게 굳은 베나즈 가문의 인장을 살펴보며 한숨을 픽 쉬었다.
그 한숨 속엔 홀가분함이 섞여 있었다.
동시에 방금까지 내가 알고 있었던 테리아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아 조심스레 물었다.
“어떤 의식 같은 건가?”
“아버지가 받았던 의뢰였거든. 기사왕 에르앵의…,”
그녀의 말에 내 가슴이 일순간 뛰었다.
“숱하게 들어왔던 그 의뢰의 내용을 지금 내가 이행하고 있다는 게 조금 신기해서.”
오른손등 위 찍힌 문양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곧 나와 같은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또 한편으로는 없는 줄 알았던 기약이 맺어졌구나, 하는 홀가분함도 들어.”
그녀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대신 어루만져 위로하듯 눈빛으로 쏟아 그녀를 적신 나는 이제 마주한 의문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기사왕 에르앵의 의뢰 내용이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햇살 같은 금발을 찰랑거리며,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내 질문에 답했다.
“오직, 베나즈의 이름을 가진 자만이 부러진 검을 되찾으러 올 것이니. 대장장이는 찾아왔을 묘연한 자의 인장을 찍게 해 진위를 가리라.”
그렇게 들은 답은,
되려 뛰었던 내 가슴을 더욱 자극했다.
이미 기사왕은 이 순간까지 내다보고 있었던 걸까.
그것이 아니라면, 맥레인을 진정으로 믿었던 거야.
옆에서 조용히 있던 스케비가 진지한 표정으로 사족을 붙였다.
“그 의뢰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베나즈의 이름은 이 땅에서 불문율 같은 게 되어버렸더군. 누구도 그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어.”
그럼 테리아는 조심스레 내게 다가와.
“그리고 디안, 네가 그 베나즈의 이름을 갖고 왔지.”
슬쩍 내 손을 잡아 왔다.
베나즈가 부정 받는 세상이 되리란 걸 예상하고, 그 이름으로서 0의 완성을 이루도록 에르앵은 아르테서스에게 의뢰한 거야.
맥레인은 나를 통해 0을 남겼고,
아르테서스는 테리아를 통해 기사왕의 검을 남겼다.
그리고 이제, 우리 둘이서 그 매듭을 짓는 거다.
나는 내 손 주위를 맴도는 테리아의 그 부드러운 손을 꼭 잡았다.
* * *
테리아는 풀무를 짓밟아 화구에 바람을 먹였다.
그리고 보관해놓았던 나무와 종류를 알 수 없는 철 가루, 진득한 은색 액체를 연달아 화구에 집어넣어 그 열기를 키웠다.
어찌나 뜨거운지 멀리 떨어진 나조차 그 열기에 살짝 얼굴을 찌푸릴 정도였다.
“그거 알아?”
내 옆에 나란히 앉아 테리아를 지켜보고 있던 스케비는,
그 작은 앞발 하나를 내 허벅지에 얹은 채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대장장이는 불을 보는 능력으로 그 실력이 판가름 되거든. 해서 소위 장인이라 불리는 대장장이들은 그 불 보는 능력이 아주 뛰어난 자들이라고 볼 수 있어.”
스케비는 화구에 열기를 더해가는 테리아를 기특한 듯이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불을 보는 능력은 단순히 익혀서 체화하는 것과는 다르지, 애초에 남들과는 다른 재능이 있어야 하고 그 재능마저 부족한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평생을 의심과 싸워가며 체화시켜야 해.”
이어 스케비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르테서스는 그 능력이 아주 출중한 대장장이였어, 불의 이죽거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두들긴 쇠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다 알 정도였지.”
“말 그대로 장인에 해당하는 분이셨군요.”
“맞아, 하지만 테리아는 달라.”
그는 그 좁쌀 같은 작은 눈에 경의를 담은 채 테리아를 바라보았다.
“대가로 팔을 잃었다곤 해도 태생부터 압도적인 재능을 타고났을 뿐만 아니라, 결국 아르테서스에 의해 완벽하게 벼려짐으로써 그 재능이 완벽히 개화했지.”
“불을 보는 능력 말입니까?”
내 물음에 스케비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곧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불은 보는 것에만 그치는 게 아니야, 그녀는 불이란 원소를 오감의 영역 안에서 가지고 놀 수 있으니까. 남들은 수많은 시간을 갈아가며 불 보는 법을 체화시켜야 하지만, 그녀는 완성된 순간부터 그저 당연히 알게 될 감각 중 하나에 불과 한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스케비는 테리아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그런 그의 고갯짓을 따라 가보면,
화구에 오른팔을 집어넣고 있는 테리아가 보였다.
그녀는 불덩이 하나를 꺼내 주무르다가도, 다시 화구 속에 오른팔을 집어넣어 마치 손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갈무리하듯 고심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불의 결, 기세, 열기, 그 응집력에 더해 딱딱거리는 이죽거림 속 찰나의 깨짐이 있을 가능성조차 그녀에겐 한낱 물리적인 공식에 지나지 않아. 그러니 애초에 아르테서스조차 테리아에게 비하지 못하는 거야.”
스케비의 설명을 들으니 새삼,
그녀가 한없이 높아 보였다.
하얀 작업복을 입은 채, 숭고한 손짓으로 화구 속 답을 찾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어느 거대한 탑의 주인같이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화구 속을 휘젓던 테리아가 답을 찾았을까, 두 눈을 번뜩인 그녀가 부러진 검 날을 달구기 시작했다.
동시에 작업실 내부는,
달빛보다 차가운 은빛으로 가득 차올랐다.
* * *
테리아에 의해 완벽하게 풀린 불의 공식은,
그것에 대해 무지한 나조차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몇 번의 달굼, 몇 번의 두들김.
간결하면서도 고고한 그 동작 몇 번 만에 조각난 검날은 올곧은 한 자루의 검으로 완성되었다.
이제 나는 그녀를 도와 가드와 자루를 만드는 것을 도왔다.
나무 표면을 거친 가죽으로 다듬고, 어느 괴물에게서 나왔을 법한 아교를 발라 그 위에 긴 끈을 돌돌 말아 올리면.
그녀는 달궈진 검날 뿌리 부분을 이용해 그것에 구멍을 뚫었다.
십자처럼 직각으로 뻗은 가드 위로는 스케비가 종횡무진 움직이며 그 안에 미세한 문양을 바삐 새기고 있었다.
작은 두 앞발에 낀 장갑 끝에는 날카로운 보석이 달려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가지고 어느 유려한 나무의 결과 가지를 순식간에 그려내었다.
“어떤 뜻이 담긴 겁니까?”
내 물음에 문양을 새겨넣던 스케비는,
“전설적인 세계수, 아브렐리드의 가지를 새긴 거야. 그 어떤 사계 앞에서도 초연히 과실을 맺으리라는 뜻이 담겨 있지.”
“그거…, 참으로 멋지네요.”
내 감탄에 스케비는 코를 움찔거리며 가드 끝부분에 누운 듯한 형상의 산을 그려냈다.
“이 산은 베슈킨스, 난쟁이들의 영원한 성지야. 그 어떤 미약한 것이라도 세상의 거인으로 만들어준다는 기원이 담겨 있어.”
문양 새기기를 마친 스케비가 가드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두 팔로 그것을 내 쪽으로 밀어냈다.
“봐, 마음에 들어?”
가드를 들어 유심히 지켜보던 나는 감상을 내뱉기도 전에 벅차올라 솔직함부터 내뱉어야만 했다.
“그저 최곱니다.”
자랑과 감탄이 이어지는 우리 둘 사이를 지켜보고 있던 테리아는,
조용히 고개를 돌린 채 웃었다.
이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벌써 날이 다시 어두워지고 있어.”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갔다 온 스케비가 그대로 지쳐 쓰러졌다.
하루를 꼬박 지새웠단 말인가?
그럼에도 테리아는 완강한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를 도와 폼멜까지 완성하고 나자,
어느새 작업실 안에선 새벽 냄새가 가득했다.
마친 작업 속에서 한결 가벼운 여유를 얻은 테리아는, 그 새벽 냄새 가운데 잠든 스케비의 눈치를 보다가.
몰래 내게 다가와 입을 맞췄다.
그럼 나는 좀 더 다가가 그녀의 오른팔을 붙잡으려 했지만.
“안 돼, 아직 뜨거울 거야.”
테리아는 놀란 얼굴로 휙 물러섰다.
대신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다가와, 그 풍만한 오른 가슴으로 내 팔을 가로지르며 희롱했다.
그러다가도 새침한 모습으로 돌아와,
“참, 날은 완전무결한 것이어서 상하는 일이 없겠지만 자루와 가드는 그렇지 않아서 상하면 수리를 받아야 해.”
내게 몇 가지 일러주었다.
“그러니까 수리가 필요할 때면 나를 찾아와.”
“아마도 엄청나게 고장 날 텐데.”
내 능청스러운 대답에 테리아는 돌연,
식겁한 얼굴로 묻는다.
“그만큼…, 앞으로의 길이 험난하다는 뜻이겠지.”
그래, 맞는 말이지…,
능청을 떨려다 괜히 그녀에게 걱정만 팔아버렸네.
작업은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
낡은 아밍 소드에서 자루 부분을 뽑은 그녀는, 조심스레 그 안에 새겨진 글귀를 내게 보여주었다.
“봐, 이게 바로 0이야.”
뜻을 알 수 없는, 어떤 문양이나 그림에 가까워 보이는 글귀.
“바로 이 글귀가 0의 기억을 담고 있어.”
이 세상을 관통하는 아주 강력한 힘 중 하나 일진데,
그것을 가두고 있는 것은 그저 한낱 그림 같은 글귀로구나.
현자가 기억을 잉크 삼아 써 내려갔을 그 글귀를 담담히 내려다보던 나는,
그제야 왜 자루에 피를 흘려보내는 행위를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두 발 걷는 자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가장 강력한 서약의 증표.
그것이 피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결정적으로…,
저 0이라는 글귀를 통해 나와 맥레인이 가족이 되었지 않았는가.
그의 피로 서명되었을 문양 위로, 나의 피가 뒤덮여 졌었고.
반대로 나의 피로 서명되었던 것 위로, 그의 피가 새로이 뒤덮였으니까…,
피를 나눈 진정한 가족이 된 거야.
테리아는 조용히 0이 새겨진 자루를 내가 다듬은 자루 위에 얹어 놓았다.
그리고 숨죽은 화구 속에서 잔불 하나를 집어 얹어진 자루를 태웠다.
그것은 힘없이 검게 타 이내 으스러졌지만,
새겨진 글귀만큼은 아래에 놓인 새로운 자루 위에 그을음으로 선명히 남아있었다.
그 일련의 과정은 분명 세 종족의 합의가 이뤄져야만 가능한 것인 만큼 거창할 줄 알았지만,
의외로 참 간결하게 끝이 나버렸다.
그나저나…,
한낱 글귀에 불과한 것이 불 앞에서도 초연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니,
그래도 인챈트로구나, 그 힘을 절절히 느꼈어.
이제 새로운 가드와 자루가, 마찬가지로 재탄생한 검날과 결합 되었다.
상당히 긴 롱소드.
가드를 위시한 십자 안엔 거룩함이 샘솟는 문양으로 점철되어 있다.
검날은 전보다 더한 달덩이가 되어,
가만히 내려다보아도 눈이 시릴 정도였다.
그 셀레어조차 이 검 옆에 있었다면 잿빛처럼 보였을 것이리라.
곧이어 테리아는 그 검을 두 손으로 조심히 받쳐,
내 앞에 내밀었다.
“이 검에 붙여질 새로운 이름은 ‘새비안’ 다시 태어난 0이자, 뜻에 따라 베나즈를 새로운 주인으로 모실 무기.”
나는 토르킨 선생님께 배운 대로,
기사의 예를 갖춰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려,
이내 테리아로부터 검을 받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