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24화 (224/365)

224화. 증거 (3)

테리아, 그녀만의 오롯한 방 안.

한결 여유를 되찾은 그녀는 내 옆에 바짝 붙은 채 검은 끈을 가지고 한창 매듭짓기에 열중했다.

그런 와중에도 마치 꼬리를 흔들듯, 내 무릎 위에 올린 허벅다리를 흔들거린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내 손에 들려있는 검은 끈에 집중하고 있다가 보면,

어느새 그녀는 고개를 쓱 내밀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씩 웃길 반복한다.

급기야는 손에 쥐고 있던 검은 끈을 내려놓은 채 내 옆모습을 이리저리 뜯어보듯 바라보기 시작했다.

해서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치자,

테리아는 휘둥그레진 눈을 끔뻑거리며 당황을 내비치다가.

이내 흘러내린 옆머리를 귀 뒤로 훌쩍 넘기고는 시선을 회피하며 수줍게 웃었다.

그리곤 다시 흘깃거리며 내 눈치를 살피는데,

방금 넘긴 머리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잔털이 그녀의 그런 모습과 겹쳐져 참으로 귀여워 보였다.

“테리아, 왜?”

“아냐, 아무것도.”

돌연 새침하게 구는 그녀에게 나는 그저 아리송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매듭에 집중해, 디안.”

“테리아, 너는?”

“뭐가?”

“같이 매듭에 집중해야 하는 거 아니야?”

“다 널 생각해서 나름대로 속도를 조절하고 있는 것뿐이야.”

그녀의 말에 반박하지 못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검은 끈의 매듭에 집중해야만 했다.

“그러면서 겸사겸사 재밌는 것도 보고…,”

“재밌는 거?”

배시시,

웃는 그녀가 내 옆모습을 빤히 쳐다본다.

“어, 재밌는 거.”

“뭐가 그렇게 재밌는데?”

“나도 몰라, 그냥 재밌네.”

흔들흔들,

내 다리 위에 걸친 허벅다리를 흔들며 태연히 매듭짓기에 집중하기 시작하는 테리아.

그런 그녀에게서 이제,

막연히 느꼈었던 그 일말의 압박감조차 사라지고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나도 편히 웃었다.

이윽고 쥐고 있던 끈의 매듭짓기를 모두 마쳤다.

테리아는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본인의 작업을 딱 맞춰 끝냈다.

그렇게 완성된 결과물을 들어 올린 그녀는,

“생각보다 손재주가 좋네.”

만족한 얼굴로 내가 지은 매듭들을 살펴보았다.

“검집으로 쓰기에 더할 나위 없어 보여.”

흡족한 평을 내린 그녀는 이어 검집 입구 부분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그럼 나는 탁상 옆에 기대놓았던 검의 가드 부분을 양손으로 붙잡은 채 조심스레 검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검집은 딱 맞아떨어졌다.

아직 뻑뻑한 감은 남아있었지만, 이 부분은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해결될 문제겠지.

그나저나 아직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이 검이 가지고 있는 이질적인 감성 말이야.

그녀의 손에 의해 재탄생 된 이 ‘새비안’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균형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 균형은,

그 무게마저 속여낼 정도로 정교했다.

검의 자루 부분을 잡으면 말 그대로 신체 부위가 연장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반대로 날 부분 쪽으로 들어 올리면 통상적인 묵직함이 느껴져.

이 부분만으로도 확신하건대,

소위 명품이라는 개념보다 한참 위의 격을 아우르는 수준의 물건이리라.

“이제 다시 돌아갈 일만 남았네.”

“…, 그렇네.”

테리아는 몸을 틀어 나를 정면으로 올려다보며 물었다.

조금은 조바심이 느껴지는, 그러면서도 불안함을 담은 표정으로.

그러나 그녀의 그 햇살 같은 금발은 상반되게 반짝거렸다.

“아이베리아 내 손가락 안에 드는, 아니 어쩌면 가장 강력한 명분을 갖고 돌아가는 것이니까…,”

슬쩍, 손을 뻗어 내 무릎을 꼬집듯 잡은 그녀의 눈망울에서 9월의 하늘이 쏟아져 내렸다.

“조심해, 부디.”

“테리아, 너는?”

그런 그녀가 쏟은 하늘에 별을 담듯, 나는 나긋한 눈빛을 보내며 그녀에게 물었다.

“어쩌면 네게 가장 위험했을 요소가 사라진 건데, 이후 어떤 계획이라도 갖고 있어?”

테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특유의 눈매에서 나오는 새침함을 드러냈다.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그 복잡한 심경을 대변하듯, 버릇처럼 손가락으로 햇살 줄기 하나를 돌돌 감으면서 말이다.

“역시 익명으로서 학회 활동을 제대로 해 봐야겠지. 늘 바라왔던 거였으니까.”

“부디, 조심하도록 해. 세간이 너의 그 모습을 오해로써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상관없어. 익명을 두르고 글씨만으로 소통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녀는 고개를 쓱 내리며 얼버무리듯 말했다.

“지금처럼 네가 날 생각해주기만 한다면…, 뭔들…,”

그렇게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결국엔 서툰 감정을 다루지 못하고 왈칵 쏟아낸다.

“고장…! 안 나도 말이야. 검의 가드나 자루 말이야…, 나는 계속 여기 있을 거니까…, 언제든지 찾아와도 된다고.”

두서없는 그녀의 쑥스러움이 내 마음을 거칠게 흔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와 함께 돌아가고 싶었지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그 길을 강요할 순 없는 노릇이기에.

“당연히 올 거야, 널 보러.”

담담히 약속하듯 그녀에게 말했다.

테리아 루스,

그녀는 그제야 머리카락을 닮은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 * *

안장 위에 올라 두들기듯 박차를 가하면,

벤투스는 금세 한 줄기 바람처럼 흘렀다.

단숨에 그녀와 멀어졌지만,

반대로 나부끼는 바람에 그녀의 향기가 더욱 진하게 일었다.

길다면 길고, 또 짧다면 한참 짧은 여정이었어.

그리나, 기간과 상관없이 그 여정을 통해 얻은 결실은 너무나 값진 것이었다.

이제 내 허리엔 아이베리아에서 손꼽히는 명분이 매달려 있다.

베나즈의 이름으로 휘두를 명분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상상만 해도 달콤한 인연을 만났다.

테리아 루스.

부디 기회라는 풍랑을 만나 다시 그녀에게 닿기를.

길이 아닌 북서쪽이란 방향으로 한참을 이동하던 나는, 이제 갈림길 앞에서 멈춰 섰다.

위쪽으로 올라가면 리케니엔이 있는 빌비온이고,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곧 중립지역으로 향하는 국경선이 나온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지.

조용히, 안장 가방 속에서 유리로 된 구체를 꺼내든 나는.

그 안에 일렁이며 반짝이는 별빛을 내려다보며 묵묵히.

말머리를 아래쪽으로 돌렸다.

베리스텔라.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던 그 별의 궤적을 따라서.

* * *

남쪽 길을 따라 전력으로 질주해 내려갔다.

시기상 새벽임에도 따듯한 바람이 흐를 계절이었건만, 벤투스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마주 오는 바람들 모두 한겨울의 것처럼 느껴졌다.

맥레인의 늙은 길잡이는 아직도 바람을 따라잡을 만큼 강인하고 강성했다.

내게 방향을 제시해 줄 나침반으로써.

어느덧,

중립지역으로 향하는 국경에 도착했다.

거의 말라가던 물줄기는 크게 불어 강줄기를 이루고 있었다.

아마도,

저 너머에서 벌어졌던 전쟁의 여파 때문이겠지.

다행히 저 멀리 간이로 설치해놓은 나무다리가 보였다.

다리 각 끝엔 깃발들이 나풀거렸지만, 그곳을 지키는 이는 하나도 보이지 않아서.

그 틈에 얼른 다리를 건넜다.

그리고 벤투스의 네 발이 중립지역의 땅에 닿기 무섭게.

안장 가방 속에서 은빛 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어느 시간대에 쏟아졌던 별빛이었는지는 몰라도, 지금 비쳐내야 할 것이 있기라도 한 듯이 반짝이는 그것을.

나는 허리에 매단 채 묵묵히 말을 몰았다.

그럼 곧,

별빛으로 환하게 밝혀진 내 주위로 어떤 형상을 한 연기가 지나가듯 스친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으나.

절대로 놓칠 수 없는 형상을 하고 있었기에.

나는 얼른 벤투스를 재촉해야만 했다.

곧 세차게 달리는 벤투스 앞으로, 내 옆을 스쳐 지나갔던 형상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형상은 나와 같이 말을 타고 아주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는데,

그 안장 위엔…,

두 남녀가 타고 있었다.

…,

“맥레인, 어딜 가시는 겁니까.”

씁쓸함과 반가움을 곱씹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려 본다.

“메리안님, 이렇게나마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북받친 감정에 이를 딱딱 부딪치며 혼잣말을 내뱉어 본다.

그럼에도 별빛에 비친 그 형상은 대답 없이 아주 빠르게 남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남쪽으로 내려가던 형상은 깊은 숲에서 우뚝 멈춰 섰다.

과거의 벤투스는 숨을 헐떡이며 그대로 주저앉았고,

안장에서 미끄러지듯 쏟아진 맥레인은 내려오는 메리안을 받아 들었다.

직후,

마치 메아리처럼 형상으로부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메리안, 다친 곳은 없소?”

“당신은요? 피투성이잖아요.”

나는 묵묵히 말에서 내려 그 현장을 지켜보았다.

“렝킨슨이 죽었어, 그 렌스조차 마지막에 쓰러졌지…, 메리안 나는 그들을 지켜내지 못했어…,”

“그들이 당신을, 우리를 지켜준 거예요.”

슬픔을 곱씹고 있는 맥레인의 얼굴을,

메리안이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쌌다.

“미안하오…, 미안하오…,”

“공동의 운명을 가지고 누구를 탓할 순 없어요, 맥레인.”

이윽고 맥레인이 허리에 매달린 낡은 아밍 소드를 내려다보며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나의 맹세가, 그 섬김의 흔적이 이렇게 선명하게 남아있지 않소. 공동의 운명이라기엔 당신의 희생이 너무나 커…,”

“그러한 맹세를 쏟아낼 줄 아는 남자였기에, 당신 옆에 내가 있는 것 아니겠어요.”

초췌한 얼굴이었지만, 그 어떤 봄보다 포근한 표정을 지은 메리안은 맥레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당신이 자랑스러워요, 마지막에 내린 그 결정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었어요.”

“베르융, 조이. 그 고집불통인 놈들을 꺾어내느라 내 온 힘을 다 써버렸소.”

맥레인은 다정한 얼굴로 메리안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곤 조용히 떨어져.

품에서 작은 단검 하나를 꺼내 들었다.

메리안은,

눈물을 뚝뚝 쏟으며 재차 따지듯 물었다.

“이것으로 끝내도 괜찮은 거예요?”

“이것마저 내게 남은 숙명이오.”

“맥레인…,”

“괜찮소, 괜찮아…, 금방 끝날 거야. 세상으로부터 지워짐으로써 내 역할이 끝날 테니까.”

이윽고 맥레인은,

들고 있던 단검으로 자신의 양팔을 쭉 그었다.

비록 흐리멍덩한 형상이었지만, 그 순간 내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 버렸다.

뚝뚝,

자로 잰 듯 베어진 양팔에서 쏟아지는 피.

그 고통을 채 느끼기도 전에 맥레인은 무릎을 꿇고 앉아.

메리안을 올려다보았다.

흐느껴 울던 메리안은 이내 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내, 그 안에 담긴 기름을 맥레인의 양팔에 쏟았다.

직후,

양팔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불꽃.

동시에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 양팔.

정확히는, 그 팔에 흐르고 있는 피가 끓고 있었으리라.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이 수반하고 있을 텐데도, 맥레인은 비명 한번 지르지 않았다.

그저 이마 위로 굵직한 핏대를 내세운 채 무던히 참아낼 뿐.

그렇게 양팔로부터 많은 것들이 증발하고 나서야, 불길은 사그라들었다.

아마도,

이것을 통해 그의 안에 글라디옴이란 이름으로 깃들어 있던 힘들이 모두 증발했겠지.

* * *

피 끓이기를 마친 직후 둘은 다시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뭔가에 쫓기듯, 필사적으로 달려가는 그들의 뒷모습은 너무나 처절해서.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렇게 일순간,

형상이 사라지다가,

다시 나타났을 땐 모든 상황이 급변한 뒤였다.

다섯의 기사가 맥레인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중 한 기사는,

메리안을 인질로 붙든 채였다.

“끝났어,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맥레인은 다섯 기사에게 필사적으로 빌면서 애원했다.

“기사왕의 건설이 모두 다 무너져 내렸으니, 그깟 명분 따위 없어도 충분히 군림할 수 있잖은가!”

이에 민머리에 호리호리한 기사 하나가 시체 같은 표정으로 맥레인을 쏘아붙였다.

“그 건설을 무너트린 공성추가 한둘이 아니라서 말이야, 이해관계라는 게 늘 그렇잖은가.”

그런 그의 옆, 긴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키 큰 기사가 이죽거렸다.

“글라디옴의 최후가 이렇게 보잘것없는 것이라니. 한때 최강이라 불리던 자가 어찌 이렇게 형편없이 무너지나?”

그런 그의 모욕에도,

맥레인은 두 무릎을 꿇은 채 읍소했다.

“이제 내게 남은 건 메리안 하나뿐이네. 그대들은 돌아가 유감없이 군림하게, 그저 내게 작은 자비 하나만 던져주면…,”

“맥레인, 그거 알아?”

맥레인의 읍소가 채 끝나기도 전,

메리안을 붙들고 있던 짧은 머리의 여기사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이 안에.”

이윽고 그녀는 서슴없이 메리안의 아랫배와 사타구니를 쓰다듬더니 이내 광기 어린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이 안에 네 씨앗이 있어, 그 사실도 몰랐나?”

이에 맥레인은 두 손을 모은 채 아랫입술을 벌벌 떨었다.

이미 그를 포위한 다섯 기사에게,

0은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애초에 맥레인 옆에 나뒹굴고 있는 낡은 아밍소드에 다섯 기사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으니까.

“제… 발…,”

맥레인이 허망한 표정을 지으며 빈다.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는 메리안은 눈물을 쏟고 있었다.

그러나 민머리의 기사는,

“맞아, 우린 돌아가 군림하기만 하면 돼. 그런데…, 그런 우리에게 화근인 것을 남겨두고 가선 안 되지 않나.”

가차 없이 냉소를 쏟았다.

이후 벌어진 일은,

너무나 순식간이어서.

나도 모르게 두 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다섯 기사의 무기가,

메리안의 몸 곳곳을 찔러 들어가 관통했다.

그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보고 있던 맥레인은 괴성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레버드! 잘란! 엠프리오! 가헨! 프리메! 너희들의 이름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내 심연에 몸뚱이를 내던져서라도 너희들을 저주할 것이야!!”

심줄이 모두 끊긴 한 마리의 야수처럼,

통곡을 부르짖는 그를 뒤로.

다섯 기사는 뒤돌아섰다.

이내 메리안의 곁으로 달려가 그녀를 살피던 멕레인은,

몇 시간이고.

슬피 울었다.

한참 후.

맥레인은 메리안을 안아 든 채.

남쪽 숲을 한없이 가로질렀다.

그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 가보니 곧,

작은 마을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 멈춰선 맥레인의 너머로, 시몬과 매튜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이내,

별빛은 완전히 멎어버렸다.

* * *

식을 줄 모르는 이 분노를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

그 어떤 냉정과 침착으로도 식지가 않는다.

벤투스를 닦달해 정처 없이 달려가던 나는, 안장에서 뛰어내려 언덕 꼭대기 위에서 한참을 소리 질렀다.

완성,

하겠습니다.

베나즈의 복수를 내가.

완성하겠습니다.

새비안을 뽑아 들자, 동시에 주위 기류가 모조리 바뀐다.

이내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두르자,

잠시 후.

저 시선 끝 흐릿하게 보이는 산의 하얀 옷이 벗겨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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