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소식 (3)
“아실지 모르겠지만, 맞습니다. 과거 철강왕이라는 이름으로 군림했었던 그 제리드 가문 말입니다.”
알고 있다.
“지금은 제리워드라는 이름으로, 그것도 막대한 자본을 굴리는 은행으로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기업 가문입니다.”
처음은 맥레인이 알려주었던 책을 통해서 그 이름을 접했었지.
“비록 철강 산업을 하던 당시에 비할 바는 못되겠지만 확신하건대.., 아직도 기업 가운데 그 규모와 명성은 한 손가락 안에 들 겁니다.”
인간 사회에서 최고로 칭송받는 금속이 바로 제리드 강철이라고.
“기사의 땅 아이베리아에선 단 한 번도 발을 들인 적 없던 그 제리드 가문이…, 공의 제안에 화답한 겁니다.”
그리고 그 이름은,
테리아의 과거 속에도 있었다.
“솔직히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판단하기엔 너무 그릇이 큰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이 부분은 공께서 직접 판단하셔야…,”
그녀의 그 감쪽같은 오른팔도,
다름 아닌 제리드 강철로 만들어졌지.
“영주님…?”
뭘까,
이 확신할 수 없는 이질감은.
우연이라기엔 터무니없고,
작위적이라기엔 확신이 없다.
“영주님.”
마찬가지로 빈센 다르마야와 만났을 때도 그래.
우연과 작위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듯한 그 느낌.
그 빈센 다르마야가 내게 이런 말을 했었지.
‘자신의 운명이 작위적으로 느껴진다면, 그건 자신의 운명이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정확히는 나와 빈센의 만남을 주선했을 그 의문의 점성술사가 한 말이지만.
도무지 해쳐도 해쳐지지 않는 뿌연 아리송함에,
덜컥 심장이 두근거렸다.
“영주님!”
그러다 기지어의 부름에 벌컥,
정신을 차린 나는 겨우 수표에서 시선을 뗄 수 있었다.
기지어는,
걱정하는 표정으로 날 살피더니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눈앞의 다급함 때문에 영주님께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괜찮습니다…, 기지어.”
“단지 충분한 고심 끝에 결정을 내리셔도 늦지 않으니, 시간을 좀 들이시라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의 조언에 탁했던 내 정신이 말끔히 돌아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은 눈앞의 국면에 집중하자.
모호한 것에 집중을 쏟기 시작하면 선명한 것을 잃게 될 테니까.
아직 나는, 선명한 것들을 손에 넣어야 하는 입장이니까.
다시 수표를 내려다본 나는 다른 의미로 아찔함을 느껴야만 했다.
천문학적인 액수다.
금화 23,900,000개.
이보다 훨씬 적은 액수로 쟁취했던 변화들을 생각한다면, 저 액수로 이뤄낼 것들의 파급력은 얼마나 거대할지.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그렇기에,
“주객전도입니다.”
손에 든 수표를 던지듯 책상 위에 내려놓은 나는 짧은 감상을 남겼다.
그 말에 기지어와 바돈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독을 스스로 마시는 것과 같은 일이지요, 그 사실을 여기 적힌 깁슨이란 자가 제일 잘 알 겁니다.”
기지어는,
마치 뭔가를 믿고 있었다는 듯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수표의 처리를 위해서라도 직접 만나봐야겠군요.”
이어진 내 말에 바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따로 떠나기 위한 일정을…,”
이에 나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표를 적어낸 당사자에게 직접 편지를 보낼 것입니다, 이 수표와 관련한 일을 처리하려면 본인이 직접 찾아와야 할 것이라고.”
그 말에 바돈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런 바돈에 이어 기지어가 냉정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제리드 가문이 이곳에 관심을 기울인 이상, 공께서 취하시는 행동에 따라 그들이 보여주는 개입의 방향 역시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예컨대, 한 번의 행동으로 최대의 적을 만들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기지어.”
조금은 실망했다.
그래서 그 실망감을 담은 눈으로 기지어의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그런 내 눈빛에 기지어의 얼굴은 대번에 창백해졌지만, 그 안엔 아직 굵직한 심지가 박혀있었다.
“그건 저들 역시 마찬가집니다, 그리고 장담하는데. 그들의 후회가 더 클 겁니다.”
이윽고 기지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참이나 들지 못했다.
“깁슨이란 자가 내 부름에 응한다면, 그는 제일 먼저 베나즈 가문에 이 수표를 내밀어 떠보고자 했던 그 무례에 대해 사과해야 할 겁니다. 하지 않으면, 제리드는 최대의 적을 만들게 될 테니까요. 바돈, 이 회의가 끝나는 즉시 내 뜻을 담은 편지를 작성해 보내십시오.”
“네, 영주님.”
바돈은 고개를 들지 못하는 기지어의 눈치를 쭉 살피다가 얼른 내 명령을 받들었다.
“잠시 쉬었다가 하지요, 바돈. 깃발들과 관련된 보고는 그 직후에 듣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소신은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바돈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어를 데리고 밖으로 나섰다.
* * *
“재상, 이 사람아! 어찌 영주님 앞에서 그런 무례를…!”
접견실 밖을 나서기 무섭게 바돈이 제법 무례를 부려가며 기지어를 닦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돈의 그 말에도 반응이 없던 기지어는,
뒤늦게 허리를 활짝 펼쳐.
“하… 하하!”
감춰왔던 황홀한 표정을 드러내며 호탕하게 웃었다.
“봤는가, 시종장! 저분이 바로 우리가 모시는 분일세!”
“자네 정말…!”
“제리드야, 한때 철강왕이란 이름으로 산업 꼭대기에 섰던 제리드라고! 뿐만이야? 그 말도 안 되는 수표를 보내왔어! 그런데 보았는가? 마치 그것을 쓰레기 버리듯 책상 위에 내던지신걸?!”
기지어는 바돈의 두 어깨를 부여잡고 괴팍하게 되물었다.
“봐! 내 말이 맞았지, 그렇지!?”
그의 말에 바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 말대로군…, 그 수표를 보자마자 영주님은 자네가 말한 것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셨어.”
그러다가 날 선 눈빛으로 기지어를 노려본 바돈은,
“그렇다고 영주님을 그렇게 떠볼 생각을 하다니, 자칫하면 자네에 대한 영주님의 신뢰가 무너질 수도 있었어. 특히나 이런 때라면 더더욱!”
진심으로 그에게 경고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대수냐는 듯, 기지어는 연신 호탕하게 웃으며 특유의 괴짜 같은 미소를 그렸다.
“나는 모르겠다네, 시종장!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지금까지는 없었던 어떤 ‘확실한 동기’가 영주님의 중심에 자리 잡았어! 그리고 그것을 통해 또 성장하셨지.”
짝짝.
두 손으로 자신의 뺨을 두들기던 그는 다시 바돈에게 묻는다.
“봐봐, 시종장. 새파랗게 젊어 한없이 정력적이나 동시에 새파랗게 질린 듯 차분한 감정을 품은 자가 이 아이베리아에 몇이나 되겠는가?”
“절대라는 건 없네, 아이베리아엔 더더욱.”
바돈의 답에 기지어는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시종장, 자네도 이쁜 소리만 골라 하는군!”
“기지어, 지금까지 잠잠하다가 갑자기 왜 이렇게 괴짜 기질을 드러내기 시작한 거야?!”
재상이란 호칭까지 빼가며 묻는 바돈에게 기지어는 말했다.
“떨리지 않는가? 디안 베나즈란 이상이 이 아이베리아에 있을 다른 이상들과 충돌하게 될 거라는 사실이! 그 이상의 날을 갈고닦는 것에 우리가 절실히 소모된다는 사실이!”
훌쩍,
본인의 할 말만 늘여놓은 기지어는 절뚝절뚝.
흥이 난 걸음으로 바돈을 지나쳐 아래층으로 향했다.
바돈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넋 나간 얼굴로 한참이나 쳐다봐야 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그는 기지어 몰래 고개를 숙여 피식 웃었다.
덕분에,
베나즈 가문에 대한 그 믿음의 확신이 바로 섰으니까.
* * *
“이상입니다.”
차분하게 보고를 마친 바돈이 제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그러나 그 차분함과는 달리 보고의 내용은 상당히 무거운 것들이었다.
이 땅에 베나즈의 적이 얼마나 많은지.
깨달은 시간이었으니까.
당장 선전포고할 기세를 담아낸 힐난, 그것이 주를 이루는 깃발들의 답신이 내 책상 위에 수십 개나 올라와 있다.
온갖 저주를 퍼부은 문장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매스꺼움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확실한 적대 의사를 보내온 깃발 가운데엔 전설이라 불리는,
아이베리아의 칠 기사 중 하나도 있었다.
아이베리아는 저주스러운 이름을 허락하지 않는다.
긴말이 필요한가.
조만간 마주칠 전장에서, 내 직접 그대의 마지막 핏방울까지 털어내 그 자취를 없애겠다.
- 베가르드 욘테 -
베가르드 욘테.
그 이름과 이름에 걸린 전설 말고는 아는 것이 전무한 미지의 적.
그러나 당장 눈앞에 보이는 장애물 가운데 가장 거대할 것이리라.
사실,
윤곽이라도 드러난 적들은 두렵지 않다.
진정으로 두려운 것은,
드러나지 않은 적.
공표식을 알리는 새가 끝내 닿지 못하였거나, 아니면 닿음에도 불구하고 침묵으로 일관했을 깃발.
그것이 지금 내게 있어 가장 두려운 것이다.
물론 끝없이 암담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 어떤 설명도 없는, 베나즈의 깃발이 일어섰음을 알리는 공표에 긍정으로 답한 깃발도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몇몇은,
오래전 리케니엔에서 쭉 살아왔을 바돈조차 놀라게 만드는, 그런 깃발들이었다.
그 중 첫 번째는,
‘오렌’
리케니엔의 북동쪽, 동결된 계절의 경계선에 우뚝 세워진 성의 주인인 그들은.
궁금했소.
듣고 싶었소.
그러니 마땅히 듣겠소.
-쟈드 오렌-
차가움이 느껴지는 종이 위에 간결하고 깔끔한 의견을 물어왔다.
그다음은 기지어가 열띤 표정으로 소개한 깃발,
[에커즈]
작금의 승리는 그에 따른 마땅한 이치가 없었지.
0의 주인이여, 그대의 이야기가 타당하다면 그대들이 거둬들일 승리 역시 마땅한 이치가 있을 터.
우리에게 그에 따른 확신을 준다면,
기꺼이 화답하겠다.
- 선봉 기사, 아리나 에커즈 -
에커즈는 동쪽 중앙,
아이베리아의 13 고성 가운데 하나인 ‘오비스’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전원이 여성으로 이뤄진 기사단.
그들의 기원은 과거,
어비스의 원주인인 공작의 부재중 들이닥친 외세의 침략에 대항한 여성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런 에커즈의 명성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한 기지어는, 분명 이들이 우리에게 아주 큰 전력이 될 거라 확신하는 눈치였다.
그다음은…,
그래.
기다렸습니다.
나의 번짐이, 그쪽의 번짐에 맞닿기를.
남쪽의 변방이 낯익은 이름을 듣고 서쪽을 바라보오.
- 프랑쿠아, 베지어 리튼 -
벅차올랐다.
나와 뜻을 함께해준다는 그 사실만으로.
나를 그들의 번짐 끝에 닿을 대의로 인정해주었다는 사실만으로.
이윽고 마지막으로 바돈이 내게 제시한 서신은,
[몬스]
출처도, 어떤 의사도 담겨 있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오래된 종이, 그 위에 어울리지 않게 꾹꾹 눌려 담긴 명필.
그것을 두고 기지어는 이전과는 달리 존경을 담은 듯한 조심스런 말투로 내게 말했다.
“몬스는 북쪽, 외로운 첨탑에 있는 기록보관소를 말합니다.”
“기록보관소 말입니까?”
“예, 아이베리아의 역사를 빠짐없이 기록하는 기록자들의 성소와도 같은 곳이지요.”
“그럼 우리에게 보낸 이 서신은…,”
“아이베리아의 역사에 추가할 한 줄을 위해, 그 기록자가 이곳에 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록자는 공의 깃발이 휘날리기를 멈출 날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기록해낼 겁니다.”
기록자라.
듣는 것만으론 마치 살아있는 아이베리아의 역사 같은 느낌이다.
혹시,
그 기록자를 통해 과거를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그저 스치듯 알아가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정돈되어 기록된 방대한 과거를 말이야.
이를테면…,
똑똑.
생각이 어느 말미에 닿기 직전, 누군가가 접견실 문을 두들겼다.
이어 들려오는 목소리는 세라의 것이었다.
“저택 밖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 바돈이 서둘러 나가 그녀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는,
곧바로 멍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기록보관소에서 왔다고 합니다.”
* * *
“델, 힘들었느냐.”
등이 굽었음에도 엄청난 키를 자랑하는 노인이 옆에 있던 종자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옆머리 한쪽을 땋은 청년이 느긋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렇게 힘들진 않았습니다, 우리의 짐을 대신 짊어준 노새가 제일 힘들었겠죠.”
그 말에 노인은 자신의 키보다 큰 지팡이로 땅을 툭툭 두들기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우리가 얼른 노새의 짐을 덜어줘야겠구나.”
이윽고 델이라 불린 청년은 리케니엔의 저택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스승님, 그들의 말이 정말 사실일까요? 0을 가지고 되돌아왔다는 그 말 말이에요.”
그러면 노인은 입을 다 가릴 정도로 풍성한 수염을 실룩였다.
“진실이나 거짓이나 그 자체로 기록이 된다면 역사가 되는 것이지.”
곧,
저택 안에서 걸어 나오는 인물들을 찬찬히 살핀 노인은.
“보아라 델, 한 줄의 역사를.”
속을 알 수 없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