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34화 (234/365)

234화. 도 (2)

겨를 없이 노인을 따랐다.

광기로 아수라장이 되어가는 마을을 뒤로한 채.

당혹에 얼룩져 복잡했던 감정들이 모조리 묻히고, 그렇게 그 상태로 노인의 뒤를 따라 한적한 부둣가에 도착했다.

그곳엔 노인이 타고 온 것으로 보이는 작은 나룻배가 있었다.

“배 미는 것을 도울 수 있겠느냐?”

슬쩍, 내 몰골을 살펴보던 노인의 부탁에 나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이 나룻배 위에 올라타 신호를 주면, 부두 끝에 엎드려 있던 나는 있는 힘껏 배를 밀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노를 휘저어 나룻배를 물길 위로 올린 노인은,

직후 마을 쪽에 눈길을 두고 있던 날 보고 물었다.

“왜, 다시 마을로 돌아가고 싶으냐.”

그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얼른 고개를 가로젓자,

곧 노인이 인자한 얼굴로 거대한 손을 내게 내민다.

“단단히 잡거라.”

그것은 주름지고 낡은 것이었지만.

내 삶에 세 번째 우호가 담긴, 그 무엇보다 윤택한 것이었다.

우악스러운 힘에 이끌려 나룻배 위에 오른 나는 절뚝거리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와 동시에.

저 멀리 마을 쪽에서 검은 연기 기둥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찰박찰박.

노인이 노를 저어 물길을 재촉하고.

검은 연기는 점점 내게서 멀어져간다.

이내,

얼룩진 당혹 밑에 고개 숙이고 있던 여러 감정이.

도저히 말릴 수 없을 정도로 울컥 튀어나와 버렸다.

“흐… 윽…,”

그 때문에 이마의 상처가 벌어져 핏물이 흘렀지만, 그보다 더 많은 눈물과 콧물이 쏟아지는 바람에.

연거푸 눈과 코를 훔쳐야만 했다.

그러다가,

“으아아아아!”

이젠 뭐에 받친 울음인지 모를 정도로, 그 설움이란 것이 완전히 폭발해 버렸다.

막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댐처럼.

노인은 그런 내 모습에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묵묵히 노를 저어 더욱더 먼 곳을 향해 나아갈 뿐이었다.

* * *

물길조차 가늠하기 힘들 만큼 날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노인은 그 어둠 속에서도 귀신같이 물길 속에 노를 박아 저었다.

나는,

말 그대로 울다 지쳐 쓰러져 있다가, 겨우 몸을 추슬러 일어날 수 있었다.

온몸에 진이 다 빠져나간 느낌.

이런 내 맞은편에서 파이프 담배를 태우고 있던 노인은 반색하며 말을 걸어왔다.

“일어났느냐.”

녹색 잔불을 머금은 파이프.

그리고 그 파이프를 머금은 입에서 흘러나오는 녹색 연기.

휘청거리는 연기에 한참 시선을 빼앗겨 있는 와중, 노인이 내게 물었다.

“도야, 배고프냐.”

어머니의 다정함을 닮은, 그런 따스한 것이 노인의 입에서 나왔다.

그래서 또 감정이 요동쳤지만,

더 큰 요동이 배 속에서 꿈틀거리는 바람에 막 흩어진 녹색 연기처럼 요동치던 감정도 휘발되었다.

“배고파요.”

노인은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그 안에 들어있던 빵 한 덩이를 건넸다.

종이는 귀한 물건이다.

저 아이베리아 중심 쪽은 발에 차일 정도로 흔한 물건이라고 들었지만,

깃발이 없는 변두리에선 정말 귀한 물건이야.

그제야 문득 떠올랐다.

책을 가져오셨던 그 날, 왜 어머님의 온몸에 멍이 들어있었는지.

변두리 마을에서 귀한 종이로 이루어진 책을 내게 가져다주려다 아주 모진 고초를 당하셨던 거야.

노인이 건넨 빵을 집어 허겁지겁 입속에 넣었다.

그리고 목 깊숙이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것과 함께 꿀떡 삼켜버렸다.

“감사합니다.”

이어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니 노인은 껄껄 웃으면서 파이프에 담겨 있던 재를 털고는 내게 말했다.

“내 이름은 토르킨. 토르킨 루에르다.”

“감사합니다, 토르킨님.”

“그리 부르지 말고 날 선생이라 부르거라, 네가 허락한다면 내 너를 거둘 것이니라.”

난 얼른 배 바닥에 이마를 처박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 *

제법 따듯한 계절이었지만 새벽의 물길은 추웠다.

한창 노를 젓던 선생은 이제 물살에 배를 맡긴 채 유유자적 주위 풍경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그 기회에 선생께 질문했다.

“선생님, 전 책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한 구절 정도는 들어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자 선생께서는 다시 반색하시며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그래? 그것이 무엇이냐?”

“아이베리아의 깃발들은 몸이 불편한 자들을 차별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만큼 특출난 재능을 가진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아, 푸른 깃의 기사에서 나오는 대목이로구나.”

책의 제목이었을까, 연기를 내뿜으며 대답하는 선생의 눈동자 속 한 줄기 추억이 반짝였다.

“그런데 어째서 마을에 찾아온 깃발은 그러지 않은 것입니까?”

내 물음에 선생은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도야, 책에 적혀 있다 해서 그것이 진리인 건 아니란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상에 가까운 것이지.”

“이상…?”

“순수한 맹목을 열렬히 태워야만 나올 수 있는, 그런 연기 같은 것 말이다.”

후,

하고 녹색 연기를 내뱉는 선생님의 얼굴엔 열정이 그려져 있다.

“그럼 아이베리아엔 그런 이상은 이제 없는 겁니까?”

“아니,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어딘가에 있겠지. 기사의 땅은 그런 곳이니까. 나도 그런 이상을 좇는 사람 중 하나고 말이야.”

순간 벅차오름이 느껴져 그에게 적극적으로 물었다.

“그럼 그 이상을 찾으면 저도 쓰임 받을 수 있는 겁니까? 그 책에 나온 이야기처럼.”

이에 선생께선 활짝 웃으며 대답해주셨다.

“물론이지, 책의 나온 이야기처럼.”

시간이 흘러,

저 너머로 해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 사이 선생께선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리고 지금은,

“그게… 무슨…,”

“앙 실러 데우스는 기사의 땅에 존재하는 이상 중 하나란다, 그러나 모두가 다 그렇지는 않지.”

“그러니까…, 마을에서 벌어졌던 그 일들은 단지 돈…, 때문에…?”

일그러진 눈썹 위로 다시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흘렀다.

선생께선 그것을 손수 닦아주시며 말을 이으셨다.

“그래, 멕실라 가문의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서였다. 특유의 푸른 머리 탓에 하늘의 가문이라 불리던, 아주 이지적인 귀족들이었지.”

“그럴수가…,”

아직도 선명하다.

눈앞에서 한치의 서두름도, 늦춰짐도 없이 허망하게 참수당한 그들의 모습이.

그 소녀의 모습이…,

“어른들의 사정으로 빚어진 전쟁 때문에 멕실라 가문은 망명을 선택해야 했단다. 그리고 그것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앙 실러 데우스 측의 기사 하나가 개입을 했지.”

분노가 치밀었다.

선생께서는 이런 내 분노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느냐?”

“공평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이상을 둘렀으면서 그것을 철퇴처럼 휘두르지 않았습니까, 공평 이전에 잘못을 따져야 합니다.”

“하하하 내가 그래도 널 잘 봤구나!”

그게 무슨 말인지,

나는 그저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려야만 했다.

이어 선생께선 단호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도야, 이상은 아주 강력한 무기이기도 하기에 이상이라 불릴 수있는 것이다.”

“예…?”

“수단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이해가 되느냐? 되지 않아도 차차 알게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래, 도야. 이렇게 설명해 보자꾸나.”

선생께서 내 쪽으로 고개를 쓱 내밀며 설명을 이으셨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휘두른 이상이라는 철퇴에, 너는 아주 큰 걸 얻었단다. 세상을 얻었지. 이상을 꿈꿀 세상을.”

선생께서 눈 속 이글거리는 불꽃을 드러내며 묻는다.

“그렇지, 기지어?”

맞아.

좌절 속에서 전환의 발판을 마련해준 그녀의 이름으로 나는 새로운 삶을 꿈꿨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도야, 기지어 도야. 그렇게 얻은 세상으로, 이상으로 너는 무엇을 할 생각이냐?”

“저는…,”

바꿀 겁니다.

바꾸고 싶습니다.

“어제 보았던 그런 것들을, 내 삶에 보였던 그 잔혹의 팽배를…,”

모조리 다.

선생님은 내 어깨에 손을 얹으셨다.

“네가 얻은 세상으로 이상으로 휘둘러 바꾸거라. 이젠 그것이 너의 수단이니까.”

“아…,”

“그 휘두름의 마지막 종착지를 내 알려줄까?”

휘적휘적, 열망에 가득 찬 내 얼굴이 위아래로 흔들린다.

“7년, 풀고르크레. 앙 실러 데우스의 섬광이라 불리는 기사. 해 보거라, 너의 휘두름으로 그 아성을 무너트려 보아라. 내 제자야.”

* * *

깊은 산중에 나 있는 길.

그 목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작은 술집.

그곳엔 괴담 같은 소문 하나가 흐른다.

그것을 반증하듯, 술집에 들른 두 남자가 조심스레 그 소문에 관한 이야기를 안주 삼아 잔을 넘기고 있었다.

“그 붉은 귀신이라는 소문이 사살이긴 한가벼.”

“그러게 말이여, 벌목꾼만 오가는 이 길에 검을 차고 오는 자들을 보게 될 줄이야.”

스리슬쩍, 그 둘이 저 구석에 앉은 남자에게 시선을 모은다.

구석엔 구름 같은 옷을 입은 사내가 정돈된 모습으로 앉아 있다.

그 앞 식탁 위엔,

기사의 땅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종류의 검이 얹어져 있었다.

동쪽으로 네 바다를 건너야 나오는 아주 먼 땅.

이국의 향취가 물씬 배어있는 그곳의 전통 중 하나.

환도라 불리는 것이.

그것으로 그려내는 검술은 아이베리아를 관통할 만큼 굉장했기 때문에, 이 검의 주인인 남자는 여덟 검 중 하나로써 인정받을 수 있었고.

해서 이미 기사들을 비롯해 비전을 가진 자들 사이에서 그 검은 아주 유명한 것이었다.

여덟 검 중 하나,

‘고산’

여덟 자루의 검 가운데 가장 무겁고, 가장 깊은 검으로 칭송받는 그는 그 가운데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자였다.

그러니까,

그 ‘백로’와의 싸움에서 무승부를 기록한 전적이 있는 것만으로도 위 말은 입증되는 것이었다.

시선을 느낀 남자는 환도 자루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흘겨보고 있던 두 장정이 화들짝 놀라 얼른 눈동자를 비킨다.

볼 일은 없다는 듯.

차분한 표정을 지은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검은색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술집 밖을 나섰다.

벌목꾼들만 오가는 이곳에 그가 온 이유는,

방금 두 남자의 안줏거리였던 붉은 귀신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물론 붉은 귀신이란 건 소문으로 부풀려진 이야기.

정확히는 붉은 머리카락과 수염을 가진 괴짜를 말하는 것이다.

회계, 정치, 심지어 치정까지.

그것이 한 줄짜리든 백 줄짜리든 상관없다.

해결의 실마리나 변호의 단초가 제공되는 것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괴짜는 그것을 빌미로 거래를 걸어온다.

거래는 괴짜만이 가지고 있는 살생부.

다시 생각해보니 붉은 귀신이란 소문이 마냥 부풀려진 것 같지도 않구나.

차분함을 이어가던 남자는 짙은 눈썹을 살짝 움직이며 두 남자가 삼던 안줏거리를 되새겼다.

그리곤 피식,

웃는다.

이내 예민한 감각을 펼쳐 숨겨진 길을 손쉽게 찾아낸 그는 마주한 동굴 앞, 평평한 바위에 골라 앉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야, 그 ‘고산’이 이런 곳에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뒤로 아무렇게나 넘긴 붉은 머리카락, 그 아래 이마에 맺힌 흉터.

턱을 덮은 붉은 수염, 그 위로 맺힌 뚜렷한 이목구비.

“반갑소, 나 기지어 도요.”

손을 쭉 내밀은 그에게 남자는 기사의 예를 갖춘 뒤 그 악수에 응했다.

“테이트 레모입니다.”

기지어는 남자가 보이는 기사의 예를 보곤,

“경이라고 불러야겠군?”

하고 물었고, 이에 테이트는 식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쉽게도 지금은 아니오.”

“그렇다면 날 찾아온 건 그것을 되찾기 위한 단서를 마련하기 위함인가?”

“눈치가 빠르시오, 확실히 그대의 비상이 내 검보다 빠르구려.”

기지어는 특유의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리더니, 이내 품에서 작은 종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거기엔 이름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지만,

마지막 두 개를 제외하곤 모두 빗금으로 그어진 상태였다.

가공할 동체시력으로 그 종이 내용을 모조리 눈에 담은 테이트는 마지막에 적힌 이름을 보곤 약간 놀란 눈치를 보였다.

그것은 이런 한낱 거래만으로 꺾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으니까.

기지어는 그 위에 있는 이름을 테이트에게 건넸다.

“제거하시오, 나는 당신의 발밑에 깔 반석을 준비할 테니.”

“하나만 묻겠소.”

“뭐지?”

“원한이오?”

“아니, 내가 바꾸려는 것들의 일부요.”

* * *

과거,

내게 경멸과 모멸을 주었던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가진 나의 수단으로 말이다.

남들보다 빠르게 달려간 내 생각이 날카로운 것들로 치환되어 그들에게 되돌아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통쾌해, 아주 많이.

그들의 고통스러운 최후를 직접 보고 싶었지만, 사실 지금은 그것조차 시간 낭비일 뿐이다.

이제 남은 건, 원대한 이상을 만나는 것이다.

나보다 더 거대한 이상 말이다.

이 작은 내가 휩쓸려버릴 정도로 대단한 이상 말이야.

그럼으로써 자연스럽게 닿게 되겠지.

지워지지 않은 살생부의 마지막 부분이.

“아, 이제 하산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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