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정리 (2)
저택으로 돌아와 접견실로 올라가던 도중, 복도에 앉아 날 기다리고 있던 베르융과 마주쳤다.
그는 날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반가움을 내비쳤다.
“영주님.”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아닙니다, 방금 도착했습니다.”
검은색 무늬 없는 프락 코트를 입은 그의 모습은 참으로 훤칠해 보여서,
생소함과 동시에 정감이 느껴졌다.
늘 갑옷이 아니면 그 안에 껴입는 아밍 더블렛만을 입고 있었는데 말이야.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발리르의 일로 많이 바쁘실 텐데.”
“되려 소신이 영주님의 시간을 빼앗는 건 아닌지…,”
썩 유쾌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 베르융은 접견실로 들어서는 내 뒤를 바짝 따랐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우리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 자연스레 앉았다.
이어 베르융이 나를 찾아온 그 이유에 대한 운을 떼자,
“할리와 기지어를 통해 들었습니다, 발기지르와의 일전 말입니다.”
그는 돌연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차근차근 정리해나가는 중입니다.”
직후 베르융은 침묵을 머금고 있다가.
“틀림없는 대승이었으나 희생 역시 컸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소신을 드러냈다.
“제가 영주님을 찾아온 건 죽은 병사들의 처우를 위해서입니다. 영주님, 이들의 스러짐에 합당함을 부여해주실 수 있는 분은 오롯이 영주님뿐입니다.”
“압니다.”
빌비온을 하나로 묶어낸 그 근본에는 기사들이 있다.
그리고 기사는 병사들의 위시함으로 완성되는 존재다.
애초에,
이 땅 위에 솟은 깃발 가운데 다른 근본이 있었던가.
“병사들과 전사자들의 예우는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전투의 배상금으로 해당 문제를 해결하면 되겠어.
이 부분은 조이와 따로 논의하면 되겠지.
내 대답에 베르융은 그제야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빌비온 내 실질적으로 가장 강력한 ‘군령권’을 가지게 된 만큼, 지금 그의 신경은 병사들에게 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군령 외적으론 늘 멋쩍어질 수밖에.
나는 중심에서 그런 그의 멋쩍음을 덜어줘야만 해.
그래야만,
곧 빌비온 내에 입점 될 기업과 조합들조차 개입할 수 없는 ‘성역’을 만들 수 있을 테니까.
“참…, 그리고 영주님.”
베르융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책상 위에 낡은 인장 하나를 올려놓았다.
늑대의 옆모습이 새겨진 그것은 최근까지도 관리했는지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이게 뭡니까?”
“적군 측 어느 전사한 기사의 유품입니다.”
인장을 뒤집어 보니 주인의 이름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이름은…,
내겐 그리 낯선 것이 아니어서.
“일차원적으로 생각하면 그저 적에 불과하겠지만, 돌이켜 저들 조직의 근간을 생각해보면 이 인장의 주인은 여러 관계 속에서 강제된 싸움 속에서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순간 두 귀가 먹먹해져 베르융의 설명마저 들리지 않았다.
켈리르의 기사, 이리즈.
당신의 이름을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중립지역, 포드에서 마주쳤던 그 재기 넘치던 여기사를 이런 식으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어.
만감이 교차하는 와중, 뒤늦게 정신을 차려보면.
나도 모르게 잔뜩 힘을 준 손으로 인장을 쥐고 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르융은 막 하던 말을 마무리 짓고서, 조금은 초연한 눈빛으로 한참을 말없이 있어 주었다.
“아는…, 이름입니까.”
“시신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의 물음에 물음으로 답하자.
“기사의 예를 담아 그녀의 고향으로 보냈습니다.”
베르융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비록 적으로 만났으나, 우리들의 귀감이 될 만큼 위대한 기사였다고. 그리 적은 편지도 함께 보냈지요.”
“잘…, 하셨습니다.”
“그녀의 죽음으로써 그녀 가문에 얽혀있던 관계들도 모두 말끔히 정리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연락이 닿는다면 그 가문을 영주님의 깃발 아래에…,”
“아니, 아닙니다.”
조심스레,
쥔 손을 풀어 담겨 있던 인장을 내려놓았다.
“적어도 가족들의 안녕이 그녀의 넋에 닿기 전까진…, 시간을 두도록 합시다.”
“알겠습니다, 영주님.”
베르융은 코트 자락을 부여잡은 채 공손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어 내게 인사를 건넨 뒤 그대로 접견실 밖으로 향하는 그를.
“베르융.”
불러 세워 물었다.
“아는 이름이었습니다. 최근에 불현듯 떠올랐다면 같은 방향으로 나부끼는 깃발 아래 재회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슬쩍 드러낸 나의 우울에.
베르융은 신하로서가 아닌 기사로서 내 경종을 울렸다.
“아이베리아에선 찾기 힘든 종류의 재회이지요. 그러니 영주님께서 그런 재회를 찾기 쉬운 세상을 건설하소서.”
* * *
“영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시종의 말에 기다란 식탁에 둘러앉아 있던 모든 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석 바로 오른편에 앉아있던 기지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막 홀 안으로 모습을 드러낸 디안 베나즈가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상석으로 향했다.
그 뒤는 바돈과 그의 집사부가 줄을 지어 따르고 있었다.
공표식이 거행되고 난 뒤,
핵심 부처를 급하게 재편한 것 치곤 그 위압감이 참으로 대단하다.
특히 디안 베나즈가 풍겨내는 고고한 분위기가 그랬다.
기지어는 그런 그의 모습에 올라가는 입꼬리를 간신히 말려야만 했다.
자리가 두 발 걷는 자를 만든다는 말이 있지만,
그 말은 바꿔 말하면 자리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인물이라는 뜻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
두 발 걷는 자가 자리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마땅히 그 자리를 휘두를 인물이 되는 것.
디안 베나즈는 자신의 자리를 완벽하게 만들 줄 아는 인물이다.
젊을뿐더러 그 용모가 지나치게 수려해 자칫 방탕하고 빈틈 많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미 그에 대해 잘 아는 기지어는 그마저도 기특해 보일 지경이었다.
이내 디안은 상석 앞에 멈춰 서서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마치 침묵을 깨트리듯, 지주들은 조용히 착석했다.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곧이어 지주 중 하나가 고개를 불쑥 내밀어 디안에게 말을 건넸다.
기지어는 그런 그의 얼굴을 흘깃거리곤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반쯤까진 흰 머리, 못생긴 고구마 줄기 같은 구레나룻.
자식이 리케니엔의 정규군으로서 의무를 다하고 있는 덕에 선출된 지주, 베낙 들랜.
그는 딱 보아도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야망이 큰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인사에,
디안은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금세 무표정한 얼굴로 식탁 중앙을 내려다보았다.
기지어는,
그런 디안을 반짝이는 눈으로 흘겼다.
첫 마디로 어떤 말을 꺼낼지 너무나 궁금해서.
이윽고 디안의 그 조각 같은 입술이 열렸다.
“감사하다는 말은, 이 자리를 기다려왔다는 뜻이겠지요.”
살짝,
입꼬리를 올린 채 묻는 디안의 그 아름다운 얼굴을,
베낙은 마치 핥듯이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베낙 공을 제외한 다른 분들은 이 자리가 그다지 반갑지 않은가 봅니다.”
이어 디안의 입에서 서운함이 내뱉어지기 무섭게, 입을 다물고 있던 지주들의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영주님, 이렇게 공식적인 자리에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 땅의 진정한 원주인을 되찾게 되어 감개무량합니다.”
“어찌 영주님이 반갑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주재하신 이 자리가 무거운 것이기에 소신들의 입도 덩달아 무거워졌음을 이해해주시옵소서.”
하나둘 급히 첨언을 붙이는 지주들.
그 중심에 있던 디안은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수차례 끄덕였다.
“본의 아니게 지주분들을 닦달한 꼴이 되었군요, 사과하겠습니다. 맞습니다. 무거운 자리지요. 이 회의 중심에 놓일 의제들은 하나같이 무거운 것뿐일 테니까요.”
압박하다가도 이내 풀어지다가,
“시간 낭비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끝내 다시 압박하듯 디안은 거침없이 안건을 던졌다.
“첫 수확의 분량은 얼마나 될지, 그다음 수확의 예상량은 얼마인지. 이미 이곳에 들어올 기업과 조합의 목록들을 확인하셨을 테니 그들과의 협업은 어떻게 진행할 생각인지. 그 정한 모든 것들을 내게 들려주십시오.”
말을 끝마친 디안의 그 우수의 찬 눈빛은 아주 정확히,
베낙에게 향해 있었다.
“베낙 공, 이 자릴 그토록 기다려오셨다 했으니 그 기다림에 걸맞은 것이 있겠지요.”
“아…! 영주님!”
당황한 눈으로 주위를 어지럽게 살핀 베낙은,
멍한 얼굴로 디안의 얼굴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베낙 공. 이 자리는 어쨌든 공식적인 첫 지주 회의이니까요. 많은 것들이 어설플 수밖에 없다 이 말입니다. 하지만 이 자리가 끝났을 땐 여러분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 대한 상기를 다시 한번 거듭하셔야 할 겁니다. 그래야만 제가 여러분들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디안은 매서운 눈빛으로 식탁 주위를 한바탕 살벌하게 훑었다.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리케니엔에서 지주는 그리 강한 단어가 되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독단적인 관리와 통제밖엔 답이 없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법 느슨한 기준으로 본인이 지주라는 자리에 선출되셨다는 것을. 지키셔야지요. 그에 걸맞은 걸 제게 보여주십시오.”
아프다.
꼬집은 데를 더욱 비틀어 뜯어내는 것만 같다.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기지어마저도 미간이 살짝 일그러질 정도로,
디안의 말은 매운 것이었다.
토르킨 선생,
당신의 스물아홉 번째 제자에게 대체 무엇을 가르친 것입니까.
어떤 제왕학을 들이밀었는지 엿보고 싶어질 정도입니다.
속으로 미묘한 쾌재와 함께 질문을 던진 기지어는 근질거리는 몸을 달래기 위해 애써 몸을 뒤척거려야 했다.
“첫 지주 회의는 이것으로 끝냅시다, 모두 기다리시느라 허기가 지셨을 텐데. 같이 식사하시지요.”
디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집사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 * *
어떤 정해진 틀 속에서 행동한다는 건,
심지어 여유가 산재해 있다고 해도 참 숨 막히는 것이로구나.
내겐 너무 낯설고 어색한 틀이어서 그런 것일까.
이마저도 적응할 수 있는 것일까.
“영주님,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어두우십니다.”
“괜찮습니다, 바돈.”
“혹시 오찬 때 뭘 잘못 드신 것은…,”
“아뇨, 모두 괜찮았습니다. 그냥 좀 답답한 기분이 들어서 그럽니다.”
“9월의 바람을 준비할까요?”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바돈. 따로 일을 보러 가셔도 됩니다.”
바돈은 즉답하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더욱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시종장에게 영주님 곁을 지키는 것보다 중한 일은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답답함을 느끼시진 않으십니까?”
내 물음에 그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오히려 안도감이 느껴집니다, 영주님의 곁을 지킴으로서 제 할 일을 해내고 있다는 그 사실 덕분에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나도 모르게 은연중에 그의 말을 새겼다.
그러니까,
나도 그런 안도감을 느끼고 싶어서.
뒤이어 시종 하나가 헐레벌떡 다가와 바돈을 찾았다.
바돈은 그런 시종 곁으로 가 그의 속삭임을 귀에 한가득 담은 뒤, 조용히 내 앞에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영주님, 막 저택 앞에 외부 인사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누구입니까.”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에커즈, 그 선봉 기사 아리나 경이라고 합니다.”
드디어 공표 이후 처음으로 맞이해 보는구나, 빌비온 외 아이베리아의 깃발을 가진 자를.
“안으로 정중히 모셔오세요.”
내 말에 바돈이 시종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이윽고 저택 저 바깥에서부터 묵직한 발소리 여럿이 들려오기 시작했고,
그것이 점점 가까이 다가와 끝내.
내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이베리아에 있는 13개 고성 중 하나,
오비스의 주인이자.
기사단.
‘에커즈’
그 선봉 기사가 금방이라도 빛을 토해낼 만큼 반짝이는 갑옷을 입은 채 내 앞으로 걸어왔다.
나와 키가 비슷할까.
그만큼 쭉 뻗은 키를 가진 기사 아리나는.
싱그러운 갈색의 긴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묶고 있었다.
영롱한 녹색 눈동자, 그 위로 숲처럼 짙게 뻗은 갈색 눈썹.
참으로 빼어난 용모를 가진 여인이었으나, 그 아래 맺힌 강인한 턱으로부터 풍기는 인상은.
딱 보아도 기사라 불릴만한 것이었다.
공표식이 끝나는 날, 베르융과 조이에게 미리 배운 대로.
나는 막 내 앞으로 다가온 그녀에게 0을 담은 검.
새비안의 자루를 내세워 보였다.
그러자 그녀는 묵묵히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기사의 예를 보인다.
[장악]
[11년, 코니움브렘]
[물로 찍혀진 한 문명의 마침표]
그 강대한 인챈트의 주인이.
“기사 아리나 에커즈, 태풍의 새로운 주인인 디안 베나즈를 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