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정리
눈코 뜰 새 없이 닷새가 지났다.
그동안의 햇빛과 달빛조차 기억나지 않을 만큼 말이다.
기지어와 바돈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접견실을 찾아왔지만, 그 결실은 고작 하나의 합의뿐이었다.
그러나 바꿔 말하면 닷새간 이뤄낸 합의는 다섯 개 정도는 된다는 소리였고.
그 말은 즉,
빌비온의 건설적인 청사진을 완성하기엔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닷새가 지난 오늘.
기지어의 방문은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이뤄낸 합의를 가장 무겁게 고찰하고 고심하기 위해서.
이른 아침.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유를 가로지르며 접견실로 향하면 바돈이 이미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내가 자리에 앉길 기다렸다가 예를 갖춘 인사와 함께 돌돌 말린 두루마리를 건네었다.
“영주님, 오늘의 일정입니다.”
[1 – 조찬]
[2 – 방문 및 담화 (기록관 몬스)]
[3 – 담화 (베르융)]
[4 – 지주 회의 참석]
[5 – 지주들과의 오찬]
[6 – 외력 가문들의 공식 방문 (예정)]
[7 – 시종장 주제, 베나즈 가문 집사부와의 만찬]
차곡차곡 써 내려간 차분한 글씨, 그것들을 모두 훑은 나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물어야 했다.
“이게 뭡니까?”
“영주님의 오늘 일정을 간략하게 정한 것입니다.”
바돈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영주님의 일정 관리는 제 일입니다. 물론…, 직전까지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제대로 이행할 수 없었지요. 사실, 이 일정표도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영주님의 협의를 거쳐야 하지만…, 마찬가지로 상황이 상황인지라 산재 된 것들의 정리를 위해 제가 임의로 작성한 것입니다.”
본연의 일을 할 수 있게 되어서 그런가,
바돈은 어제보다 더욱 기품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일정표에 시간이 없군요?”
“영주님의 움직임이 곧 시간입니다, 일정표에 적혀있는 인원들은 오롯이 영주님의 일정 소화에 맞춰 움직여야 하지요.”
“그럼…, 오전 중의 담화가 길어지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지주들은 때늦은 오찬을 먹겠지요. 아니, 그대로 굶은 채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 움직입시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내 모습에 바돈은 고개를 숙인 채.
왜인지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 *
조찬을 마치자 곧바로 세라가 찾아왔다.
몇월의 햇살인지 모를, 그런 쨍함을 품은 옷가지를 든 채.
그녀는 잔뜩 신이 난 표정으로 들고 온 옷가지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영주님, 오늘 저녁 시종장 주제 만찬에 참석하신다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기대됩니다, 베나즈 가문을 모실 새로운 집사부들 역시 이 소식을 들으면 매우 기뻐할 거예요.”
철철 흐르는 그녀의 기대감은,
느끼기에 마땅히 부응하고 싶은 것이었다.
“새로운 봉사인을 들이신 겁니까?”
막 검은 리넨 셔츠를 내게 입혀주던 세라가 입꼬리를 올리며 물음에 답했다.
“네, 발리르의 기사 가르웨의 따님과 켄타나의 손꼽히는 귀족, 빌로즈 가문의 둘째 따님이 베나즈 가문의 새로운 집사부로 편입되었습니다.”
뭐랄까.
베나즈 저택 내 인물들의 체급이 급격하게 올라가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덜컥,
두 어깨가 무거워졌다.
“이 집사부의 결성만으로 켄타나와 발리르 사이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다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나저나 티히트라에서는 마땅한 인물이 없었던 겁니까?”
이어지는 내 물음에 세라는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예, 여러 차례 알아보았으나…,”
“그렇군요.”
말을 마치기 무섭게 세라는 검고 얇은 코트를 내게 입혀주었다.
티히트라와의 관계는,
솔직히 말하면 아직 껄끄럽지.
그곳의 유력 가문이었던 블로사와는 아주 악연이었으니까.
어쩌면 집사부를 통해 그 응어리를 조금은 풀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쉽게 됐어.
이렇게 되면 폴란에게 힘을 더 실어 티히트라에 남아있는 반발심이 부풀지 않도록 관리하는 게 최선일 거야.
이와 관련해서 기지어에게 조언을 구해봐야겠군.
“다 되었습니다, 여지없이 멋진 모습으로 완성되어주시니 감복할 따름이에요.”
세라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내 모습을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감사합니다, 세라.”
* * *
“오랜만입니다, 할리.”
바돈과 함께 저택 밖으로 나서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할리가 퍼뜩 내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 인사에 맞춰 내 뒤에 있던 바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그에게 오늘 하루 영주님의 호의를 부탁했습니다.”
“그렇습니까, 할리가 함께 한다니 든든하군요.”
할리는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다가도 이런 내 말에 날카로운 표정을 지었다.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겠습니다.”
그를 보지 못했던 그 날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군인이라는 틀에 좀 더 여물진 듯한 모습이구나.
그렇게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걷자, 내 뒤편 좌우로 바돈과 할리가 따라붙었다.
“할리, 부상은 좀 어떻습니까.”
슬쩍, 할리에게 사담을 건네자 그는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인 채 그에 맞지 않는 낮고 진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활동에 지장이 없을 만큼 완벽히 나았습니다.”
“정말 다행이군요, 베르융 경에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찰대의 규모가 매우 커졌다고.”
“아직도 실감이 잘 나지 않습니다, 제가 그 규모를 통솔로써 운용할 수 있을지도…,”
할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바돈이 그를 나무랐다.
“예끼, 이 사람아! 영주님 앞에서 무슨 모습을 보이는 거야!”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영역들을 충실히 넓혀 나가겠습니다.”
꾸지람을 들은 할리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항소하듯 내게 말했다.
그 모습에 나는 입꼬리에 작은 미소 하나를 걸친 채,
이런 표정을 둘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영주님… 잠깐…!”
“영주님 무슨 일…!”
그러자 둘은 혼비백산한 모습으로 얼른 내 뒤를 따르기 바쁘다.
직전까지 있었던 실랑이가 무색해질 만큼.
* * *
“잘 지내십니까.”
“공께서 베풀어주신 성대함 덕분에 이 늙은이는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기록관 몬스.
그는 멀찌감치서 다가오는 나를 보자마자 부리나케 나와 나를 반겼다.
그 옆에는 아직도 고개 숙여 인사하는 몬스의 종자가 있었다.
“이놈 델, 살아있는 공께 염원 담은 묵념이라도 하려는 게냐?”
몬스는 자신의 키보다 큰 지팡이를 가볍게 놀려 종자 델의 종아리를 가볍게 찔렀다.
델은 그제야 허리를 활짝 펼 수 있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기록관 몬스가 찾아온 지 닷새.
그에게 제공한 작은 오두막 위로는 이미 그의 삶이 진하게 덧칠되어 있었다.
그렇게 오두막 입구에 멈춰 선 몬스는 내 뒤를 따르던 바돈을 흘겨보며 말했다.
“영주님과 단둘이서 긴밀히 나눌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의 말에 뒤돌아 바돈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같은 끄덕임으로 화답한 바돈은 할리와 함께 나란히 섰다.
곧이어 오두막으로 들어서자.
“공께서 주신 성대함에 이 늙은이가 뭐라도 해야 하는데…, 차라도 한 잔 대접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럼, 부탁드립니다.”
흔쾌히 몬스의 말을 받아들이자,
그는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채 찻장으로 걸어갔다.
덜컹, 덜컹.
그 과정에서도 몬스는 자신의 키보다 큰 지팡이로 바닥을 두들겼는데.
뭔가 묘한 기분이 든다.
그러니까,
저 지팡이.
진정 나무로 만들어진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아! 이 늙은이가 깜빡했군!”
이런 내 생각을 은연중 간파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노파심인 건지.
몬스는 급히 몸을 들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주름진 두 손을 뻗어 내 앞의 자리를 공손히 가리키며 말했다.
“공, 자리에 앉으시지요. 이 늙은이가 젊은 영주님을 멋쩍게 만들 뻔했습니다.”
그가 가리킨 곳에 있는 작고 조촐한 의자에 앉자,
어느새 몬스는 펄펄 끓는 차를 내 앞에 내놓았다.
“말린 구즈베리 차입니다, 이 늙은이가 단 것을 좋아해서 차도 차답지 않은 걸 마신답니다.”
그러면서 태연히 푸념을 읊은 그는 이제 내가 먼저 찻잔을 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주름진 얼굴 속엔,
대체 어떤 생각이 숨겨져 있는지 감조차 잡지 못하겠다.
조용히, 잔을 들어 붉은빛을 띠는 차를 들이켰다.
첫맛은 달고 새콤하나 끝 맛은 차 특유의 차분하고 씁쓸한 여운이 느껴졌다.
이어서 찻잔을 내려놓자.
뒤늦게 차 한 모금을 따라 들이킨 몬스가 입을 열었다.
“또 제가 이 차를 좋아하는 이유는 평생 끄적였던 것들과 닮아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역사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기록된 역사 대부분은 그 처음이 아주 흥미로운 형태로 시작되지만, 종래엔 심심하고 허무하기 그지없이 끝나버리기 때문입니다.”
“궁금합니다, 그 가운데 어떤 부분이 정확히 마음에 드셨던 겁니까?”
“군상은 마치 시들지 않을 거란 착각을 가진 꽃과 같습니다. 저는 그 착각을 아주 좋아하지요.”
몬스의 주름진 눈두덩이 속, 메마른 눈동자 속에 처음으로 빛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 착각이 세상을 바꾸지요. 끝내 시든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가 다시 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궁금합니다, 공께선 어떤 착각을 하고 계실지 말입니다.”
직전까지 그렇게나 예의를 갖추던, 그 볼품없어 보이던 노인 몬스는.
어느 순간,
숲을 주름잡은 늙은 맹수가 되어있었다.
벌컥,
그의 살짝 무례한 발언에 반발심이 솟았지만.
예전 맥레인에게 두들겨 맞으며 정신에 새겨 넣었었던.
그로 인해 발휘할 수 있었던 특유의 침착 덕분에 그 말의 의중을 간신히 꿰뚫을 수 있었다.
그래,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을 어떻게 바꿀 생각인가.’
겠지.
몬스는 이미 내 표정에서 모든 의도를 알아차린 듯.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찻잔을 기울였다.
“되돌리는 것, 저는 그러한 착각을 품고 이 땅에 왔습니다.”
“세상은 되돌림이라는 걸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것 또한 변화의 하나일 뿐.”
“그렇다면 그 기조 자체부터 되돌려 놓겠습니다.”
“어떻게?”
“진 꽃을 이어 다시 핀 꽃처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구의 몬스를 냉정하게 내려다보았다.
“스러진 그들의 염원에 뿌리를 박은 이 꽃은, 적어도 전의 것보단 아주 오랫동안 피어 있을 겁니다.”
그는,
은은한 미소를 띠며 남은 차를 깔끔히 비웠다.
이어 찻잔을 내려놓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자연히 내 고개가 위로 젖혀졌다.
참으로 거대하다.
진정 세월을 먹으면 먹을수록 작아지는 두 발 걷는 자가 맞는 건가 싶을 정도로.
그러나 이내 내 고개는,
자연스레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몬스.
그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것이다.
헐거운 무릎을 두 손으로 잡아 겨우 완성 시킨 그 자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기꺼이 기록하겠나이다, 그대의 역사를.”
하지만 모르겠어.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전하는 그 인사 속엔.
왠지 모를 버거움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