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35화 (235/365)

235화. 빛과 그림자

술에 완전히 취한 기지어의 고개가 푹 꺼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회중시계를 열어보면 벌써 해가 떠오를 시간이다.

이야기를 나눈 지 대략 여섯 시간 정도 흐른 건가.

기지어가 진지한 표정으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을 때, 난 그저 그 이야기가 향후 정세에 관한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술을 먹고 싶다는 그의 말에.

곧 정세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래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

그러니까 의외다.

그의 과거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런데 하산 이야기를 끝으로 그가 완전히 뻗어버리는 바람에 아무래도 자리를 파해야 할 것 같구나.

하지만 알겠습니다, 기지어.

당신이 왜 그토록 조바심을 내며 극렬히 반응한 것인지를.

그나저나 기록관 몬스, 그는 대관절 어떤 자이기에 향후 벌어질 일들의 확신을 열거하는 걸까.

“후.”

살짝 술기운이 올라온다.

그래서 그런가, 두서없이 여러 생각이 마구마구 솟아오르는 느낌.

하긴, 생각보다 많이 마셨다.

아무리 기지어라고 해도 이만한 술을 빌려야만 과거의 씁쓸함을 말할 수 있었던 거겠지.

듣는 나조차 제법 씁쓸했으니까.

어쨌든 요는,

그러니까 그가 과거 이야기를 한 이유와 현 상황 가운데 일맥상통하는 주제인 ‘7년’인가.

인챈트에 대해 배웠을 때.

한 자릿수에 해당하는 재해는 대부분 관제가 되지 않는 독보적인 것들이라고 했었지.

말 그대로 기사의 땅 아이베리아 내에 대명사로써 존재하는 자들.

꺾기 위해선 오롯이 부딪혀야만 하는 상대.

단지 그 7년이라는 단어뿐인데 압박감이 실로 무시무시하네.

그러나 무너트려야지.

그래야 하겠지.

그래야만 아직 뚜렷하게 설계하지 않은 첫 원정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테니까.

베나즈는 태풍의 눈을 휘감을, 마땅히 몰아칠 바람 같은 기사들을 하나라도 더 포용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아리나 에커즈는 정말 베나즈 가문에 든든한 존재가 되어줄 거다.

남쪽의 프랑쿠아 역시 베지어 경이 빌비온으로 찾아오진 못했지만, 그가 보내주었던 서신만으로도 단단한 받침이 생긴 거나 다름이 없어.

그리고 아직 우리에게 호의를 보였으나 지금까지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그래서 그 기원이 어디인지조차 모르는 의문의 세력이 있다.

‘쟈드 오렌’

떠오른 김에 바로 뒤에 있는 집무실 책상으로 가 잘 정돈된 서신을 집어 들었다.

궁금했소.

듣고 싶었소.

그러니 마땅히 듣겠소.

-쟈드 오렌-

나도 당신이 궁금하네.

하지만 들려줘야 하는 쪽은 나이기에, 뭐가 됐든 먼저 움직여야 하는 쪽은 내가 되어야 하겠지.

아, 여러 생각이 튀어나오긴 하는데 그 생각에 대한 정리가 잘 안 되는 기분이야.

이쯤 그치고 좀 쉬면서 정신을 차리는 게 좋겠다.

그 전에…,

“재상.”

테이블 위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기지어를 조심스레 흔들어 깨웠다.

그러자 그가 마치 발작을 일으키듯 고개를 쳐들고는,

울상인 표정으로 날 바라보기 시작한다.

“쭈군! 감싸합니다! 이러케 하산한 이 눔 앞에 이쌍으로 떠억 하니 나톼나줘숴.”

“…, 재상 많이 취했습니다.”

“쏴랑해요.”

방금 사랑한다는 그 말에 묘한 음율이 실려 있다.

“기지어, 정신 차리세요.”

“헣허허 제 이룸으로 부루쉰 검니까! 아! 우리 쑬을 먹고 있써지요! 소찍히 술 마셔쓰믄 한 번쯤은 후배 노릇도 해주쎠야지요! 내가 한차암 윗 기순데!”

“그래요, 제가 몰라뵙습니다. 선배. 섭섭하셨지요.”

“크하하하! 후배로 만났으믄 없는 여똥생이라도 만들어 껼혼시켰을 꺼야.”

“좋네요, 좋아. 그 전에 몸 좀 가누세요.”

“사씰 내가 여자였으믄! 너는 진즉에 끝나써!”

붉은 머리카락만큼이나 상기된 얼굴로 내게 엉겨들던 그는 아주 잠깐.

실낱같은 정신 줄을 겨우 붙잡았는지 창백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어…, 제봘 꿈이라고 해쭈세요.”

“네, 꿈입니다, 그러니까…,”

“헤헿 그르치? 꿈이지? 이르케 꿈에서라도 학회모임을 가지니까 좋네! 토르킨 선생께서 오래 사셔야 해. 그래야 제자들이 하아나아아도 빠쥠없이 감사함을 느끼지!”

그의 한풀이 끝에 나온 가벼움은 참으로 소박한 것이었다.

그래도 계속해서 엉겨 붙는 술버릇은 많이 고약한 바람에, 나는 상체로 그를 받친 채 유연하게 뻗은 다리 끝으로 탁상 위에 놓인 종을 울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접견실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인기척.

이내,

똑똑.

하는 소리가 들리면.

“들어…, 잠깐 재상! 아니 들어 오세요.”

서둘러 의자에서 발사되려는 기지어를 억누른 채 대답했다.

문이 열리고,

그 틈으로 빼꼼 누군가가 들어서면.

나는 그것이 당연히…,

“시종장, 좀 거들어 주시겠습니까?”

바돈일 줄 알고 보지도 않고서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다가 묘한 이질감에 고개를 돌려 보면, 살짝 익어가는 과일 빛 상기를 뺨에 얹은 여인이 날 빤히 쳐다보고 있다.

켄타나의 귀족, 빌로즈 가문의 차녀.

가니아.

“가니아, 시종장을 좀 불러주시겠습니까?”

이름을 부르자 그녀가 붉은 가을 단풍 색처럼 뻘게진 얼굴로 고개를 휘휘 끄덕인다.

“예…! 영주님!”

황색 잔상이 남을 정도로 머리가 휘날리게 뛰어간 그녀가 금방 다시 돌아왔을 땐 바돈이 함께였다.

그리고 바돈은 접견실 안 풍경을 확인하기 무섭게.

“이… 미친…,”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으로 달려들어 내게서 기지어를 떼어놓았다.

“재상! 단단히 미쳤구만! 지금 영주님께 무슨 무례를 저지르는 거야!”

“바돈, 제 탓입니다. 그의 주량을 생각하지 않고…,”

“아닙니다, 딱 봐도 선을 넘은 건 재상이겠지요. 어휴!”

부축을 시도하는 바돈을 도와 반대편에서 기지어를 붙들면, 곧 이 실랑이 소리에 뒤따라온 집사부 시종들이 달라붙어 거들었다.

“영주님, 이후는 저희 집사부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늦은 시간에 미안합니다.”

“이게 저희의 일인 걸요, 그런데…, 다음에 술자리를 하신다면 저도 꼭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기지어의 한쪽 팔을 목에 두른 바돈이 싱긋하고 웃는다.

그제야 한시름 놓은 나는 같은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 * *

“참으로 놀랄 일이야, 얼마만의 기사회 소집이지?”

후덕한 풍채, 그 위를 뒤덮는 매끈한 기업 제 흰색 의복.

그가 막 궁궐 같은 마차에서 내려 주위 모두에게 들리도록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그 왼편의 작은 마차에서 막 내리던 청년이 이죽거리며 답했다.

“경께선 많이 했지 않수? 아, 그건 기사회 모임이 아니라 창녀 후리기 모임이었나?”

“건방진 새끼, 아직도 살아있었구나?”

후덕한 풍채를 가진 남자가 위협적인 모습으로 청년에게 다가가자, 청년은 오히려 더욱 당당한 모습으로 그에게 맞섰다.

그러더니.

갑자기 둘이 어깨를 맞부딪히며 살갑게 포옹한다.

“하하하! 베커드 경! 오랜만입니다.”

“소르자, 반갑구먼! 아니 소르자 경이라고 불러야지.”

“그나저나 기사회 소집이라니, 전서구를 받고 정말 놀랐습니다.”

삐죽삐죽, 짧게 뻗친 검은 머리를 가진 청년 소르자의 물음에.

갈색 단발머리를 한 후덕한 남자, 베커드는 소르자의 더블릿 깃을 매만져주며 대답했다.

“이 친구야, 전통도 좋긴 좋지만 좀 감각적으로도 굴고 그래. 아이베리아의 더블릿은 너무 투박하지 않나?”

“베커드 경, 저는 곧 죽어도 기사 놈이지 않습니까.”

“아직도 난쟁이 제 갑옷을 입나?”

“가벼운 건 저랑은 잘 안 맞아서요.”

“하, 진짜 기사 중의 기사 납셨구먼.”

두툼한 턱살을 출렁이며 웃던 베커드는, 이제 자신의 왼쪽 귀에 걸린 귀걸이를 가리키며 소르자에게 말했다.

“소르자, 너도 기사회이니 이참에 우리들의 산에 함께 올라야 하지 않겠나? 깃발들일수록 함께 해야지.”

“그게 그 은밀하다는 기사회의 뒷산입니까?”

“주기적으로 친분을 도모하기 위해 등반하는 거지, 가끔 요긴한 정보가 담긴 메아리도 들려온다고.”

베커드의 은밀한 말에 소르자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다가 대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베커드 경, 다 좋은데 창녀와 노는 건 제 취향이 아니라서요. 아시지 않습니까?”

소르자의 대답에 베커드는 살짝 언짢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피식 웃으며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다 알지, 기사회에 자네 같은 애처가가 또 누가 있겠나? 하하하!”

그렇게 둘이 한참 파안대소하는 와중, 막 그들의 마차 뒤편으로 또 다른 마차가 도착했다.

챙이 높은 검은색 모자를 쓴 기수는 곧장 좌석에서 내려 문을 열었고, 곧 그곳에서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내렸다.

소르자는 그 여인을 보자마자 한쪽 가슴에 손을 얹고 기사의 예를 갖춘 인사를 건넸다.

“레바리스 경께서도 오셨군요.”

한 올의 이탈도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 말끔하게 말려 올라간 검은 머리카락.

그 아래 갸름한 두상 속 맺힌 고혹.

짙은 속눈썹을 깜빡거리던 여인은 소르자의 인사에 마찬가지로 한쪽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인사를 올렸다.

“소르자 경.”

이어 그런 그녀의 전신을 핥듯이 쳐다보던 베커드가,

“이야, 기사회 소집이 좋긴 좋네. 레바리스 경을 이렇게 다 만나고.”

끈적한 추파를 던졌지만 레바리스는 그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유유히 거대한 별장의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 저희도 갑시다, 베커드 경.”

그렇게 소르자와 베커드도 먼저 들어간 레바리스를 따라 별장 내부로 향했다.

내부는 사치라곤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심심한 분위기였다.

아무런 골동품도 놓여 있지 않은, 텅텅 빈 홀엔 이미 두 사람이 먼저 와 있는 상태.

그렇게 레바리스와 소르자, 베커드가 도착하여 홀에 다섯 사람이 되었을 때.

기다렸다는 듯 별장 안쪽에서부터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의 등장에,

홀에 모인 다섯은 동시에 한쪽 무릎을 꿇어 예를 갖췄다.

“이렇게 기사회 소집에 응해주어 고맙소.”

말끔하게 올린, 활활 타오르는 듯 진한 금발 머리.

푹 꺼진 눈과 그와 대비되게 우뚝 솟은 콧대.

그림자를 좀먹은 눈두덩이 속 사백안에 속하는 작고 푸르스름한 눈동자는 보석처럼 반짝인다.

“앙 실러 데우스, 그 빛의 그림자가 되길 맹세한 그대들에게 다시 한번 경의를 보내는 바이오.”

점잖게 말을 마친 남자는 그대로 맨바닥에 정좌했다.

이에 다른 다섯 기사도 맨바닥에 앉는다.

“기사회를 소집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아이베리아 서쪽 일 때문이오. 그 서쪽 일이 무엇인지는 모두가 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설명은 하지 않겠소.”

이어 베커드가 물었다.

“그 일 덕에 우리 쪽에도 명분이란 게 생겼잖습니까. 해서 우리도 움직이는 겁니까?”

그러자 금발의 남자는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 그들 움직임에 맞춰 움직일 것이오. 개입이란 건 이른 시작일수록 깊숙이 들어가기 마련이니까.”

“그럼, 그들의 1차 원정에 맞출 생각이시군요?”

이어지는 소르자의 물음에 금발의 남자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을 지키던 레바리스 역시 금발의 남자에게 질문을 이었다.

“이미 베나즈의 좌우가 완성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레바리스가 말을 막 이으려던 차에, 미리 홀에 도착해 있었던 둘 중 하나인 앙상한 사내가 허연 송곳니를 드러내며 외쳤다.

“베르융 오르테, 테티르 론바즈. 아이베리아의 굵직한 전설들이시지.”

금발 남자는 손짓으로 앙상한 사내의 끼어듦을 제지했다.

그럼 앙상한 사내는 군말 없이 그에 따른다.

이제 다시 레바리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자체로도 강성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 그들이 원정을 시작한다면 병력의 정비 성숙도를 감당할 만큼 내실이 굳어졌다는 뜻이지 않겠습니까? 굳이 그들의 움직임에 맞췄다간 여러모로 더한 피로를 불러일으키게 될 겁니다.”

제법 합리적인 의견이었지만,

마찬가지로 금발 남자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명분이라는 게 판 위에 여러 개 날뛰기 시작하면 그 국면들이 어느 방향으로 향할지 모르오. 예컨대 우리의 섣부른 개입이 다른 명분들의 적대적 국면을 일으킬 수 있다는 말이오.”

베커드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하지만 공, 무려 0입니다. 아이베리아 중원에 힘을 비축하고 있던 자들 모두가 들고일어날 최고의 명분이지요. 개입의 시기는커녕 기회를 놓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금발의 남자가 묻는다.

“그 말은 곧, 원정을 시작함과 동시에 허무하게 무너질 거라 그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베커드의 확답에 금발의 남자는,

웃었다.

낮고 그르렁거리는, 그런 매서운 소리를 내며.

그리고 물었다.

“경들은 잊은 거요? 아니면 아예 기억에서 지워버린 거요?”

경외를 넘어 어느 신화를 열거하는 듯한 목소리로.

“베나즈. 아이베리아 내 최강이라는 유일무이한 이름으로 군림했던 기사의 이름이지. 우린, 아니 이 땅은 아직 0을 가진 베나즈의 후손을 모르오. 그 잠재까지도.”

소르자가 의문을 표한다.

“그 리시론이 개입하기로 결정한다면요…?”

금발 남자는 역시 단호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소위 평화주의자라는 동방의 시르아가 곧바로 리디굴람을 밀고 중심으로 진출할 명분을 가지게 되겠지. 소르자 경, 판 위를 봐야지 판 아래 대지를 보면 쓰나.”

이제,

금발 남자는 결론을 내리 짓는다.

“일단 봅시다, 중원의 국면들을. 어차피 우리에게 개입 지점이 떨어질 건 기정사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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