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개선
“세라님, 보셨어요? 굉장히 키가 큰 여인이었어요!”
살구색, 신체에 딱 맞는 최신 유행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세라에게 다가왔다.
막 주방을 점검하고 있던 세라는 그런 그녀가 쏟아내는 쾌활함에 미소로 화답했다.
“아마도 베나즈 가문에 보탬이 되어줄 분이신가 봅니다.”
“세상에, 첫 방문자가 여기사일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뽀얀 살결, 그 위에 걸쳐진 풋풋한 상기를 실룩거리며 멍하니 서 있던 여인은.
조금은 질투 난 표정으로 세라에게 질문했다.
“기골이 장대했지만, 참 이뻤지요. 방금 온 여기사분이요.”
그녀의 그 어린 질투심이 귀여웠는지, 세라는 막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하지만 역시 아가씨가 더 아름다운 것 같네요, 과연 빌로즈 가문의 둘째 따님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했다니까요?”
이어지는 세라의 칭찬에,
앳된 여인은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잡은 채 세라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 경쾌한 움직임에 밝은 황색 머리칼이 윤기를 쏟으며 한바탕 찰랑거렸다.
켄타나의 귀족 가문, 빌로즈의 차녀.
가니아.
베나즈 가문의 집사부로 편입된 그녀는 이제 막 세라가 하려는 일을 빼앗아 들었다.
“집사부의 안주인께서 이런 허드렛일을 하다니요!”
열일곱.
적은 나이이나 귀족 가문 내 기류에 통달한 그녀는 당돌함을 드러내며 세라에게 빼앗은 과일을 손수 씻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썩 마음에 들었던 세라는 그저 흐뭇한 미소로 지켜볼 뿐이다.
“세라님.”
그렇게 과일을 씻던 가니아가 콧잔등에 튀겨진 물방울을 팔로 닦아내며 묻는다.
“영주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그 말을 내뱉는 동시에 그녀의 얼굴은 전보다 더욱 붉어져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더욱 붉어진 이유는,
이미 저택에 도착하기 무섭게 이곳의 영주, 디안 베나즈의 얼굴을 먼발치에서 몰래 확인해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항간의 소문은 사실이었다.
젊을뿐더러,
무시무시하게 잘생겼고.
또 무지막지하게 잘생겼다는 그 소문 말이야.
“참으로 따스한 분이십니다.”
세라의 대답에 가니아는 하던 일을 멈추고 두 눈을 반짝였다.
“보기엔 참으로 냉정해 보이셨는데요…?”
“조금 무뚝뚝한 면이 있으시지만 그렇다고 바위처럼 둔감하신 성정을 가지신 건 아니랍니다. 시종장에게 전서구도 꼬박꼬박 잘 보내시기도 하시고…,”
이미 가니아는 쭈그려 앉아 양손으로 턱을 괸 채 세라 옆에서 모든 이야기를 흡수하듯 경청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무슨 상상을 하는지,
“킥킥.”
하고 혼자서 먹이 갉는 다람쥐처럼 재잘재잘 웃는다.
“영주님은 무슨 음식을 좋아하나요?”
이어지는 질문에 세라는 가니아 옆에 나란히 쭈그려 앉아 다정하게 얘기해 주었다.
“뭐든 가리지 않고 다 잘 드십니다, 다만 푸른 종류의 열매는 조금 가리시지요. 특유의 시큼한 맛을 선호하진 않으시거든요. 아! 생각해보니 단 걸 아주 좋아하셨던 것 같네요.”
짙은 속눈썹을 바삐 휘청거리며, 세라의 말을 꼼꼼히 듣던 가니아는 젖은 손으로 무릎을 껴안은 채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도 단 것 좋아하는데.”
공통점 하나를 발견했다는 그 사실이 좋았던 걸까.
가니아는 무릎에 작은 얼굴을 절반 이상 파묻은 채 묘한 두근거림을 느꼈다.
“참, 곧 만찬 시간이네요. 서둘러 준비하도록 합시다.”
이윽고 아차 하는 표정으로 세라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덩달아 가니아 역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 * *
“오비스의 주요 길목이 정리되어있는 지도입니다.”
아리나는 빳빳한 두루마리를 내게 내밀며 말을 이었다.
“추후 교류에 이 정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시면 될 겁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의중을 뜨듯 되물었다.
“이런 것을 선뜻 건네는 걸 보면, 그만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럼 아리나는 빼지 않고 우직하게 즉답했다.
“고성 오비스는 아이베리아 내 손꼽히는 난공불락을 자랑하며. 에커즈의 기마병 역시 패배를 잊은 지 오래이니까요.”
“그런 그대들의 호의를 믿어도 되겠습니까?”
“오히려 제가 묻고 싶습니다, 영주님의 품 안에 있는 태풍은 필시 어떤 명분에 의해 불고 있는 것이겠지요. 저는 그 명분이 우리를 설득시켜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에커즈 기사단의 깃발은,
오랜 시간 동안 나부낄 바람을 마주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지금 아이베리아에 나타난 태풍에 관심을 보인 것이고, 그 태풍이 몰고 올 바람에 마땅히 나부낄 수 있을까가 최대의 관심사처럼 보여.
나는,
그런 그들의 관심에 부합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해서,
“유감없는 나부낌이 될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요.”
그녀에게 당당히 확답했다.
그러자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던 아리나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제법 좋은 관계로 시작된 것 같아,
“아리나 경, 만찬에 함께 하시겠습니까?”
그녀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자리를 제의했다.
그녀라면 현 아이베리아의 정세를 아주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그것에 대한 궁금증을 풀 좋은 기회다.
사실 기록관 몬스에게 여러 궁금증을 풀어보고 싶었지만, 직전에 뭔지 모를 위기감 같은 것이 느껴져서 하지 못했다.
뭐랄까,
그에겐 사소한 것이라도 책을 잡히면 골치가 아파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
아이베리아의 정세와 관련된 질문조차도 선뜻 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야.
내 제의에 아리나는 다시 석상 같은 얼굴로, 아니.
정확히는 아쉬움을 내비치는 석상 같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유감스럽게도 복귀를 서둘러야 하는 이유가 있어서요. 그 마음만 감개무량하게 받겠습니다.”
“이유가 뭔지 물어도 됩니까?”
“야간 순찰이 있습니다, 최근 오비스 인근에 괴물들의 출몰 빈도가 높아졌거든요.”
미래에 대한 중요한 도모가 될지도 모르는 자리보다,
일단 눈앞의 원칙이 우선이라 이건가.
말 그대로 기사 그 자체로군.
아리나 에커즈.
여러 의미로 꽤 든든한 우호 세력이 되겠어.
* * *
아리나가 떠난 직후 꽤 늦은 만찬이 시작됐다.
바돈을 위시한 집사부 전체가 합석한 만찬 자리는 간만에 저택 홀을 가득 메울 정도로 북적였다.
바로 내 오른편에 앉은 바돈은 눈앞에 차려진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조용히 내 귓가에 대고 여러 이야기를 속삭이기 바빴다.
이야기는 대부분 바돈의 선에서 정돈한 일들의 보고였는데, 그중 절반이 기업에 관련한 일이었다.
그는 베나즈 가문의 집사부와 협력할 기업으로 ‘뷰글스’를 선택했다고 했다.
뷰글스는 두 개의 서쪽 바다 건너에 있는 선전과 광고사업을 하는 기업.
그들을 통해 베나즈 가문을 자유민들에게 선전하여 사회적 친밀감을 높이겠다는 것이 바돈의 계획이다.
확실히,
나쁘지 않게 들려.
어쨌든 베나즈라는 이름은 아이베리아를 설득해야 하는 처지이기 때문에 갖은 방법을 동원해야 해.
그렇게 한참 바돈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와중,
그의 오른편에 앉은 세라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하긴 엄연히 집사부와의 첫 만찬인데, 바돈 개인의 업무로 날 독점하고 있는 모습이 그리 좋지 않게 보였을 거야.
덩달아 나도 그녀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이내 바돈이 제자리로 돌아오자 세라는 숟가락으로 유리잔을 살살 두들기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영주님, 베나즈 가문의 내실을 다지고 쌓아 올리기 위해 이 자리에 많은 이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영주님의 말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어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그럼 집사부의 서열을 재확인시켜주는 것으로 운을 떼면 되겠지.
“세라님의 말대로, 여러분들은 기꺼이 베나즈 가문의 건설을 위해 이곳에 모이셨습니다.”
세라에 대한 존대에, 그녀는 감동한 표정으로 내 눈을 마주쳐왔다.
“앞으로 여러분께 많이 의지하게 될 겁니다, 저는 아직 여러모로 미숙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저와 제 가문은 계속해서 개선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겁니다. 우선 토대를 쌓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함께 쌓읍시다. 그렇게 해서 쌓게 될 토대의 이름은 존중으로 합시다.”
생각나는 가사 몇 줄을 빌려,
번지르르한 윤택을 급히 발라 내뱉은 그 말에.
그들은 유감없이 반짝이는 눈빛으로 화답해 주었다.
적어도 내 진심만큼은 확실히 전해졌구나 싶어서.
조금은 벅차오르는 마음을 가지고 잔을 들어 올렸다.
이에 그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앞에 놓인 잔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잔들이 한바탕 꺾이고 나서야,
마치 버거운 고개를 막 넘어선 듯.
식탁 위 기류는 좀 더 유순한 것으로 바뀌었다.
“영주님, 이쪽은 빌로즈 가문의 차녀이신 가니아님입니다. 베나즈 가문의 집사부로서 그 역할을 아주 톡톡히 해내실 겁니다.”
슬슬 자리가 왁자지껄해질 때쯤.
세라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만큼 작은 여인을 데려와 내게 소개했다.
“인사 올리시지요, 아가씨.”
이어지는 세라의 손짓에,
멀뚱멀뚱.
그러다가도 멈칫거리며 눈치를 살피던 가니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내게 인사했다.
“가니아 빌로즈라고 합니다, 베나즈 가문의 집사부가 되어 영광입니다.”
뭐에 쫓기듯 달달 내뱉는 인사가 끝나고,
뒤늦게 양손으로 치맛자락을 집어 격식을 덧붙이는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긴장을 덜어주기 위해.
“그렇게 어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가니아님.”
격려하듯 화답하자, 그녀는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고는 날 빤히 바라보며 답했다.
“누… 뉍!”
* * *
공식적인 하루의 일정이 모두 끝난 늦은 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기지어가 접견실로 찾아왔다.
그의 양 옆구리엔 수십 개의 두루마리가 끼워져 있었다.
“영주님.”
절뚝절뚝.
버거운 모습으로 내 앞까지 다가온 그는 이제 옆구리에 낀 두루마리들을 모두 바닥에 쏟아냈다.
“오늘 하루 내실의 청사진을 그리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마에 맺힌 땀을 반짝이며 묻는 그의 얼굴엔 비장함이 깃들어 있다.
“그렇습니다.”
내 대답에 기지어는 고개를 불쑥 내민 채 두 눈을 반짝였다.
“그렇다면 내일은 시선을 바깥으로 돌리소서. 슬슬 개선하실 때가 되지 않으셨습니까?”
“이른 감이 있지 않습니까?”
“천만에!”
기지어가 특유의 괴짜 분위기를 풍겨대며 일갈했다.
“베나즈의 외침을 들은 적들은 저마다 그에 따른 명분을 갖고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을 겁니다, 그런 가운데 같은 명분을 가진 몇몇은 서로 규합하여 더욱 강성한 세력으로 성장하겠지요.”
“그러니 밖으로 나서서 몸집을 불려야 한다, 그 말입니까?”
“태풍의 눈 만으론 고요가 한계입니다. 거센 바람결을 둘러야 비로소 태풍을 재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최근 벌어진 전투의 수습도 아직 끝나지 않았습…,”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지어는 단호함을 내비쳤다.
“보여주셔야 합니다, 태풍의 실체를. 전서구 따위로 설득되지 않은 그들의 경종을 직접 때리소서. 때로는 기세만으로 꺾어짐을 수확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다.
유독 그에게서 초조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기지어, 뭔가 알게 된 것이라도 있습니까?”
* * *
“재상, 이 늙은이에게 무슨 볼일이신지요.”
몬스는 자신을 찾아온 기지어를 향해 천연스러운 표정으로 인사를 올렸다.
“아, 딱 보아도 이 늙은 고서를 펼치기 위해 오셨구려.”
이윽고 기지어의 눈빛을 읽은 몬스는,
낡은 의자에 걸터앉은 채 여유 넘치는 모습으로 말을 이어갔다.
“내 갈피가 없어 그대가 원하는 장을 펼쳐줄 수가 없구려, 그러니 재상께서 직접 일러주셔야 하오.”
몬스의 그 말에 기지어는 망설임 없이 그와 마주 앉았다.
그리고는 절박함을 내비치며 물었다.
“알려주십시오.”
“무엇을?”
“소실된 기사왕의 역사를, 그것을 알려주지 못하겠다면 그 기사왕을 무너트린 적들의 현재라도.”
“젊은 재상이여, 역사라는 건 시간으로 체감해야만 비로소 곡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네. 기록된 몇 문단을 훑는 것만으론 완벽히 이해할 수 없지.”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들이닥칠 적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뿐이지.”
기지어의 물음에 몬스는 슬쩍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의 주름진 눈두덩이가 그림자에 파묻혔다.
“7년. 당장 베나즈의 눈앞에 나타나게 될 것은 그것이 될 것이오. 나머지는 당신의 이해에 달렸지.”
이윽고 그림자 속에서 눈두덩이를 드러낸 몬스의 말에.
기지어의 얼굴은 삽시간에 창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