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소식 (2)
“형님, 이렇게 태평하게 계셔도 되는 겁니까?”
두 눈을 아슬아슬하게 가리는 더벅머리.
그 아래 짙게 내려앉은 주근깨.
아직 소년의 태를 벗지 못한 사내가 잔뜩 조바심을 부리며 서성였다.
그 사내의 허리춤엔 길이가 꽤 짧은 커틀러스 한 자루가 채워져 있었다.
“형님!”
그런 그가 발을 동동 구르며 다시 한번 크게 불러보지만.
바로 옆에서 태평하게 누워 있던 장신의 사내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말의 갈기처럼 거칠게 뻗은 갈색 머리.
감은 눈 밑이 다 가려질 정도로 긴 갈색의 속눈썹.
그 아래 조바심을 내놓는 사내와 같이 짙은 주근깨.
딱 보아도 수수하고 순수한 인상인 그는 그렇게 한참을 자는 듯 누워 있다가.
“형니임!!”
세 번째 부름 만에야 연한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우야, 시끄럽다.”
이윽고 입 밖으로 튀어나온 사근사근하고 낮은 목소리에, 더벅머리 사내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천천히 떨어지는 낙엽 흉내라도 좀 내보고 그래라, 늘 봄볕 아래 아우성치는 잡초처럼 지내다간 늙어서 크게 고생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태평한 소리에 더벅머리 남자는 다시 발을 구르며 따져 물었다.
“형님이야말로 봄볕 아래 아우성치는 잡초 흉내라도 좀 내보십시오! 늘 떨어지는 낙엽처럼 지내다간 얼마 못 가 말라비틀어져 산산이 부서져 내릴 겁니다!”
이에 누워 있던 사내가 한쪽 눈을 슬며시 뜨더니, 그 안에 드러난 적색 눈동자에 슬픔을 담아 되묻는다.
“이 형님이 그렇게도 싫으냐, 아우의 저주에 몸서리가 다 처지는구나.”
“몸서리라기엔 지금도 미동조차 하지 않고 누워계시잖습니까!”
“예리한걸.”
능청스럽게 대꾸하며 기껏 뜬 한쪽 눈을 감은 남자는 다시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그의 평온과는 반대로, 옆에 서 있던 더벅머리 사내는 소리 없이 가슴을 치며 답답해 했다.
“설마 아직도 소식을 모르고 계시는 건 아니겠지요?!”
이내 참지 못해 다시 묻자, 누워있던 사내는 조용히 입만 열어 대꾸했다.
“안다, 아우야.”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평온을 잘도 부리시는 겁니까?!”
“아우야.”
갑자기 날카로워진 남자의 목소리, 사내는 다시 덜컥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무엇이 달라졌느냐? 그래, 여덟 자루였던 검이 일곱 자루가 되었을 테니 그 점은 확실히 달라졌구나. 그런데 그 외에는? 뭐가 있지?”
남자의 물음에 사내는 더벅머리를 긁적이며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달라진 것은 없는데, 네 몸속의 소요가 다름을 강요하는구나.”
이윽고 남자의 말에 더벅머리 사내는 공손히 두 손을 모은 채,
침착히 말을 이었다.
“형님! 제가 아직 나이가 많지는 않지만…, 엄연히 다름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여덟 검이 일곱 검이 됨으로서 그 빈 공백으로 인한 소요가 틀림없이 발생할 거라는 사실을요. 하여 제 몸속의 소요가 아니라 확실히 나중에 일어날 소요에 대해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 말에 느긋하게 누워 있던 사내는,
두 눈을 뜬 채 사내를 지그시 바라보며 기특해 했다.
“들어보니 네 말이 맞구나, 아우야.”
슥,
하고 깃털처럼 가벼이 일어나 앉은 남자는 이제 사내를 마주했다.
이에 더벅머리 사내는 기다렸다는 듯 남자와 마주 앉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우리에겐 다름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집안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덟 검 간의 세력과 그 세력으로 인한 득실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번 일로 인하여 손해를 보지 않을까 우려하더군요.”
남자는 얇고 가는 손으로 사내의 더벅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슬프다, 집 안 사람들 가운데 그런 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그러나 가족이기 때문에 이해하려 노력해야 하는 것도 맞아. 아우 너는 그런 의미로 봤을 때 참 다정한 사람이다.”
쓰다듬길 멈춘 남자는 더벅머리 사내 허리춤에 달린 커틀러스를 바라보았다.
“본질을 잊지 말거라,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의 이름 아래 지켜나가고 이어나가야 한다. 이 못난 형은 그 과정에서 득실을 따지는 자들이 생겨나도록 방치했지만, 너는 이 못난 형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주의해야 해.”
“잘 알겠습니다, 형님…, 그럼 이번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그 말에 남자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불행인지 다행인지. 부러진 검은 마침 부러질 만한 검이었단다. 망나니의 손에 들린 방향 잃은 검이었지. 따라서 그 부재로 인한 득실의 따짐 역시 생각보다 크지 않을 거다.”
“하지만 형님은 그자가 가진 비전을 보고 감탄을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분명 대단한 검술이었지, 세 점으로 분화한 찌르기를 극점으로 찔러내는 그것은 확실히 기만이라기보단 기술의 극치였다. 허나…, 언제나 그렇듯 비전이라는 개인의 써 내려감 속엔 끝이 없다. 저 우주처럼 말이야.”
더벅머리 사내는 이제 초롱초롱한 눈으로 기대감을 쏟아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궁금해집니다, 그 검을 부러트린 자의 실력은 어떤 것인지.”
“그러냐, 그럼 네가 얼른 더 성장해야겠구나. 그리고 자연히 고개를 숙여 낙엽처럼 지내는 모습을 얼른 보고 싶군.”
“전 죽어도 낙엽처럼은 안 될 겁니다.”
“하하하!”
사내의 다짐에 남자는 이번엔 더벅머리를 풀어헤치듯 격하게 쓰다듬으며 웃었다.
아우 데프릭 나르드.
그리고 그의 형이자,
아이베리아의 여덟 검 중 ‘백로’라는 이명으로 불리는 사내.
네드릭 나르드의 소소한 담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 * *
“공표식이 끝난 직후 제가 전해드린 책을 모두 다 읽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지어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기업과 조합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설명은 건너뛰겠습니다…,”
이에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기지어는,
금세 아차 하는 표정으로 내게 질문을 던졌다.
“…, 그래도 가장 중요한 질문을 지나칠 순 없겠지요. 기업은 각각 가업형과 사업형으로 그 특성이 두 가지로 나뉩니다. 그 둘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가업형은 가문에 종속되어 대를 이어 경영을 유지하는 기업을 뜻하는 것이고, 사업형은 지분을 나눠 가진 사원들의 합의로 경영 유지를 하는 기업을 뜻합니다.”
“그 두 특성이 가진 대표적인 특이점은요?”
“기지어, 당신이 준 책을 읽고 느낀 점들로 빗대자면 가업형은 대부분 오만하고 사업형은 지독한 숫자 중독자들이라는 겁니다.”
내 대답에,
피곤에 절여져 있던 기지어의 두 눈에 생기가 바짝 돌기 시작했다.
“굉장히 정확한 해석입니다, 책을 거의 갈아 마신 수준으로 독해하셨군요.”
그 반응에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바돈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직후,
그는 가져온 두루마리를 펼쳐 그 내용 중 한 줄을 눈에 담은 채 담담히 말을 이었다.
“공표식의 파급력은 실로 절륜했습니다, 총 13개의 기업과 9개의 조합이 우리에게 긍정적인 답신을 보내왔거든요.”
“그 방향으로만 절륜하진 않았을 텐데요.”
찌르는 듯한 내 물음에 기지어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즉답했다.
“맞습니다, 총 98개의 크고 작은 기업과 31개의 조합이 우리에게 적대적인 서신을 보냈습니다. 아마도 본인들이 소속되어 있는 깃발들의 의견에 동조한 것들이 대부분일 겁니다.”
이어 기지어는,
더욱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보고를 이어갔다.
“단편적으로 보면 참 버거운 숫자처럼 느껴지시겠지만, 저들끼리도 복잡한 관계를 아우르고 있기에 실상은 파편화된 각자의 적의에 불과합니다.”
“그렇군요.”
그의 그 자신만만함이 좋았다.
그 안에 내포된 정력적인 모습은 보는 나조차 자신감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럼, 직접 확인해 보시지요. 제가 그 가운데서도 추리고 추린 기업과 조합들입니다.”
곧이어 기지어는 겉에 잉크 때가 잔뜩 묻은 두루마리를 내게 건네주었다.
어제 밤새도록,
피로를 삼키며 완성 시켰을 그 두루마리를 나는 무겁게 받아들고 그 안의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두 눈에 담았다.
[레프리길]
레프리길은 베나즈 가문의 새로운 행보에 기꺼이 친애를 보냅니다.
저희는 아이베리아의 대륙법을 기반으로 삼은 법제 기업입니다.
오롯이 이 땅 위에 차곡차곡 채워진 법령만으로 공정한 판결을 제시하며, 이러한 제시에 차별과 곡해의 여지가 남지 않도록 3중 망의 감시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하나,
사건의 수사권은 해당 지역 깃발의 정규군이 가지게 됩니다.
둘,
재판의 진행 승인은 마찬가지로 해당 지역 행정체계에 의해서만 결정됩니다.
셋,
재판의 진행은 모두 에란드 숲의 살아있는 석상이라 불리는 고블린들이 진행합니다.
마치 난쟁이의 기계장치와 같이 냉정의 중립을 고수하는 그들은 저희 레프리길이 귀하께 제시하는 ‘공정’ 그 자체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공정이란 상품을 취급해 파는 기업이지만, 그렇기에 그 공정이란 상품이 거짓이라는 불량으로 남지 않도록 저희는 노력할 것입니다.
이것은 협업 제안서이기도 합니다.
저희만의 노력으로 온전한 공정은 생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서신에 긍정적인 답변을 하리라 결정하셨다면, 그 전에 귀하의 기반 아래 협업의 의지가 있는 양심이 있는지 필시 확인해주시길 바랍니다.
-레프리길의 제3 재판장, 앙길쉬-
쉽게 말하면 재판의 대행을 맡기는 것인가.
정확히 말하자면, 제3 종족의 철저한 객관을 빌리는 느낌이네.
기지어가 추천한 이유는 아마도 이것 때문이겠지.
성격상 빈틈이 생기는 여지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니까.
이어 다음으로 시선을 옮기면,
[꼬인 손가락]
안녕하십니까.
아이베리아 ‘금속회’의 정식 가입된 기술 조합, 꼬인 손가락입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저희는 품질 보증 면에서 유일한 ‘별 다섯 개’ 등급을 받았습니다.
귀하의 영지 내에 우리 조합이 입점한다면 톱니바퀴의, 톱니바퀴에 의한, 톱니바퀴로 인한 작고 차가운 사회를 기꺼이 구축하겠습니다.
무려 별이 다섯 개.
별이 다섯 개입니다.
인정합니다.
금속회 내 가장 단가가 비싸기에 이것이 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요.
하지만 인정하시게 될 겁니다.
왜 그런 가격이 붙어졌는지 말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별이 다섯 갭니다.
별이 다섯 개.
…,아 참.
베나즈 깃발의 부흥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 조합 대표, 울락 -
읽는 것만으로도 그 자부심이 느껴지는 내용이었다.
그나저나 단가가 높다니.
특유의 투박함이 조금은 부담스럽게 느껴지는걸.
빌비온이 통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야, 그마저도 포개어진 손 조합의 지원 덕분에 겨우 이뤄졌지.
슬쩍,
두루마리 위로 보이는 기지어의 얼굴을 바라보니.
그는 이런 내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태연히 바돈과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깃발 쪽의 보고조차 아직 듣지 못했구나.
그 부분은 곧 바돈에게서 들을 수 있을 테니, 당장 눈앞의 문제부터 침착하게 받아들이자.
“기지어.”
“예, 부르셨습니까.”
“잠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하나 있는 것 같은데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기지어는 역시나 망설임 없이 즉답했다.
“맞습니다, 사실 추려낸 그 기업들과 조합들은 빌비온에겐 하나같이 다 무거운 것뿐입니다.”
말을 마친 직후 다시 한번,
조용히 바돈과 눈빛을 주고받은 기지어는 이제 갑자기.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경직된 모습으로 내게 말했다.
“사실…, 그곳에 적혀 있지 않은 기업이 하나 더 있습니다. 솔직히 지금도 뭘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감도 잡히질 않습니다. 그저 당황스럽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 당당했던 기지어가 조금은 머쓱한 얼굴로 말까지 더듬는다,
도대체 뭣 때문에?
기지어는 절뚝거리며 다가와 책상 위에 작은 종이 하나를 올려 내 쪽으로 조심스레 밀어 건넸다.
“소위 대박이라고 하는 일이 저희에게 찾아왔습니다. 난제 앞에 고심하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그 풀이가 떨어진 수준이라고나 할까…,”
도대체 뭐기에,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이내 그가 내민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제리워드 - 중앙은행 수표]
금화 23,900,000개.
발행인 : 중앙은행
지급인 : 깁슨 제리드
수령인 : 디안 베나즈
- 귀하의 부흥을 염원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