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제리드 (2)
악수를 마친 뒤에도 깁슨 제리드는 날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꽤 초조해 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마찬가지로 침묵을 유지하던 나를 보고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귀한 시간을 제가 빼앗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군요.”
그 말을 들으니 그의 의도를 그제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대화의 포문을 여는 것은 내 쪽이라 이 말이지.
“보내온 서신, 아니 수표를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해서 열었다.
그러자 깁슨은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고쳐 앉았다.
“누가 보아도 의도가 깃들어 보이는 내용이었으니까요.”
그는 내 의문에 차분함으로 답했다.
“예상은 했습니다, 하지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해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지요.”
“그게 뭡니까?”
“아이베리아의 중원을 열기도, 잠그기도 했던 그 열쇠가 되돌아왔으니까요. 저희 제리워드 은행은 마땅히 그 열쇠를 쥔 자에게 걸맞은 투자를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수표의 내용은…, 저희의 그런 적극적인 의지의 피력이라고 생각해주십시오.”
깔끔하고 간결하게 설명을 마친 깁슨은 날카로운 눈으로 내 눈치를 살폈다.
“이제 막 기업과 조합에 대해 알아가고 있는 처지라 모든 걸 다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주변인들을 통해 한 가지 사실은 알 수 있더군요. 제리드 가문의 사업적 위상 말입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저는 그저 윗세대 어른분들이 깔아놓은 비옥함 위에 씨를 흩뿌릴 뿐입니다.”
“그 비옥함의 광활함이 리케니엔을 넘어 빌비온보다 거대한 터라 베나즈 가문의 대표로선 더욱 신중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해합니다, 다만 사업적 의도 외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지 않은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럼 그 사업적 의도가 무엇인지 지금 제게 바로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리드 가문이 아이베리아와 이렇다 할 연은 없지만, 그렇다고 그 땅의 들려오는 이야기들을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기사의 땅 중심에 되돌아온 베나즈.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일인데…,”
깁슨의 눈이 반짝인다.
“0과 함께 명분으로서 다시 돌아왔으니 이야기는 더더욱 달라집니다. 일개 사업가인 저로서도 하나의 큰 기회로 보였지요.”
“정확히는 위험이 동반된 큰 기회일 텐데요.”
“그렇지요, 공께서 말씀하신 대로 굉장한 위험이 동반된 기회지요. 하지만 위험을 감수할 만큼 투자에 성공했을 때 오는 이득 역시 사업가로선 거부하기 힘들 만큼 큰 것입니다.”
깁슨은 깍지 손을 한 채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결정적으로, 제리워드 은행의 투자가 그 위험이라는 걸 확실히 줄일 거라는 겁니다.”
반박은 못 하겠다.
그 수표에 적혀있던 금액만으로도 이뤄낼 수 있는 것들이 무궁무진할 정도였으니까.
확실히 제리드는 제리드란 말인가.
서로의 완고함을 나눴을 뿐인데, 그의 그 끝없는 자신감들만 엿본 기분이 들어.
어려운 자다.
반대로 가까이 두어 그 어려움을 견제하고 싶어지는 자이기도 하다.
“그 의견에 대해선 이견이 없군요, 하지만 보내주신 수표에 버금가는 투자를 섣불리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게 사실이기에.”
“그 부분에 대해선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뇨, 투자 의지의 피력으로 알아달라고 하셨으니 그렇게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주도권은 내게 있다.
“그만큼 투자의 의지가 확실하시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부분 역시 베나즈 가문에서 조율할 생각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여 주시겠습니까?”
자, 2300만 개짜리 의지라고 했지?
그럼 이런 내 제안도 그렇게 무리하게 느껴지진 않을 거야.
살짝 망설이는 것을 기대했는데.
그는 정말 온화한 표정으로 즉답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리워드 은행은 베나즈 가문의 영위가 원활히 흐를 수 있도록 혈관의 역할을 다하겠습니다.”
깁슨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내게 손을 내밀어 보였다.
아이베리아가 아니라 다른 땅 위였다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미는 쪽은 내가 되었을 거다.
그만큼 그의 행동에는 권위라는 무거운 것이 잡혀 있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공의 시간을 빼앗는 것만큼 위험한 투자도 없으니까요. 다만 불러주신다면 곧바로 달려오겠습니다.”
“환영합니다, 빌비온 내 사업부지와 관련된 내용은 재상에게 따로 기별을 넣어두도록 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손을 맞잡았다.
바짝 힘있게 내 손을 부여잡은 그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한 번 푹 숙이고서 접견실 밖으로 나섰다.
* * *
저택 밖으로 나온 깁슨은 고급스러운 가죽 함을 꺼내 연초 하나를 꺼냈다.
이어 그것을 입에 문 그는 불을 붙이기는커녕 그대로 흠뻑 빨았다.
그러자 연초 끝에서 잔불이 벌겋게 일어섰다.
“후.”
입 밖으로 한가득 뿜어져 나오는 청록색 연기.
조금은 여유를 부리며 펴도 될법한데, 그는 연초를 피우는 내내 깍듯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내 연초 하나를 모두 태운 그가 꽁초를 바닥에 던진 뒤 구두로 짓밟아 비볐다.
이제 그가 저택 바깥 정문으로 나서자,
호리호리한 청년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나서서 그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다녀오셨습니까.”
“그래.”
청년 뒤로는 흑단종의 나무로 만들어진 최고급 마차 수십 대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깁슨의 움직임 하나로 파생된 행렬이었다.
“꽤 긍정적인 협의를 완성하신 것 같습니다만…,”
“맞네, 다행히 미움을 사진 않은 모양이야. 내 시선도 좀 바뀌었어. 기사의 땅은 고지식함으로 가득 차 있을 줄 알았거든. 확실히 젊은 피가 다르긴 달라.”
깁슨은 어두컴컴한 리케니엔의 거리를 두리번거리며 말을 이었다.
“비옥한 땅이야. 그러나 직전까지 의지가 없어 역설적이게도 불모지였던 땅이기도 하지.”
“베나즈 가문이 일어서면서 여러 가지로 극적인 성장을 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업과 조합의 입점으로 이제 그 성장도 엄청난 폭발력을 가지게 되겠지, 왜 성장통에 시달리는 아이들처럼 말이야.”
깁슨은 살짝 들뜬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지켜보고 있던 청년은 작은 미소를 품은 채 물었다.
“정말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보기 드문 순수한 땅이잖나, 광기에 가까웠던 화약의 시대. 그 잔향이 아직도 묻어 있는 이 세상에서 말이야. 깃발과 귀족과 기사와 그리고 인챈트를 위시한 그들만의 전투가 전통인 땅이라니.”
깁슨의 말을 곱씹던 청년은 어느새 저도 모르게 가슴 속에 들끓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한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놓치지 않은 깁슨은,
피식 웃으며 청년의 어깨를 두들겼다.
“소감은 돌아가서 하지, 너무 늦었어. 이곳에 계속 머무르다가 베나즈 가문의 집사부에게 밉보일지도 모르겠군.”
“예, 그런데 바로 돌아가실 겁니까?”
“아니, 수행원들은 모두 물리도록 해. 나는 빌비온의 재상과 만나봐야겠어.”
깁슨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마차 안에 들어섰다.
그러다가 작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선두 마차로 향하려는 청년을 불러 세웠다.
“자네는 어떤가, 그래도 이곳이 고향이었지 않은가?”
그 말에 청년은 제법 허무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왔기에 도착했을 뿐이고 서 있어 보니 이곳이었을 뿐…,”
잠시 후, 청년이 선두 마차에 올라타기 무섭게 마차들이 일정한 속도를 지키며 매끄럽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행렬의 규모가 무색하게,
난쟁이들이 만든 바퀴는 큰소리하나 내지 않고 조용히 리케니엔의 거리를 할퀴었다.
* * *
“반신반의하시더니, 제법 야망을 부풀려 오셨군요.”
“그러게나 말이야. 처음 자네가 불현듯 나타났을 때만 해도 내겐 불신뿐이었는데.”
조용한 진동만이 울려 퍼지는 마차 안.
깁슨은 좌석 앞 칸막이 너머에 마주 앉아 있는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해합니다, 통계와 수학으로 점철된 당신의 삶에 점성술과 같은 모호한 것이 익숙할 리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지금은 후회해. 세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변했는데 선조 때부터 굳어진 기조가 아직도 내 사고를 단단히 가로막고 있다니.”
“글쎄요, 저라는 존재의 의미심장함을 놓지 않고 이렇게까지 동조하며 투자하는 당신을 보면 방금 그 말은 별로 와닿지 않네요.”
칸막이 너머, 마주 앉아 있는 여인의 실루엣이 살짝 움직였다.
그 실루엣 속에 살짝 드러난 것은.
아주 밝은 은빛이었다.
깁슨은 털털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변덕도 사업의 소양 중 하나니까. 하지만 그것 말고도 자네를 믿는 이유는 또 있어.”
그러나 곧 깁슨의 유순했던 얼굴에 냉철함이 깃들었다.
“어쨌든 당신은 가문의 어르신에게도 조언을 주었지 않았나, 철강왕이라 불리던 그 세대 어르신들에게 말이야.”
“하지만 지금은 철강 산업을 접고 은행 사업을 하고 있잖아요? 믿는 이유라기엔 오히려 저를 원망해야 하는 게 정상 아닐까요?”
깁슨은 코웃음을 쳤다.
“아니, 그렇기에 널 믿는다는 거야. 난 냉혈에 젖은 철강왕의 굴레를 뒤집어쓸 생각이 없어. 철강왕의 흔적은 이 세상에 몇 안 남은 제리드 강철로 충분해. 나는 제리워드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사업의 기틀을 다질 거야.”
“정확히는 철강왕이라는 이름 아래 쌓인 수십, 수백억 자산의 기반으로 말이지요.”
“그래, 필요하다면 마땅히 수단으로 써야지. 그게 사업가니까.”
직후 이어진 잠깐의 정적.
깁슨은 마치 시인하듯, 품에서 연초 하나를 입에 문 채 자조적인 말을 이었다.
“젠장, 그래 거짓말이야. 난 자넬 믿지 않아. 그러나 변한 이 세상을 받아들인 자네의 능력은 믿어.”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여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렸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도착했네요, 학술원. 이미 겪어봤겠지만 토르킨의 제자는 만만치 않아요.”
“베나즈만 할까.”
“그건…, 그렇네요.”
깁슨은 옷매무새를 고치고선 곧바로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다 슬쩍 고개를 돌려 마차 안에 타 있는 여인에게 물었다.
“아마 느낌상 재상을 만나고 왔을 땐 자네는 이미 없을 것 같은데.”
“눈치가 빠르시네요.”
여인의 즉답에 깁슨은 구두 코에 광이 제대로 묻었나 살피며 말하다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족속이로군, 점성술사라는 것은. 그럼…, ‘플라움’ 나중에 다시 마주치…,”
이내 마차에서 증발하듯 사라진 인기척을 느끼며 고개를 가로저어야만 했다.
* * *
“깁슨 제리드, 귀하를 이런 곳에서 마주하니 기분이 묘해지는군요.”
“마이스터 토르킨 선생의 제자를 이렇게 뵙게 되니 영광입니다.”
기지어는 통찰이 깃든 노골적인 시선으로 깁슨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그러나 깁슨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유로움을 드러낼 뿐이었다.
“의외였소, 저편 세상을 주무르는 사업가가 베나즈의 이름에 응답할 줄은 몰랐거든.”
위치상 어쩔 수 없이 드러내는 적개심일까?
아니면 그저 기지어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성향일까.
전자든 후자든 초면에 서슴없이 드러내는 것을 보면 항간에 떠돌던 소문대로 괴짜 기질을 타고났구나.
깁슨은 그런 기지어에게 오히려 호감을 느꼈다.
디안 베나즈는 그에게조차 버거운 상대였지만, 이쪽은 여러 의미로 통할 구석이 많아 보이거든.
“서로 본론만을 나눕시다, 내가 최근에 영주님께 결례를 좀 저질러서 말이오. 그거 해결하려면 홀로 고심을 꽤 해야 하오.”
호쾌한 기지어의 말에 깁슨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럼 본론만을 말하지요.”
깁슨은 버릇처럼 연초를 입에 물고서 물었다.
“리케니엔에 설립될 은행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을 겁니다. 본점이 들어갈 곳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까.”
“그 말인즉슨?”
“0을, 그것도 베나즈의 이름을 가진 자가 그것과 함께 되돌아왔다면 마땅히 기사왕의 ‘성지’를 탈환하는 것이 목적이지 않겠소.”
기지어는,
두 눈을 크게 뜨면서도 그 안에 원초적인 욕망을 반짝였다.
“그렇겠지요.”
“본점의 설립은 그곳에서 이뤄질 것이오.”
“그렇게 되겠소?”
“제리워드 은행이 성지 탈환에 아낌없이 투자한다면, 분명 기회가 오지 않겠소?”
“하지만 성지를 되찾게 되면 필연적으로 오만가지 이해관계가 얽히겠지요.”
기지어의 말에 깁슨은 떠보듯 그에게 말했다.
“재상, 같은 역사를 써 내려가지 않을 거란 거 잘 압니다.”
“허.”
기지어는,
허심탄회한 미소를 지었다.
저 사업가 양반의 통찰이 자신의 모든 것을 관통했거든.
그러나,
“듣고 싶소, 이제 내 투자는 곧 당신의 추진력이 될 것인데 그 추진력의 방향이 어디로 향할지 말이오.”
통찰 속 진의가 무엇인지는 모르는군.
기지어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한껏 든 채, 이글거리는 속내를 내뿜었다.
“왕조.”
깁슨은,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드러내야만 했다.
“아이베리아 중심을 제어할 왕조, 나는 디안 베나즈를 통해 그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기지어의 진의는 높은 것이었다.