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26화 (226/365)

226화. 누군가의 이야기들

내가 꾸는 꿈들은 그렇게 반가운 종류의 것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내게 꿈은 곧 ‘통보’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 통보는 오늘도 여지없이 찾아왔다.

꿈의 배경은 들판이다.

아주 광활한 들판.

그리고 그 들판 한가운데엔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솟아 있다.

분홍색 나뭇잎이 무성한, 아주 특이한 나무가.

그런 나무 아래엔 날 기다리고 있는 한 남자가 있다.

눈을 겨우 가리는 크기의 검은 유리알 안경.

말끔한 민머리,

덥수룩한 수염.

입고 있는 것은 늘 그렇듯 나풀거리는 흰색 면 재질의 상의와 하의다.

그는 막 다가오는 나를 향해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늦었군!”

악마 같은 놈.

언제나 저렇게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구나.

저놈의 표정을 조금이라도 일그러트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놈과 나의 관계는 아주 명확한 상하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 상하는 인간과 개미 수준에 버금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개미의 입장인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순응하는 것뿐이야.

“또 무슨 일을 하려는 거지…?”

내 물음에 녀석은 손사래를 치며 호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를 통해서 일 벌이려는 게 아니야, 단지 네가 날 위해 해 줘야 할 일이 있는 거지.”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되는데?”

내 물음에 남자는 좁쌀만 한 안경을 한 차례 고쳐 쓰고는 말을 이었다.

“수집해야 할 물건이 있거든. ‘베레’와 관련된 물건이야.”

베레.

저놈과 같은 부류들이 즐기는 일종의 카드놀이 같은 거다.

“이미 카드 대부분을 수집한 것으로 아는데, 아니면 이제 나도 당신의 ‘카드 주머니’ 중 하나가 되는 건가?”

“아이작. 난 당신을 그런 가치 없는 것에 소비하고 싶지 않아. 그럴 생각도 없고.”

놈은 활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지 이번에 새로운 카드들이 우후죽순 나오는 바람에 자네 도움이 필요한 것뿐이야.”

“원래 그렇게 새로운 카드가 잘 나오던가?”

“아니, 이번에 아이베리아에 큰일이 일어났나 봐, 판도를 흔들 만큼 큰 파도가 출렁일만한 일 말이야.”

“그래서, 내가 직접 그 카드들을 수집하면 된다?”

놈은 손뼉을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래, 맞아! 그 대가로 자네에게 3년이라는 시간을 선물해 주지.”

“뭐…?”

내가 잘 못 들었나 해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에게 되묻자 그는 흰 이빨을 드러내며 또박또박 대답했다.

“3.년.을.준.다.고.”

“내 인생의 3년을 준다 그 말이야? 통보조차 없는…?!”

“어때, 좋은 조건이지 않아? 그뿐만이 아니야. 그 3년이란 시간 동안 네가 원하는 환경에서 원하는 것을 하며 살게 해줄 수도 있어.”

“그건 당신 탑에 들어가 살아야 하는 조건이잖아…!”

놈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상관없지 않나? 어쨌든 3년이란 시간이 있는데 말이야.”

천천히,

그가 나를 지나쳐 걸으며 지겨운 설교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세상 두 발 걷는 자들은 너와 같은 빙의자들을 측은하게 보지만, 사실은 말이야, 오히려 측은한 쪽은 바로 그들이거든. 하루의 절반이란 시간을 영위하기 위해 그들은 나머지 하루의 절반을 바쳐야 하는 삶을 살고 있잖아? 하지만 빙의자들은 다르지, 통보를 받고 그것을 이행하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순수한 삶의 시간을 얻으니까. 그것도 아주 많이.”

고작 카드 몇 장 구하는 데에 3년이라면,

그래 이건 할만하지!

“좋아…, 하겠어.”

놈은 당연하다는 듯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조건이 있어.”

“갑자기 말을 바꾸는 게 어딨어?!”

“말을 바꾸는 게 아니라 이번 일의 방식에 대해 설명하려는 거야.”

“뭐…? 카드만 얻으면 되는 거 아니었어?”

“이번에 아주 먼 곳에서 온 친구와 사귀게 됐거든.”

먼 곳에서 온 친구라면…, 세상 반대편에 솟은 탑의 마법사라도 되나…?

“그런데 그 친구가 ‘베레’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뭐야? 그래서 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해, 그러니까 지금 아이베리아 근처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설명해줄 자가 필요하다 이 말이야.”

“그것도 내가 해라? 뭐 그쪽에서 빙의자라도 보낸다는 건가?”

“아니, 그냥 혼잣말을 중얼거려.”

“… 뭐?!”

“너의 혼잣말을 내가 그 친구에게 전달해줄 테니까.”

상관없다.

더는 지체할 필요는 없지.

최대한 빨리 해결해서 3년을 손에 넣는다, 이것이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가장 맹목적인 일이다.

“좋아, 그렇게 하겠어.”

* * *

“… 헉!”

악몽 같은 꿈에서 도망치듯 일어났다.

이미 그의 다른 빙의자가 나를 찾아왔었는지, 내 머리맡엔 두꺼운 카드 뭉치가 놓여 있었다.

아마도 그 설명이란 것에 이것들을 보태라 이 말이겠지.

나는 곧바로 인근 선착장으로 가 배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 긴 항해의 시간 동안.

설명을,

시작해야겠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당신.

설명은 한 번뿐이니까 잘 듣도록 하라고.

내 이름은 아이작 엘러.

애초에 모험가란 직업을 갖고 있어서 온갖 지역에서 벌어진 상황에 대해 빠삭하거든.

베레는 말이야, 기사의 땅 아이베리아와 그 인근 대륙의 이야기로 만든 카드놀이야.

자 예시를 들어볼게.

아이베리아 남쪽, 소위 무법지대라 불리던 휴전선이 있었어.

지금은 두 제국의 전쟁으로 사라져버렸지만, 어쨌든 그곳이 무법지대라는 이름 아래 집단들이 꽤 융성한 성장을 했단 말이야?

예를 들면…,

잠깐만, 카드를 뒤지고 있어.

그래, 찾았다.

바로 이 카드처럼 말이야.

[무법지대 – 포드]

위력 카드

두 참가자의 카드 비용을 2개씩 차감한 뒤, 다음 차례에 모든 카드 비용을 2개씩 늘린다.

없는 거 빼고 다 팔아, 근데 없는 게 없어서 다 살 수 있어. 아, 생각해보니까 하나는 못 팔겠다. 법 말이야. - 거상 오리반 -

아무튼, 중립지역을 중간에 끼고 대치하고 있던 두 제국이 전쟁을 벌였단 말이야?

거기서 누가 이겼는지 궁금하겠지?

바로 라이튼이 이겼어.

어디 보자, 그래 이것이 결정적이었지.

[라이튼 – 프빌리오 바르네]

존재 카드

★12

▲11 ■8

이 카드는 한 차례에 두 번 행동할 수 있다.

위 효과가 발동되지 않은 경우, 자신의 판 위에 놓인 지속 카드 하나를 파괴한다.

벼락이 내리치는 순간, 내 옆에 있던 동료들이 말 그대로 터져나갔어. 그건 틀림없이 기사의 탈을 쓴 괴물이었지. - 티바르의 생존한 병사 -

이제 좀 이해가 돼?

이 베레라고 하는 카드놀이는 아이베리아와 그 인근의 땅 위에 벌어지는 일들이 즉각적으로 반영되는, 근방 탑들의 합의 속에서 만들어진 정교한 놀이야.

지금 알려준 이 프빌리오 카드도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는 이렇게 강한 능력을 가진 카드가 아니었거든?

원래 이 카드의 공격이 11씩이나 되지 않았다 이 말이지.

그런데 전쟁 이후에 이 카드의 능력이 알아서 상향조정 되었다 이거야.

자 그럼 앞서 보여줬던 ‘무법지대 – 포드’ 카드 기억나?

이건 카드의 배경 자체가 이미 무너져 내렸기 때문에 앞으로도 변동사항이 없는 고정 카드가 되어버렸어.

말 그대로 상향될 기회가 배제된 카드란 거지.

더 설명이 필요한가?

내게 궁금한 것을 직접 물어봐 줬다면 더 편했을 텐데…,

아쉽게도 당신과 나 사이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는 것 같네.

아,

이건 궁금할 것 같은데.

왜 카드놀이의 규칙은 차치하고, 단지 화려하고 그 화려한 만큼 높은 수치를 가진 카드가 무엇인지 궁금하기 마련이잖아.

아!

그런데 이 카드 뭉치 안에 들어있을지 모르겠네.

그 값비싼 카드를 넣어줬을 리가…,

어! 있다 있어!

내 눈에 보이는 게 당신에게도 보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카드들은 겉면에 조개가 소화 시킨 무지개가 발라진 것처럼 엄청나게 반짝이거든!

[오쿨루스의 기사왕 – 에르앵]

존재 카드

★18

▲15 ■15

이 카드가 판 위에 등장 시 상대 판 위의 모든 카드를 파괴한다.

이때 파괴된 카드의 비용만큼 해당 카드의 공격을 한차례 동안 증가시킨다.

등장 자체가 유불리란 개념에 제시하는 모순 – 이름 모를 옛 서기관 -

[기사왕의 검 – 맥레인 베나즈]

존재 카드

★18

▲21 ■9

이 카드가 판 위에 등장 시 상대 판 위 존재 카드 하나를 파괴한다. 이때 파괴되는 존재 카드의 효과는 모두 무시한다.

이 카드는 위력, 지속 카드로 인한 공격, 방어 감소 효과를 받지 않는다.

그의 검은 확실한 죽음, 동시에 확실한 영광 – 어느 기사 -

어때, 엄청나지?

이 카드들은 아이베리아 내에서도 가장 굵직한 전설들이 담겨있어.

비록 지금은 전부 고정 카드겠지만, 애초에 상향이라는 개념 자체가 필요 없을 만큼 능력적으로 완성된 카드인 거지.

물론 비싼 비용 때문에 실제로 놀이에서 운용하는 데에는 까다롭긴 하겠지만…,

반대로 이런 카드들은 수집에 알맞은 것들이라 할 수 있겠네.

* * *

놈이 일러준 방향을 따라 도착한 아이베리아의 남동쪽 항구.

그곳에 발을 들이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나란히 줄지어 날아가는 흰 새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에 시선이 빼앗긴 것도 잠시, 나는 다시 설명하기에 집중해야만 했다.

어, 그러니까…,

마찬가지로 이 땅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되면 그에 따른 새로운 카드가 추가되기도 하거든.

그럼 그게 궁금할 수도 있겠다.

새롭게 추가된 카드들은 대부분 어느 정도 수준일지 말이야.

그런데 말하기가 좀 그런 것이, 새롭게 추가된 카드가 다른 전설에 해당하는 것과 성능이 비슷할 리가 없잖아?

존재 카드로 예를 들자면 새롭게 추가된 카드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이 아홉 개의 별을 갖고 있었어.

사실 그것도 엄청나게 높은 등급인 거야.

능히 전설과 견줄 정도로 상향될, 기대주 카드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수치란 거지.

잠깐, 아무래도 카드의 유통업자를 찾은 것 같아.

이렇게나 벌써 찾다니 운이 좋은걸?

아니지,

애초에 새로운 카드를 얻는 게 주된 임무가 아니었던 건가?

당신에게 설명해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야, 그래서 카드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나를 구슬린 거고 말이야…,

이런 엿같이 휘어지는 마법사놈들 같으니…,

어쨌든 카드는 다 구했어.

한 번 볼까?

내 설명대로 대부분은 다…,

…,

이게 말이 되는 거야?

아니…, 이게 뭔데?

후드를 뒤집어써서 얼굴도 제대로 안 보이는 게…,

그것보다 표면에 무지개가 발라져 있잖아…,

나도…, 이런 건 처음 본다고!

오히려 당신에게 설명을 듣고 싶을 정도야, 뭔가…, 아는 게 있어? 이것에 대해서 말이야…!

아, 이름 모를 당신의 목소리를 나는 듣지 못하지 참…!

[마지막 핏줄 – 디안 베나즈]

존재 카드

★15

▲17 ■10

이 카드가 판 위에 등장 시 두 차례 동안 상대 판 위 존재 카드의 공격을 직접 조종할 수 있다.

상대의 존재 카드 효과로 인해 이 카드가 파괴될 경우 단 한 번만 그 효과를 반사한다.

대단한 비전의 심혈조차, 그 앞에선 한낱 객기에 불과했어. - 목격자, 게헨나에서. -

* * *

아이베리아 전역에,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새가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간다.

개중에는 방향을 까먹어 바다를 건너가는 것들도 있었다.

그렇게 한 새가 낯선 곳에 도착하자,

그 새를 구경하고 있던 진한 금발의 여인은 신기함에 주위를 기웃거리며 생글생글 웃는다.

그런 그녀의 뒤로는,

“케니!”

제법 묵직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뭐 하고 있어?”

“앗!”

남자의 외침에 케니라 불린 여인은 짧은 아쉬움을 내뱉으며, 놀라 날아간 흰 새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안드레, 당신 부름에 새가 놀라 도망갔잖아.”

“그래? 어떤 새였는데?”

안드레의 물음에 케니는,

조금은 그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몰라, 처음 보는 새였어. 그런데 왜인지 낯설지가 않았어.”

* * *

성숙해졌지만 그만큼 앳된 부분이 도드라져 보이는 숙녀가 막 두꺼운 책을 옆구리에 낀 채 거리를 나섰다.

어느 기업이 주관하는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였는데,

그런 그녀 뒤로 중년의 여인이 바삐 달려 나와 부른다.

“비질라! 도시락을 챙겨야지!”

“안나 아주머니, 밖에서 사 먹을게요!”

“또 구름 과자 먹으려고 그러지?!”

“아녜요!”

한바탕 씨름을 하던 숙녀, 비질라는 그렇게 거리를 가로질러 가다가 문득.

하늘 위를 춤추듯 날아가는 흰 새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것은 딱 보아도 아주 먼 곳에서 날아온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새 참 이쁘다.

하고 바라보는 비질라의 눈은 그보다 더 아름다운 별이 녹아 있었다.

* * *

“…, 포키스…!”

“쉿!”

“이러다 놓칠 거예요!”

주근깨가 내려앉은 광대를 씰룩이며, 잔뜩 긴장된 표정으로 묻는 그에게.

한쪽에 안대를 끼고 있는 남자가 묵묵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녀석이 반응하지 않아.”

“그럴 리가, 혹시 맹금한테 당하기라도…?”

“골다스 종은 똑똑해서 맹금에게 쉽게 사냥당할 종이 아니야.”

“그럼…?”

찌르르-

찌르르-

그들의 머리 위로 곧,

새들의 지저귐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그들 지척에 있던 사냥감은 불길함을 느끼고 그새 도망을 쳐버렸다.

이에 허무한 표정을 지은 청년은,

“허, 포키스. 저것 보세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넋두리를 했다.

보라색 꽁지깃을 가진 새는,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흰 새와 한바탕 어울려 날고 있었다.

이윽고 흰 새는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고 있던 애꾸눈, 포키스는.

“촙, 저기 봐. 아직 멀리 가지 못했어.”

진지한 표정으로 촙과 함께 다시 사냥을 이어갔다.

* * *

새하얀 머리카락을 휘날리던 여인 앞으로,

그 머리 색을 닮은 하얀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조용히,

포갠 두 손으로 새를 안은 그녀는 녹아 사라지는 눈의 결정처럼,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이내 하늘을 올려다보며.

작게 혼잣말했다.

“나를 바라보던 별빛들 가운데 하나가 눈이 멀었지만, 동시에 누군가는 별빛 속에서 해답 하나를 발견했네.”

-2부 에필로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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