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소식
“시종장.”
수십에 달하는 새들의 날갯소리, 그 소리에 음표인 양 뿜어져 나오는 깃털들.
“시종장!”
그 가운데 파묻혀 한참 고군분투하던 바돈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혼비백산한 표정으로 반응했다.
“잠깐…!”
꽁지깃으로 새들을 분류하는 작업을 바삐 마친 그는 털털거리며 새장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 몰골은,
깃털이 조금만 더 묻었으면 그대로 날아갈 것 같은 모습이었다.
“기지어, 아! 실수했군. 재상께서 여긴 무슨 일입니까?”
어색한 말로 존대를 하는 바돈에게, 기지어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둘만 있을 때는 그런 거 하지 말자고 했잖나.”
“그러나 방금 저를 시종장이라 부른 건 재상님이었습니다.”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하는 바돈에게, 기지어는 한숨을 턱 내쉬며 대답했다.
“그거야 시종장으로 불러주는 걸 자네가 그렇게나 좋아하니까 그렇지.”
이에 바돈은 씩 웃으며 더욱 뻔뻔하게 말했다.
“규율에 가장 엄격해야 할 베나즈의 시종장이 그러면 쓰겠습니까.”
“그래봤자 난 관료 나부랭이네, 그러나 바돈 자네는 디안 공께서 가족처럼 생각하지 않으시는가.”
디안 공, 그리고 가족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무섭게.
깃털 묻은 얼굴로 감격한 표정을 짓는 바돈.
“그런 표정 짓지 말게, 기념일을 알아챈 칠면조 같잖아.”
“재상, 어찌 그런 비유를…!”
기지어는 짝다리를 짚은 채 손사래 쳤다.
“그건 그렇고, 시종장. 아직도 전서구가 그렇게나 많이 오는 거요? 공표식이 지난 지 사흘이나 지났는데.”
바돈은 새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베나즈의 깃발이 일어섰다는 걸 아이베리아 전역이 알아버렸으니 아마 며칠간은 전서구들과 씨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몸에 묻은 깃털을 털던 바돈은 이어 기지어에게 되물었다.
“요즘 리케니엔에 마차가 끊이질 않던데, 기업과 조합 등지에서 답장을 보내온 겁니까?”
그럼 방금 바돈이 지었던 표정을 이번엔 기지어가 똑같이 지으며 대답한다.
“끝이 없네, 아직 베나즈라는 이름엔 의심이 가득하지만 0이라는 힘의 파급력만큼은 확실한 것이니 막 달라붙는 거야. 그런데 그중에서도 아주 노골적인 적대를 드러내는 치들도 있더군.”
“그건 이쪽도 마찬가집니다, 어제는 웬 맹금 하나가 날아들어서 새장 안에 있던 전서구들을 다 찢어 죽여 놓지 않나.., 쥐 사체를 물고 온 새들도 간간이 있었거든요.”
기지어와 바돈은 서로가 가진 심정들이 비슷하다는 걸 알았는지, 꽤 오랫동안 말없이 마주 보았다.
“슬슬 서두르게, 공께서 다음 발을 내디딜 수 있도록 우리가 이 물살 가운데 고른 물줄기를 얼른 골라내야 하지 않겠는가.”
“맞습니다, 재상. 오늘 저녁에 학술원으로 가겠습니다.”
“알겠네…, 참. 그것 하나만 물어보지. 지금까지 답신을 보내온 것 가운데, 아이베리아 내 굵직한 가문의 이름이 하나라도 있었나?”
기지어의 물음에 바돈은,
조금은 긴장한 얼굴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어디에 따로 기록해 정리하지 않아도 바로 뇌리에 박힐 만큼 저명한 가문들이 몇 있습니다.”
그 대답에 기지어는 복잡한 심경 속 조금의 위안을 얻었는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참 잘 됐어…, 아니, 잘 됐다고 해야 하는 게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 * *
“라스 발기지르가 무리하게 벌였던 이번 전투로 발리르의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명분이 생겼습니다. 애초에 발리르의 민심이 그를 떠난 상태이기는 했지만, 이번 일로 확실하게 매듭을 지을 수 있을 겁니다.”
여러 문서를 펼친 채 보고에 열중하던 조이는 바로 다음 문서로 시선을 옮겼다.
“하여 발리르 내에 남아있던 토지 분쟁에 대해선 이제 되짚을 거리가 없고, 다음은 전쟁의 배상금입니다. 현재까지 추산한 배상금은 금화 109만 개이나 이 부분은 종교 기업인 빌렌과 추가적인 협상이 이뤄질 예정입니다.”
폴란은 그런 조이 옆에 초롱초롱히 눈을 뜨고 경청하고 있었다.
“발리르의 영주 베르융과 휘하 기사들의 공을 추후라도 직접 치하하신다면, 그들의 사기가 구름마저 꿰뚫을 만큼 치솟을 겁니다.”
문서 내용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깔끔하게 보고한 조이는 이제 문서에서 눈을 뗀 채 나를 바라보았다.
“조이 경께서 공적에 따른 행상을 정해주시면, 제가 때에 맞춰 직접 발리르로 찾아가겠습니다.”
이에 나직이 그에게 말하자 그는 두 눈으로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직후 조이 옆에 앉아 있던 폴란 쪽을 바라보자, 멀뚱멀뚱 있던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어깨에 잔뜩 힘을 준 채 고개를 숙였다.
“공, 하실 말씀이라도…?”
“폴란, 조이 경과 함께 켄타나로 가서 전쟁 배상금에 대한 협상을 진행하도록 하십시오. 그 이후 티히트라와 관련해 따로 논의하도록 합시다.”
내 지시에 폴란은 금방이라도 활활 불타오를 것 같은 눈빛을 내비쳤다.
“기꺼이 명을 수행하겠습니다!”
그렇게 흥분한 폴란이 집무실 밖으로 나서기 무섭게 꽉 붙잡고 있던 긴장의 끈을 조금 놓을 수 있었다.
조이 역시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자세를 살짝 풀고는,
내 눈치를 진득하게 살피다가 은근슬쩍 고개를 내밀어 속삭였다.
“힘드십니까.”
“힘들고, 어색하고…, 또 어색합니다.”
“공표식이 끝난 직후부터 여러 가지 일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중에서 최고 힘든 것을 꼽으라면…, 조직과 그 조직 내 직무 사이의 위계일 겁니다.”
“그래도 잘하고 계신 겁니다, 공표식이 끝난 그 날 밤새도록 저와 베르융이 열심히 괴롭힌 보람이 있군요.”
“늘 그래왔던 것처럼 해서는 안 되는 겁니까?”
조이는 씁쓸한 눈빛을 보내며 대답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위계로 단단히 두들겨 만든 골격을 차곡차곡 쌓아가야 하는 때이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잠시 흐르는 침묵,
이내 조이는 가족과도 같은 애틋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후회…, 하십니까.”
그럼 나는 대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습니다.”
조이는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입니다.”
안도와 뭔지 모를 아쉬움이 느껴지는 목소리와 함께.
“곧 재상과 시종장의 합의가 끝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베나즈 가문의 적과 아군이 가려지게 되겠지요. 각오는 되어 있으십니까.”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조이 경께 투정 부리지도 않았을 겁니다.”
조이는 작게 웃었다.
“하하,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 잠깐의 침묵 끝에 조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주 정신없는 사흘이었습니다. 오늘 저녁만큼은 여유롭게 보내시기를.”
“잘 가십시오, 조이.”
그는 콧수염을 실룩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직후 뒤돌아 집무실 밖으로 나설 때까지,
솔직히 내심 기대했었다.
그 옛날처럼 은근슬쩍 내 이름을 부르며 반말할 줄 알았거든.
들고 있던 깃펜을 내려놓고, 등받이에 몸을 쏟았다.
그러다가 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며 서성였다.
그런 창 속엔 막 저택 밖을 빠져나가는 조이가 보였다.
이런 내 행동을 다 알고 있었을까, 그는 저택 밖을 나서다가도 슬쩍 뒤돌아 창 너머 서성이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곤 쓰고 있던 모자를 슬쩍 벗어 다시 한번 내게 인사를 건네는 그에게,
작게 손 흔들어 답했다.
상황이라는 게,
현실이라는 게.
참 차갑다.
직전까지, 이 리케니엔에 돌아와 공표식을 치르기 직전까지.
닿는 모든 것이 불타진 않을까 싶었다.
그럴 만큼 내 감정은 분명 격해져 있었다.
그 옛날 별빛을 통해 보았던, 소중했던 사람의 처절한 과거를 보며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느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겠지.
그러나 지금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내가 발휘한 차분도, 침착도 아니었다.
그냥 놓인 상황과 그 인식한 상황 속에서 헤아린 현실 아래서 나는 철저하게 식어버렸다.
덤덤히 뒤돌아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책상 위에는, 공표식이 끝난 직후 써 내려갔던.
아이베리아 전역에 알리는 베나즈 가문의 포고문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바돈과 기지어가 달라붙어, 내가 쓴 포고문을 수백 장으로 필사해 새와 함께 날려 보냈었지.
묵묵히 포고문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자연스레 그 내용이 내 눈에 쏟아져 들어왔다.
들어라,
나는 베나즈의 이름으로 이 땅에 다시 돌아왔다.
보아라,
이 베나즈의 이름으로 건설시킬 진실을.
그러니,
시인하라.
나 디안 베나즈의 물음에.
그 내용을 모두 살피고 나니,
가슴속 깊숙한 곳에서 뜨겁고 끈적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안심했다.
언제든지 열렬해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어서.
잊지 않는다.
이미 내 마음에 새겨진 작자들아.
‘레버드’
‘잘란’
‘엠프리오’
‘가헨’
‘프리메’
* * *
야심한 저녁.
바돈이 수많은 서신을 옆구리에 낀 채 학술원을 찾았다.
이에 반기는 기지어는 수많은 두루마리 사이에 이미 반쯤 묻힌 상태였다.
“시종장, 마중 나가지 못해 유감이군.”
“뿌리가 어찌 땅 밖으로 고개를 내밀겠습니까, 조금만 더 있으면 밑동이 자라날 것 같은데.”
“칠면조에 대한 복수인가?”
기지어의 맥빠진 물음에 바돈은 대답 없이 큼지막한 미소 하나를 그렸다.
“그럼 서로 정돈한 것을 교차로 검증하지.”
이내 둘은 유리구슬 안에 담긴 햇살의 춤사위 아래 마주 앉았다.
“재상, 혹 눈여겨본 기업이나 조합이 있으십니까?”
“내용은커녕 두루마리 겉에 박힌 상징조차 못 봤소, 그저 쏟아져 들어오는 두루마리를 조엘과 둘이서 수습한 게 다지.”
“하긴, 전서구의 서신과 비교하면 두루마리는 그 질량만 해도 무시무시하겠군요.”
“기업과 조합이 이래서 문제야, 나는 간혹 아이베리아의 그 전통적인 투박함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소. 특히 이들의 이 영업적 행태들 말이야!”
기지어는 반쯤 파묻힌 양팔을 꺼내 들며 허공을 향해 항소하듯 소리쳤다.
그리곤 보란 듯이,
화려한 세공물이 붙어있는 두루마리 하나를 펼쳐 내밀었다.
[아케리드 보르스나]
아이베리아에 새로운 부흥점을 제시하신 귀하의 발자취를, 저희 아케리드 보르스나가 응원합니다.
태양 앞에 만세!
저희 아케리드 보르스나는 용의 시대 제3기부터 쭉 이어져 온 기업으로서 조명 산업의 살아있는 증인이자 기술자입니다.
그 어떤 기업과 조합도 햇살에 한해선 저희 아케리드 보르스나보다 경제적이지 못할 것입니다.
태양 앞에 만세!
긍정적인 답변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귀하의 치하가 깃든 모든 도시가 밤에도 밝음으로 물들 수 있도록 염원하고 또 염원하겠습니다.
-아케리드 보르스나, 이사 켈롱-
화려하기 그지없는 두루마리와 그에 견줄 만큼 화려한 잉크로 써 갈겨진 내용 앞에,
바돈은 그저 두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정말 엄청나네…,”
이어 중얼거리는 바돈에게 기지어는 손뼉을 치며 맞장구쳤다.
“그렇지? 보는 것만으로도 내 똥꼬가 허는 느낌이야.”
“재상…, 말씀에 주의를…,”
“엄연히 학술원은 내 자유를 보장하는 공간이네, 그러니까 자네도 이 순간만큼은 늘 그랬던 것처럼 하라고. 눈앞의 직무가 뻑뻑하게 그지없는데, 다른 것마저도 뻑뻑하면 두 발 걷는 자가 어떻게 살라고?”
툭툭 내뱉는 기지어의 꼬장에 바돈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곧바로,
기지어는 바돈 쪽에 있던 서신 하나를 쓱 뺏어 들었다.
디안 베나즈여,
우리는 당신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벨샤드의 기사, 렝케지스-
작은 종이 속 간결하게 정렬된 글씨.
그리고 이름 옆에 묵직하게 찍힌 인장.
그것을 본 기지어는 두 눈을 반짝이며 감탄을 내뱉었다.
이어 조엘이 만든 지도를 훑던 기지어는,
“벨샤드라…, 빌비온 동남쪽에 있군. 필체부터가 완전 내 취향이야.”
만족의 만족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바돈은 기지어가 집어 든 서신을 얼른 빼앗아 들었다.
“아무래도 서신은 내가 맡는 게 좋겠군.”
“어허, 시종장!”
“어허, 재상! 객관을 쏟아야지 객관을!”
기지어는 놀란 표정을 짓다가도,
자신의 요청으로 느슨해진 바돈을 바라보며 곧 호탕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