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제리드
“아주 신이 났네, 테리아.”
“그럼, 평생의 짐을 벗고 그 홀가분함을 느끼는 중인데 신이 날 수밖에 없지.”
“거짓말, 벌써 그가 그립지?”
찍찍,
코를 움찔거리며 묻는 스캐비의 말에 막 작업을 시작하려던 테리아가 멈칫한다.
그리고는 4중 돋보기로 겹겹이 쌓여 있는 안경을 벗으며 최대한 당황을 숨긴 채 묻는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나 스캐비의 좁쌀만 한 눈에 비친 테리아는 누가 봐도 당황에 역력한 모습이었다.
“내가 아무리 쥐가 되었다지만 그쯤은 알 수 있어, 그를 겪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어…?!!”
순박한 테리아의 반응에 스캐비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작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테리아, 모르는 게 이상하잖아. 평생 남자 한 번 못 만나본 티를 다 내던데.”
“조용히 해!”
얼굴을 붉히며 격하게 반응하는 그녀의 이마 위로, 햇살 같은 금발 몇 가닥이 흘러내렸다.
“능글맞은 쥐 같으니!”
“잘 지내는지 전서구라도 보내보는 게 어때?”
방금 보였던 심통은 어디 가고,
스캐비의 말에 그녀의 눈이 커다래진다.
“어…, 그럴까…. 그래도 될까?”
그 천진한 모습에 스캐비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어야 했다.
“이제 학회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하면 정말 바빠질 거야,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그 말에 테리아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창백한 오른팔을 만지작거렸다.
“그렇지…,”
“그래서, 보낼 거야 말 거야?”
“보내면, 그가 좋아할까?”
“그도 널 좋아하던 눈치던데.”
스캐비의 말에 테리아는 말없이 작게 웃었다.
두 뺨에 잘 익은 복숭아를 담은 채로.
“그래야겠어, 하지만 전서구 말고 다른 걸 보낼래.”
“뭘 보내려고?”
“그냥…, 장식용 검 한 자루를 만들어 보내려고.”
용기 내어 결심한 테리아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스캐비는 끝내 콧수염을 실룩거리며 인자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그렇게 해. 참…, 오른팔은 이제 괜찮아진 거야?”
“응, 열기를 먹인 덕에 감각을 다시 가다듬을 수 있었어.”
이어지는 물음에 테리아는 창백한 오른손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말을 이었다.
“아르테서스의 유작이자 마지막 작품에 이상이 생길 줄이야.”
“지금은 내 신체 일부기도 하니까, 아마도 원인은 내 쪽에 있었을 거야. 새비안을 벼리면서 무리하기도 했고…,”
조금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자신의 오른팔을 살펴보던 테리아는 이내 본격적인 모습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 * *
“베나즈 가문에 부흥이 함께하기를 진심으로 염원합니다, 안녕하십니까. 뷰글스의 마드렌이라고 합니다.”
뒤로 질끈 묶은 잿빛 머리카락.
다람쥐처럼 끝이 뾰족한 코, 작고 야무진 입술.
딱 보아도 강단이 느껴지는 여인의 당찬 인사에 나는 점잖게 화답했다.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디안 베나즈입니다.”
“우선 빌비온 내에 저희 뷰글스의 유치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드렌은 쓰고 있던 안경을 슬쩍 올리며 흥미로운 눈빛으로 내 얼굴을 끈적하게 살폈다.
“생각보다…, 굉장히 젊으셔서 놀랐습니다.”
“그렇습니까.”
“초면부터 이런 말을 하기엔 조금 조심스럽지만, 대중의 인기를 얻으시는 데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으실 겁니다.”
그녀 뒤에서 조용히 서 있던 바돈은 나를 슬쩍 바라보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
“이곳 리케니엔에 자리가 잡히는 대로 정상적인 업무를 시작하겠습니다, 저희 뷰글스의 선전이 베나즈 가문의 오해 불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뭐랄까,
그녀에게서 굉장한 직업의식이 느껴져.
외향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그 당당함이 참으로 매력적인 사람인 것 같다.
“이후 관련된 모든 사항은 시종장을 통하시면 될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올린 그녀는 기업 제로 보이는 딱 달라붙는 치마를 정돈한 채 일어나 접견실 밖으로 향했다.
직후,
“다음은 법제 기업, 레프리길입니다.”
바돈이 접견실 입구에 멈춰 선 채 내게 보고를 올렸다.
오늘 일정은 이곳 빌비온에 입점 될 기업과 조합들과의 대면으로 꽉 찬 상태다.
바꿔 말하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것이지.
“들여보내세요.”
내 말에 바돈이 고개를 끄덕이며 접견실 문을 열었다.
그러자 너머에서 기다렸다는 듯, 여섯의 무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그중 인간은 단 한 명뿐이었다.
유일한 인간인 중년의 남자는 깃 달린 모자를 벗고서 내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물론 그 뒤로 보이는 다섯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위를 기웃거리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렇게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공. 저희는 법제 기업 레프리길에서 나온 제2 법관 ‘계절’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뒤에 서성이던 다섯 존재에게 허리 숙여 예를 갖췄다.
“인사드리시지요, 베나즈의 디안 공이십니다.”
다섯 존재는 그제야 주위 기웃거리던 것을 멈추고 내게 공손한 인사를 건네주었다.
중년 남자의 다리 길이 정도 되는 키.
그 키에 걸맞지 않게 매우 거대한 얼굴.
그리고 그 얼굴에 빽빽이 들어찬 주름.
하지만 세월로 새겨진 것은 아니다, 마치 인간의 관절부에 새겨진 주름과 같이 그들 종족의 특성인 것으로 보여.
거기다 대부분이 안경을 끼고 있고,
수염의 모양 역시 천차만별인데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가르마를 탄 모습으로 통일되어 있다.
중립지역에서도 보지 못한, 묘한 신비함을 간직한 그들을 잠자코 보고 있노라면.
곧 중년의 남성이 그들을 직접 소개하기 시작한다.
“이분들은 케시나그 산맥 출신 고블린입니다. 가벨레라 학회를 수료하셨으며 레프리길의 정식 판사분들이시지요.”
고블린.
난생처음 듣는, 또 접해보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왜소한 모습과는 달리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고고함은 경의를 보내고 싶다.
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그 다섯에게 정식으로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디안 베나즈라고 합니다.”
이런 내 인사에 다섯 고블린은 모두 양복 앞주머니에 작은 손을 얹은 채 화답했다.
“반갑습니다.”
“반가워요.”
“그래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시오.”
“좋은 곳이오, 두루 잘 지내봅시다.”
그 행동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벌어진 것이었지만, 이내 입에서 나오는 인사들은 각각이 다 개성 넘치는 것들이었다.
확실히,
배타적인 종족의 시선으로 법을 내려다보게 된다면 권력이 개입할 여지가 없겠어.
다만 이에 따른 단점 역시 분명 있겠지.
그것은 앞으로의 시간이 증명해줄 것이다.
중년 남자는 다시 한번 내게 인사를 건넨 뒤 다섯 고블린과 함께 접견실 밖을 나섰다.
* * *
“괜찮으십니까, 영주님?”
“…, 예.”
대답과는 달리 내 몸은 막 의자 위에 녹아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래에다가 커피 한 잔을 타오라 시켰습니다.”
윽, 포개어진 손 조합에서 나온 커피는 내 취향이 아닌데.
“괜찮습…,”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들려오는,
똑똑.
소리.
이윽고 문이 열리자 그 너머로 세라가 직접 커피 한 잔을 들고서 찾아왔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시종장님.”
“그대도 수고가 많소.”
“영주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곧 있으면 바닥에 흘러내리실 것 같은데.”
“4월의 바람과 9월의 향취를 뿌리도록 해야겠어요.”
“그게 좋겠네, 그럼 부탁하네.”
문 앞에서 격식 차린 이야기를 주고받는 두 사람 사이에서, 아직 숨기지 못한 애정이 느껴진다.
그러한 뉘앙스에 넌지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내 입가가 자연스레 올라갔다.
“영주님, 드시지요.”
그래, 맛보다는 심장 구슬리는 용도로라도 넘겨야지.
바돈에게 전해 받은 잔을 조심스레 넘기면, 나도 모르게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거…,”
포개어진 손 조합의 것이 아니다.
“네 번째로 방문하였던 배클리엄 만물상회의 것입니다.”
베클리엄 만물상회.
가바작이란 이름을 가진 네 마리 바위 소가 이끄는 그 거대한 이동식 상점이었었지.
다시 생각해보면 참 놀랍다.
그 거대한 상점이 주기적으로 빌비온 내 거점들을 순회하듯 이동한다는 것이.
세상엔 정말 여러 종류의 기업과 조합들이 있다.
지금은 그 다양함의 긍정적인 부분을 직접 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셈이네.
달고 맛있어.
“리케니엔을 비롯해 빌비온 전체가 변할 겁니다, 그 커피의 맛처럼요.”
바돈의 말에 나는 말 없이 커피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그리곤 식은 웃음과 함께 그에게 허심탄회를 내뱉었다.
“그 변화가 이것과 같이 달기만 하면 좋겠군요.”
그러나 이런 내 말과는 달리, 혀끝에선 커피 특유의 쌉싸름한 맛이 잔뜩 느껴졌다.
딱 한 잔만큼의 여유는 정말 눈 깜짝할 사이 끝이 나버렸다.
버릇처럼 값싼 회중시계를 열어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해가 반쯤 저물 시간이다.
살려줘.
“오늘 일정은 이걸로 마치면 될 것 같습니다.”
순간 귀가 쫑긋 세워졌다.
내 바람을 누군가 들어준 건가.
“그러지요.”
최대한 태연히 반응한 나는 자세를 고쳐잡아 앉았다.
음,
오늘은 따로 음식을 받아 방에서 먹어야겠다.
그러면서 겸사겸사 검 관리도 좀 하고.
집사부에서 관리하고 있겠지만 갑옷이 잘 있나도 확인해 봐야겠어.
그다음 저택 뒷길을 통해 산책을 좀 하다가, 그래.
기지어, 아니 재상을 만나봐야지.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기도 하고…,
향후 원정에 대해 논의할 것도 있고.
그리고 돌아와선 좀 더 구체적인 계획을 마련하자.
원정길에 따라 적들의 수가 늘어날 수도, 아군의 수가 늘어날 수도 있으니 이 첫 원정에 베나즈라는 이름의 흥망성쇠가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야.
실패한다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공표식의 답으로 적의를 보낸,
그마저도 응답하지 않은 미지의 적들이 순식간에 쏟아져 들어올 테니까.
오늘 있던 일정보다 훨씬 무거운 문제이나,
자유라는 이름 아래 놓이니 지금 당장 온몸에 활력이 감도는 느낌이다.
하지만,
곧 바돈이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듣고 급히 접견실 밖으로 나가면서 내 바쁜 계획들도 모조리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영주님.”
급히 돌아온 바돈의 말은 제법 무거운 것이어서.
“제리워드 은행의 깁슨 제리드가 찾아왔습니다.”
나는 얼른 진중함 한 숟갈을 머금어야만 했다.
이윽고 바돈의 안내를 받아 접견실 안으로 들어선, 큰 키의 늘씬한 중년의 사내.
검은 양복, 그 상의 속에 힐끗 보이는 붉은 조끼.
아래 드러난 회중시계의 금줄.
화려한 듯 보이면서도 단출한 복색 위로는.
매부리코를 가진 정력적인 인상이 꽃피워져 있다.
갈색 머리는 윤택한 기름을 머금은 채 말끔히 넘어가 있고, 까칠한 감이 남아 있도록 정돈된 수염은 턱선을 따라 뒤덮었다.
가히 위력적인 중후함을 뽐내는 그의 짙은 눈썹에선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왔다.
그의 방문을 반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면,
그는 절제된 예를 갖추면서도 지금까지 마주쳤던 기업과 조합의 인물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여유와 함께.
“한낱 사업가의 객기를 용서해 주십시오. 덕분에 기사의 땅이 어떤 곳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두 공께서 제게 주신 가르침입니다.”
지난번 보냈던 터무니 없는 액수의 수표를 거론하며 진심으로 사과했다.
“깁슨 제리드입니다.”
과거 철강왕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군림했던 기업 가문, 제리드.
그 가문의 사람이 지금 내 눈앞에서 정식으로 인사를 건네고 있다.
그런데 왜인지 모르게,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내 심장이 벌컥 뛰었다.
아니,
정확히는 심장 외적으로 느껴지는 묘한 박동이었다.
그것은 오래전 중립지역 생활을 막 시작했던 때 잠시 느꼈다가 이내 지금까지 잠잠했던 감각이었다.
마치 두 개의 심장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감각이 말이야.
하지만 그것이 나를 더디게 만들지는 못했다.
그가 공손히 허리 숙여 내민 손에 대고 나는 베나즈 가문의 대표자로서 당당함을 내놓았다.
“디안 베나즈입니다.”
우리는 한동안 서로의 내력을 시험하듯,
제법 오랜 시간 악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